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갑오개혁: 두 판 사이의 차이

30번째 줄: 30번째 줄:
2차 갑오개혁 기간 동안에 추진된 개혁 조치들은 크게 삼국간섭 이전 이노우에 공사의 주도로 추진된 것(정부기구 개편 등)과,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감소한 기간에 박영효 내각이 추진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REF>분류 정리 필요</REF>
2차 갑오개혁 기간 동안에 추진된 개혁 조치들은 크게 삼국간섭 이전 이노우에 공사의 주도로 추진된 것(정부기구 개편 등)과,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감소한 기간에 박영효 내각이 추진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REF>분류 정리 필요</REF>
=== <홍범 14조> 반포 ===
=== <홍범 14조> 반포 ===
고종은 1895년 1월 7~8일 14개 조로 이루어진 '홍범(洪範)'을 발표한다. 이 홍범은 갑오개혁의 방향을 천명한 정책 지침으로서, 전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순 한글 · 국한문 혼용 · 순 한문의 세 가지 형태로 발표되었다. 홍범 전문은 다음과 같다.<ref>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40_0040_0020_0030_0010&position=-1 <홍범 14조의 반포>]</ref>
고종은 1895년 1월 7~8일 14개 조로 이루어진 '홍범(洪範)'을 발표한다. 이 홍범은 갑오개혁의 방향을 천명한 정책 지침으로서, 전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순 한글 · 국한문 혼용 · 순 한문의 세 가지 형태로 발표되었다. 홍범은 박영효가 주도하여 작성한 것으로 여겨지며, 전문은 다음과 같다.<ref>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40_0040_0020_0030_0010&position=-1 <홍범 14조의 반포>]</ref>


{{인용문|홍범 14조
{{인용문|홍범 14조
61번째 줄: 61번째 줄:


14. 사람을 쓰되 문벌에 구애받지 말고 선비를 구함에 두루 조야에 미쳐 인재등용의 길을 넓힐 것.<ref>≪高宗實錄≫, 고종 31년 12월 12일</ref>}}
14. 사람을 쓰되 문벌에 구애받지 말고 선비를 구함에 두루 조야에 미쳐 인재등용의 길을 넓힐 것.<ref>≪高宗實錄≫, 고종 31년 12월 12일</ref>}}
=== 대외 관계 관련 ===
=== 대외 관계 관련 ===
* 왕실 존칭이 격상되었다. 왕에 대한 존칭이 기존의 '주상 전하(主上殿下)'에서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되었고, 왕비와 세자에 대한 존칭도 그에 맞춰 각각 격상되었다.
* 왕실 존칭이 격상되었다. 왕에 대한 존칭이 기존의 '주상 전하(主上殿下)'에서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되었고, 왕비와 세자에 대한 존칭도 그에 맞춰 각각 격상되었다.

2018년 11월 9일 (금) 18:25 판

제2차 갑오개혁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한 1894년 12월 17일부터, 박영효가 왕궁 침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어 실각한 1895년 7월 6일까지의 기간에 조선에서 진행된 개혁 조치들을 말한다.

제2차 갑오개혁의 배경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촉발된 청일 양국의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은 당초 청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1894년 9월 16일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고 9월 17일 황해 해전에서도 일본군이 승리를 거두자 정세가 급격히 변화했다. 일본은 더 이상 조선 조정 내의 개혁 추진에 대한 개입을 소극적으로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당초 방관 정책을 펴던 오오토리 게이스케 주한 일본 공사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임명한다.

한편 당초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할 친일 정권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갑신정변 당시의 급진 개화파인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입각하도록 하려 하였다. 박영효는 1894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조선 조정은 여전히 갑신정변을 역모로 규정하여 정변의 주동자들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박영효는 1차 갑오개혁을 추진한 정권인 1차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지 못하고 인천에서 사태를 관망해야 했다.

이같은 상황은 9월 16일 평양전투를 계기로 반전되어, 조선 조정은 더 이상 박영효를 입각시키려는 일본 이노우에 공사의 압력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12월 9일 고종이 갑신정변 당시의 주동자들을 사면함에 따라 박영효 등 갑신파 인물들에게 정치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에 따라 12월 17일에는 김홍집을 총리대신,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하는 제2차 김홍집 내각 혹은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이 출범한다.[1]

정권의 성격

1894년 10월 15일 부임한 이노우에 공사는, 전임 오오토리 공사가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키기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취해놓고서도 정세를 관망하며 소극적 방관 정책을 취했던 것과 달리, 청일전쟁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보호국화를 시도했다.

