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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쾰른|쾰른]]으로 이적해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 4강에서 골도 넣었었지만 [[분데스리가]]를 주름잡는 수준은 아니었고, 그때까지 흑인 선수는 단 1명조차 없을 정도로 [[분데스리가]]는 유럽인들의 세계였다.<ref>최초의 흑인 선수는 4년 뒤에 데뷔하며, 독일에서 태어나지 않은 흑인 선수는 1990년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이 선수가 바로 차범근과 함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11에 선정된 가나의 전설적인 공격수 [[토니 예보아]]다.</ref> 그런데 축구변방인 [[대한민국]]에서 건너온 선수가 정상급 플레이를 선보이니 당연히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당시 유럽 최고의 선수였던 [[케빈 키건]],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라이벌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키커]]는 1979/80시즌 전반기 평가에서 키건이 아니라 차범근을 외국인 전체 1위로 선정했다.<ref>차범근이 토크콘서트에서 자신이 키건과 루메니게보다 높은 등급을 받았다고 말한 게 바로 이것. 그러나 루메니게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외국인이었던 차범근과 같은 랭킹에 있을 수가 없었다. 누가 잘못 말해줬거나 평점 순위와 착각한 듯 싶다. 후반기 평가는 키건이 1위, 차범근이 6위.</ref>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차범근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리그 17골을 기록한 1985/86시즌으로 생각하지만 당시의 평가를 봤을 때는 데뷔시즌인 1979/80시즌이 커리어 하이라고 할 수 있다.<ref>1980년 [[독일 올해의 선수]]에서도 5표를 받아 12위에 올랐으며, 외국인으로선 키건 다음으로 높은 순위였다. 반면 1986년에는 1표를 받는데 그쳤다.</ref> 당연히 [[키커]] 시즌 베스트11에도 선정됐으며,<ref>주간 베스트11 선정횟수로 정하는데 8회로 전체 5위였다.</ref>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는 9위에 그쳤지만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ref>차범근이 2차전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실제로는 아니다.</ref> 그러나 이런 임팩트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는데 [[키커]]는 1979/80시즌 후반기 평가에서 '전반기만큼 위력적이지 않았으며 수비수들이 차범근을 상대하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라고 평했으며, 2번째 시즌에는 허리부상을 당하며 1개월간 결장하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ref>차범근은 8주간 결장했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4주다.</ref> 그래도 [[DFB-포칼]] 결승전에서 골을 넣으며 트로피를 챙겼으며 꾸준히 팀의 주축선수로 활약했다.<s>임팩트가 떨어진 게 탈아시아급인 게 함정</s><ref>농담이 아니고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뛸 때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키커/랑리스테|키커 랑리스테]]에서 K등급 밑으로 내려가본 적이 없다. 현재 한국축구의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는 [[손흥민]]은 이번시즌에 처음으로 K를 받아봤다!</ref> 1982/83시즌에는 본인의 리그 최다득점이던 15골을 기록했으나 팀의 재정문제로 떠나야 했고 결국 승격한지 얼마 되지 않은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된다.<ref>당시 이탈리아의 [[AC 밀란|밀란]]과 [[SSC 나폴리|나폴리]]가 이적제의를 했다고 해서 빅클럽에서 인정받은 최고의 선수 떡밥이 있다. 그러나 밀란은 [[1980 토토네로|승부조작]]의 영향으로 승강을 반복하던 중소클럽이었고 [[나폴리]]는 [[디에고 마라도나]]를 영입하기 전이었다.</ref><ref>[[세리에 A]]로 가지 않고 [[분데스리가]]에 남은 이유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 부회장이 선수들을 속여서 막대한 빚이 생겼고 그걸 갚기 위해서라고...</ref>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에서 비록 4시즌밖에 뛰지 않았지만 클럽의 전성기<ref>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1970년대 초부터 80년대 초까지, 그리고 90년대 초반 이렇게 3번의 전성기가 있었다.</ref>에 뛰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현지 팬들에게 회자되는 선수이며, 2013년 구단에서 팬투표로 선정한 역대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했다.