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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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恩喜. 호는 추계(秋溪).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언론인, 여성운동가, 작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4년 음력 11월 21일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1]에서 부친 탐진 최씨 최병규(崔秉奎)와 모친 달성 서씨 서덕경(徐德瓊) 사이의 5남 5녀 중 5녀로 출생했다. 어렸을 때 ‘총각’으로 불리다가 창동소학교에 입한 직후 출생지인 은천면의 이름을 따서 ‘은희(銀姬)’라고 했다가, 다시 ‘은희(恩喜)’라고 바꿨다. 그녀는 훗날 자신의 집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의 부계는 한학자로 해주에서 7대를 살았는데, 3대 독자이신 내 아버님이 젊어서 내 조부님의 3년상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경무부 판임 벼슬을 지냈다 한다. (중략) 선친은 뜻한 바 있어 일찍이 승진길을 버리고, 팔도강산을 유람하던 끝에 낙향한 곳이 연고지 아닌 배천이었다. 지리적으로 제2고향인 해주에서 가깝기도 하려니와 풍광이 명미하고 산수가 아름다우며, 비옥한 토지와 순후한 인심이 자못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부친 최병규는 배천에서 토지를 많이 사고 농장을 장만하였으며, 평안북도 운산금광에도 투자했다. 또한 개화 사상에 감화되어 머리를 짧게 깎고 집안의 노비를 모두 면천시키고 노비의 자제들을 후원했다.[2] 그리고 인문계, 실과교육, 농민교육을 비롯한 3개의 학교[3]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남녀가 평등한 위치가 되려면 여성도 경제권을 가져야 한다’며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강조했다. 다만 가부장제가 만연했던 사회 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하다. 최은희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딸이 족보를 보고 싶어하는 걸 알아채고 “오빠들에게나 읽힐 책이다”라며 막았고,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집으로 온 그녀에게 집안의 가보로 내려온 옥돌 도장함을 주면서도 “가문을 지키지 못할 딸이지만, 네 동생은 아직 어리고…”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최은희는 이에 대해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의 아버님 흉중을 헤아릴 길이 없다”고 회상했다. 부친의 이같은 한을 풀어주고 싶었는지, 그녀는 자서전에서 부계인 ‘탐진 최 씨의 상조(上祖)들’을 여러 장에 걸쳐 상세하게 적었다.

최은희는 개신교계 학교인 창동소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고, 장학생으로 뽑혀 해주 사립 의정여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도 최우등으로 졸업하여 도지사 상을 타고 도쿄 유학을 준비하면서, 그 준비로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이때 교사들이 역사 시간에 교과서인 일본 역사책을 펼쳐놓고 몰래 조선 역사를 강의하여 학생들의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최은희는 이 영향으로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녀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동아리 활동을 하였고, 박희도의 지도를 받았다. 한 번은 일신보에 난 가출소녀의 딱한 사정을 접하고, 인천의 사창가에 팔려간 그녀를 구출하고자 교내 모금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스스로 만든 수공예품을 팔아 170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 무렵 부친 최병규가 숨을 거뒀는데, 그는 임종 때 딸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우리가 독립을 하려면 학문이나 경제적 발달에 있어 남녀가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네가 솔선수범하여라. 동경유학은 집행유예에 걸려 있어 당장 실행이 안될 것인즉, 그동안 내가 네가 상속할 2천원 상당의 전답(20섬 지기)으로 해주에 부인상점을 설치해서 지반을 닦아놓고 떠나면 네 학비는 염려 없을 것이다. 잘 발전시키면 장차 도미 유학 준비도 할 수 잇지 않겠느냐? 내 친우 이승모, 김영택 씨에게 부탁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될 때 참석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며칠간 구류되었다가 풀려났다. 그후 고향인 황해도 배천군으로 돌아와서 “동포여 일어서자”는 격문 등을 송흥국(洪興國)·이정식(李廷植)·오예제(吳禮濟)·조기복(趙起福)에게 전달하고 이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 등을 제작하였다. 3월 30일 배천읍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24일 해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이은(李垠)과 이방자의 결혼식이 거행된 후, 특사로 복권되었다. 그 덕분에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었고, 도쿄 니혼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 아동보전과에 입학했다.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4년 여름방학에 귀국하여 춘원 이광수의 집을 방문했다. 이때 이광수의 부인이자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이 부잣집의 출산 경비를 받지 못하게 되자, 최은희가 자원하여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끈질기게 앉아서 받아왔다. 이광수는 이걸 보고 그녀의 두둑한 배짱과 수완을 마음에 들어했다. 또한 허영숙과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문장력이 상당해서 기자가 되기에 적합하였고, 일본 유학 시절 그녀를 만나본 민태원도 “활발하고 붙임성이 있어 신문기자를 하기에 적합하다”며 조선일보 편집국장에게 추천하였다. 그 결과, 최은희는 1924년 10월 5일 21세의 나이로 최초의 한국인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후 2년간 와세다대학 법률 통신 강의를 수학하고 논문을 통과해 니혼여자대학을 졸업했다.

