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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전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자바인들로부터 넓은 영토를 획득하고 재정적으로도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마타람과 방칼란은 몰락했고 이는 자바인들 사이에서 반네덜란드 정서가 심해지게 하였으며 이후에도 자바인들과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해서 갑자기 정치적으로 각성한 네덜란드<ref>따라서 이들은 현지 세력을 이용하여 보급 등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ref>에 의해 머지 않은 미래에 엄청난 숫자의 자바인<ref>이들은 과거 네덜란드와 자바인들의 사례를 참고하였으나 네덜란드가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ref>들이 학살당하게 된다. 화인들은 학살을 당해서 단기적으로는 그들이 종사하던 설탕 산업<ref>자바인들이 화인들 대신 차지하였으나 그들에겐 경제적 능력이 없어 망했다.</ref>과 함께 몰락하였으나 네덜란드에 의해 별로 좋지 않은 일자리였으나 정치적, 군사적으로도 다수가 고용<ref>자바 전쟁에서도 그런 면이 나타나는데, 원래 화인들은 학살 전에는 자바인에 대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항하는 것을 피해서 그리 쓸모가 없었다.</ref>되게 되었고 그 결과 화인들의 세력<ref>경제력도 다른 산업에 종사하여 금방 복구했다.</ref>은 빠르게 복구되었다.
자바 전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자바인들로부터 넓은 영토를 획득하고 재정적으로도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마타람과 방칼란은 몰락했고 이는 자바인들 사이에서 반네덜란드 정서가 심해지게 하였으며 이후에도 자바인들과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해서 갑자기 정치적으로 각성한 네덜란드<ref>따라서 이들은 현지 세력을 이용하여 보급 등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ref>에 의해 머지 않은 미래에 엄청난 숫자의 자바인<ref>이들은 과거 네덜란드와 자바인들의 사례를 참고하였으나 네덜란드가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ref>들이 학살당하게 된다. 화인들은 학살을 당해서 단기적으로는 그들이 종사하던 설탕 산업<ref>자바인들이 화인들 대신 차지하였으나 그들에겐 경제적 능력이 없어 망했다.</ref>과 함께 몰락하였으나 네덜란드에 의해 별로 좋지 않은 일자리였으나 정치적, 군사적으로도 다수가 고용<ref>자바 전쟁에서도 그런 면이 나타나는데, 원래 화인들은 학살 전에는 자바인에 대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항하는 것을 피해서 그리 쓸모가 없었다.</ref>되게 되었고 그 결과 화인들의 세력<ref>경제력도 다른 산업에 종사하여 금방 복구했다.</ref>은 빠르게 복구되었다.
[[분류:전쟁]]

2021년 6월 16일 (수) 21:10 판

개요

자바 전쟁은 그 이름의 일반성답게 자바에서 벌어진 여러 전쟁을 의미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가장 좁은 의미인 1741~1743년의 전쟁을 다룬다.

자바 전쟁(1741~1743)

배경

자바섬은 이전 전쟁으로 인한 불씨가 꺼지지 않았으며 이런 와중에 네덜란드는 자바의 해안 도시에 중국인을 불러왔다. 이유는 원주민들의 경제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화인들의 쌓은 부는 유럽인들[1]과 토착민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렀다. 그런 상황에서 말라리아가 창궐하여 수천 명이 사망하였는데, 1만 명 정도인 화인들[2]은 생각보다 얼마 죽지도 않았고 특히 화인 특유의 사회[3]로 인하여 경제적 피해는 심하게 보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화인들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바타비아에 돌기 시작했고 화인 집단에 대한 혐오가 명백해졌다. 화인들 역시 영향을 받아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국제 설탕 가격이 크게 떨어졌고, 동인도 회사는 당시 설탕 산업에 종사하던 화인들의 반발을 우려함에도 이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격 인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화인들의 불만은 임계점을 넘었고, 수천 명의 화인들이 바타비아에서 시위를 했으나 이를 네덜란드가 계속 무시하자 자티느가라와 타나아방 지역의 화인 수백 명이 폭동을 일으켜 50명의 네덜란드 군인을 살해했다. 그러자 동인도 회사는 민병대를 포함한 1,800명의 군대를 보내 화인들에 대해 통행금지령을 내렸고 그들의 무기를 압수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생긴 충돌로 주로 약한 화인들에 대한 일방적인 폭행, 학살 등이 발생했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아드리안 팔케니르 총독은 이를 막으려고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그도 사건의 원인으로 화인의 폭동만을 삼았으며 일반 화인들에겐 사면을 약속했으나 막상 화인 폭동 주동자들에게 막대한 헌상금을 걸어서 최대 만 명의 화인이 살해당했다. 이 학살의 여파는 다른 도시에도 퍼져서 약간의 화교 학살과 화교 재산에 대한 약탈이 발발했다.

