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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본사]]
== 임나일본부란? ==
== 임나일본부란? ==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건 4~6세기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세웠다는 관청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요지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실효 지배했다는 데 의의를 둔다. 제국사학이 팽배할 당시 내선일체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밀었던 경험이 있는데 실로 일본사학계의 흑역사라 할 수 있겠다. 사이토 타다시 이런 사람들이 '''20세기'''에나 주장했던 이론이다. 당시는 학문적 성과에 정치적 의도가 워낙 짙게 깔리던 시절이라...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건 4~6세기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세웠다는 관청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요지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실효 지배했다는 데 의의를 둔다. 제국사학이 팽배할 당시 내선일체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밀었던 경험이 있는데 실로 일본사학계의 흑역사라 할 수 있겠다. 사이토 타다시 이런 사람들이 '''20세기'''에나 주장했던 이론이다. 당시는 학문적 성과에 정치적 의도가 워낙 짙게 깔리던 시절이라...


 
참고로, 정작 사이토 타다시는 '''문학박사'''였고 고고학 연구의 기본적인 조예도 없었다. 경주나 가야 고분 연구한답시고 발굴하다가 기껏 발굴한 유물들도 어디로 갔는지 죄다 유실했던 적도 많다. 특히, 임나일본부설은 《[[고사기]]》나 《[[일본서기]]》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정작 일본의 역사학자인 나오키 코지로는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죄다 가치가 없는 조작, 변형된 문서라면서 비판했다. 그러다보니 일본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대판민국<ref>오사카 비하명칭. 오사카가 한국이랑 친하대나? <s>정작 한국인은 듣도보도 못한 소리인데</s> 참고로 나오키 코지로는 오사카 대학에 학적을 두고 있다.</ref> 대학 교수라며 가열차게 적도 있다.
참고로, 정작 사이토 타다시는 '''문학박사'''였고 고고학 연구의 기본적인 조예도 없었다. 경주나 가야 고분 연구한답시고 발굴하다가 기껏 발굴한 유물들도 어디로 갔는지 죄다 유실했던 적도 많다. 특히, 임나일본부설은 고사기나 일본서기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정작 일본의 역사학자인 나오키 코지로 상은 일본서기와 고서기가 죄다 가치가 없는 조작, 변형된 문서라면서 비판했다. 그러다보니 일웹에선 대판민국<ref>오사카 비하명칭. 오사카가 한국이랑 친하대나? <s>정작 한국인은 듣도보도 못한 소리인데</s>참고로 나오키상이 오사카대학에 학적을 두고 있음.</ref> 대학 교수라며 가열차게 까인 적도 있다.


== 가능하긴 한가? ==
== 가능하긴 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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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나일본부라는 명칭 ==
== 임나일본부라는 명칭 ==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서기 자체는 옛 문헌을 참고해서 작성된 2차 사료이므로 이를 신뢰한다면 日本이라는 표기 자체는 그 '옛 문헌' 에 있었던 표기라는 것이 된다. 일본서기의 임나는 가야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 일본에 日本이라는 표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부(임나일 야마토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임나일본부가 4세기 경에 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컨대 '옛 문헌'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거나 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없었을 것이고, 일본서기의 저자가 후대에 임의로 창작했다는 것이다.<ref>일본서기에는 계속 일본(一本)에 따르기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이 책에 따르면...'이라는 뜻이다.</ref>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서기 자체는 옛 문헌을 참고해서 작성된 2차 사료이므로 이를 신뢰한다면 日本이라는 표기 자체는 그 '옛 문헌' 에 있었던 표기라는 것이 된다. 일본서기의 임나는 가야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 일본에 日本이라는 표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부(임나일 야마토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임나일본부가 4세기 경에 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컨대 '옛 문헌'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거나 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없었을 것이고, 일본서기의 저자가 후대에 임의로 창작했다는 것이다.<ref>일본서기에는 계속 일본(一本)에 따르기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이 책에 따르면...'이라는 뜻이다.</ref>


