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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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94번 <놀람> 2악장 깜짝이야

Franz Joseph Haydn (1732-1809)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 모차르트, 베토벤 등과 함께 고전파를 대표하는 음악가이다. 흔히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생애

그의 부모는 음악과는 관련이 없는 직업에 종사하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취미로 음악을 즐겼고,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이후에는 근처의 소도시 하인부르크로 아들을 보내어 음악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 때 성당의 성가대에서 보이 소프라노로 활동하였는데, 목소리가 상당히 미성이었는지 교회측으로부터 카스트라토가 될 것을 권유받았다고 한다. 고자가 될 뻔 했다 그말인가? 다행히 그의 아버지가 거절하여 성사되지는 않았다.

얼마 후 하이든은 빈으로 진출하여 성가대원으로 활약하다가 변성기가 옴에 따라 성가대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한동안 하이든은 경제적으로 악전고투를 거듭하면서도, 틈틈이 작곡 이론을 공부하고 작품을 만들어가며 자신의 진로를 작곡가 쪽으로 잡아나가게 된다.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귀족 가문을 기웃거리던 하이든은, 귀족 집안의 비상근 작곡가나 음악 교사 등으로 일하던 도중 1757년 모르친 백작 집안에 악장(카펠마이스터 Kapellmeister)으로 취직하며 처음으로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에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하지만 모르친 백작 가문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하이든은 헝가리계 귀족인 에스테르하지 가문으로 직장을 옮겼고, 이곳에서 그는 거의 30여년간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명성을 쌓아올리게 된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공작 작위를 가진 유력 귀족이었고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악단도 운영하고 있었으며, 가문의 당주인 파울 안톤, 니콜라우스는 아마추어 연주자이기도 했다. 하이든은 공작과 악단을 위하여 다양한 장르에 걸쳐 수백 곡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썼다.

그의 명성이 전 유럽에 퍼져나가던 1790년, 니콜라우스가 타계하고 새로 당주가 된 인물은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어 하이든에게 거액의 퇴직금을 지급하고 계약을 해지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런던의 공연 기획자인 요한 페터 잘로몬의 의뢰를 받아들여 두 차례 영국에 다녀왔고, 12곡의 후기 교향곡을 작곡하였는데 이를 '런던 교향곡'으로 묶어 통칭한다[1]. 1795년 빈으로 돌아온 그는 이미 전 유럽에 그 명성을 떨치는 거물급 음악인이 되어 있었다.

이후로는 주로 종교음악이나 <트럼펫 협주곡> 등의 몇몇 걸작들을 쓰며 여생을 보냈다. 70세를 넘길 무렵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1809년 타계하였는데 당시는 나폴레옹의 빈 침공으로 온통 시끄럽던 시절이었다.

평가

여담

청년기의 베토벤을 제자로 둔 적이 있다. 하지만 성격이나 음악적 지향점이 상당히 많이 달랐기 때문인지 둘 사이의 관계는 그리 친밀하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베토벤도 하이든에게 그리 많은 것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각주

  1. 그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곡인 교향곡 104번을 <런던 교향곡>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