이 학살 이후, 바타비아 화인들은 성벽 밖 화인 거주구에만 거주할 수 있게 되었는데, 거주구를 나오기 위해서는 특별 통행권이 필요했다. 팔케니르 총독은 화교들에게 의존하던 산업을 망친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사임 의사를 밝히고 공식적으로 퇴임했으며 네덜란드로 귀환하는 길에 동인도 회사의 위원회의 지시로 케이프타운에서 붙잡혔고 도로 바타비아로 끌려가 투옥된 채로 바타비아 학살 관련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았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팔케니르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그의 모든 재산은 압류되었다. 팔케니르는 결국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팔케니르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밝혀져 선고된 사형이 철회되었고 그의 유족은 합당한 배상금을 받았다.

전개

케 판장이라는 자바인은 화인들을 위한 대규모 피난처를 구축하고 화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800명의 네덜란드 군인과 2천 명의 토착민 민병대로 구성된 네덜란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케 판장은 대략 8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놀랍게도 전투 경험이 없는 화인 피해자들을 지휘해 네덜란드군에게도 45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도주했다. 그는 반튼 술탄국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반튼 술탄은 오히려 군대를 보내 이들을 막았고 결국 케 판장은 동쪽으로 도주했다. 그들은 지역의 화인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자원병들을 모아 세력이 조금씩 커졌다.

그와 동시에 바타비아 학살 소식이 자바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고 화인들에게 네덜란드 세력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창칼로 무장한 화인들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클라스 뤼턴 등을 살해하기도 했다. 당연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군대는 네덜란드인과 자바인들을 이용해 이런 폭도들을 처형하고 다녔다. 그러나 사령관 바르톨로메우스 피스허르는 화인들의 대대적인 반란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자바인들에게 수상쩍은 화인들을 체포하여 사살하라고 권고했다.

한편, 마타람 왕실의 수수후난 파쿠부워노 2세는 겉으로는 몰라도 속으로는 반네덜란드인 인물이었고 바타비아의 정황과 화인들의 반감을 알게 되자 이를 이용하기로 한다. 그는 휘하 장군들에게 일단은 네덜란드와 충돌하지 말라고 하면서 동시에 최대한 많은 화인들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화인들이 반네덜란드 감정을 갖도록 선동했다. 그는 동시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강한 반감을 가진 자바인들을 지원했다. 네덜란드의 피스허르 사령관은 이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으나 무시하고 여전히 파쿠부워노 2세를 신뢰했다.