이노우에 공사는 우선 반일 쿠데타 기도가 발각된 대원군파를 실각시킬 의도에서, 국왕인 고종의 권위를 명목상 강화시키는 조치를 조선 조정의 어전회의에서 건의하여 관철했다. 그러나 이것은 왕실에게 정권의 실질적 주도권을 내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대원군의 실각을 기회로 판단하여 정계에 전면에 나서려던 왕비 민씨의 시도는 즉시 이노우에 공사에게 차단당한 것이다.[2]

이어서 이노우에 공사는 1894년 11월부터 1895년 4월 사이에 조선 정부 내 거의 모든 부서에 총 42명의 일본인 고문관을 배치했다. 이로써 조선 정부는 일본인 고문관들이 장악한 일종의 보호국 정부로 바뀌어가고 있었다.[3] 2차 갑오개혁 초기인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에서 추진된 개혁은 이들 일본인 고문관들의 자문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공포된 51건의 개혁 법령은 이후 삼국간섭(1895년 5월 4일), 박영효의 단독 집권 및 실각 등 정세 변화 속에서 흐지부지되어, 1차 갑오개혁 때와 마찬가지로 실제 실현된 것은 많지 않았다.[4]

개혁 추진 세력의 변동

1894년 12월 17일 출범한 제2차 김홍집 내각은 크게 박영효의 갑신파, 김홍집 중심의 갑오파, 박정양 중심의 정동파 등 세 세력이 참여한 연립 내각이었다. 박영효 등 갑신파는 국내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을 갖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이들 갑신파를 이용하여 갑오파와 정동파 사이의 정쟁을 제어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1895년 초부터 박영효는 일본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조선 조정 내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여 집권을 시도했다. 박영효는 갑오파의 조희연 등이 자파의 인물을 군부의 요직에 임명하려 하는 것을 방해하고 대신 자기의 측근들을 임명하려 하였으며, 김홍집을 밀어내고 자신이 총리대신직을 차지하려 하였다. 이같은 박영효의 행보와 일본의 의중이 충돌함에 따라, 박영효는 일본의 조선 이권 침탈 시도에 저항하는 독립 지향적 입장에 서게 된다.

1895년 5월 무렵이 되면 국제 정세도 급변하게 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정하여 한반도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나, 일본의 지나친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5월 4일)에 굴하여 요동 반도를 반환하는 등 도리어 그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된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 내에서도 일본의 지위가 하락하고 러시아와 미국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었으므로, 박영효는 기본적으로 친미 · 친러 성향이던 고종과 민비가 평소 일본과 제휴해 오던 자신과의 제휴 관계를 청산하여 자신을 실각시키게 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따라서 박영효는 군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해야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5월 17일에는 김홍집과 조희연이 실각하여 갑신파가 주도하고 정동파가 참여하는 새로운 내각, 즉 박영효 내각이 수립된다. 이 내각에는 서재필, 윤치호 등 박영효의 측근들이 각료로 참여했으며, 총리대신 자리에는 박정양이 앉았으나 실권은 내부대신 박영효가 쥐고 있었다.

1895년 5월 하순에 출범한 박영효 내각은 이후 박영효가 실각하게 되는 7월 초까지 주로 군과 경찰 조직, 지방행정 제도에 중점을 두어 활발한 개혁 활동을 펼쳤다. 이 당시 각료 18인 중 10명이 오랜 기간의 미국 생활을 거친 사람들로서, 이 정권은 일본 지향적이라기보다는 서구 지향적인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혁의 내용

2차 갑오개혁 기간 동안에 추진된 개혁 조치들은 크게 삼국간섭 이전 이노우에 공사의 주도로 추진된 것(정부기구 개편 등)과,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감소한 기간에 박영효 내각이 추진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5]

<홍범 14조> 반포

고종은 1895년 1월 7~8일 14개 조로 이루어진 '홍범(洪範)'을 발표한다. 이 홍범은 갑오개혁의 방향을 천명한 정책 지침으로서, 전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순 한글 · 국한문 혼용 · 순 한문의 세 가지 형태로 발표되었다. 홍범은 박영효가 주도하여 작성한 것으로 여겨지며, 전문은 다음과 같다.[6]

홍범 14조

1. 청국에 의부(依附;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 버리고 자주독립하는 기초를 확실히 세울 것.

2. 왕실 전범(王室典範)을 제정(制定)하여 대위(大位)의 계승과 종척(宗戚)의 분의(分義; 도리)를 밝힐 것.

3. 대군주가 정전(正殿)에 나아가 일을 보아 국정을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재결하고 후빈(后嬪)·종척(宗戚)은 간예(干預; 간섭)함을 용납치 않을 것.

4.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수즉(須卽; 즉시) 분리하고 서로 혼합하지 않을 것.

