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태 (18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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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容兌.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이용준의 친형이다.

생애

1890년 음력 8월 12일 충청도 충주부 산척면 광동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광주 이씨, 호는 단암(檀菴)이다. 5살 때인 1894년 제천군 백운면 모정리로 이사하였고, 연당 이선춘에게 한학을 배웠다. 1900년 같은 면의 주론리로 이사한 후 갈현리에 사는 신당 임의상 문하에서 박제덕, 임병필, 임병문, 임병순, 이석대, 강규희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1903년 갈현리의 원선생 문하에서도 수학했으며, 이후 왕당리로 이사하여 1904년 충북 괴산군 장연면에 거주하는 최씨와 결혼했다. 1905년 중원군 근좌면 원박리로 이사하였고, 1906년 동리에 사는 홍성훈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가 거주하던 제천은 당시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훗날 이용태는 18세 때인 1907년 당시 상황을 <단암문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 각지에서 의병이 떼를 지어 일어나고 인심은 몹시 어지러워지니 이는 곧 나라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모든 일이 날로 그릇되어 백성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임금의 위급함이 조석에 달려 있는 까닭이라. 7월 14일 밤에 의병의 부대가 마을 앞길을 지나서 충주 방면으로 갔는데 밤이 깊어서 일본 군대가 노략질을 하면서 쳐오는데 길가의 집들을 모두 불지르고 마을 사람 네 사람이 총살을 당하였다. 그 처참한 형상이 이에 이르러 심신이 아울러 놀라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1908년 근좌면 공전리에 사는 습재 이직신 문하에서 이량우, 윤창호, 홍기오, 정해문 등과 함께 수학했다. 1910년 4월 21세의 나리로 서울로 상경하여 이종두와 함께 양약국을 경영하였다. 그해 7월 말 한일병합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단암문고에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시국의 변천이 날로 심하고 나랏일은 점점 위태로워지니 사람이 다 통분하지 않은 이 없고 뜻 있는 사람 치고 분하고 의기심에 한탄하지 않는 이 없으나 나라의 운수가 장차 쇠하니 인도에 바름이 없어지고 밖에는 침략해 오는 적이 있고, 안에는 나라를 파는 도둑이 있으니 어찌 오래 갈 수 있으랴. 슬프다! 7월 25일에 이르러 한일합병의 유고가 선포되니 온 나라 안은 피눈물이 더하여짐을 깨닫지 못하겠고 정성스러운 마음에 통분을 아로새김을 누르기 어렵도다. 슬프고 원통하다! 어찌하여 하늘은 이 백성을 근심하여 건지지 아니하고 장차 나라의 운명을 오랑캐 손에 떨어뜨리려 하는고? 이천만 백성이 통곡하는 소리는 중천에 사무치는데 삼천리의 넓은 국토는 문득 임자를 잃었도다. 이 날을 당하여 우리 조선민족이 된 사람이라면 그 누가 불공대천의 원수임을 가슴 깊이 새겨두지 아니하랴.

(중략)

대개 오늘의 시국형세를 말하자면 나라는 망하고 임금은 없어지고 세상은 쇠퇴하고 도덕은 잦아들어 천운의 비색함이 그 극도에 다다랐는데 하물며 집과 내 몸이 극도에 달한 것을 다시 말해 또 무엇하랴. 지난날이 멀고 오래되어 상고할 수 없음은 운세이니 쫓는다 하더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요. 앞날을 계승함은 무궁한 이치라. 순하면 반드시 이르나니 스스로 사람의 도리를 닦음만 같지 못하고 세상일을 갈아 다스림만 같지 못하므로 드디어 옛일을 상고할 마음을 끊어 버렸다.}}