마침내 천 명의 화인 세력이 탄중에 이르렀고 스마랑을 향해 진군했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음은 명백해졌다. 당시 스마랑에 머물던 피스허르는 다급히 탄중의 자바인들에게 화인 반란군을 저지하라고 요구하였으나 탄중의 자바 군대는 고품질의 쌀을 요구했다. 동인도 회사가 급히 쌀을 조달해 보내자, 탄중의 자바 군대는 화인들과 맞서는 척을 하다 도주했고 화인 반군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진격했다. 다급해진 피스허르는 다른 지역의 자바인들에게 화인 반군을 막기 위한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했는데, 그들은 마찬가지로 싸우는 척이나 하다가 철수해 버렸다. 자신들 밑에 있던 자바인들이 네덜란드인들을 위해 싸울 생각이 없음을 알게 된 피스허르에게 파쿠부워노 2세는 그들에게 6천 명의 군대를 맡길 것이니 동인도 회사가 참전 보상금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런 상황에 자바의 북부에서도 화인들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배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예 독립국을 세우고 싱세를 자신들의 군주로 옹립하였다.마르타푸는 파쿠부워노 2세의 밀명을 받고 화인 반군과 싸우는 척을 하다 후퇴했다. 그는 아예 자바군이 아군의 군마를 사격하게 하더니 네덜란드군이 도착하자 군마의 상처를 보여주며 이처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했다고 네덜란드인들을 기만하였다.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로 화인들을 방관하는 파쿠부워노 2세는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바로 자신이 임명한 라슴 공작인 워댜닝랏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무슬림이자 화교 혼혈로 자바인과 화인들 사이를 중개하여 네덜란드인들 몰래 화인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그의 세력 아래에 있던 자바인, 화인들은 합심하여 네덜란드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고용된 자바인들이 합세한 수천 명의 반란군은 스마랑에 가까운 그로보간으로 모였다. 위기에 빠진 피스허르는 비정상적으로 반응해 주위의 반감을 샀고, 공황에 빠진 일부 네덜란드인들은 도시를 버리고 탈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반란군이 스마랑을 습격하기 전에 파쿠부워노 2세가 네덜란드에게 약속한 군세를 이끌고 스마랑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네덜란드를 축출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자바 귀족들에게 왕실에 충성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탄중을 출발한 1천 명의 화인 반란군이 주와나, 름방의 동인도 회사 초소를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자바 전쟁이 시작되었다.

주와나를 점령한 화인 반란군은 곧이어 스마랑으로 진격하여 파쿠부워노 2세가 가진 군대의 협조 하에 스마랑을 포위 공격하였다. 피스허르는 이렇게 되자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화인 장교 앙코와 용코를 붙잡아 참수했고, 자신들의 밑에 있던 모든 화인들을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리지만 그의 부하들은 이 어처구니 없는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 스마랑에서 치열한 포위전이 이어지는 동시에 자바 북부에서 화인 반란군의 공격이 계속되어 화인 세력은 름방과 북부의 주요 항구 즈파라마저 점령하였다. 네덜란드에게는 상황이 매우 심각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충격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방칼란은 마타람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양측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군사력은 상당했다. 방칼란의 군주 차크라닝랏 4세는 자바 정복을 꿈꾸며 자바 동부의 여러 지역에 영향력이 있었고, 방칼란의 팽창에 의해 마타람과의 관계는 파쿠부워노 2세의 여동생이 차크라닝랏 4세의 공비였음에도 틀어져 있었다. 그는 네덜란드 세력이 위기에 처하자 몇 가지 요구를 하며 자신의 세력으로 구원을 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동인도 회사는 지금 당장은 가릴 처지라 아니라 차크라닝랏 4세의 도움을 승낙했고, 이에 차크라닝랏 4세는 자바 북부에 방칼란군을 보내 네덜란드군을 돕게 하였으며, 네덜란드의 신뢰를 얻기 위해 마타람 왕실과의 관계를 끊고 파쿠부워노 2세의 여동생를 마타람의 수도인 카르타수라로 보냈다. 방칼란군은 화인들을 사납게 공격해서 수라바야와 그레식의 화인들을 일소했다.