5. 의정부와 각 아문 직무·권한의 제정을 밝게 작정할 것.

6. 인민이 세를 바치는 것은 다 법령으로 작정하고 멋대로 명목을 붙여 함부로 거두지 말 것.

7. 조세의 과징(課徵)과 경비의 지출은 다 탁지부[7]에서 관할할 것.

8. 왕실비용을 솔선하여 절감함으로써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도록 할 것.

9. 왕실비와 각 관부의 비용은 미리 1년 회계를 작정하여 재정의 기초를 확립할 것.

10. 지방관제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리의 직권(職權)을 한정할 것.

11. 국중(國中)의 총준 자제(聰俊子弟)를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전습(傳習)할 것.

12. 장관(將官)을 교육하고 징병법을 정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정할 것.

13. 민법과 형법을 엄명(嚴明)하게 제정하여 감금(監禁)과 징벌(懲罰)을 남행(濫行)치 않음으로써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할 것.

14. 사람을 쓰되 문벌에 구애받지 말고 선비를 구함에 두루 조야에 미쳐 인재등용의 길을 넓힐 것.[8]

대외 관계 관련

  • 왕실 존칭이 격상되었다. 왕에 대한 존칭이 기존의 '주상 전하(主上殿下)'에서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되었고, 왕비와 세자에 대한 존칭도 그에 맞춰 각각 격상되었다.
  • 청에 대한 종속 관계를 상징하던 서울의 시설물들에 대한 철거가 추진되었다. 박영효는 당초 청제공덕비(淸帝功德碑), 영은문(迎恩門), 모화관(慕華館), 홍제원(弘濟院)의 전면 철거를 추진하였으나, 갑오파와 정동파의 반대로 청제공덕비와 영은문만이 철거되었다.
  • 태극기 공식 사용
  • 공문서에서 한글 사용
  • 독립경일(獨立慶日) 제정

정부기구 개편

  •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칭하고, 8아문 중 농상무아문과 공무아문을 통합하여 7부로 개편 (1895년 4월 19일)
    • 7부 : 외부·내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
  • 군국기무처를 중추원에 통합, 실권 없는 자문기관으로 격하
  • 궁내부를 설치하여 내각과 분리 (1894년 12월 17일)
    • 궁내부 산하에, 왕실 경비를 취급하는 회계원(會計院)과 별도로 왕실 사유재산을 운용하는 내장원(內藏院)을 두어 왕실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이는 1차 개혁에서 왕실 재정까지도 탁지부에서 관할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지방행정제도 개편

기존의 조선 지방행정 체계는 8도(道), 5유수부(留守府), 3감리서(監理署), 목(牧)-군(郡)-현(縣) 등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박영효는 내부대신으로서 1895년 1월 초에 지방행정제도 개편을 시도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가,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박영효 자신이 독자적으로 실권을 장악했던 시기인 1895년 6월에 이르러 실제로 개편을 단행한다. 박영효는 새로 설치된 23부의 관찰사 자리에 자파의 인물을 대거 임용하여 자기 정권의 개혁 추진 동력으로 삼았다.[9]

  • 8도의 대행정구역을 폐지하고 23부(府)의 소행정구역으로 개편
  • 부-목-군-현을 337개 군(郡)으로 단일화
  • 인천·부산·원산 등 3항의 감리서 폐지
  • 지방관의 명령계통 정비
    • 각 부에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각 군에 군수(郡守)를 두어, 내부대신-관찰사-군수의 명령계통 체계를 분명히 함
  • 지방관 권한 축소
    • 각 부에 경무관을 두어 경찰권 분리
    • 지방관이 환정(還政)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명시하여 수세권 제한
    • 지방재판소를 설치하여 재판권 분리

경제 개혁

  • <회계법(會計法)> 발표(1895년 4월 24일)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예산제도, 조세법정주의 등 규정
    • 조세법정주의 규정 : 조세를 신설하거나 세율을 변결할 때는 반드시 법률로 정하도록 하여, 법적 근거가 없는 요역(徭役) 등의 징발을 금지함
    • 회계연도를 정의하여, 매년 탁지부에서 예산안을 작성해서 각료회의에서 심의를 받도록 함
    • <회계법>은 초기에 중앙 정부에서만 시행하다가,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1895년 6월 23일부터 전국 확대 실시
  • 인삼 전매제 실시
  • 일반인의 사금 채광 허가
  • 광세 징수제도 정비 : 징세 권한을 지방관으로부터 분리하여 체계화
  • 육의전(六矣廛) 및 공납(貢納)제도 폐지