최은희는 부인견학단을 조직해 공장과 감옥, 학교 등을 견학하고 현상 변장 탐방 기자를 하였으며, 기근 구제 여류 음악회를 주최하는 등 기자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민간 신문 최초로 ‘가정란’을 3면에 신설하고 ‘첫 길에 앞장선 이들’을 찾아 26회에 걸쳐 연재하는 등 탐문 조사를 착실히 수행했다. 1924년 12월 17일부터 3일간 무선전화 공개 시험 방송에서 아나운서를 하기도 했고, 1925년 12월에는 조선일보 비행사 신용욱의 비행기에 동승하여 5회에 걸쳐 서울 상공을 날기도 했다. 1925년 7월 한강 유역에서 ‘을축년 대홍수’가 발생하면서 이로 인한 여파로 기근이 들자, 각 사회단체와 부인단체, 각 권번의 기생들로 ‘조선일보 부인구호반’을 조직해 왕십리에서 아흐레 동안 주먹밥을 먹고 구내 벤치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구호활동에 주력했다. 또한 서울의 빈민굴이나 아편굴, 유곽이나 대구의 창녀굴과 같이 식민지배의 최저변에 위치한 기층 민중의 고난과 비참한 현실을 발굴해 이를 일반에 널리 알리고자 했다.

1926년 직업여성의 경제적 독립의식과 친선을 목적으로 망월구락부를 조직하고, 황애시덕, 김활란, 황신덕, 허성실과 더불어 발기총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 6.10 만세운동이 발발했을 때 검찰이 벌인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특종 보도했다. 특히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 미와 와사부로 경부를 미행해 경찰서 내로 진입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러한 활약으로 ‘신문계의 패왕’이라 불렸으며, 적극적이고 당찬 성격 때문에 ‘말괄량이’ 혹은 ‘수염 난 여자’ 등의 별명이 붙었다. 1927년 5월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를 창립하여 부인 계몽운동과 여성의 지위 향상, 여성 해방을 목표로 삼았다. 그녀는 근우회에서 서기와 중앙집행위원, 재무부장을 맡아 4년간 활동했다. 1927년 6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이 벌어질 때, 학교 당국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안재홍, 서범석, 이숙종 등과 함께 발표했다.

1930년 7월 7일 니혼대학 법과 출신으로 법원에 근무하던 이석영(李錫泳)과 결혼한 뒤 조선일보 신문사를 퇴직했다. 이석영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작은딸이 2살 되던 해에 남편이 사망했다. 이후 대외 활동을 일절 하지 않고 가정주부로 지내던 그녀는 8.15 광복 직후 사회에 다시 등장했다. 1945년 9월 여권실천운동자 클럽을 조직하고 대표에 취임했으며, 대한부인회 서울시본부 창설위원, 대한여자국민당 서울시 당수에 취임하면서, 여성의 정계 진출운동, 즉 ‘여성입각운동’을 추진했다. 6.25 전쟁 중에는 ‘어머니날’을 제정하기 위한 활동을 주도하여 1952년 대한부인회에서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제정하게 하였다. 1955년 이승만에 의해 관제화되면서 ‘어버이날’로 변경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독특한 어머니의 공과 덕과 은혜를 감사하기 위한 날을, 관에서는 무슨 의미로 아버지를 끌어들여 어버이날 또는 가정의 날이라 하였는가? (중략) 술에 물탄 이, 물에 술탄 이처럼, 싱겁고 향기 없고 절실함이 없는 뒤범벅 개떡을 만들어 놓았다.

