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넘어옴)
今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 이순신, 명량대첩(1597)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임진왜란 431주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조선을 침공하고 이 참전하여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발생한 전쟁. 학설에 따라 다르지만, 조선 전후를 구분하는 기준이며, 동아시아 정세 변동에 큰 영향을 준 전쟁이다.

원인[편집 | 원본 편집]

원인 역시 여러 학설들이 존재한다. 먼저, 일본 내 다이묘들의 해외 무력 발산,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의 야욕, 한일간의 지속적인 외교관계 악화 등을 들 수 있다. 일본 내에서는 임진왜란을 비중있게 다루지 않아 히데요시가 노망나서 일으킨 전쟁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경과[편집 | 원본 편집]

임진왜란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1592년 5월 23일, 제1군 ~ 제9군 및 수군으로 갈라진 약 20만 명의 일본군이 상륙하였다.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은 부산진과 동래성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조선의 양대 명장이라 불리던 이일과 신립이 상주와 충주에서 싸웠으나 일본군이 승리하였다. 한 달이 채 되지않는 시간 안에 한성에 도달한 일본군에 놀란 한성의 조정은 급히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갔으며, 민심은 들끓었기에 여러 궁들이 불탔고,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전쟁 초기의 양상[편집 | 원본 편집]

조선 육군의 첫 승리는 해유령 전투였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일본군은 생각보다 길어진 전쟁에 추가 보급을 하였는데, 이 보급을 끊은 것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옥포, 당포 등에서 승리하며 보급로를 끊어내는 역할을 하였고, 일본은 남해안선에 왜성을 짓는 방식으로 보급을 해결한다. 조선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고, 조정은 분조를 결심하여 광해군, 임해군, 순화군 등을 각지로 파견한다.

정유재란[편집 | 원본 편집]

영향[편집 | 원본 편집]

임진왜란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크게 변화했다.

명나라 만력제영하의 난, 임진왜란, 양응룡의 난으로 막대한 물자를 쏟았고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증세와 징집으로 인해 백성이 분노하여 민란을 일으켰다. 하필 만력제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라 방을 나가지 못하고 정치에 무관심하였다. 이로 인해 실정으로 당쟁이 심화되었고 명나라는 멸망을 맞이하게 된다. 명나라가 쇠퇴하고 후금이 세력을 확장하였고 결국 후금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하게 되었다.

명의 원군 파병 요구에 광해군은 요구를 거부했지만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인조는 원군을 파병한다. 후금은 조선을 침공했고(정묘호란) 형제의 맹약을 맺게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형제의 맹약을 어기고 무리한 정병과 물자, 그리고 형제의 맹약을 군신지의로 바꾸라는 요구를 하여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악화되었다. 이에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고(병자호란) 병자호란에 조선이 패배하면서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고 11개의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지하는 서군과 정유재란에 불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이 전쟁을 벌이고(세키가하라 전투) 동군이 승리하면서 에도 막부를 수립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강화하려고 하였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은지 얼마 안되어 강화 의사를 의심하여 탐적사를 보내고 사명대사 유정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게 되어 강화 의사를 확인하였다. 이후 국서를 교환하면서 전쟁포로를 교환하게 된다.[1]

기유약조로 일본과 조선은 강화하게 된다.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한 이유는 단순히 조선과 화해를 하자는 의도 말고도 서부 지역의 다이묘들을 장악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있었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이용하여 지방 다이묘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과시하였다.

임진왜란 중 일본인이 조선으로 귀화하였고(항왜) 조선인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는 인구의 이동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삼평을 비롯한 기술자들을 끌고가거나 약탈하여 선진 문화가 전해졌고 일본에서 조선으로 조총, 고추, 담배가 전래되었다.

  1. 그러나 일본이 보낸 포로는 매우 일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