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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Iksan Station lobby.jpg|신역사 내부 맞이방 모습 | File:Iksan Station lobby.jpg|신역사 내부 맞이방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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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3월, 호남선 및 군산선이 개통하면서 개역하였으며 당시의 역명은 '''이리역'''이었다. 본격적으로 여객을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1915년]] 부터이다. 일제 치하에서 호남의 주요 도시인 | [[1912년]] 3월, 호남선 및 군산선이 개통하면서 개역하였으며 당시의 역명은 '''이리역'''이었다. 본격적으로 여객을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1915년]] 부터이다. 일제 치하에서 호남의 주요 도시인 전주가 아닌 이리에 분기역이 설치된 이유는 전주의 경우 주변에 구릉지가 존재하여 철도를 부설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반면, 이리는 평야지대에 위치하여 철도 부설이 용이하였고, 주변의 김제나 삼례 등 곡창지대에서 수탈한 쌀을 군산항을 통하여 공출하기에 용이했던 점을 적극 활용한 것이었다. 또한 당시 [[군산시|군산]]은 일본인 밀집 주거지역이 형성되었었고 군산과 익산을 연결하는 군산선이 건설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었다.<ref>이 당시 일본인들이 건축한 건물들이 도심지에 다수 남아있어서 현재 군산시의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ref> | ||
이후 [[한국전쟁]] 당시 미군 공습기가 이리역에 폭격을 퍼부어 역사가 쑥대밭이 되었으며, [[1977년]]에는 [[이리역 폭발]]로 역사가 파괴되고 복구 및 재건을 거쳐 [[1978년]]에 신역사가 만들어졌다.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익산시로 통합되면서 역명이 익산역으로 변경되었다. 통합시명이 이리시가 아닌 익산시가 된 이유는 사람들이 ‘이리’라고 하면 으레 ‘이리역 폭발사고’를 떠올리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 이후 [[한국전쟁]] 당시 미군 공습기가 이리역에 폭격을 퍼부어 역사가 쑥대밭이 되었으며, [[1977년]]에는 [[이리역 폭발]]로 역사가 파괴되고 복구 및 재건을 거쳐 [[1978년]]에 신역사가 만들어졌다.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익산시로 통합되면서 역명이 익산역으로 변경되었다. 통합시명이 이리시가 아닌 익산시가 된 이유는 사람들이 ‘이리’라고 하면 으레 ‘이리역 폭발사고’를 떠올리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