프리드리히 하이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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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다.

1920년대에 유럽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았다. 이러한 고통을 뼈아프게 느낀 하이에크는 인플레이션에 극도로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게 된다. 그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더불어,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기 변동론의 전문가가 되었다. 라이오넬 로빈스(Lionel Robbins)는 그를 런던정경대학으로 초청한다. 1930년대, 런던정경대학에서 하이에크는 케인즈를 공격하고,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기 변동론을 내세우며, 명성을 쌓아갔다. 그의 저작들이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런던정경대학에서 그는 로빈스와 더불어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경기 변동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면서 케임브리지에 있는 케인스의 이론을 공격하여, 두 대학 간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케인스가 1936년 일반이론을 발표하면서, 하이에크의 위치는 크게 흔들렸다. 이 때 이후로, 런던정경대학의 제자들 대다수가 케인지언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케인스의 경제학이 대세를 이루면서, 경기 변동 이론가로서의 하이에크는 묻혀 버렸다...[1]

그는 미제스와 더불어 사회주의적 경제 계산에 반대하는 논쟁을 펼쳤다. 오스카 랑게(Oskar Lange)가 신고전파 이론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계산이 가능하다는 논증을 내놓자, 그는 신고전파의 완전정보모형이 현실과 떨어져 있다는 비판을 펼쳤고, 그러면서, 신고전파 경제 이론과 멀어져 갔다. 그는 대다수 동료 경제학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작성된 그의 논문 "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 (1945)는 하이에크가 이룩한 중요한 경제학적 업적으로 꼽힌다. 그가 사회주의 논쟁에서 보여준 접근법은 현대 정보경제학에서 볼 때 굉장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케인스는 하이에크에게 케임브리지에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케임브리지로 피난을 온 하이에크는 1944년, 집산주의적 계획에 맞서는 The Road to Serfdom (1944)을 내놓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집산주의적 계획은, 결국 정치적인 자유도 잃게 만들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 전개를 보면 사회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로 변질되지 않았으며, 혼합경제는 공산주의로 빠지지 않고 나름대로의 안정성을 유지했다. 이 책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하이에크를 시장을 시대착오적으로 옹호하는 학자로 인식되게 만들어 버렸다. 영국의 노동당 하의 영국 정치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케인스만큼은 예외적으로 이 책에 대하여 공감을 표했으나, 그는 1946년에 죽었다. 좌파에서뿐 아니라, 영국의 보수주의 철학자 마이클 오크숏(Michael Oakeshott)마저, 계획에 반대하는 또다른 하나의 계획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리자, 하이에크는 학계에서 고립되기 시작했다.

하이에크는 1947년 몽펠르랭 소사이어티를 만들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았다. 미제스와 로빈스, 그리고 밀턴 프리드먼 등도 모였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는 케인스가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보다 더 강력하다"고 한 것을 인용하면서, 일반적인 기득권이 아니라, 사상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그들이 사상의 힘을 이용하여, 실제로 체계를 세상에 구현하려고 했다는 용기였다. 하이에크가 보기에, 보수주의는 그러한 사상의 용기가 없었고, 진정한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를 불러일으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이에크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상의 체계를 세상에 구현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에게 이러한 지적인 전쟁에 참여하도록 호소했다.