1952년 대한여자국민당은 임영신부통령 후보로 추대했고, 최은희는 “임 여사를 우리의 부통령으로! 여자 부통령 입후보는 만고의 처음입니다!”라는 선전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녀는 임영신이 외교 전문가이자 행정가 및 교육자로서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임영신은 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집권한 민주당 정권에서 각료 인선이 시작되자, 보사부 장관에 박순천을 등용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박순천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과 연대해 마산 의신여학교 교원으로서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1년간 징역을 살았던 걸 강조했다. 그러나 제안이 거부당하자, 1960년 11월 5일 조선일보 <부인시론>에 “여성도 대폭 등용하라 - 장 내각에 충고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현석호 내무장관은 본 내각에 전국의 군수급 임명을 끝낼 것이라고 발표하였는데, 그중에는 시험 삼아서라도 각 도에서 일군씩이나마 여성에게 그 직임을 주어 보겠다는 기획을 세웠는지 알 수 없거니와, 제2공화국 국무총리 인준이 시작될 때부터 여권실천운동자 클럽에서는 보사부 장관에 박순천 여사를, 법무부 정무차관에 이태영 여사를 기용하여 달라는 요청서를 국회에서 인준되는 대로 즉각 그에게 수교하여 주도록 미리 민의원 의장에게 맡겨둔 일이 있었다. 이 두 여사의 실력이 어느 누구라도 능가하리라는 것은 천하 공지의 사실이건만, 신정부는 이를 고려하지 않았고, 서울특별시에서 9개구의 청장과 수백의 동장군을 임명할 적에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심지어 말단 공무원인 부녀국 부녀계장이 과거에 여자이었던 것을 남자로 바꾸어버린 일과 사범대학 부속여고 교장 자리에 또한 남자 교장을 채용하였은즉 실로 거거우심(去去尤深)라는 말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략)

이승만 전 대통령은 아무리 독재정권이라 하였지만 초대 상공장관 무임소장관에 공보처장 감찰위원 등에 여성을 기용하였고, 또 그들은 두드러진 업적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남성 동료들보다 열등한 일을 한 적이 없었으며, 더구나 부정축재나 민족반역의 악덕행위를 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장 정권은 왜 과거 관계의 여성들이 큰 득죄나 한 것처럼 그다지도 앵돌아져 버렸단 말인가. (중략) 필자는 장 내각에 충고한다. ‘3살 먹은 아이 말도 귀 넘어 듣지 말라’는 속담이 있은즉, 어디 한 번 시험적으로라도 크게 용기를 내어 한 귀퉁이씩 떠맡겨 보시라. 여성은 비교적 양심적이오, 성실하고 사심이 없으며, 애국애족에 불타는 자 적지 않은즉, 숨은 인재를 널리 구하여 적재적소에 대폭 등용시켜 보시기를.

필자 최은희 사회평론가-여성실천 운동자클럽 대표.

여성입각 운동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녀는 역사 집필에 집중했다. 이보다 앞선 1958년, 그녀가 집필한 <근역의 방향>이 3.1 운동 사재(史材)로 당선되고 1961년 책이 출간되었다. 이에 그녀는 남은 인생을 여성사 및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독립운동과 민족문화에 공헌한 사실에 입각하여 여성사에 중추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와 동시에 여성의 연대와 자매애가 독립운동과 민족문화의 한 축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녀는 3.1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유관순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녀의 오빠가 1920년 10월 12일 정오,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지급출두하라는 통지를 받고 달려간즉, 그날 새벽 관순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1년 6개월 동안 가지가지로 겪은 고초와 악형의 빌미가 큰 병이 되어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한 17세의 꽃봉오리가 그대로 스러지고 만 것이다.