<ref>http://www.eintracht.de/aktuell/40463/</ref> 차남 [[차두리]]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 소속일 때, 11FREUNDE라는 언론에서 아버지&아들이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사진을 겹쳐서 표지로 쓰기도 했다. ===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1983~1989) ===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은 이제 막 분데스리가에서 4시즌을 보낸, 전형적인 중하위권 팀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명문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를 마다하고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으로 이적한 건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 때문인데, 일본 축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기에 아시아인을 잘 알고 상대하기 편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두 팀의 운명은 여기서 갈렸는데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렸고, [[1. FC 뉘른베르크|뉘른베르크]]는 최하위로 강등당한 뒤 지금까지도 승격과 강등을 반복하며 옛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ref>공교롭게도 차범근이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할 때 [[베르더 브레멘|브레멘]]을 걸렀는데 역시 강등당했었다. 뭐 곧장 2부리그 우승하고 나중에는 [[분데스리가]] 우승까지 차지했으니 [[베르더 브레멘|브레멘]]에서 뛰었다면 커리어에 리그 우승이 추가됐을지도? <s>그럼 [[UEFA컵]] 우승을 못했겠지</s></ref> 첫시즌인 1983/84시즌은 팀 역대 최고의 성적인 7위로 마쳤으나 1984/85시즌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듯이 부진했고, 팀의 순위도 원래자리(?)인 13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 부진을 뒤로 하고 1985/86시즌에는 본인의 커리어 최다득점인 리그 17골을 기록하면서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에게 최초의 [[UEFA컵]] 티켓을 선사한다.<s>[[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s> 시즌이 끝나고 국내 시절에는 호주에게 가로막혀 좌절했었던 월드컵에 나가게 된다.<s>그런데 국내에서는 찬반여론이 치열했던 게 유머</s><ref>웃기는 소리 같지만 당시에는 진지했다. 1978년 아시안게임 결승을 끝으로 차범근은 단 1경기의 국가대표 경기도 출전하지 않았는데 [[최순호]], [[김종부]], [[김주성]] 등 후배들의 활약으로 32년만의 월드컵 티켓을 따낸 상황에서 차범근을 불렀다간 팀 케미스트리에 해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985년 말에 차범근이 물오른 기량을 선보였고 평가전 결과도 썩 좋지 않자 결국 차범근을 발탁하고, 아예 서독으로 전지훈련을 갔다.</ref> 차범근이 합류하고 전지훈련 결과가 좋으니까 8강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설레발이 나왔는데 애초에 우리나라가 속해있던 A조가 굉장히 힘든 조였고, 처음의 여론도 '16강 힘들겠다'였다. 선수들은 긴장해서 얼어붙었고 전술의 수준은 비교도 안 될 수준. 당시 차범근은 [[최순호]]와 투톱을 이루면서 오른쪽 측면의 공격을 떠맡다시피 했는데 클래스 있는 모습은 보여줬으나 혼자 힘으로 팀을 이기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은 그렇게 아쉬움만 남기고 끝났다. 월드컵의 상심이 컸던 건지 아니면 신체적 한계가 온 것인지 1986/87시즌에는 커리어 최악의 부진을 겪었고 1987/88시즌에는 무릎과 허벅지 부상으로 고생했다. 차범근의 3번째 우승이자 2번째 [[UEFA컵]] 우승이 1987/88시즌에 있어서 팀의 주포로 맹활약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노쇠화가가 드러나던 시점이었고, [[1988 서울 올림픽]] 참가마저도 고사할 정도였다. 이때부터 미드필더로 출전하는 비중이 늘어났고 1988/89시즌에는 미드필더로 뛰다가 축구화를 완전히 벗는다. 분데스리가 최종 기록은 308경기 98득점으로 말년의 목표였던 100득점에는 끝내 실패했지만 당시에는 외국인 최다출장 2위이자 최다득점자였다.<ref>현재는 8위와 5위.</ref> 차범근이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에 미친 영향은 굉장히 큰데 2부리그에서 올라온지 얼마 안 된 구단이 영입한 빅네임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팀의 기대에 부응하여 성공적으로 클럽을 정착시켰으며, [[헤어베르트 바스]] 등과 함께 클럽의 간판스타로 뛰었다. 