또한 계속하여,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여 비로소 한문이 전파되었다고 되어 있다.<ref>왕인이란 학자의 이름은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다만 중국 측의 기록에서도 '왜는 문자가 없었고...백제가 불교를 전해 주면서 문자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ref> 논어와 천자문 모두 한문을 익히는 데 필요한 기초 교과서 취급. 여기서 논어는 문제가 없지만 천자문은 중국의 학자 조흥사가 6세기에 지은 책이다.<ref>혹자는 더 오래된 도서로 '종요의 천자문' 을 제시하는데, 가상의 도서이다.</ref> '''즉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은 6세기까지 한문(문자)이 없었다.''' 그런데 200년이나 앞선, 4세기 경에 식민 지배를 위한 행정관청이 있었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또한 계속하여,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여 비로소 한문이 전파되었다고 되어 있다.<ref>왕인이란 학자의 이름은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다만 중국 측의 기록에서도 '왜는 문자가 없었고...백제가 불교를 전해 주면서 문자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ref> 논어와 천자문 모두 한문을 익히는 데 필요한 기초 교과서 취급. 여기서 논어는 문제가 없지만 천자문은 중국의 학자 조흥사가 6세기에 지은 책이다.<ref>혹자는 더 오래된 도서로 '종요의 천자문' 을 제시하는데, 가상의 도서이다.</ref> '''즉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은 6세기까지 한문(문자)이 없었다.''' 그런데 200년이나 앞선, 4세기 경에 식민 지배를 위한 행정관청이 있었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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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태왕비의 신묘년 기사 ==
== 호태왕비의 신묘년 기사 ==
호태왕이란 [[광개토대왕]]을 말하는 것이다. 호태왕비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의 준말으로,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와 광개토대왕의 치적 등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일반적으로는 광개토대왕릉비라 하나 정작 호태왕의 능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호태왕이란 [[광개토대왕]]을 말하는 것이다. 호태왕비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의 준말으로,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와 광개토대왕의 치적 등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일반적으로는 광개토대왕릉비라 하나 정작 호태왕의 능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유명한 떡밥이다. 임나일본부설 옹호론자들은 총 1500자 이상의 호태왕비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20글자를 빼와서 그것만 주구장창 물고 늘어질뿐만 아니라, '''심지어 없는 한자까지 만들어내''' 자신들이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있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이 비문이 그것인데, 여기에 과연 임나, 혹은 가야라는 단어가 있는가? 참고로 저 20자 이외에도 신묘년 기사 전체를 살펴볼 때 '''임나라는 글자는 아예 없다.'''  위 비문을 임나일본부설 옹호론자들은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한다. 가라란 가야, 즉 임나를 말하는 것이다. 도대체 없는 한자를 만들어내어 해석하는 것은 더욱이 얼마나 기묘한 것인가? '''게다가 고구려는 가야를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신라는 따로 신라(新羅)라고 표기했다.''' 고구려는 신라를 羅라는 한 글자로 호칭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유명한 떡밥이다. 임나일본부설 옹호론자들은 총 1500자 이상의 호태왕비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20글자를 빼와서 그것만 주구장창 물고 늘어질뿐만 아니라, '''심지어 없는 한자까지 만들어내''' 자신들이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있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이 비문이 그것인데, 여기에 과연 임나, 혹은 가야라는 단어가 있는가? 참고로 저 20자 이외에도 신묘년 기사 전체를 살펴볼 때 '''임나라는 글자는 아예 없다.'''  위 비문을 임나일본부설 옹호론자들은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한다. 가라란 가야, 즉 임나를 말하는 것이다. 도대체 없는 한자를 만들어내어 해석하는 것은 더욱이 얼마나 기묘한 것인가? '''게다가 고구려는 가야를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신라는 따로 신라(新羅)라고 표기했다.''' 고구려는 신라를 羅라는 한 글자로 호칭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호태왕비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는 본래 고구려의 속국이었다.<ref>이는 고구려의 과장된 천하관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ref> 신묘년 기사에 그것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속국이었으므로 조공을 바쳤다' 는 내용인데 여기에는 누구에게 조공을 바쳤는지 목적어가 없다. 당연히 고구려가 자신의 치적을 과장하기 위해 쓴 것이므로 고구려에게 바친 것임이 당연하다. 글을 쓴 주체가 고구려이므로, 또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게 당연하므로 그런 당연한 것은 생략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호태왕비에는 고구려, 내지는 고려라는 말이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다. 만약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쳤다' 라고 쓴다면 마치 제3자가 고구려와 다른 국가의 정세를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요컨대,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말 역시 (고구려가)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호태왕비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는 본래 고구려의 속국이었다.<ref>이는 고구려의 과장된 천하관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ref> 신묘년 기사에 그것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속국이었으므로 조공을 바쳤다' 는 내용인데 여기에는 누구에게 조공을 바쳤는지 목적어가 없다. 당연히 고구려가 자신의 치적을 과장하기 위해 쓴 것이므로 고구려에게 바친 것임이 당연하다. 