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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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志淵. 초명은 장지윤(張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崇陽山人). 대한민국독립운동가였으나 한일병합 이후 친일파로 전락한 인물.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건국훈장 서훈 취소되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4년 음력 11월 30일 경상도 상주목 내동면 동곽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인봉동·성동동 근처)에서 아버지 인동 장씨 장용상(張龍相)과 어머니 문화 류씨 류성림(柳成霖)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명망높은 유학자 가문으로, 부친은 퇴계학파인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었다. 그는 6살 때 서당에 입학하여 한학을 배웠으나, 9세때 모친을 잃었고 12세에 의지하던 조모마저 별세했다. 이후 먼 할아버지 뻘 되는 장석봉의 집에 머물면서 그에게 수학하여 19세때는 한학에 통달, 문장에 일가견을 이루었다. 과거를 치루기 위해 공부를 하던 중이던 1884년 6월 조정에서 복제개혁을 둘러싸고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했다. 그는 복제개혁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위정척사파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후 과거를 수차례 보았으나 번번이 낙방하였고, 1894년 2월 식년시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이 시기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여 관직에 오를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이 청나라군과 일본군의 전쟁터로 전락하자, 이를 통탄하며 6월 상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지만 의병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 아관파천이 진행되던 1896년 4월 용산(龍山: 지금의 경북 영천군)에서 곽종석이승희를 만나 유교경전의 여러가지 뜻을 묻고 앞날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곽종석은 최익현이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명령을 거부한 상소문을 보여줬다. 장지연은 "군사를 일으켜 일본을 문책하고, 예법을 보존하고 문물을 회복하여 오랑캐 풍습을 일체 폐지하라"는 최익현의 주장에 큰 감명을 받고,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험난한 구국의 길을 추구하는 최익현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1896년 11월 상경한 장지연은 1897년부터 정치문제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고종이 그해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자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 초안을 지었다. 이때 뛰어난 작문 실력을 인정받아 1897년 7월 사례소(史禮所)의 직원을 맡았다. 사례소는 역사와 예의에 관한 책을 증보, 편찬하던 기관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대한예전(大韓禮典)>을 편찬했다. 8월에 내부주사를 겸임하였고, 8월 23일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들에 대한 응징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이 날을 맞아 분혈이 창자를 끓게 하고 노기가 치밀어 견디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적을 쳐서 목숨을 버릴지언정 맹세코 역적과 더불어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습니다. (중략) 슬프도다. 복수의 형세가 어려워 잠시 쉬는 것이옵니까, 아니면 조정에 비책이 있어 누설치 아니하는 것이옵니까.

또한 을미사변에 관련한 개화파 인사들을 응징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다만 황후 시해에 관련된 개화파들을 척결하되, 시세의 변화를 인정하여 "받아들일 만한 개화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시점에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자연히 개화사상을 긍정적으로 뱌라보게 되었다. 1898년 9월 황성신문이 창간되자 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창간호의 발간취지문에서 "신문이란 사기의 유"라고 규정하고, "논설이란 사가의 평론하는 체요, 잡보란 사가의 기사하는 체"라고 덧붙였다. 그해 10월 내부주사를 사임하고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인공동회에 참여해 남궁억, 이동녕, 양한묵 등과 함께 총무위원으로 활약하며 대회를 주도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고종의 명으로 해산될 때 체포되어 한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899년 1월부터 8월까지 격일간 신문인 <시사총보(時事叢報)> 주필이 되었으며, 1900년 10월 시사총보가 출판사인 광문사(廣文社)로 개편, 설립될 때 편집원으로 참여해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 <아언각비(雅言覺非)> 등을 간행했다. 또한 정약용의 현손(玄孫: 증손자의 아들)인 정규영(丁奎英)을 직접 찾아가 정약용의 저서인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받아낸 뒤, 이를 증보하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를 편찬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주로 지리, 역사, 문학, 농학을 다뤘다. <소채재배전서(蔬菜栽培全書)>와 <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 등 새로운 지식을 소개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통문화를 갈무리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서적으로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과 <대동시선(大東詩選)>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전자는 조선의 유교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고 후자는 문학사를 정리한 것이다.

1901년 다시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었고, 1902년 8월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3년 일본의 이권 침탈을 비판하는 논설을 황성신문에 게재했다가 신문이 며칠간 정간되고 그 역시 취조받았다. 그는 이때부터 대한제국이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취해야 한다고 여기고 자강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1904년 3월 중추원에 연명으로 시정개선을 촉구하는 '정치경장에 관한 주요사항' 55개 조항을 헌의했다.

