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청해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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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청해진 유적
청해진.jpg
건축물 정보
주소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734번지
대지면적 239,312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308호
지정일 1984년 9월 1일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로 전라남도 완도의 부속 도서인 장도(장군섬)에 있다. 청해진(淸海鎭)이 설치된 위치인 완도 일대는 신라 당항성에서 수도인 서라벌의 항만 역할을 한 울산으로 가는 지점의 중간쯤 되는 위치로 범위를 넓혀 보면 중국(당)과 일본을 연결하는 당시 해상무역로의 길목이기도 한 지점이다.

장보고가 중앙의 세력다툼에 의해 암살되고 난 뒤에도 청해진 자체는 자체의 군사력이 워낙 강대하여서 한동안 유지되었으나 5년 뒤 문성왕 13년인 851년에 폐쇄되고 일대의 주민들은 벽골군(현 김제시) 일대로 이주하게 되면서 이후에는 다시 사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청해진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태풍 사라 내습 당시 일대 바다가 완전히 뒤집히면서 해안가 뻘 속에 묻혀있던 목책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후 인근 주민들이 밭으로 일구던 장도 일대를 발굴조사한 결과 이곳이 당시 청해진의 본영이자 중심지였던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발굴성과[편집 | 원본 편집]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이루어진 발굴과정에서 890m의 성벽과 내부 건물지, 굴립주[1] 건물지, 매납(매장)유구 등을 확인하였으며 331m의 해안 목책의 분포 확인과 3만여 점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특히 매납지의 흔적은 청해진 조음도에서 중사(中祀)[2]를 거행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비추어 볼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이루어진 추가 발굴에서 해안출입 겸 접안시설인 석축렬과 우물 등이 발굴되었다. 이후 기존에 밝혀진 나무 목책열 이외에 바깥쪽 바닷속에 또 다른 목책열이 지나는 것이 확인되었고 성벽에 나 있는 배수구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특히 성 출입구 인근의 우물은 우물 바닥에서 사면편병, 주름무늬병 등의 토기류와 철제 자귀, 금제고리 등의 유물과 어망추, 가락바퀴 숯돌 등의 생활 유물도 다수 발굴되었다. 특히 우물 맨 밑바닥의 토기류는 4점이 나란히 깔려 있어서 신라후기 당시 이 우물을 만들면서 매납한 정황이 보여 성의 축성시기와 우물의 축조시기가 동일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청해진 자체는 신라 후기에 짧은 시간동안 사용되었으나 이 곳에서 워낙에 많은 유물들이 나온 덕분에 이 유물들은 9세기 전반의 신라시대 표지유물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청해진 구조[편집 | 원본 편집]

전체적으로는 장도 전체를 둘러싼 판축식 토성으로 외성을 두른 뒤 성 내부를 가로지르는 중성과 중성문을 설치한 이중성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성문은 외성문과 중성문 각 1개씩이 존재하고 있으며 중성과 외성이 만나는 지점 높은 곳에 고대(高臺)[3]가 복원된 형태로 있으며 성 둘레에는 4개의 치(雉)가 돌출되어있다.있어 주변을 감제할 수 있는 형태이다. 외성문은 약간 낮은 옹성이 그 정면을 막고 있는 형태로 옹성 내부에는 당시 축조된 우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보통 성 내에 우물을 설치하는것을 생각하면 이 우물의 위치는 매우 특이한 구조라 할 수 있다.

이외에 성 내에는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28호인 완도 장좌리 당제 및 당굿을 하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장도는 본래 간조시에만 완도 본섬과 연결되는 반육계도(半陸係島)로 장도의 출입은 썰물 때에만 제한적으로 가능했었다. 완도군에서는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자 아예 목조로 된 육교를 설치해서 때를 가리지 않고 섬에 출입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각주

  1. 땅을 파낸 뒤 그 위에 기둥을 세운 형태
  2. 국가 제사의 일종으로 농업관련 제사이며 가장 큰 제사인 대사보다는 약식제사에 해당한다.
  3. 관측을 위한 장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