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니케아 공의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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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차 세계 공의회]]/[[에페소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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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9일 (목) 02:31 판

틀:종교

지극히 영광되시는 우리 하느님 그리스도여, 교부들로 이 세상을 비추는 기초로 삼았고 그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진정한 믿음으로 인도하셨다. 지극히 자애로우신 이여 주께 영화로다.

정교회의 제1차 세계 공의회 참석 교부들 주일 찬양송, (한국 정교회 공식 번역판)

라틴어 : Concilium Nicaenum Primum[1]

그리스어 :

영어 : First Council of Nicaea


개요

파일:442px-Nicaea icon.jpg

  • 제1차 니체아 공의회를 그린 이콘 1

파일:1nd Nicae.jpg

  •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그린 이콘 2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된 후 소집된 최초의 공의회.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선고 후 파문했고, 그때까지는 신자들이 사도전승으로써 이어받아서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논란을 만들던 예수의 신적 본질과 성부와의 관계[2]를 논리적으로 정립하여 삼위일체론을 교리로 선포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없던 개념을 아예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때까지도 그리스도교 내에서 믿던 내용이지만 논리적으로 온전하게 정립되지 않아서 애매한 개념을 논리적으로 다듬고 정립하고 공식적인 교리로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공의회는 공의회 참석 주교들 스스로조차도 이것이 큰 영향을 끼치거나 할 줄은 몰랐기에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문헌을 적거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관련 정보는 공의회 참석 주교 개개인이 사사로이 적어놓은 것에 의한 것이다.

공의회의 소집 배경

320년경 제국의 문화적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리비아 출신 신부 아리우스는[3]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들고 나온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네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성자(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처럼 영원하지 않다.
  2. 성자는 세상의 창조에 앞서서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그렇기에 성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다.
  3. 성자는 본성상으로 성부의 아들이 아니고, 성부의 으뜸적인 창조물로써 성부의 아들이다.
  4. 성자는 성부와 같은 본성에서 난게 아니라, 그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므로 그의 본성은 성부의 그것과 다르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하느님"이라거나,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하느님" 같이 애매하지만 어쨌든 예수도 하느님이시다 하고 믿어왔으며, 그렇기에 예수를 성부와 함께 '흠숭(=숭배)' 해왔다. 그런데 쓰잘데기 없이 그리스 철학을 배운 누가 보면 자기만 철학하는 줄 알겠네 아리우스가 "유일신이면 당연히 하나여야지, 유일신을 주장하면서 어떻게 예수까지 하느님이라 하는가?"라고 신의 단일성을 주장하며, 하느님으로 믿어오던 예수를 하느님의 "으뜸 피조물"로 격하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유일신 신앙이라는 측면에서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어서받아들이기가 쉬웠으나 그렇게 될 경우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던 거룩한 전승에 대한 치명적인 손상인 동시에, 교회는 "피조물을 흠숭한다"라고 고백하거나 (이렇게 될 경우 뭐가 어떻게 됐든간에 하느님이 아닌 것을 숭배한다는 말이 되므로 십계명의 제1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일이 된다!)[4] "예수에 대한 흠숭을 중지"해야만 했다.

결국 그의 말이 쉽기에 받아들이는 아리우스파와 당연하게도 노발대발하며 그에 대해 반발하는 파로 나뉘어졌다[5]. 급기야 아리우스와 지지자들이 이집트, 리비아,트리폴리타니아에서 온 거의 백 명에 달하는 주교들 앞에서 심문을 받고 이단으로 파문당하는 사태까지 갔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주장 자체는 지극히 간단하고 이해하기도 쉬웠기에 그 가르침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거리에 대자보가 나 붙고 장터에서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벽마다 분필로 쓴 온갖 구호가 돌아다니는 등 그야말로 귀족, 평민 구분 없이 100분 토론 모드에 돌입했다(...) 또한 아리우스는 여론 몰이에 능통한 자였고, 자신의 견해를 널리 알리기 위해 가요와 동요를 지었고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6]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교 교회 종교음악의 아버지로 간주하며 그에게 커다란 경의를 표한다.

가톨릭 신학 사전, '아리우스파' 항목

또한 아리우스는 파문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서 니코메디아로 갔고, 그곳의 주교 에우세비오는 현지 회의를 소집하여 아리우스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견해를 채택했다. 비슷한 시기에 카이자리아의 주교 에우세비오(동명이인이다)가 소집한 시리아 고위 성직자들의 회의도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강력한 백업을 얻은 아리우스는 이집트로 돌아왔고 복직을 요구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데르는 당연히 이 요구를 거절했고, 그러자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으아 깽판 그리고 323년 가을에[7] 이르러서 이 폭동은 이집트만이 아니라 레반트 전역에서 위험할 정도로 커졌다. 얼마 후 막 제국을 통합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이 사태에 당연히 기겁해있는 상태였고, 이 사태를 끝내기 위해 직접 쓴 서한을 정통파와 아리우스파에게 모두 전달했다.