글을 쓴 주체가 고구려이므로, 또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는게 당연하므로 그런 당연한 것은 생략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호태왕비에는 고구려, 내지는 고려라는 말이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다. 만약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쳤다' 라고 쓴다면 마치 제3자가 고구려와 다른 국가의 정세를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요컨대,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말 역시 (고구려가)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호태왕비 신묘년 기사 전체를 살펴보자. 신묘년 기사를 긁어온 것이다. 판독자는 일본학자 미즈타니 테지로(水谷悌二郞)이다.<ref>공정성(?)을 위하여 일본학자의 판독문을 싣는다.</ref> 『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滅殘國軍▨▨』 해석하자면 백제와 신라는 본래 속국이었으므로 조공을 바쳤는데, '이에 왜가 신묘년에 □백제□□신라, 신민으로 삼았다. 이에 영락6년 왕이 직접 군졸을 이끌고 백제군을 파하였다.' '''심지어 이 판독문에는 왜가 바다를 건넜다는 말조차 없다.''' 본래 금석학이란 것은 빠진 글자를 입맛대로 끼워넣으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이라 더욱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위의 판독문은 적당한 한자를 유추해서 보면 '백제와 신라는 본래 (고구려의) 속국이었으므로 조공을 바쳤는데, 왜가 신묘년에 백제, 신라와 (내통)하였으므로<ref>혹은 백제가 왜와 통하여 신라를 깨뜨렸으므로.</ref>, (고구려가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군졸을 이끌고 백제를 파하였다.' 는 식으로도 해독이 가능하다.
호태왕비 신묘년 기사 전체를 살펴보자. 신묘년 기사를 긁어온 것이다. 판독자는 일본학자 미즈타니 테지로(水谷悌二郞)이다.<ref>공정성(?)을 위하여 일본학자의 판독문을 싣는다.</ref> 『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滅殘國軍▨▨』 해석하자면 백제와 신라는 본래 속국이었으므로 조공을 바쳤는데, '이에 왜가 신묘년에 □백제□□신라, 신민으로 삼았다. 이에 영락6년 왕이 직접 군졸을 이끌고 백제군을 파하였다.' '''심지어 이 판독문에는 왜가 바다를 건넜다는 말조차 없다.''' 본래 금석학이란 것은 빠진 글자를 입맛대로 끼워넣으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이라 더욱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위의 판독문은 적당한 한자를 유추해서 보면 '백제와 신라는 본래 (고구려의) 속국이었으므로 조공을 바쳤는데, 왜가 신묘년에 백제, 신라와 (내통)하였으므로<ref>혹은 백제가 왜와 통하여 신라를 깨뜨렸으므로.</ref>, (고구려가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군졸을 이끌고 백제를 파하였다.' 는 식으로도 해독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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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일본이 백제와 신라...등을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면 비문 전체 내용이 논리적으로 매우 이상해진다.
이것을 일본이 백제와 신라...등을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면 비문 전체 내용이 논리적으로 매우 이상해진다.
#고구려의 천하관에서는, 백제와 신라는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신민이었다. 그런데 왜가 이를 정말로 빼앗았다면 왜를 격퇴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호태왕비에 따르면 '''고구려왕은 왜가 아니라 백제를 쳤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모순을 설명하자면, 고구려의 천하관에 따르면 백제>왜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호태왕비는 호태왕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써둔 글이므로 치적을 과장하려면 잡졸에 불과한 왜를 격파한 것보다는 백제를 격파했다고 쓰는 것이 위엄이 살지 않겠는가? 요컨대 고구려의 천하관에서 왜는 소위 따까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천하관에서는, 백제와 신라는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신민이었다. 그런데 왜가 이를 정말로 빼앗았다면 왜를 격퇴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호태왕비에 따르면 '''고구려왕은 왜가 아니라 백제를 쳤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모순을 설명하자면, 고구려의 천하관에 따르면 백제>왜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호태왕비는 호태왕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써둔 글이므로 치적을 과장하려면 잡졸에 불과한 왜를 격파한 것보다는 백제를 격파했다고 쓰는 것이 위엄이 살지 않겠는가? 요컨대 고구려의 천하관에서 왜는 소위 따까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만약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정벌했다고 치자. 그런데 바로 그 해, 즉 신묘년 영락6년에 고구려는 남부로 내려가 백제를 재정벌하였다. 따라서, 만약 왜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점령하여 휘하에 두었다면, 1년만에 지배권을 빼앗긴 것이 된다. 이는 한반도 남부를 오랫동안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과 '''아예 상충되는 이야기이므로 서로 모순이며,'''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참고로 왜군 자체는 비문을 참고하면 이후 몇년 뒤 왜는 '''다시 한 번 왔다가 고구려에게 박살난다.'''  
#만약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정벌했다고 치자. 그런데 바로 그 해, 즉 신묘년 영락6년에 고구려는 남부로 내려가 백제를 재정벌하였다. 따라서, 만약 왜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점령하여 휘하에 두었다면, 1년 만에 지배권을 빼앗긴 것이 된다. 이는 한반도 남부를 오랫동안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과 '''아예 상충되는 이야기이므로 서로 모순이며,'''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참고로 왜군 자체는 비문을 참고하면 이후 몇년 뒤 왜는 '''다시 한 번 왔다가 고구려에게 박살난다.'''  
#왜가 반도 오래 전부터 남부를 지배했다면 굳이 다시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을 강조해서 기록할 필요가 없다.
#왜가 반도 오래 전부터 남부를 지배했다면 굳이 다시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을 강조해서 기록할 필요가 없다.


