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서씨

이천 서씨(利川 徐氏)는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천(利川)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18년(935년) 왕건후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살던 서목(徐穆)이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준 데서 비롯됐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려시대 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 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 서눌(徐訥 문하시중.종1품), 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 서정(徐靖 판삼사사.종1품), 서균(徐均 좌복야.정2품), 서공(徐恭 판삼사사. 종1품),서순(徐淳 지추밀원사. 정2품) 7대가 연이어 재상에 올랐다. 이천 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1] 2000년 인구는 53,407가구, 172,072명이다.

분가[편집 | 원본 편집]

  • 장성 서씨(長城徐氏) 시조 서릉(徐稜)은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시조인 서신일(徐神逸)의 11세손으로 고려 조에 시중(侍中 종1품)을 지냈다. 이천서씨 절효공파.
  • 연산 서씨(連山徐氏)의 시조는 서준영(徐俊英)이나 이후의 문헌이 전하지 않아 서의민(徐義敏)을 1세조로 한다. 2000년 인구는 6,416명이다. 이천서씨 연산공파.
  • 남평 서씨(南平徐氏) 시조는 병부상서 대광내의령(兵部尙書 大匡內議令 종1품) 서린(徐鱗)이며 남원부사 서호 (徐顥)의 아들 서지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종 때 이조판서에 올랐다. 1985년 인구는 5,298명이다. 이천서씨 병부상서공파.
  • 평당 서씨(平當 徐氏) 시조 서준방(徐俊邦)이 고려조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 정3품)를 지내고 외적(外敵)을 격퇴시키는데 공(功)을 세워 봉성군(峯城君)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서약진(徐若珍)과 손자 서숭조(徐崇祖)에 이르기까지 3대가 봉성군에 봉해졌다. 7세손 서원경(徐元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을 역임하였다. 이천서씨 평당공파.
    • 봉성 서씨(峯城 徐氏) 시조는 서극(徐克)이다. 이천서씨 봉성공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