정복자이신 최고 황제(Augustus)인 콘스탄티누스가 알렉산데르와 아리우스에게 고하는 바이오. 그대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충실하게 조사한 결과, 나는 그 원인이 참으로 사소한 것이며 격렬한 쟁점으로서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소. ······ 그러므로 이제 그대들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대들과 같은 하느님의 종이 드리는 충고를 받아들여 주기 바라오. 이 충고란 다름이 아니오. 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한 것도 잘못이었고, 제기된 질문에 응답한 것도 잘못이었소. 법의 권위가 아니라 논쟁의 정신에서, 즉 여가를 오용하여 심심풀이처럼 제기한 논점은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만 제한해야 하며, 대중 집회에서 서둘로 발표하거나 경솔하게 대중의 기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 그토록 숭고하고 난해한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II, 64~72[8]

요약: 정신 사나우니까 둘다 제발 조용히해라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지역 주교들의 회의는 중단하고, 대신 니케아(니체아)에서 권위있는 세계 공의회를 열어서 아리우스파와 정통파 양측이 모두 승복할 만한 판결을 내자고 했다. 이러하여 325년 6월 19일에 니케아에 있는 황제 별궁에서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를 소집했으니 이것이 바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이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요를 전쟁이나 전투로 간주할 것입니다. 오히려 소요는 전쟁이나 전투보다도 진정시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소요를 적대시할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공의회 개막 연설[9]

요약: 그만좀 싸우고 쿨하게 합의보자[10]

이때 참석한 주교는 318±2명이라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11]. 여담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공의회의 개막식 때 개회 연설까지 반강제로 떠맡게 되었는데, 참석한 주교들 거의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주교들이었고 황제 자신도 그리스어를 비교적 잘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반강제로 떠맡게 된 개회 연설에 대한 복수 차원에서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연설했다. 그리고 당시 카이자리아의 주교 에우세비오는 황제가 개막식에 입장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라고 묘사하였다. 아부?

여담 2. 공의회에 소집된 주교들은 박해시절의 박해 때문에 한쪽 눈이 없던 주교도 있었고, 양쪽 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 주교도 있었고, 다리를 질질 끌고다니는 주교도 있었다고 공의회 참석 주교들 중 하나는 적어놓았다.

공의회의 쟁점과 결과

공의회의 쟁점은 주로 아리우스 논쟁이었고, 그리고 간간히 부활대축일의 날짜 계산 같은 것들이 논의되었다.

공의회는 아리우스의 새로운 주장을 물리치고, 예수와 성부가 동일본체(homoousia)라는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오던 가르침을 발전시켜서 삼위일체론으로 정립하였다. 그리고 아리우스는 결국 그리스도가 성부와 성령과 똑같은 천주성(天主性)을 지녔다는 니케아 신경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여서 이단자로 결정되어 파문되었고, 그는 아우구스타 트리베리움으로 유배를 갔다. 키배에서 진 자의 말로 로마제국에서는 키배에서 지면 유배를 갑니다

그리고 부활 대축일의 날짜 계산에서는 요일과는 관계없이 유월절에 따라 유대력의 니산월 14일을 부활절로 정하고 기념하는 전통과 그 다음의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하고 기념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춘분 이후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번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결정되었다. 여담으로 동방교회에서는 20세기까지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동서방교회가 둘 다 부활절의 날짜를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에 따라 기념함에도 그레고리오력을 사용하는 서방교회와 부활절이 차이가 난다. [12]

그리고 이 공의회는 사제서품과 성직자의 승격 그리고 교회위계질서에 대한 20개의 규범과 니케아 신경을 채택했다.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의미가 큰 사건이었는데, 이 공의회를 통하여 콘스탄티누스는 강력한 정치적 리더쉽을 발휘하였고 전체 교회의 통합까지 도왔다는 찬사를 들었다. 황제는 공의회로 소집된 주교들을 몇 주일 더 비티니아에 머물게 하고 자신의 즉위 20주년 기념 연회에서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앞서 언급한 카이자리아의 에우세비오는 이 공의회에서 정통파로 돌아왔으며 이 연회에도 참석했는데, 당시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주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황궁의 연회에 참석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연회였다. 황제의 경호관을 비롯한 여러 병사들이 검을 뺴어 들고 황궁 입구를 에워싸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그 한가운데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들어갔다.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이르자 황제의 벗들 몇 사람이 앉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양측에 배치된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마치 그리스도의 왕국을 미리 본 것처럼 그 장면은 현실이라기보다 꿈과 같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III, 15

태세전환한 주교의 아부 같지만 넘어가자[13]

니케아 신경

항목 참조.