실제로 클럽 홈페이지에도 차범근과 바스가 80년대 클럽의 주축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쉽게 말해 지금의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을 만든 창업공신인 셈. 2004년 팬투표로 선정한 클럽 역대 베스트11에는 못 들었지만 공격수 3위를 기록해 벤치멤버에 포함되어 있다.<ref>1위는 클럽의 역대 넘버원인 [[울프 키르스텐]]이고, 2위는 독일의 간판공격수였던 [[루디 푈러]] 現 레버쿠젠 단장이다.</ref> == 감독 시절 == == 논란 == === 선수로서의 위상 === '''한국 축구계 최고의 떡밥''' 차범근이 우리나라를 넘어 아시아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라는 건 대부분이 동의하는 바라서 큰 논쟁거리가 안 되지만 문제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레전드들과 비교할 때다.<ref>물론 이견이 없는 건 아니라서 [[박지성]]과 [[파울리노 알칸타라]]가 거론된다. 박지성은 대단한 커리어를 갖고 있지만 선수 개인의 위상이 리그 정상급으로 평가받았던 적이 없다는 점에서, 알칸타라는 100년 전의 인물인 데다 스페인 국가대표로도 뛰었던 혼혈이라는 점 때문에 보통 차범근을 최고로 놓는다.</ref> [[빠가 까를 만든다]]와 [[까가 빠를 만든다]]의 무한루프로 수많은 커뮤니티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왔으며 덕분에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데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선수로 여기며 [[루이스 피구]]나 [[안드리 셰브첸코]] 같은 선수들과 비교한다.<ref>포지션이 다른 피구와 셰바가 언급되는 게 의아할 수 있는데 후술하겠지만 한동안 차범근의 포지션이 윙포워드라는 게 대세였기 때문에 그때는 피구나 [[라이언 긱스]] 같은 인물들과 비교했다. 지금은 다시 센터포워드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면서 뛰어난 공격수인 셰바와 비교되는 것.<s>셰바도 윙포워드로 뛴 적 있는데?</s></ref> 반면에 낮게 평가하는 이들은 엄청난 간격을 보여주는데 주로 회자되는 선수로는 [[마크 비두카]]와 [[야쿠부 아이예그베니|야쿠부]]가 있다.<s>[[2010 FIFA 월드컵|남아공월드컵]] 16강의 1등공신 야쿠부 무시하냐?</s> 원래 격렬한 논쟁 끝에 의견의 양극화가 이뤄지는 건 쉽게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차범근의 위상 논란은 유독 심한 편인데 이유야 많겠지만 정확한 정보의 부재가 크다.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분데스리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으며, [[키커]]의 평점이나 [[키커/랑리스테|선수랭킹]]을 접할 수 있게 된 것도 근래의 일이다. 덕분에 차범근에 대한 정보는 몇 안 되는 기록물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의 회고, 그리고 정말 가끔씩 나오는 해외언론의 언급이 다였다. 문제는 이 자료들의 신빙성이 꽤 높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억에 의한 구전이라는 건 당연히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스포츠라고 예외는 아니다.<ref>대표적인 사례를 야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박찬호]]가 [[LA 다저스]]에서 뛰던 시절 팀의 마무리투수 [[제프 쇼]]는 박찬호의 경기를 자주 말아먹어 '불쇼'라고 불렸지만 실제로는 수준급 마무리였으며 오히려 박찬호가 나올 때 더 잘 던진 선수였다.</ref> 1986년에 [[대한축구협회]]에서 출간했던 '한국축구 100년사'라는 서적에 차범근의 이적과정이 실려있는데, 정작 차범근이 잘못된 내용이 많다고 빨간줄을 직직 그었을 정도이며 당사자인 차범근조차 시간이 흐르면서 발언의 내용이 바뀌고 사실관계가 다른 인터뷰를 하니 구전으로 전해오는 내용과 실제 기록은 차이가 많이 날 수밖에 없었다.<ref>당장 이 문서의 9번과 13번 주석을 보면 된다.</ref> 사정이 이렇다보니 차범근에 대한 일화들은 어느새 신화처럼 자리잡았고 이를 두고 극단적인 논쟁이 이어져 온 것이다. 차범근이 뛰었던 1980년대의 축구계와 현재의 축구계가 다르기 때문에 현역선수와의 비교는 어려운 일이며, 애초에 선수평가는 주관이 많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ref>예를 들어 1999년 브라질의 플라카르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선정하면서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가힌샤]], [[프란츠 베켄바우어]] 순으로 평가했고 2009년 영국의 데일리 메일은 크루이프까지는 동일했으나 4위에 [[조지 베스트]], 5위에 [[지네딘 지단]]을 선정했다.