군사 개혁

  • 통위영·장위영·총어사·경리사·호위청 폐지 (1894년 12월 17일)
  • 훈련대(訓練隊) 창설 (1895년 1월)
  • 박영효는 단독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근대적 상비군을 창설하려 시도했다.
    • 훈련대의 규모를 기존 2개 대대에서 6개 대대로 확장하여 약 3,000명의 병력을 주요 도시에 배치 계획
    • 신설대(新設隊)를 창설하여 공병대 8개 부대, 경·중보병 2개 부대, 기병 2개 부대 등 4,800명 규모로 운영하려던 계획
    • 3개월 과정의 훈련대 사관 양성소(訓練隊士官養成所) 창설 계획
  • 지방군제 개혁 시도 : 8도의 감영과 감사가 폐지되어 지방군이 해산되었고, 봉수 체계도 폐지되었다. 그러나 박영효의 망명으로 이후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중단되었다.

경찰 제도 개혁

1차 갑오개혁 당시 설치된 경무청을 확대하여, 근대적으로 무장하고 편제된 대규모의 경찰력을 확보하여 개혁 기반으로 활용하려 했다. 경무부사(警務副使)를 감축하고 경무관·총순을 확충하였으며, 경찰관(순검)들을 서양식 소총으로 무장시켜 훈련하였다. 1895년 7월 초까지 내부대신 휘하에는 최소 670명의 경찰 병력이 있었다.

사법 제도 개혁

  • 사법권을 행정부로부터 분리
    • 법무아문 산하의 의금사(義禁司)를 '법무아문 권설(임시) 재판소(法務衙門權設裁判所)'로 개칭하여 재판과 행형 사무 일체를 재판소로 이임 (1895년 1월 11일)
    • <재판소 구성법(裁判所構成法)>을 발표하여 공식적으로 사법권 분리 (1895년 4월 19일)
  • 판사·검사 등 사법관 직제 확립
  • 법관양성소 설치

교육제도 개혁

정동파(친미파)인 박정양, 이완용, 윤치호,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교육제도 개혁이 추진되었다.

  •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 반포 (1895년 2월 26일)
  • 한성사범학교 개교 (1895년 5월 24일)
  • 외국어학교 개교 : 1895년부터 1898년까지 서울과 인천 등지에 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 독일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를 각각 설립
  • 갑신정변 이후 중지되어 있었던 해외 유학생 파견을 재개 : 도쿄의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경응의숙)에 매년 일정 인원을 입학시키는 협약 체결

기타

  • 조선협회 창설 : 근대적 정당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준정치단체의 성격
  • 전통적 백색 복식 대신 서양식 흑색 위주의 복식을 보급
  • 갑신정변 등에 연루된 정치범 복권

제2차 갑오개혁의 종료

1895년 5월 하순부터 7월 초순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실권을 장악한 박영효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군과 경찰 조직, 지방행정 조직의 개편에 주력했다. 권력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박영효는 6월 25일 왕실 경호 업무에 자신이 지휘하는 훈련대를 투입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했으나 거절당했는데, 대원군 실각 이후 다시금 권력을 회복하려 하던 왕비 민씨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왕실 경비대 교체 건의가 거절당하자 박영효는 무력으로 왕실을 장악해서 통제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박영효 내각에서 권력을 잃은 김홍집 등 갑오파가 민씨에게 협조하여 박영효를 몰아내는 계략을 세웠다고도 하고[10], 박영효 스스로가 실제로 훈련대를 동원하여 민씨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도 한다. 박영효 스스로는 그러한 음모를 꾸민 적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다고 하며, 이노우에 공사가 서울을 떠나 있는 동안 대리로 업무를 맡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대리공사는 박영효가 실제로 '과격한 행동'의 계획을 세웠으나 자신이 만류하여 철회했다고 주장했다.

1895년 7월 7일 박영효는 궁정회의에서 '불궤(不軌) 음모'의 혐의로 자신을 체포할 것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기무라 대리공사 등의 협조를 얻어 일본으로 2차 망명길에 오른다. 이에 따라 박영효 내각은 붕괴하고 2차 갑오개혁은 마무리된다.[11]

각주

  1.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고종·박영효 중심의 친일정부 조성>
  3.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조선정부내 일본인 고문관 배치>
  4.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조선왕조 기간제도의 개혁>
  5. 분류 정리 필요
  6.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홍범 14조의 반포>
  7. 기존의 의정부 8아문 체제가 내각 7부 체제로 공식 개편된 것은 1895년 4월 19일이다.
  8. ≪高宗實錄≫, 고종 31년 12월 12일
  9.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지방행정제도의 개혁>
  10.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제3차 개혁의 배경>
  11.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제2차 개혁의 추진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