== 임나일본부는 없다 ==
무엇보다,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면 최소한 역사서에 그러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이는 《[[일본서기]]》에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삼황오제]]에 맞먹는 판타지로, '''여자 혼자서 널빤지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넌 뒤 마술로 해일을 부르거나 천황이 수염을 뽑아 땅에 던지니 삼나무로 변하는 등''' 온갖 허황된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중국의 학자들도 《일본서기》는 최소한 일본 내부의 자료로서는 마지못해 인정하나 외교적 부분에 대한 것은 전부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당대의 역사를 그대로 적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참고 자료로,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단군 신화]]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문학적 가치는 존재할 지도 모르나 사서로써의 가치는 거의 없다. 참고로 《일본서기》의 연년은 동아시아의 어떤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 임나일본부는 없다 ==
일부 임나일본부설 신봉자들은 한반도의 역사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부분을 지웠다고 주장한다. 물론 신라나 백제의 입장에서 그럴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은 어떠한가? 이들의 기록에서도 임나일본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중국 기록에는 백제의 관직명까지 적혀 있다. 그런데 왜 임나일본부는 없을까? 물론 당연하다. '''임나일본부 같은 건 없었으니까.''' 심지어, 임나일본부는 '''일본 최고(最古)의 기록물인 《[[고사기]]》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고사기》에는 야마토국이 백제와 가야, 신라에 이르는 지역에 대규모 정벌을 나섰다는 이야기조차 없다. 《고사기》는 7세기의 천황까지 상세히 적었으므로 만약 야마토국의 신라정벌이 있었다면 고사기에 당연스레 기록되는 것이 타당하다.
무엇보다,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면 최소한 역사서에 그러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이는 일본서기에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삼황오제에 맞먹는 판타지로, '''여자 혼자서 널빤지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넌 뒤 마술로 해일을 부르거나 천황이 수염을 뽑아 땅에 던지니 삼나무로 변하는 등''' 온갖 허황된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중국의 학자들도 일본서기는 최소한 일본 내부의 자료로서는 마지못해 인정하나 외교적 부분에 대한 것은 전부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당대의 역사를 그대로 적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참고 자료로,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단군 신화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문학적 가치는 존재할 지도 모르나 사서로써의 가치는 거의 없다. '''참고로 일본서기의 연년은 동아시아의 어떤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일부 임나일본부설 신봉자들은 한반도의 역사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부분을 지웠다고 주장한다. 물론 신라나 백제의 입장에서 그럴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은 어떠한가? 이들의 기록에서도 임나일본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중국 기록에는 백제의 관직명까지 적혀있다. 그런데 왜 임나일본부는 없을까? 물론 당연하다. '''임나일본부 같은 건 없었으니까.''' 심지어, 임나일본부는 '''일본 최고(最古)의 기록물인 고사기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고사기에는 야마토국이 백제와 가야, 신라에 이르는 지역에 대규모 정벌을 나섰다는 이야기조차 없다. 고사기는 7세기의 천황까지 상세히 적었으므로 만약 야마토 국의 신라정벌이 있었다면 고사기에 당연스레 기록되는 것이 타당하다.  
일부 중국의 기록에 왜가 신라를 쳤다는 기록이 나오긴 하는데 얘네는 낙랑이 백제에 있다는 둥 아예 대충 상상으로 지어낸 티가 역력해서 한반도의 역사를 기록하는 기록물로써 어떤 가치도 없다. 일본이 남부 조선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증거 자체는 있지만 임나일본부의 실존을 증명하는 증거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본도 하나의 왕조인 만큼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겠으나,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과 지배했다는 것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일부 중국의 기록에 왜가 신라를 쳤다는 기록이 나오긴 하는데 얘네는 낙랑이 백제에 있다는 둥 아예 대충 상상으로 지어낸 티가 역력해서 한반도의 역사를 기록하는 기록물로써 어떤 가치도 없다. 임나일본부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이 남부 조선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증거 자체는 있지만 임나일본부의 실존을 증명하는 증거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본도 하나의 왕조인 만큼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겠으나,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과 지배했다는 것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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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본사]]