이후 1913년 4월 20일 충청북도 중원군 근좌면 면서기로 임명되어 근무하였으며, 1915년 4월 군 동리의 통폐합규정이 발표되어 근우면과 근좌면이 1개의 면으로 통합하면서 근우면사무소로 옮겨 근무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발발했다. 이용태는 <행년락기>에서 이 당시 국내 정세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해의 물건값은 아주 비싸서 쌀 한 섬의 값이 60원이요, 콩 한 섬 값이 25원 광목 한 자 값이 50전이요, 솔가지 나무 한 짐 값이 3원을 헤아리니 이것은 고금에 처음 보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기가 어려움을 또한 헤아리기 어렵도다. 여름철에 가뭄이 매우 심하여 비가 40여일 동안 오지 아니하여 오곡이 모두 타고 온갖 풀들이 다 말라서 인심이 몹시 어지럽더니 마침내 큰 비가 내려 얼마간의 곡물이 소생은 하였으나 한해가 심한 논은 짚을 거두어 드리지 아니하고 버린 것이 없는 곳이 없다. 수해도 또한 매우 심하여 얼마간 남은 곡물도 또 손해를 보아 수해와 한재가 아울러 극심하였으니 가히 흉년이라 하곘는데, 유독 치우치게 피해를 본 곳이 황해도와 평안도와 함경도와 경기도와 충청남도이다.

그해 4월 17일 제천읍내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용태는 동생 이용준이 만세시위에 가담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자신도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면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이후 1920년 봉양면 청년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봉양모범서당을 설립하여 교육에도 전념했다. 1922년 1월 1일 농민들을 위해 봉양면 소작인회를 발기하여 소작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그가 집필한 봉양면 소작인회 발기취지서는 다음과 같다.

시절은 봄과 가을의 다름이 있으나 그 성취하는 공업은 한 가지요, 사람은 가난하고 부자됨이 다르나 살아가는 형세는 마찬가지다. 하늘이 공정하여 삶을 좋아하는 덕이 없다면 만물을 길러내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능히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십팔 세기 이전에는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고 가난하면 부자에게 붙어서 서로 즐거워하고 서로 사랑하되 서로가 조금도 사이가 벌어지지 아니하고 각각 생활을 유지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풍속이 무너지고 인심이 각박하여져서 형이 잘 살고 아우가 가난하여도 못 사는 것을 좋아하되 애호하거나 위급함을 구하지 아니하고 아우가 강하고 형은 약하더라도 한갓 억센 팔힘을 준 것만을 한탄하되 사람의 도리로써 정의를 생각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떳떳한 사람의 도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이를 분개하지 아니할 것인가.


슬프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침에 모골이 송연하고 온 몸이 아프도다. 역사가 있는 민족이요, 성인 기자의 뒤를 이은 백성으로서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애닯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고생하여 일년 동안 힘써 농사지은 것을 모두 도조로 바치고 남는 것이 없으니 풍년에도 마침내는 몸만 고생하고 흉년에는 굶어 죽음을 면하지 못함이 오늘날 세상의 소작인들의 처참한 정상이다. 그러하니 우리들이 살아남아 있을 날이 어찌 오랠 것인가? 지난 대정 6년(1917년 정사) 이후로부터 토지에 부과하는 공과금이 해마다 높게 오르고 늘어감은 피하지 못할 시국 형세라 다만 백성들이 마땅히 바쳐야할 것이다. 그 공과금을 부담할 의무는 국가법률에 소유자로 지정되어 있으나 제천고을에 이르러서는 몇 사람의 자선가를 제하고는 법령의 어떠함에 구애됨이 없이 다만 옛날의 습관에 의지하여 거의 모든 것을 소작인에게 부담하게 하니 이것이 어찌 소작인을 애호한다는 본뜻일까 보냐. 해마다 이와같이 과거처럼 되풀이 한다면 구렁창과 언덕으로 굴러 떨어짐이 십 중에 팔구나 되리니 어찌 한심치 아니한가.

본 회의 취지는 한갓 제 몸만을 위한 계책이 아니요, 실로 우리나라의 전체 국민을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발기하노니 뜻있는 여러분께서는 모름지기 서로 돕고 서로 붙들어 동포들의 생활을 온전하게 한다면 천만다행한 일이 되오리다.