규범

  • 고자 : 고자는 성직자가 될 수 있으나,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은 안 된 다. (규범1)
  • 개종자 : 이단으로부터 개종한 자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성직품에 오를 수 있다. 신품성사 이전에 고백하지 않은 죄가 들어나면 면직된다. (규범2)
  • 가족 : 가정 집에 모친과 자매외에는 어떤 의심받을 만한 여인도 함께 있을 수가 없다. (규범3)
  • 주교 선출 : 주교는 교구에 속한 모든 주교, 최소 3명의 주교들의 선임과 그외는 동의서신을 받아야 하고 최종적으로 대주교의 확인이 있어야 한다. (규범4)
  • 시노드(주교회의) : 주교회의는 일년에 두 번해야 한다. 사순시기 전과 가을 전에 개최되어야 한다. (규범5)
  • 파문 : 주교에 의해 파문 된 자는 그 어느 주교도 복귀시킬 수 없다. 단, 무기력이나 다툼 외에 이와 비슷한 경우에 의한 파문은 제외된다. (규범5)
  • 관할 구역 :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리비아, 펜데포리스을 관할하며, 로마 총대주교는 로마에 속한 지역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그 이외의 지역을 관할한다.
  • 대주교의 판단에 거슬리는 주교는 주교 자격이 없다. (규범6)
  • 성직 자격 : 검증없이 신품성사를 받은 자가 이후 죄인임이 밝혀지면 면직된다. (규범9)
  • 면직 :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타락한 성직자는 서품을 베푼 자와 함께 면직된다. (규범10)
  • 회개 : 타락한 자는 관대함을 받을 만하건 못하건 간에 12년 동안 회개해야 한다. (규범11)
  • 폭력 : 폭력을 참고 유혹을 물리쳤더라도 차후에 사악함에 빠졌다면 10년 간 파문 당한다. 그 기간동안 회개하는 생활은 철저한 감시와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규범12)
  • 성체 성사 : 임종에 있는 자는 영성체를 받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면 기도와 준비를 한후에 영성체 한다. (규범13)
  • 예비신자 : 예비신자가 타락하면 3년 동안 다시 예비신자 준비를 한후에 예비신자가 되야한다. (규범14)
  • 구역 이탈 : 주교, 사제, 부제오는 도시를 옮겨다닐 수 없다. 계속 옮겨다니면 소속 도시로 돌려 보내져야한다. (규범15)
  • 소속 구역 : 사제 혹은 부제가 소속 교회를 이탈하여 다른 교회에 받아들여졌다면, 본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타 교구소속인 자에게 신품성사를 소속 주교의 허락없이 베풀어 졌다면 무효가 된다. (규범16)
  • 고리대금 : 150%의 고리대금을 받는 자는 교회법규에 의해 파문된다. (규범17)
  • 부제 : 부제는 자신의 구역에만 머물러야 한다. 부제는 사제에게 성체성혈을 베풀거나, 사제보다 먼저 영성체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석을 하지 못한다. (규범18)
  • 여성 부제 : 여성 부제가 타락하면 성직품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평신도로 간주한다. (규범19)
  • 기도 : 주일과 오순절에는 서서 기도한다. (규범20)

관련 항목

각주

  1. 고전 라틴어 발음을 기준으로 하면 '제1차 니케아 공의회'로 번역한다. 그러나 교회 라틴어 기준일시에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로 번역
  2. 요한복음서에도 나오듯이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하느님" 같은 개념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 내려오던지라 유일신 종교인 그리스도교에서는 큰 논란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사실 아리우스파도 이 개념을 정립하려 들다가 나온 이단설
  3. 순교자 '안티오크의 성 루치아노'의 제자였다.
  4. 아타나시오파는 아리우스파에 대해서 "니들은 예수를 피조물이라 하면서도 예수에 대한 흠숭은 그만 안두네? 이것들 완전 다신교도들이네" 하며 깠다.
  5. 그리고 이 주축에 성 아타나시오가 서기에 일명 "아타나시우스파"로 불린다.
  6. 출처 <비잔티움 연대기>
  7. 이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경쟁자 리키니우스와 한참 대립을 세우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제국 전체의 완전무결한 통치자가 된건 324년에 이르러서이다.
  8.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간접인용.
  9. 출처 <비잔티움 연대기>
  10. 콘스탄티누스는 이제 막 제국을 통합시킨 입장이라 교리문제로 제국이 분열하는 건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어했다. 다만 그 자신은 교리 문제에는 관심이 적었는데, 당장 이 항목에 쓰인 편지와 연설의 어조만 보더라도 '정확하고 합리적인 결론' 같은 것보다는 '당장 이 문제를 끝내는 것'에 관심이 컸다. 여담으로 콘스탄티누스의 안드로메다로 간 교리이해를 볼 수 있는 일화 중 하나로, 그는 죽기 직전 337년 5월 22일 성령강림대축일에 세례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는 원죄와 본죄와 그 벌까지 한방에 모조리 용서하는 효과가 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이것을 노리고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은 것(...) 로마 버전 파스칼의 내기 다만 어느 정도 옹호할 건덕지도 있는데, 이 시기에는 이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11. 그리고 이 주교들 중 4명은 끝까지 아리우스파를 옹호하다가 파문당했다.
  12. 4년마다 한번씩 겹친다고 한다.
  13. 사실 이 항목에서 인용되고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생애(De Vita Constantini)' 자체가 에우세비오의 저작이다. 이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