2018년 9월 12일 (수) 01:26 판

임나일본부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건 4~6세기 고대 일본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세웠다는 관청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요지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를 실효 지배했다는 데 의의를 둔다. 제국사학이 팽배할 당시 내선일체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밀었던 경험이 있는데 실로 일본사학계의 흑역사라 할 수 있겠다. 사이토 타다시 이런 사람들이 20세기에나 주장했던 이론이다. 당시는 학문적 성과에 정치적 의도가 워낙 짙게 깔리던 시절이라...

참고로, 정작 사이토 타다시는 문학박사였고 고고학 연구의 기본적인 조예도 없었다. 경주나 가야 고분 연구한답시고 발굴하다가 기껏 발굴한 유물들도 어디로 갔는지 죄다 유실했던 적도 많다. 특히, 임나일본부설은 《고사기》나 《일본서기》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정작 일본의 역사학자인 나오키 코지로는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죄다 가치가 없는 조작, 변형된 문서라면서 비판했다. 그러다보니 일본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대판민국[1] 대학 교수라며 가열차게 깐 적도 있다.

가능하긴 한가?

만약 일본이 가야, 신라백제에 걸쳐서 한반도 남부를 실효 지배하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자. 무엇이 필요할까?

일단...배가 필요하다. 존나게 큰 배가. 존나게 큰 배가 필요해...

한반도 남부의 인구가 몇명이었는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지만, 비주류 학설에는 경주에만 인구가 90만이 넘는다는 둥 꽤나 크게 잡고 있다. 한반도 남부 지역은 식량이 풍부한 땅이었기 때문에 추산인구는 더욱 커지게 된다. 즉 반도 지배를 위해서는 대규모의 인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일본의 항해술은 도저히 반도의 식민 경영이 불가능한 것으로, 일본의 배는 대개 삼나무로 건조되어 정원은 고작 30명 정도였다. 게다가 돛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중 20명 이상은 노를 저어야 했고 히라노 쿠니오 저서, <야마토 국의 원상>에 따르면 속도는 고작 2노트 정도였다고 한다. 날씨가 나쁘면 항행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때 고대선박을 재현해서 만든 배로는 한국까지 도달하는 데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 45일이 걸렸다. 실제로는 해류가 안정적이지 못하므로 중간 기착지에서 항해하지 못하는 날을 합치면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는 일본 학자가 연구한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많은 국가들이 식민경영을 했으나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식민지를 대부분 포기하였다. 이것은 열강들이 갑자기 착해졌거나 민족의식이 발달한 것이 아니라, 돈이 그다지 안 되기 때문이 주요 이유였다. 식민경영의 비용이 이득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증기선과 철갑선이 있는 20세기에도 이러할진대 목선밖에 없는 4세기 경에 식민 경영이 말이 될 법한가. 고대 선박이라고 해서 마냥 무시할 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동아시아의 무역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던 것은 7, 8세기 이후였다. 4세기 경의 선박 기술로는 도저히, 백제와 신라에 이르는 거대한 영역을 바다 건너 식민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약하면 애초에 4세기의 고대일본이 대규모 해상무역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식민경영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

