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1789년부터 1794년까지 프랑스에서 발생한 전형적인 시민혁명. 프랑스 대혁명이라고도 한다. 구제도의 모순과 부패가 쌇인데다 산업구조의 변화로 시민계급의 세력이 커져 일어난 것이 원인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민의회의 지도 아래 혁명이 진행되어 인권선언이 이루어지고, 입헌군주제를 지향하였으나 1791년 국왕이었던 루이 16세의 도주 시도를 계기로 입법 의회가 성립되고, 다음해 공화정이 세워지게 됐다.

원인[편집 | 원본 편집]

  • 미국 독립전쟁의 소식이 프랑스에 전파됨
  • 신분제의 모순이 누적됨 : 특히 세금 문제에서 1신분인 귀족과 2신분인 성직자는 세금이 면제되었지만 3신분인 평민들에게는 과중한 세금 부담이 지워졌다. 당시 프랑스는 국가 단위에서 지고 있던 부채가 엄청났는데 이 부담을 지운 당사자는 정작 왕을 비롯한 1, 2신분의 사람들이었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3신분에 속하는 평민들이었던 것
  • 과거 중상주의로 인한 부르주아지의 성장 : 3신분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과거 중상주의 정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신분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의식 측면에서는 귀족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상황이다. 이런 상태에서 신분제의 모순으로 인해 이들의 불만 역시 누적되어 나중에 이들이 혁명을 이끄는 주도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 계몽주의의 대두

진행[편집 | 원본 편집]

결과[편집 | 원본 편집]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통령정부가 수립되면서 일단은 혁명이 종료된다.

영향[편집 | 원본 편집]

프랑스 혁명은 유럽의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중세의 잔재였던 신분제가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민족주의에 기반한 근대 국민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사건이 됐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국민국가들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았고, 이때부터 시작된 국민국가 간의 제국주의적 대립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에서 제일 부각되는 면은 왕을 처형하면서 공화정을 시도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범국가적 공화주의 운동은 프랑스 제정 시작과 이후 빈 체제의 영향으로 별 의미가 없어졌으며,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독립한 벨기에, 그리스 등도 공화주의보다는 민족주의 색채가 더 강했기에 군주제를 채택했다. 이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공화국이라고는 프랑스, 스위스, 포르투갈산마리노 밖에 없었다. 한편 이 때 근대적인 의미의 좌파우파가 탄생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