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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사라진 후,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기까지 존재했었던 대한민국의 2번째 공화헌정체제이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사라진 후,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기까지 존재했었던 대한민국의 2번째 공화헌정체제이다.
== 개요 ==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제1공화국이 종식된 후, [[허정]] 과도정부기를 거쳐 [[6·15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당시 [[대통령]]은 [[윤보선]], [[국무총리]]는 [[장면]]이었다.


==개요 ==
== 정치 ==
제2공화국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제1공화국이 종식된 후, [[허정]] 과도정부기를 거쳐 [[6·15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당시 [[대통령]]은 [[윤보선]], [[국무총리]]는 [[장면]]이었다.
민주당이 의회 75%를 장악한 여당이 되어 대통령과 총리를 추대하였다. 구파는 대통령은 윤보선 총리는 김도연을 원했고 신파는 대통령은 윤보선 총리는 장면을 원했다. 윤보선은 김도연을 원했는데 결국 장면이 총리가 되었다. 내각 구성에서도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 있었다. 이에 구파는 신민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경제==
== 사회 ==
시민은 이승만 정권 타도의 주체는 시민과 학생이라고 생각했고 사상계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 이유는 1공화국 당시 자유당 정부와 투쟁한 정당이 민주당이었으니까 과거의 노고 생각해서 지지해 주자는 의견이 주류였다. 2공화국에서 혁신 정당이 많이 등장했지만 정당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민 대상 대중운동을 주로 하게 되었다.
 
2공화국 당시 시민사회가 급속하게 팽창하였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시민사회에서 학생과 노동자가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학생은 학원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많은 교수가 이승만정권 비호에 가담했는데 4월 혁명 이후 학생들은 이런 어용교수의 퇴진을 원했다. 그리고 연세대생들이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등 민족이 화두로 부상했다. 대중계몽운동(농촌계몽운동, 외래상품 배격운동, 신생활운동)도 생겨났는데 이것도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2공화국 당시 부정선거와 부패 관련자의 처벌이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학생들이 국회를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이후 혁명재판소를 설치했다. 그 이후 학생들이 분열되었다. 일부는 대중계몽활동을 전개했고 일부는 정부에 대한 도전과 통일운동을 하자는 입장이었다. 후자는 민족주의와 결합해 미국을 배제하자는 입장으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구호를 내세웠다. 정부는 이를 용공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1공화국 때 교사들이 이승만과 이기붕 사진을 환경미화 명목으로 걸어놓고 자유당 당원으로 가입하는 등의 일을 했는데 이에 대한 속죄의식으로 급진적 정치성향을 띠게 되었다. 교원노조가 활발히 활동을 시작했다. 장면정부는 이 노조를 불법화하고자 했다. 그러자 중고생이 교원노조 집단농성에 동참하고 장면정부는 노조불법화 정책을 철회하게 되었다. 다른 노동자들도 2공화국에서 활발히 노동운동을 전개해 당시 노동조합 설립과 노동쟁의가 활발했다.
 
신문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었다. 법에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언론의 자유를 제한받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 조항이 삭제되었다. 2공화국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 경제 ==
이 시기 대한민국의 경제상황은 낙후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4·19 혁명]] 이후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와 노동자들의 운동, 시위 등으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실업률과 물가 상승은 궁핍한 국민들을 더욱 옥죄었고, 설상가상으로 미국 달러화에 대한 당시 대한민국의 화폐인 환의 가치는 대폭락을 맞이했다. 한편 제2공화국 정부는 경제발전의 근간이 되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무언가를 제대로 실행하기도 전에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며 정권이 교체되고 말았다.
이 시기 대한민국의 경제상황은 낙후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4·19 혁명]] 이후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와 노동자들의 운동, 시위 등으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실업률과 물가 상승은 궁핍한 국민들을 더욱 옥죄었고, 설상가상으로 미국 달러화에 대한 당시 대한민국의 화폐인 환의 가치는 대폭락을 맞이했다. 한편 제2공화국 정부는 경제발전의 근간이 되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무언가를 제대로 실행하기도 전에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며 정권이 교체되고 말았다.


==사건/사고==
== 평가 ==
=== 긍정적 ===
Truman은 파벌 대립이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정당과 사회에서 하나의 파벌이 지나치게 커지려 한다면 잠재적 세력인 latent group이 부상해 견제해 이 결과 정치적 이익이 보다 균등하게 대표되는 계기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2공화국의 의회와 정당에 대해 결과론적 비판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
 
=== 부정적 ===
국민의 민주당 지지 이유는 혁명과업을 완수하라는 목표가 있어서인데 책임을 망각했다. 그리고 립셋과 로칸에 의하면 정당은 투쟁의 담당자이자 통합의 도구다. 세력을 확대할 때 통합의 기능을 하게 된다. 세력 확대를 위해서는 시민사회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그런데 2공화국의 민주당은 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정당 본연의 기능을 망각했다.
 