임나일본부라는 명칭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서기 자체는 옛 문헌을 참고해서 작성된 2차 사료이므로 이를 신뢰한다면 日本이라는 표기 자체는 그 '옛 문헌' 에 있었던 표기라는 것이 된다. 일본서기의 임나는 가야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 일본에 日本이라는 표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부(임나일 야마토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임나일본부가 4세기 경에 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컨대 '옛 문헌'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거나 일본부에 대한 언급이 없었을 것이고, 일본서기의 저자가 후대에 임의로 창작했다는 것이다.[2]

또한 계속하여,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여 비로소 한문이 전파되었다고 되어 있다.[3] 논어와 천자문 모두 한문을 익히는 데 필요한 기초 교과서 취급. 여기서 논어는 문제가 없지만 천자문은 중국의 학자 조흥사가 6세기에 지은 책이다.[4] 즉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은 6세기까지 한문(문자)이 없었다. 그런데 200년이나 앞선, 4세기 경에 식민 지배를 위한 행정관청이 있었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호태왕비의 신묘년 기사

호태왕이란 광개토대왕을 말하는 것이다. 호태왕비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의 준말으로,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와 광개토대왕의 치적 등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일반적으로는 광개토대왕릉비라 하나 정작 호태왕의 능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유명한 떡밥이다. 임나일본부설 옹호론자들은 총 1500자 이상의 호태왕비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20글자를 빼와서 그것만 주구장창 물고 늘어질뿐만 아니라, 심지어 없는 한자까지 만들어내 자신들이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있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이 비문이 그것인데, 여기에 과연 임나, 혹은 가야라는 단어가 있는가? 참고로 저 20자 이외에도 신묘년 기사 전체를 살펴볼 때 임나라는 글자는 아예 없다. 위 비문을 임나일본부설 옹호론자들은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한다. 가라란 가야, 즉 임나를 말하는 것이다. 도대체 없는 한자를 만들어내어 해석하는 것은 더욱이 얼마나 기묘한 것인가? 게다가 고구려는 가야를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신라는 따로 신라(新羅)라고 표기했다. 고구려는 신라를 羅라는 한 글자로 호칭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호태왕비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는 본래 고구려의 속국이었다.[5] 신묘년 기사에 그것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속국이었으므로 조공을 바쳤다' 는 내용인데 여기에는 누구에게 조공을 바쳤는지 목적어가 없다. 당연히 고구려가 자신의 치적을 과장하기 위해 쓴 것이므로 고구려에게 바친 것임이 당연하다. 글을 쓴 주체가 고구려이므로, 또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게 당연하므로 그런 당연한 것은 생략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호태왕비에는 고구려, 내지는 고려라는 말이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다. 만약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쳤다' 라고 쓴다면 마치 제3자가 고구려와 다른 국가의 정세를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요컨대,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말 역시 (고구려가)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호태왕비 신묘년 기사 전체를 살펴보자. 신묘년 기사를 긁어온 것이다. 판독자는 일본학자 미즈타니 테지로(水谷悌二郞)이다.[6] 『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滅殘國軍▨▨』 해석하자면 백제와 신라는 본래 속국이었으므로 조공을 바쳤는데, '이에 왜가 신묘년에 □백제□□신라, 신민으로 삼았다. 이에 영락6년 왕이 직접 군졸을 이끌고 백제군을 파하였다.' 심지어 이 판독문에는 왜가 바다를 건넜다는 말조차 없다. 본래 금석학이란 것은 빠진 글자를 입맛대로 끼워넣으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이라 더욱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위의 판독문은 적당한 한자를 유추해서 보면 '백제와 신라는 본래 (고구려의) 속국이었으므로 조공을 바쳤는데, 왜가 신묘년에 백제, 신라와 (내통)하였으므로[7], (고구려가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 군졸을 이끌고 백제를 파하였다.' 는 식으로도 해독이 가능하다.