그래도 카르타수라의 네덜란드 통감 요하네스 판펠선 휘하의 네덜란드군 요새는 마타람군과 화인 반란군의 협공으로 함락되었고, 판펠선은 처형당했다. 한편 케 판장의 화인 반란군은 트갈로 향했다. 스마랑은 계속 버텼으나 피스허르는 해임되었고 스마랑의 네덜란드군 지휘는 아브라함 로스가 맡게 되었다. 로스의 부임 후 스마랑으로 네덜란드 증원군이 도착해서 스마랑은 간신히 함락을 면했다. 그리고 3,400명의 네덜란드군으로 약 2만 명의 마타람군과 약 3,500명의 화인 반군에게 반격을 가하여 오히려 승리를 거두었다. 그 승리로 인하여 네덜란드군은 즈파라 수복을 위한 공격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고, 방칼란군의 가세로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화인 반군의 공세는 의미가 없게 되었다.

파쿠부워노 2세는 방칼군에 의한 개입과 불리한 전세에 네덜란드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지했다. 그는 동인도 회사의 호헨도르프 남작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파쿠부워노 2세를 믿고 있던 반네덜란드 세력은 배신감을 느꼈고, 일부 자바인들은 네덜란드에 굴복한 파쿠부워노 2세를 더는 자신들의 군주로 인정하지 않고 당시 16세였던 아망쿠랏 3세의 손자 가른디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했다. 수수후난 아망쿠랏 5세가 된 그는 화인과 자바인들의 군주로서 반네덜란드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자 화인 반군의 지도자였던 싱세도 4천 명의 병력을 가지고 바로 달려가 아밍쿠랏 5세에게 복종했다. 당연히 화인만이 아닌 유다나가라 같은 다른 자바인 군대도 새로운 군주에게 합세하였는데, 유다나가라의 자바인 군대와 케 판장의 화인 반란군은 합세하여 배신자 파쿠부워노 2세가 있는 마타람의 수도 카르타수라를 공격하였고, 2천 정도의 마타람 수비군을 이기고 카르타수라를 점령했다. 파쿠부워노 2세와 호헨도르프 남작은 마그탄과 포노로고로 도주했고 파쿠부워노 2세는 적이었던 네덜란드와 차크라닝랏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742년 7월 1일, 아망쿠랏 5세는 카르타수라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자신에게 충성한 반란군 지도자들에게 작위를 내렸다. 그의 휘하 자바인 반란군 지도자 사잇(후일의 망쿠나가라 1세)과 화인 지도자 싱세는 다시 스마랑을 노리고 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승세는 여기까지였다. 싱세의 화인 반군은 파쿠부워노 2세를 돕는 자바인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했고, 네덜란드군에 의해 그의 거점이었던 드막이 점령되었다. 싱세는 동부의 수라바야로 도주하였으나 곧 네덜란드군에 포위되었다. 그리고 쿠두스마저도 네덜란드군에 의해 함락되어 더는 희망이 없어졌다. 사잇과 케 판장도 전력이 압도적인 네덜란드군, 방칼란군 그리고 나름대로 세력을 유지하던 파쿠부워노 2세에 의해 패배를 당해 망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바 각지에서 패주하거나 항복했고 그들의 새로운 거점 카르타수라는 네덜란드군, 방칼란군, 파쿠부워노군에 의해 사방에서 협공을 받았다. 결국 카르타수라도 함락되었고 아망쿠랏 5세는 카르타수라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이 판국에 케 판장의 군대마저 패배하고 동인도 회사의 협잡질에 의해 싱세는 네덜란드와 항복 협상에 들어갔다. 차크라닝랏 4세는 네덜란드의 속셈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뭔가 속셈이 있었던 것인지 파쿠부워노 2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이를 거절하였고, 오히려 방칼란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와 방칼란이 아군에 대한 검은 속셈이 있는 상태에서 마침내 화인 반란군과 파쿠나가라가 이끄는 자바인 반란군이 연합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반란군에 대해 항복하면 죄를 묻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하였고, 이에 반란군은 와해되었다. 네덜란드는 싱세를 항복시켰고 화인 반군 세력의 많은 지도자와 병사가 방칼란이 아닌 네덜란드에 항복하였다. 케 판장의 세력에도 네덜란드의 손길이 미쳤으나 케 판장 본인은 항복하지 않고 그대로 도주하였다. 그는 네덜란드의 끈질긴 추격을 받았는데, 발리에서 목격을 마지막으로 이후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아망쿠랏 5세도 여기저기로 도주하며 추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항복하고 싱세와 함께 실론으로 유배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네덜란드는 파쿠부워노 2세에게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파쿠부워노 2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자신들의 영토는 물론 일종의 속국[4]이었던 방칼란 공국의 영토를 바쳤으며 마타람 신민들은 항해의 자유가 제약됨은 물론 네덜란드에 매년 조공품을 제공해야 했다. 그래도 파쿠부워노 2세는 별로 신민들을 생각하지 않아서 초토화된 수도 카르타수라를 버리고, 수라카르타에 새로 왕궁을 짓고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방칼란의 차크라닝랏 4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자바 동부의 영토와 여러 이권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통수를 맞았다. 이에 분노한 차크라닝랏 4세는 자바 동부 수라바야 및 인근의 영주들과 당시까지 남아 있던 운퉁 수라파티 잔당과 연합하여 동인도 회사에 대한 자바 동부의 채무 지불을 중단시켰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에 대하여 차크라닝랏 4세와 협상하려 했지만 차크라닝랏 4세는 거부하였다. 그러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차크라닝랏 4세를 반란자로 선포하였고 그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당연히 차크라닝랏 4세는 격노하여 방칼란군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고 마두라 동부와 자바 북부, 자바 동부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예상하고 화인과 마타람 세력의 자바인 군대를 모았던 네덜란드는 우세한 전력으로 방칼란군을 격퇴했다. 패배한 차크라닝랏 4세는 반자르 술탄의 반자르마신으로 도주하여 영국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붙잡혀서 케이프의 희망봉으로 유배를 당하는 처참한 결말[5]을 맞게 되었다. 방칼란은 동인도 회사에 의해 차크라닝랏 4세의 아들인 차크라닝랏 5세가 즉위하게 되었고 전쟁 결과로 인하여 약화된 방칼란은 더 이상 네덜란드에 반항할 힘을 잃었다. 그들은 아예 마타람의 밑에 있었을 때보다 더 비참한 신세로 존속하게 되었다.