- 최은희, <한국 개화여성열전>

그녀가 집필한 근역의 방향 첫 페이지에는 “삼일 동지 중 대구 감옥 생활 십년간 같이 한 친구들”이라는 제목과 함께 김마리아, 김영순, 백신영, 신의경, 이정숙, 이혜경, 유인경, 장선희, 황애시덕 등 9명의 사진과 이름을 기재했다. 그녀는 애국부인회를 3.1 운동의 여성 비밀조직으로 분류하고,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의 생애를 <한국 근대여성사>와 <여성열전>에서 여러 차례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1967년 자신을 비롯해 3.1 운동에 참가했던 할머니들을 "3.1 할머니"로 규정하고, 그들과 함께 3.1 공원 조성식 행사를 서울 영등포구 사당동에서 개최했다. 그녀는 개석사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조국이 일어선 지 어언 20여 년. 그 당시 꽃같던 소녀들은 모두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눈이 어둡고 귀가 먹먹하고 기력이 쇠잔한 우리 할머니들이 나머지 생애에서 무엇을 조국에 바칠 수 있으리이까? 젊어서나 늙어서나 나라 위하는 그 마음 상록수와 같은 고로, 이제 마지막 힘을 합하여 조국 강토에 3.1의 푸른 얼을 심어 천대만대 사랑하는 우리 동포들에게 길이 길이 그 정신을 유전하고자 서울특별시의 후원 아래 여기 3.1 녹원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서울시 녹화 정책에 따라 연차적 식수를 하고, 경내의 유래비를 건립하고, 지나가는 길손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쉬어 갈 수 있는 아름다운 시설을 갖추어, 저희들 생전에 3.1 운동으로서의 인가를 받게 되면 정부와 국회의 사적 보존 신청을 하여 볼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후 임영신, 박순천, 황인덕, 황신덕 등과 함께 3.1 공원 설립을 위한 홍보와 모금운동을 전개했지만, 2천여 동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지 못하면서 끝내 구체화하지 못했다. 이후 집필 활동에 힘을 기울여 1973년 여성 항일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한국근대여성사> 3권을 발간했다. 모두 32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905년부터 1945년 조국을 찾기까지’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여성의 항일운동사에 초점을 두었다. 제1권은 실권, 생활, 여명, 우국, 망국, 반항, 투쟁편으로 구분하여 근대화와 일제 강점의 역사를 서술했고, 제2권은 3.1운동 편, 제3권은 비밀조직, 배일활동, 여성단체, 해외편으로 나누어 여성들의 항일운동을 서술했다.

1982년 3월부터 1987년 7월까지 <여성중앙>에 연재하였는데, 사후에 <한국 개화여성 열전>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첫날 밤에 소박맞은 왕비 - 최초의 우먼파워 민비’를 필두로 개화기에 평탄하지 못했던 조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조국의 현실에서 발버둥쳤던 23명의 여성의 삶을 인물별로 정리했다. 또한 강인한 여성, 자주독립적 여성, 개화한 여성들에게 주목해, 남성 중심적인 역사의 뒤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여성들을 발굴하고자 하였다. 1983년 5월 투병 와중에도 5천만원을 조선일보사에 기탁하면서 “한평생 언론 창달을 염원하고 기여하고자 한 꿈과 뜻이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조선일보는 이 기탁금을 바탕으로 1984년부터 현재까지 해마다 우수 여기자에게 ‘최은희 여기자상’을 수여하고 있다.

1984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삼호아파트 자택에서 별세했다. 사후 1주기에 용인공원묘원에서 묘비제막식이 개최되었다. 묘비에는 1984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 칼럼 ‘횡설수설’과 8월 18일자 조선일보 ‘만물상’이 새겨졌는데, 각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小我에의 충실이 결국 大我에의 충실을 가져온다’는 믿음으로 한평생을 항일운동과 여성운동에 몸바쳐 온 崔恩喜 여사가 80세를 일기로 이승을 달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이기도 했던 최 여사는, 단순한 기자에 그치지 않고 20세기의 우리사회를 폭넓고 치열하게 살다간, 우리나라 여성의 불꽃과 같은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여사가 남긴 방대한 저서를 보아도 얼마나 정열과 끈기에 넘쳐있었는가를 짐작하게 된다. 저서 중에서도 무려 원고지 7천장에 달하는 「祖國을 찾기까지」의 역저는 70 노년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10년의 어려움 끝에 이룩해놓은 우리나라의 여성독립운동사요, 한국근대여성사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더욱이 이 저서는 우리 근대여성사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직접 겪고 혹은 몸소 앞장서기도 했던 일종의 체험기적인 서술이라는 점에서 그 책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그대로 입을 다물고 죽으면 진실이 영 역사의 그늘 속에 묻힐 것 같아 쓰게 되었다고 한다.