장지연은 그는 기본적으로 유교 변통론을 토대로 하여 부국강민(富國强民)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서법(西法)’, 곧 서양의 기술학 수용에 대한 유연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는 무장 투쟁이 결국 "외세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갑오개혁 같은 급진적인 제도 개혁 역시 외세가 뿌리박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서양의 앞선 문물을 수용하되 조선 고유의 도(道)는 간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인 <여자독본>과 <애국부인전>은 서양 역사에서 이름을 떨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으나, 기본적으로는 유학의 ‘효열(孝烈)’을 표창하는 것에 무계를 두었다. 그는 잔 다르크에 대해 "몸은 잡힌 바가 되었으나 이로부터 덕국(프랑스)의 인심이 일층이나 더욱 분발격동하여 마침내 강한 영국을 물리치고 나라를 중흥하여 민권을 크게 발분하여 지구상 제일가는 강국이 되었으니 그 공이 다 약안(잔 다르크)의 공이라."고 평하며, "슬프다. 우리나라도 약안같은 영웅호걸과 애국충의의 여자가 혹 있는가"라고 소감을 밝혔다.

1905년 4월 정6품 승훈랑의 품계를 받았고, 7월부터 9월까지 민영기, 윤치호, 이달용 등과 함께 일본을 시찰한 뒤 돌아와서 기행문을 남겼다. 그러던 중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기고하여 일제의 침략행위와 을사오적의 만행을 폭로했다. 황성신문은 이로 인해 정간되었다가 1906년 2월 28일 복간되었고, 그는 구속되어 태형을 선고받았다가 1906년 1월 24일 석방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자신의 심정을 담은 시를 지었다.

험악한 시국 형편 갈수록 더해지니(嶮巇時事日加初)


이 세상 살아갈 길 가엽기 짝이 없네(生世堪憐此去居)

입 있어도 말하기란 새 날기처럼 어려웁고(有口能言難以鳥)

무심히 지내자니 물고기만도 못하구나(無心自樂不如漁)

나라를 돌아보니 근심이 너무 크고(回看海內憂方大)

사람의 엉성한 게책 퍽이나 한스럽다(太息人間計其疏)

앞으로 숨 돌릴 길 곰곰이 생각하니(料理從今康濟策)

마음에 든 시골찾아 농사짓고 글 읽으리(田園隨處課農書).

석방 후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직한 그는 1906년 3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편집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달 윤효정(尹孝定), 심의성(沈宜性), 임진수(林珍洙), 김상범(金相範)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자강회월보>와 <조양보> 등에 전 국민이 각성하여 실력을 배양해 구국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고, 서양의 서적 여러 권을 번역해 대중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6년 4월 교육확장을 위한 교과서 인쇄와 출판을 담당하는 회사인 '광학사(廣學社)'의 평의원을 맡았고, 평양일신학교 교장을 지냈다. 1906년 5월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으며, 1906년 6월 이후 휘문의숙 휘문관 편집원을 지냈고, 1907년 3월 휘문의숙 숙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 이 운동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시키기 위해 신문과 잡지 등에 다수의 논설을 게재하여 전 국민이 합심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그해 7월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해 순종에게 강제 양위당하자, 대한자강회 회원들과 함께 격렬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8월 19일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되자, 11월 권동진, 남궁억, 유근, 오세창 등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고, 휘문의숙(徽文義塾)의 장(長)과 평양일신학교장(平壤日新學校長)에 임명되었다. 또한 한국의 근대사를 다룬 '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를 발간헀다. 그러나 통감부의 감시가 심해지자 45세 때인 1908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고, 정순만 등이 경영하고 있던 해조신문사(海朝新聞社) 주필을 맡았다. 그러나 해조신문사가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폐간되자 상하이와 난징 등 중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한국으로 귀국했다.

1909년 1월 영남지방의 교육구국운동단체인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의 취지문을 작성했고, <교남교육회잡지> 편집원을 맡았다. 그해 2월 대한협회의 '정정부문(呈政府文)'을 지었으나, 같은해 9월 대한협회가 일진회와 연합하여 정견협정위원회를 구성하자 이를 반대해 대한협회 평의원을 사임했다. 같은달 대동교(大同敎) 편집부장에 선임되었다. 1909년 10월 진주에 있던 경남일보 주필을 맡았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된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10월 11일자 <사조>란에 싣고 평론을 남겼다가 10월 25일까지 10일간 정간되었다. 경남일보는 이후로 친일 논조의 논설을 잇달아 기고했는데, 그가 여기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

1913년 7월 신병을 이유로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주했다. 1914년 6월 마산 통도사 포교 신당을 공동으로 만들어 취지서를 발표했고, 같은 해 11월 1일부터 부산에서 경남공진회가 개최되고 11월 14일 공진회를 기념해 '조선 양반, 유생의 시문 대회'인 백일회가 열릴 때 시관(詩官)에 위촉되었다. 1914년 음력 10월 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있었지만, "매일신보의 사설은 아첨이 많고 기사는 숨기는 일이 많아 언론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하지만 1913년 7월 19일자 매일신보에 '경남일보 기자 장지연'으로 한시 <축 매일신보 윤전기 증설>을 기고해 이전부터 매일신보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매일신보도 윤전기처럼 영워히 돌고 돌아


날마다 천만번 돌아서 인쇄를 하여라.