== 사건/사고 ==
* [[1960년]]
* [[1960년]]
** [[3월 15일]] : [[3.15 부정선거]].
** [[3월 15일]] : [[3.15 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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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8일]] : [[박정희]]의 주도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
** [[5월 18일]] : [[박정희]]의 주도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


==이 시기를 다룬 대중매체==
== 이 시기를 다룬 대중매체 ==
* [[제2공화국 (드라마)]]
* [[제2공화국 (드라마)]]
: [[1989년]] [[7월 16일]]부터 [[1990년]] [[4월 29일]]까지 [[문화방송]]에서 방영하였던 [[드라마]]이다.
: [[1989년]] [[7월 16일]]부터 [[1990년]] [[4월 29일]]까지 [[문화방송]]에서 방영하였던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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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일 (목) 15:38 판

제2공화국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사라진 후,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기까지 존재했었던 대한민국의 2번째 공화헌정체제이다.

개요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제1공화국이 종식된 후, 허정 과도정부기를 거쳐 6·15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당시 대통령윤보선, 국무총리장면이었다.

정치

민주당이 의회 75%를 장악한 여당이 되어 대통령과 총리를 추대하였다. 구파는 대통령은 윤보선 총리는 김도연을 원했고 신파는 대통령은 윤보선 총리는 장면을 원했다. 윤보선은 김도연을 원했는데 결국 장면이 총리가 되었다. 내각 구성에서도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 있었다. 이에 구파는 신민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사회

시민은 이승만 정권 타도의 주체는 시민과 학생이라고 생각했고 사상계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 이유는 1공화국 당시 자유당 정부와 투쟁한 정당이 민주당이었으니까 과거의 노고 생각해서 지지해 주자는 의견이 주류였다. 2공화국에서 혁신 정당이 많이 등장했지만 정당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민 대상 대중운동을 주로 하게 되었다.

2공화국 당시 시민사회가 급속하게 팽창하였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시민사회에서 학생과 노동자가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학생은 학원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많은 교수가 이승만정권 비호에 가담했는데 4월 혁명 이후 학생들은 이런 어용교수의 퇴진을 원했다. 그리고 연세대생들이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등 민족이 화두로 부상했다. 대중계몽운동(농촌계몽운동, 외래상품 배격운동, 신생활운동)도 생겨났는데 이것도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2공화국 당시 부정선거와 부패 관련자의 처벌이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학생들이 국회를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이후 혁명재판소를 설치했다. 그 이후 학생들이 분열되었다. 일부는 대중계몽활동을 전개했고 일부는 정부에 대한 도전과 통일운동을 하자는 입장이었다. 후자는 민족주의와 결합해 미국을 배제하자는 입장으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구호를 내세웠다. 정부는 이를 용공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1공화국 때 교사들이 이승만과 이기붕 사진을 환경미화 명목으로 걸어놓고 자유당 당원으로 가입하는 등의 일을 했는데 이에 대한 속죄의식으로 급진적 정치성향을 띠게 되었다. 교원노조가 활발히 활동을 시작했다. 장면정부는 이 노조를 불법화하고자 했다. 그러자 중고생이 교원노조 집단농성에 동참하고 장면정부는 노조불법화 정책을 철회하게 되었다. 다른 노동자들도 2공화국에서 활발히 노동운동을 전개해 당시 노동조합 설립과 노동쟁의가 활발했다.

신문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었다. 법에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언론의 자유를 제한받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 조항이 삭제되었다. 2공화국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경제

이 시기 대한민국의 경제상황은 낙후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4·19 혁명 이후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와 노동자들의 운동, 시위 등으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실업률과 물가 상승은 궁핍한 국민들을 더욱 옥죄었고, 설상가상으로 미국 달러화에 대한 당시 대한민국의 화폐인 환의 가치는 대폭락을 맞이했다. 한편 제2공화국 정부는 경제발전의 근간이 되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무언가를 제대로 실행하기도 전에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며 정권이 교체되고 말았다.

평가

긍정적

Truman은 파벌 대립이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정당과 사회에서 하나의 파벌이 지나치게 커지려 한다면 잠재적 세력인 latent group이 부상해 견제해 이 결과 정치적 이익이 보다 균등하게 대표되는 계기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2공화국의 의회와 정당에 대해 결과론적 비판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

부정적

국민의 민주당 지지 이유는 혁명과업을 완수하라는 목표가 있어서인데 책임을 망각했다. 그리고 립셋과 로칸에 의하면 정당은 투쟁의 담당자이자 통합의 도구다. 세력을 확대할 때 통합의 기능을 하게 된다. 세력 확대를 위해서는 시민사회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그런데 2공화국의 민주당은 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정당 본연의 기능을 망각했다.

사건/사고

이 시기를 다룬 대중매체

1989년 7월 16일부터 1990년 4월 29일까지 문화방송에서 방영하였던 드라마이다.

각주

틀:대한민국 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