그는 경제학계의 주류에서 멀어져 갔으며, 1950년에는 미국의 시카고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시카고 대학에서는 한스 모겐소, 레오 스트라우스, 밀턴 프리드먼 같은 인물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후 사회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하이에크는 정치사상 분야의 연구를 하였다. 그의 지적 범위는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정치철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고, 체계적인 이론을 발전시켰다. The Constitution of Liberty (1960)에서, 그는 유럽의 지적 전통에 놓여 있는 두 가지 전통을 논했다. 첫 번째는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에드먼드 버크 등의 영국적 자유주의 전통이며, 두 번째는 데카르트로부터 내려오는 대륙적 전통,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였다. 전자의 노선만이 실질적 자유에 가까이 갈 수 있고, 후자는 결국 자유를 파괴하고 마는 것이었다. 하이에크는 자신이 영국적인 전통을 따르고 있고, 홉스, 루소, 벤담, 마르크스 그리고 케인스 등은 후자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며, 이러한 무지야말로 인간에게 자유가 필요한 근거이다. 그런데, 구성주의적 합리주의는 이성의 힘을 과신하여, 자유를 파괴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 또한 자유주의의 적이 될 수 있었다. 현대의 시민은 근시안적이며 자기 통제력이나 절제가 없고, 민주 정부는 경제적 개입이나 재분배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무제한적 민주주의를 막기 위해서 헌법을 만들어 이를 막아야 한다. 즉, 민주주의는 법의 지배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좌파뿐 아니라, 런던정경대학의 동료였던 라이오넬 로빈스나, 시카고 대학의 동료들마저 이 책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그들에 따르면, 하이에크는 자신이 공격하고자 하는 대상을 일종의 허수아비로 만들어 공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1962년,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Law, Legislation and Liberty 3부작 (1973, 1976, 1979)을 쓰게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왜 자신의 사상이 다른 사상에 비해 우월함에도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데 실패했을까? 하이에크의 대답은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치명적 자만(fatal conceit)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들은 자신의 사고능력을 과대평가하게 되며, 이러한 인식 하에서의 진보는 실패하게 된다. 진정한 진보는 인간 행동의 결과가 서로 얽혀 생겨난 자생적 질서의 결과이지, 지식인들의 설계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자생적 질서는 진화의 결과로 형성된 것으로 만든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치명적 자만과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번영과 자유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생적 질서에 대한 강조는 그를 소스타인 베블런, 조지프 슘페터와 더불어 경제에 대한 진화적 접근의 선구자로 인식되게 하였다. 그가 합리주의가 진정한 자유를 파괴한다고 공격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하이에크는 인간은 집산주의적 본능을 갖고 있다고 논한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되려면, 이러한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것은 쉽게 저지할 수 없다. 사회 정의(social justice)란 개념은 이러한 집산주의적 본능 때문에 생긴 미신으로, 열린 사회와 전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개념이었다. 따라서, 사회 정의의 추구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본능은 이성으로 저지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이성에 대한 신뢰야말로 사회주의를 불러오지 않았는가? 그는 구성주의적인 이성으로 계획된 시스템도, 본능도 아닌, 자생적 질서야말로 번영과 자유로 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논한다. 자유의 법은 자생적으로 새겨난 행동의 준칙을 법으로 제정한 것이며, 이러한 자유의 법은 개인의 자유라는 이상이 활짝 필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데 현대민주주의는 다수의 폭정이나, 정치적 이익의 문제 때문에, 이러한 자유의 법 대신, 나쁜 법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러한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입법부의 권한을 제한할 것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헌법이다. 헌법은 의회가 갖고 있는 과도한 민주성을 제약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자유를 보존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제한적 민주주의가 생겨나, 인간의 구성주의적 이성과 집산주의적 본능으로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전체주의적으로 타락시키게 된다. 무제한적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강하게 될 경우에는, 독재를 하더라도 과도한 민주주의를 제한해야만 자생적 질서가 유지된다. 이것이 하이에크의 제한적 민주주의 이론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도적 행동의 가치를 너무 낮추어 평가했다는 비판이 나오게 된다. 예를 들어, 20세기의 큰 정치적 변화였던 여성이나 흑인의 참정권 확대를 생각해 보자. 이는 정치 참여자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운동을 한 끝에 나온 결과인가? 아니면, 특정 의도가 아니라 자생적 질서로서 나온 결과인가? 또한, 하이에크 자신의 이론은 구성주의적 합리주의, 즉 치명적 자만으로부터 자유로운가? 하이에크는 질서는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에서처럼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자생적인 것이라고 역설해왔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개혁, 자유주의적 제도 개선을 언급할 때 그는 구성주의적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개혁이나 제도 개선은 하이에크 자신의 정치 설계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구성주의적인 체계를 공격하는 자신의 체계 자체가 구성주의적으로 설계된 결과물이라는, 따라서 자기 모순적이라는 비판이 나오게 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후로 그는 정책적인 제안을 많이 했지만, 그의 제안들은 사람들을 당혹케 만들었다. 피노체트 정권를 옹호한 것이나,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 이란에 폭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나, 화폐를 국가가 발행하지 않게 하고 민간에 맡기자고 제안한 것이나, 45세가 된 사람들로만 의회를 구성하자는 제안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정책 분석가로서의 능력과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제안들이 현실적이기는 한가? 이러한 정치 개입이나 정책 제안은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하이에크는 이러한 것 또한 타락한 현대 민주주의로부터 자유의 법을 지켜내기 위한 대가로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 구성주의나 집산주의로부터 위협받지 않게 보호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하이에크의 자유로운 사회 구상은, 집산주의적 본능의 대중을 억제할 수 있는 엘리트, 일시적으로는 독재자에게까지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는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학계의 주류로부터 떨어져 있던 인물에게는 의외의 일이었다. 공동 수상자였던 뮈르달과 균형을 맞추어 보이게 하기 위한 정치적 수상이었다는 반응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 때부터 그는 학계에서의 고립을 피하게 되었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생겨나면서 케인스의 접근법이 불신을 받게 되었다. 사회주의 계산 논쟁이나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 또한 재평가받게 되었다. 그 후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하였고, 1978년에 내한한 바도 있다. 그는 꾸준히 시장경제를 옹호하였다. 레이건과 대처의 시대에 하이에크는 대단한 영예를 누렸다. 마가렛 대처는 하원에서 하이에크야말로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공산권이 무너질 때의 영예는 굉장했다. 이러한 굉장한 영예 속에서, 그는 1992년에 눈을 감았다.

각주

  1. 밀턴 프리드먼은 하이에크의 경제학이 혼란스럽고, 이런 것들이 왜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폴 크루그먼은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기 변동 이론을 플로지스톤설에 비교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