매일신보사는 조선의 문사(文士)로 널리 알려진 장지연을 영입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1914년 12월 23일 장지연을 객경(客卿: 객원 간부)으로 초빙하는데 성공헀다. 매일신보가 이토록 장지연 영입에 열을 올린 건 조선 총독부의 "신정(新政)과 민지개발(民智開發)"을 위해 앞장서 이끌어갈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38년 5월 1일 매일신보 창립 34주년을 기념하여 명월관에서 역대 편집국장들이 참석한 좌담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전 편집국장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는 경성일보사 2대 사장을 지낸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가 "언론의 웅(雄)으로서 이름이 높던 장지연씨를 회유하느라고" 고심이 많았음을 밝혔고, 전 편집국장 방태영(方台榮: 조선 총독부 중추원 참의)는 자기가 장지연을 매일신보사로 영입했음을 밝혔다. 장지연은 아베가 자신을 알아주고 권유한 데 감격해 그와 사귀게 되었다며, 아베가 사임할 때 함께 그만둔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실제로 1918년 6월 아베가 사임하자, 장지연은 매일신보에 글을 더 이상 기고하지 않았다.

장지연은 1914년 12월 23일자 <매일신보> '사고'에 숭양산인(崇陽山人) 장지연의 실명으로 '고재만필'을 연재했다. 이후 1918년 12월까지 4년여간 한시를 포함해 약 700여 편의 글을 실었는데, 이중에는 조선 총독부의 시정을 미화하고 옹호하는 여러 편의 글과 한시가 포함되었다. 그는 1915년 1월 1일 기고한 '조선 풍속의 변천'에서, "조선총독부가 시정 5주년 기념으로 물산공진회를 마련했는데 이는 조선총독부가 혁구쇄신(革舊刷新)하여 쓸모없는 것을 없애고 농공실업을 장려하여 진보한 성적을 모두 수집하여 진열한 것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1915년 '신무(神武)천황제일'을 맞아 일본 천황가의 계통을 소개하는 글을 지어 바쳤다.

신무는 영웅의 신명(神明)한 자질로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해내(海內)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해 주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2576년간을 123대 동안 황통(皇統)이 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만세일계(萬世ᅵ系)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찌 세계 만국에 없는 바가 아니겠는가.

- '만필쇄어((漫摩瑣語)(5)-신무천황제', <매일신보> 1915.4.3.

그리고 1915년 4월 21일자 논설에서 일본을 동양의 독일이라 일컬어도 지나치지 않다고 했으며, 1916년 9월 16일자 '만록-지리관계(5)'에서 "일본은 동양의 패왕이다"라고 하였다. 1917년 6월 8일치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동상(동쪽 위에 있는 일본)으로 이왕(순종) 전하를 보내며-에서 “(순종의 일본 방문으로) 내선 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 장애를 풀어 없애고 일체 간격이 없다.”, “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 하고 찬양했다. 또 <매일신보> 1916년 6월 8일치 ‘시사소언’에서도 “일본이 마땅히 아시아의 맹주가 돼야 한다.”고 했다. 한편, 그는 조선인은 단체성이 없다고 개탄했다.

만약 집정자로 하여금 허락하게 한다 하더라도 조선인의 집회는 결코 이루질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오호라 동종동족(同種同族)이 서로 원한을 맺어 서로 원수가 되어 망국의 지경이 되어서도 후회하지 않으니, 어찌 너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 아니랴. 이로 인해 전 조선인의 습관이 되어 마침내는 단체성이 없는 인종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라. 아아! 슬프도다.

- '송재만필(松齋漫筆)(9)-단체성이 흠결호(欠缺乎)',<매일신보> 1915.12.26.

1916년 12월 10일자 <매일신보>에는 2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환영하는 한시 '현대시단-환영 장곡천 총독'이 실렸다. 1918년 1월 1일자 <매일신보>에는 '대정 6년(大正六年) 시사(詩史)'라는 제목으로 매달 2편씩 총 24편의 한시를 실었다. 이 한시들은 1917년의 주요 사건들을 소재로 쓴 것인데, 이 시편들에는 일본 천황의 '은혜'와 일제가 주도한 경제발전을 부각시키는가 하면, 식민지 농정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장지연은 1914년 11월 경성부 수송동 각황교당에서 열린 불교진흥회 발기총회에 참석하여 간사에 선출되었다. 불교진흥회는 친일 승려 이회광의 주도로 설립되었는데, 설립 취지는 "위로는 일본 천황의 통치를 보필하며, 아래로는 백성의 복을 도모하고 불교를 진흥하여 우리 동포로 하여금 모두가 불교에 귀의하게 하고자 불교진흥회를 발기한다"고 하여, 설립 당시부터 뚜렷한 친일 색채를 드러냈다. 1915년 7월에는 불교진흥회가 개최한 천도식의 제문을 지었다. 1917년 10월 문예구락부가 주최하는 문예대회 고시원으로 참여했다. 문예구락부는 1911년 7월 한문의 폐지에서 유래되는 위기감과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 문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시의에 관계된 것을 제거한다"고 하여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금지했다.