1904년 황해도 배천군에서 태어난 여사는 16살의 여학생의 나이로 3․1 운동에 앞장서 2번이나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었다. 그후 일본유학하던 중 3학년 때 「조선일보」에 우리나라 첫 여성기자로 발을 들여놓았고 많은 여성운동에 앞장을 섰다. 여사는 “어떠한 항일운동이건 그 뒤에는 숨은 여성들의 힘이 컸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곤 했었다.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제정토록 추진한 것도 바로 여사였다. 지금은 「어버이날」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대한부인회 회장으로 있던 1952년 이를 제안하여 연중 행사의 날로 만든 것이다. 성품이 참대와 같이 곧고 부지런하여 모든 이의 추앙을 한몸에 받아오던 여사는 이제 이승을 달리했다. 원고 등을 써서 모은 전재산을 여성언론을 위해 바쳤고, 유품들도 공공기관에 기증했다. 여사는 고결한 그 성품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갔다. 길이 명복을 빈다.

- 동아일보, 횡설수설

1924년 10월 13일 초저녁 서울 서대문 첫 거리 9번지에 있던 춘원 이광수 댁의 방에서, 행랑어멈 차림의 한 여인이 얼굴화장을 하고 있었다. 먹을 엷게 풀어 목줄기에서 이마, 팔뚝에서 손가락까지 검은 분을 발랐다. 마치 필리핀 사람처럼 검은 얼굴이 거울에 나타났다. 너무 부자연스러워 비누로 겉만 슬쩍 씻었다. 부엌에서 방금 나온 하릴없는 행랑 어멈이었다. 許英肅 여사가 허리를 재며 웃었다. 여인은 곧 옆집의 1살짜리 아기를 빌어다 낡은 처네를 둘러 업었다. 다시 손이 허전해서 무청 한아름을 안고 그집을 나서 뒷골목을 돌아 서대문 거리로 나왔다. 오후 7시 5분이었다. 그 행랑어멈이 그때 20세의 꽃다운 부인(여성) 기자 최은희 양이었다. 조선일보는 10월 7일부터 「조선신문계의 처음되는 시험으로」 「흥미있는 懸賞附 變裝探訪 」기자를 하루걸러 거리에 내보냈다. 첫째날은 李瑞求(나중 극작가) 사회부 기자의 군밤장수, 둘째날은 孫永極 정치부기자의 인력거꾼, 셋째날은 金達鎭(시인) 사회부 기자의 러시아 빵장수, 그리고 「婦人記者의 대담한 變裝 今 13일 제4군 출동」의 행랑어멈이었다. 누구나 거리에서 그 정체를 알아 잡아내면 10원의 상금을 탈 수 있었다.


그러나 최은희 기자의 행랑어멈은 서대문, 「담핏골」「야주개」 도렴동, 광화문, 종로1~3가를 거쳐 밤 11시 영표동 조선일보 사옥에 닿을 때까지 아슬아슬하게 들키지 않았다. 최은희 여사가 80년에 낸 「女性前進七十年/初代女記者의 回顧」에는 이런 일화들이 있다. 76세에 이 「책을 내면서」에 최여사는 松桂烟月의 옛 시조 한수를 들었다. 「70에 책을 써서 몇 해를 보잔말고, 어와 망령이야 남이 일정 우을노라, 그래도 80이나 살면 오래 볼법 있나니.」 최 여사는 그 80세를일기로 16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24년 10월 한국 최초의 여기자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8개년을 근무, 83년 5월에는 「제가 오늘까지 절약하고 모은 돈 5천만원을 조선일보에 기탁」한다고 해서 「최은희 여기자상」이 제정되었다. 어와, 그 뜻을 오래 볼법있나니…

- 조선일보, 만물상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최은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5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유해를 안장했다.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현재의 황해남도 배천군 배천읍.
  2. 이때 그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양근환이다.
  3. 동흥학교, 영명학교, 용덕학교. 이중 동흥학교와 영명학교는 나중에 합병하여 동명학교로 개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