결과

자바 전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자바인들로부터 넓은 영토를 획득하고 재정적으로도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마타람과 방칼란은 몰락했고 이는 자바인들 사이에서 반네덜란드 정서가 심해지게 하였으며 이후에도 자바인들과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해서 갑자기 정치적으로 각성한 네덜란드[6]에 의해 머지 않은 미래에 엄청난 숫자의 자바인[7]들이 학살당하게 된다. 화인들은 학살을 당해서 단기적으로는 그들이 종사하던 설탕 산업[8]과 함께 몰락하였으나 네덜란드에 의해 별로 좋지 않은 일자리였으나 정치적, 군사적으로도 다수가 고용[9]되게 되었고 그 결과 화인들의 세력[10]은 빠르게 복구되었다.

  1. 이들도 전반적으로 중국인보단 나은 편이었으나 대부분은 힘들게 일하고 수입이 그리 좋지 않았다.
  2. 많이 죽었다는 의견도 있다.
  3. 현재 중국 대륙을 보면 매우 놀랍게도 이 화인들은 유럽인이나 자바인들보다 사회적 혼란이 덜 했다고 한다.
  4. 완전한 속국은 아니었다.
  5. 방칼란의 힘이 강하고 독립적인 탓인지 그는 다른 지도자들보다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6. 따라서 이들은 현지 세력을 이용하여 보급 등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7. 이들은 과거 네덜란드와 자바인들의 사례를 참고하였으나 네덜란드가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8. 자바인들이 화인들 대신 차지하였으나 그들에겐 경제적 능력이 없어 망했다.
  9. 자바 전쟁에서도 그런 면이 나타나는데, 원래 화인들은 학살 전에는 자바인에 대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항하는 것을 피해서 그리 쓸모가 없었다.
  10. 경제력도 다른 산업에 종사하여 금방 복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