장지연은 1918년 12월 1일 <마산에 신조한 석탑>을 매일신보에 기고한 것을 마지막으로 객경 직에서 물러났다. 말년에 병을 얻자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 치료하였으며, 1919년 4월 경상남도 양산에 유람하였다. 당시엔 3.1 운동이 한창이었지만,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1921년 5월 5일에 작성된 일본 외무성 자료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 시베리아편'에 따르면, "매일신보 기자 장지연은 김경천의 초대로 주우찌하(블라디보스토크 인근으로 추정)에 있으면서 독립군을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 자료를 발굴한 연세대 국문과 박애경 교수는 "매일신보 기고자였던 장지연을 매일신보 기자라고 오기한 측면은 있지만 이름이 정확히 일치하고, 매일신보를 언급했다는 측면에서 엉뚱한 사람을 장지연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수원대 박환 교수는 "불령단관계잡건이 신빙성 있는 자료인 것은 분명하지만 노령의 장지연이 의병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입증하려면 일본 병무청 문서 등 다른 신빙성 있는 자료와 비교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1]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인사불성 상태가 되었고, 결국 1921년 10월 2일 상주 자택에서 병사했다. 향년 56세.

사후[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장지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에 위치한 그의 묘지를 '위암장지연선생의묘 (偉庵張志淵先生의墓)'라 하여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장지연이 매일신보에서 친일 성향의 논설을 연이어 기고하고 친일 단체인 불교진흥회에 적극 가담하는 등의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2005년 3월 4일 경향신문에서 장지연이 일왕을 찬양하는 한시를 게재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2] 이후 민족문제연구소는 2005년 8월 1일 장지연의 친일시를 대중에 공개했다.[3] 이에 경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과 친일청신시민행동연대는 장지연의 기념사업을 중단하거나 철회하라고 촉구했다.[4]

2005년 10월 6일 국회 정무위원회의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은 박유철 국가보훈처장에게 장지연의 서훈을 재심의하라고 촉구했다.[5] 한편 장지연의 유족 측은 장지연의 친일을 주장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김경현 씨를 상대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나, 검찰은 무혐의 처분하였다.[6]

민족문제연구소는 2008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을 게재했고, 이로 인해 장지연에게 서훈된 건국훈장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게 일어났다.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은 5월 23일 '장지연로'의 이름을 바꿔달라는 공문을 마산시에 보냈고, 마산시는 이에 따라 장지연로를 '가포로'로 변경하였다.[7] 위암장지연기념사업회와 유족 측은 이에 맞서 친일인명사전 이의신청을 하였다.[8] 2010년 10월 8일 국가보훈처는 장지연의 독립유공 서훈 취소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9]

결국 2010년 12월, 국무회의에서 건국훈장 서훈 취소를 의결하였고, 국가보훈처는 이에 따라 장지연 후손에게 서훈 취소 및 회수 통보를 했다.[10] 2011년 4월 4일 장지연 등 19명에 대한 서훈 취소안이 국무회의에 상정되었다.[11] 다음날인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서훈 취소가 확정되었다.[12] 후손은 이에 반발하여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13] 전, 현직 언론인 400명이 장지연 서훈 취소를 반대하는 서명을 하였다.[14]

2012년 1월 20일,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는 장지연의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헌법과 상훈법에 훈장은 대통령이 수여하는 것으로 규정된 만큼 서훈 취소도 대통령만이 할 수 있다"며 "권한 없는 국가보훈처장이 서훈을 취소한 것은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해 무효다"고 밝혔다.[15] 국가보훈처 측은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2012년 12월 27일 서울고등법원 행정 9부는 항소 기각 판결을 내렸다.[16]

그러나 대법원은 2014년 10월 13일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결정 무효소송 상고심에서, 독립유공자 유족이 취소처분에 불복하려면 국가보훈처장이 아닌 대통령을 상대로 소송을 내야 한다며, 원고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파기환송하였다.[17] 이후 서울고등법원은 2015년 8월 21일 장지연의 서훈 취소가 정당하다고 판단,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18] 이리하여 장지연은 독립유공자 자격이 박탈되었고, 마산시는 그의 묘지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한 걸 철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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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