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풍납동 토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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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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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ㅈ|공식 명칭은 광주 풍납리 토성이었다가 2011년에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바뀌었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 (건축물)|토성]]이었으나, [[1925년]]에 발생한 홍수로 성벽의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다만 이 남서쪽 일부가 떠내려가면서 토성안의 수많은 유물들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정체가 드러났다.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ㅈ|공식 명칭은 광주 풍납리 토성이었다가 2011년에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바뀌었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 (건축물)|토성]]이었으나, [[1925년]]에 발생한 홍수로 성벽의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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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과의 관계==
==몽촌토성과의 관계==
이 풍납토성 남쪽 방이동에는 동일한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몽촌토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데 여러 의견 중 풍납토성이 평시용 성곽이고 몽촌토성을 전시용 성곽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기각지세의 성곽 배치는 고구려 [[국내성]]에서 볼 수 있는 왕성-산성의 배치와 유사한데 이는 초기 [[백제]] 지배층이 [[고구려]]에서 남하한 세력이라는 점에 근거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 풍납토성 남쪽 방이동에는 거의 유사한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몽촌토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데 여러 의견 중 풍납토성이 평시용 성곽이고 몽촌토성을 전시용 성곽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기각지세의 성곽 배치는 고구려 [[국내성]]에서 볼 수 있는 왕성-산성의 배치와 유사한데 이는 초기 [[백제]] 지배층이 [[고구려]]에서 남하한 세력이라는 점에 근거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논란==
==논란==
이 성의 성격을 두고 학계에서는 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초기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이라는 의견과, 다른 하나는 그냥 단순한 방어용 토성에 불과하다는 의견이다. 한 가지 알아둘 것은 이 성이 위례성일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쪽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나 이들과 연결된 곳이 꽤 많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과 유적등을 보아서 위례성이 나올 가능성이 꽤 높은 상황이고 발굴을 할 때 마다 새로운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이 성 안 구역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버릴 경우 재산권 행사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 즉 재산권 행사의 권리와 문화재 보호라는 공공의 이익이 충돌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발표에 의하면 이는 90년대 초반 잠실개발 당시 투기세력의 무차별 땅 매입으로 인한 난개발이 엄청난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이 문제는 무려 70년이 더 걸린 2094년 무렵에 완전히 발굴됨과 동시에 해결될 것이라고 한다. 한 순간의 실수가 100여년에 걸친 문제로 커져버린 비극인 것이다.
이 성의 성격을 두고 학계에서는 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초기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이라는 의견과, 다른 하나는 그냥 단순한 방어용 토성에 불과하다는 의견이다. 한 가지 알아둘 것은 이 성이 위례성일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쪽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나 이들과 연결된 곳이 꽤 많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과 유적등을 보아서 위례성이 나올 가능성이 꽤 높은 상황이고 발굴을 할 때 마다 새로운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이 성 안 구역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버릴 경우 재산권 행사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 즉 재산권 행사의 권리와 문화재 보호라는 공공의 이익이 충돌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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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사적]][[분류:한국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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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6일 (토) 20:53 판

틀:문화재

개요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1]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에 발생한 홍수로 성벽의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특성

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북동-남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의 축조는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판축 기법을 이용한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몽촌토성과의 관계

이 풍납토성 남쪽 방이동에는 거의 유사한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몽촌토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데 여러 의견 중 풍납토성이 평시용 성곽이고 몽촌토성을 전시용 성곽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기각지세의 성곽 배치는 고구려 국내성에서 볼 수 있는 왕성-산성의 배치와 유사한데 이는 초기 백제 지배층이 고구려에서 남하한 세력이라는 점에 근거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논란

이 성의 성격을 두고 학계에서는 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초기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이라는 의견과, 다른 하나는 그냥 단순한 방어용 토성에 불과하다는 의견이다. 한 가지 알아둘 것은 이 성이 위례성일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쪽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나 이들과 연결된 곳이 꽤 많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과 유적등을 보아서 위례성이 나올 가능성이 꽤 높은 상황이고 발굴을 할 때 마다 새로운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이 성 안 구역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버릴 경우 재산권 행사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 즉 재산권 행사의 권리와 문화재 보호라는 공공의 이익이 충돌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각주

  1. 공식 명칭은 광주 풍납리 토성이었다가 2011년에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