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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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백 낙서~~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는 카를 마르크스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을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남긴 ~~매우 짧은~~글이다. 취소선 드립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짧다.

일설에 따르면 카를 마르크스는 <기독교의 본질>을 읽고 불현듯 떠오른 의견을 적으려 하다가 마땅한 종이가 없어서, 자기 집에 사는 세탁부가 남겨놓은 쪽지 여백에다가 이를 휘갈겨썼고, 나중에는 그것마저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 설이 사실이라면 이 ~~여백 낙서~~글이 다시 발굴되고 유명해진 것은 역사적 기적일지도.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는 마르크스가 1883년에 죽은 이후 1888년에 마르크스의 친구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공표되었다.

내용

당장 쪽지 여백에 적은 내용이라고 알려진 만큼 그 내용은 매우 짧으며, 리브레 위키의 한 문서로 기록해도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이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는, 11개의 명제로 이루어져 있다.

1.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유물론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오직 객체의 아래에서만 포착된다는 점이다. 그런 것들은 감성적 인간의 활동, 즉 실천으로 포착되지 않았으며, 주체적인 것으로도 포착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의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추상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관념론을 통해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런 관념론이 현실적인 감성적 활동 그 자체를 알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포이어바흐는 이런 관념의 객체들과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감성적 객체들을 파악하고자 햇다. 하지만 그는 인간적 활동 그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 포착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의 <기독교의 본질>에서 단지 이론적 태도만 진짜 인간 태도로 간주된 반면, 실천은 오직 더러운 유태인이 나타나는 형태로만 포착되어 그런 식으로 고착된다. 그러므로 그는 '혁명적인' 즉 '실천적이고도 비판적인' 활동을 개념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대상의 진리가 인간의 사고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인간은 실천에서 자기 사고의 진리를, 즉 자기 사고가 현실성과 힘을 지녔으며 이 세계 안에 실재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 고립시킨 채 사고가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인가를 논쟁하는 것은 순전히 현학적인 문제이다.
3. 환경들을 변화시키고 교육을 중시하는 유물론의 학설은 그 환경들이 인간들에 읜해 변화되며 교육자 자신이 교육되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런 학설은 사회를 환경과 교육이라는 별도의 두 부분으로 단절시키고 나서 그 중 한 부분을 사회 위에 군림하게 만든다. 환경과 인간 활동에 변화를 가하는 일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 또는 자기변화라는 것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 포착되어야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4.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자기 소외라는 사실, 즉 세계가 종교적 세계와 세속적 세계로 이중화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 세속적 기초로 해체시키는 데 요점이 있다. 그러나 이 세속적 기초가 자기를 자기로부터 떼어내어 그렇게 떼어진 자기를 독립적 영역으로 구름 속에 고착시킨다는 것은 오직 그 세속적 기초 자체가 갈갈이 찢겨 있고 자기모순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속적 기초 자체는 그 자체 안에서,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안고 있는 모순 안에서, 실천적 혁명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땅 위의 가족이 신성 가족의 비밀임이 밝혀지고 나면 이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근절되어야 하는 것은 땅 위의 가족이다.
5. 추상적 사고에 만족하지 않은 포이어바흐는 직관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인간 감성의 실천적 활동으로 포착하지 않는다.
6.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해체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개인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총화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현실적 본질을 비판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한 포이어바흐는 1. 역사의 경과를 추상화시켜 종교적 심성을 그 자체로 고정시키고 추상적으로 고립된 인간 개개인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로 내몰린다. 2.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오직 '종(種)' 그것도 내면적이고 침묵적인 상태에서 수많은 개인들을 자연적으로 결합시키는 보편성으로만 포착될 수 있다.
7. 따라서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심성'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분석하는 추상적 개인이 하나의 특정 사회형태에 속한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8.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일체의 이론을 신비주의로 바꾸어버리는 유인을 주는 불가사의들은 인간의 실천 및 이 실천에 대한 개념파악에서 그 합리적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9. 직관적 유물론이 도달하는 최고점,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 개념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은 개별적 개인과 시민사회를 직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0. 구식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사회이지만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또는 사회적 인간성이다.
11. 철학자들은 이 세계를 단지 각기 다르게 해석하기만 했을 뿐이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 글에 대한 다른 번역 또한 찾을 수 있다.

의미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보다 약 100여 년 전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칸트는 명목상으로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한 철학자로서는 사실상 신학을 박살냈다. 그의 3대 비판서(<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등에서, 건전한 이성은 결코 자신의 한계(경험적인 것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서만 바르게 논할 수 있는 것)을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여, 경험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인 '물 자체'에 대해서 인간은 결코 인식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 또한 경험적인 것을 넘어서는 영역에 속한다. 그렇다면, 신학은 '신'에 대해 나름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이성을 굴려서 만들어낸 이론들인데, 칸트에 따르면 이것은 이성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 된다! 사실상 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을 저술하여 신학의 가치를 어떻게든 인정하려고 시도한다. 결국, 신과 같은 종교의 이야기는, 다소 우화적일지라도 인간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이며, 그러하게 해석하는 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카를 마르크스는, ~~왜 하필이면 그걸 남이 쓴 메모에다 낙서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인간 그 자체에 대해 논하면 되지, 왜 우화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냐?라고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여러 책들이 있었다. 유토피아나 걸리버 여행기는 줄거리 상으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이야기지만, 우화적 접근을 통해 현실 세계를 비판하고 풍자하며, 어떠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포이어바흐와 같은 견해는, 그렇게 현실을 모형화한 우화적 접근이 현실 세계를 제대로 투영하지 못하며, 하나의 인간 개개인에 대해서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