이것을 일본이 백제와 신라...등을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면 비문 전체 내용이 논리적으로 매우 이상해진다.

  1. 고구려의 천하관에서는, 백제와 신라는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신민이었다. 그런데 왜가 이를 정말로 빼앗았다면 왜를 격퇴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호태왕비에 따르면 고구려왕은 왜가 아니라 백제를 쳤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모순을 설명하자면, 고구려의 천하관에 따르면 백제>왜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호태왕비는 호태왕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써둔 글이므로 치적을 과장하려면 잡졸에 불과한 왜를 격파한 것보다는 백제를 격파했다고 쓰는 것이 위엄이 살지 않겠는가? 요컨대 고구려의 천하관에서 왜는 소위 따까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2. 만약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정벌했다고 치자. 그런데 바로 그 해, 즉 신묘년 영락6년에 고구려는 남부로 내려가 백제를 재정벌하였다. 따라서, 만약 왜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점령하여 휘하에 두었다면, 1년 만에 지배권을 빼앗긴 것이 된다. 이는 한반도 남부를 오랫동안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과 아예 상충되는 이야기이므로 서로 모순이며,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참고로 왜군 자체는 비문을 참고하면 이후 몇년 뒤 왜는 다시 한 번 왔다가 고구려에게 박살난다.
  3. 왜가 반도 오래 전부터 남부를 지배했다면 굳이 다시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을 강조해서 기록할 필요가 없다.

임나일본부는 없다

무엇보다,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면 최소한 역사서에 그러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이는 《일본서기》에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삼황오제에 맞먹는 판타지로, 여자 혼자서 널빤지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넌 뒤 마술로 해일을 부르거나 천황이 수염을 뽑아 땅에 던지니 삼나무로 변하는 등 온갖 허황된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중국의 학자들도 《일본서기》는 최소한 일본 내부의 자료로서는 마지못해 인정하나 외교적 부분에 대한 것은 전부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당대의 역사를 그대로 적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참고 자료로,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단군 신화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문학적 가치는 존재할 지도 모르나 사서로써의 가치는 거의 없다. 참고로 《일본서기》의 연년은 동아시아의 어떤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일부 임나일본부설 신봉자들은 한반도의 역사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부분을 지웠다고 주장한다. 물론 신라나 백제의 입장에서 그럴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은 어떠한가? 이들의 기록에서도 임나일본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중국 기록에는 백제의 관직명까지 적혀 있다. 그런데 왜 임나일본부는 없을까? 물론 당연하다. 임나일본부 같은 건 없었으니까. 심지어, 임나일본부는 일본 최고(最古)의 기록물인 《고사기》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고사기》에는 야마토국이 백제와 가야, 신라에 이르는 지역에 대규모 정벌을 나섰다는 이야기조차 없다. 《고사기》는 7세기의 천황까지 상세히 적었으므로 만약 야마토국의 신라정벌이 있었다면 고사기에 당연스레 기록되는 것이 타당하다.

일부 중국의 기록에 왜가 신라를 쳤다는 기록이 나오긴 하는데 얘네는 낙랑이 백제에 있다는 둥 아예 대충 상상으로 지어낸 티가 역력해서 한반도의 역사를 기록하는 기록물로써 어떤 가치도 없다. 일본이 남부 조선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증거 자체는 있지만 임나일본부의 실존을 증명하는 증거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본도 하나의 왕조인 만큼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겠으나,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과 지배했다는 것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각주

  1. 오사카 비하명칭. 오사카가 한국이랑 친하대나? 정작 한국인은 듣도보도 못한 소리인데 참고로 나오키 코지로는 오사카 대학에 학적을 두고 있다.
  2. 일본서기에는 계속 일본(一本)에 따르기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이 책에 따르면...'이라는 뜻이다.
  3. 왕인이란 학자의 이름은 일본서기에만 등장한다. 다만 중국 측의 기록에서도 '왜는 문자가 없었고...백제가 불교를 전해 주면서 문자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4. 혹자는 더 오래된 도서로 '종요의 천자문' 을 제시하는데, 가상의 도서이다.
  5. 이는 고구려의 과장된 천하관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6. 공정성(?)을 위하여 일본학자의 판독문을 싣는다.
  7. 혹은 백제가 왜와 통하여 신라를 깨뜨렸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