</ref> 그럼에도 굳이 차범근의 위치를 평가해본다면 [[분데스리가]]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으나 리그에서 손꼽히는 공격수이자 중상위권 클럽의 핵심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ref>상술했듯 1979년 말에 [[케빈 키건]]과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라이벌 구도가 있긴 했으나 오래 지속되진 못했으며, 차범근 본인도 '루메니게나 [[파울 브라이트너|브라이트너]] 등이 서있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ref> 또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꾸준히 정상급의 기량을 선보인 선수라기보다는 짧게나마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덕에 선수생활 전반의 평가가 높아진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ref>차범근의 수상실적과 높은 평가는 1979/80시즌과 1985/86시즌, 이 2시즌에 집중되어 있다.</ref> 그러므로 차범근이 받아야 할 평가는 80년대 최고의 선수보다는 오랜기간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뛰어난 용병 중 한 명이 정확할 것이다. === 포지션 논쟁 === <s>한국 축구계 최고의 떡밥(2)</s><ref>치열한 떡밥이긴 했으나 요새는 떡밥의 유통기한이 거의 다했다.</ref> 차범근의 포지션을 두고 논란이 발생한 건 크게 2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차범근이 라이트윙으로 시작해서 중앙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꿨으며, 독일에서도 미드필더로 뛴 적이 있기 때문에 기억의 혼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물론 단지 이것 때문이었다면 치열한 키배가 벌어졌을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차범근의 위상을 더욱 높이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기록은 308경기 98득점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외국인 최다 득점이었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차범근처럼 오랫동안 독일에서 뛴 용병이 없어서지 득점력으로 따지면 당대를 기준으로도 결코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ref>차범근의 부인 오은미가 차범근의 인터뷰에 끼어들어 골을 넣는 선수는 아니었다면서 루메니게랑 [[루디 푈러|푈러]]랑 비교도 안 되게 차이가 많이 났다고 놀린 적도 있다 <s>근데 여사님 그 두 사람이랑 비교하는 건 반칙인데요</s></ref> 물론 득점이 공격수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공격수가 골로 말한다지만 공격을 풀어가고 찬스를 만들어주는 능력의 차이로 골이 적은 공격수가 골이 많은 공격수보다 뛰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f>[[데니스 베르캄프]]가 [[EPL]]에서 몇골을 넣었는지를 생각해보자.</ref> 그러나 대중적으로는 골을 많이 넣는 공격수가 더 좋은 공격수로 치환되는 경우가 많았고, 차범근의 득점기록은 정상급 공격수라고 보기에는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대신 차범근이 윙포워드라고 가정하면 굉장히 뛰어난 득점기록이 된다. 그래서 2000년대 중후반까지 차범근의 위상을 설명할 때 꼭 나오는 표현이 '윙으로서는 대단한 경기당 0.3골'이었다.<ref>심지어 차범근은 당시에는 없었던 윙포워드라는 포지션을 만든 선수라는 주장까지 있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ref> 하지만 이런 주장은 80년대 [[분데스리가]] 경기의 기록지가 풀리고 차범근이 중앙공격수로 뛰었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무너졌다.<ref>사실 이전에도 차범근이 본인은 중앙공격수로 뛰었다고 인터뷰를 했었지만 라이트윙으로 뛰었다고 말을 바꾼 인터뷰도 있어서 윙이 맞다고 우기는 사람이 많았다.</ref> 차범근이 [[분데스리가]]로 건너갈 무렵에는 4-3-3의 시대가 끝나고 4-4-2로 전술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4-3-3에서는 라이트윙과 센터포워드를 번갈아가며 뛰었고,<ref>1979년에 차범근이 [[동아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스리톱의 센터포워드로 뛰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s>그런데 그 경기의 [[키커]] 기록지에는 라이트윙으로 나오는 게 함정.</s></ref> 4-4-2에서는 중앙공격수로 뛰었다. 4-4-2의 시대는 곧 끝나고 3-5-2가 주류가 되었으나 이때도 역시 중앙공격수로 뛰었다. 즉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주로 소화했던 포지션은 우리가 흔히 섀도우 스트라이커, 세컨드 스트라이커, 딥라잉 포워드라고 부르는 투톱의 처진 공격수였다. 단 차범근이 중앙에 머무르지 않고 측면을 공격하는 성향이 있긴 했는데 [[1986 FIFA 월드컵|1986 월드컵]]만 봐도 최순호와 투톱을 이룬 건지 라이트윙으로 나온 건지 싶을 정도로 현란한 측면플레이를 선보인다. === 감독으로서의 역량 === ---- <references/> [[분류:분데스리가]]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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