봉양면 소작인회가 결성된 시기는 일제가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제1차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던 시기로, 당시 일본 지도층은 일본의 만성적 공황을 대처하기 위해 한국을 상품판매시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공업원료, 식량공급지로서 수탈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경제구조를 재편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토지조사사업이 전격 시행되었고, 식료품가공 등의 경공업에 일본 국가자본의 투자를 증대시켜 고리대적, 자본주의적 착취와 함께 반봉건적 소작관계를 재편성했다. 봉양면 소작인회는 이러한 소작인들의 어려운 상황 호소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동포가 서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2년 8월 봉양농민조합을 조직하여 농민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24년 1월 9일 봉양면장에 임명되었다. 1924년 6월 3일에는 산업조합을ㅇ 설립하여 산업조합장에 선출되었고, 1928년 3월 3일애는 대동회를 발기하였고, 1929년 12월에는 대동흥업사를 발기하여 산업진흥, 풍속개량, 문화향상을 꾀하여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1931년 광산업에 착수하기도 했고, 1932년에는 농산물품평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33년 제천군 위촉으로 유림순회강연을 맡아 활동했다. 그리고 1934년 1월 30일 백운명잔에 임명되었고, 덕동간이학교를 설립했다.

한편, 이용태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대종교에 호감을 품고 1928년 3월 20일 경성의 대종교 남도본사를 찾아 입교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경성에 가서 대종교 남도본사를 방문하여 신가, 개천가, 단군교포명서 등을 입수하였고, <심일신고>, <신단실기> 등 대종교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탐독했다. 그러던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한 동생 이용준이 1939년 1월 베이징에서 아리요시 아키라 일본 공사 암살 계획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동생을 면회한 후 4월 21일 중국 베이징, 봉천, 선경, 하얼빈, 목단강, 동경성 등지를 시찰하고 귀국했다. 1939년 7월 3일 백운면장을 사직하고 10월에는 전선유도대회에 군 대표로 참가했다.

1939년 10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영안현 동경성 대종교총본사로 가서 3세 교주 윤세복을 만나 여러 차례에 걸쳐 대종교에 대한 해설을 듣고 감명받았다. 1940년 1월 참교가 되어 찬범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 7월 지교로 승진하여 경의원 참의에 취임했다. 그러나 1942년 일제가 대종교와 조선어학회 사건을 연결시킨 '임오교변'을 단행하여 대종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1942년 11월 19일 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 이용태를 비롯하여 21명의 대종교 간부들이 동시에 검거되었고, 대종교 총본사의 신간서적 2천여 권, 구존서적 3천여 권, 천진 및 인신, 각종도서와 교단 서류 600여 종이 압수당했다. 체포된 인사들 중 성하식, 김진호, 안용수, 이종주 등 4명은 혐의 사실이 없어 즉시 석방되었고, 나머지는 영안현 경무과에 설치된 특별취조본부에서 4개월간 심문받으며 고문과 악형을 당했다.

1943년 10월 1일 72세의 고령이었던 권영준이 면소되었고, 뒤이어 김진호, 김두천, 이성빈, 서윤제(독립유공자 서일의 맏아들) 등 4명은 교무무책으로 1944년 1월 2일 출옥했다. 이후 목단강성 경무청 특무과에서 2차로 3개월간 심문이 이어졌고, 1944년 4월 27일 목단강고등법원 제1호실에서 윤세복, 김영숙, 윤정현, 이재유, 이용태, 이현익, 최관 등 7명에 대한 공판이 개최되었다. 윤세복은 4일간 심문받았고, 그외 6명은 2일간 심문받았다. 1944년 5월 13일 윤세복은 무기징역, 김영숙은 징역 15년, 윤정현은 징역 10년, 이용태는 징역 10년, 최관은 징역 10년, 이현익은 징역 7년, 그리고 이재유는 징역 5년을 구형받았다. 다음달인 6월 26일 윤세복, 김영숙, 이현익, 이재유 등은 원심대로 확정하였고, 윤정현, 이용태, 최관 3명은 징역 10년에서 8년으로 감형되었다. 이 사건에 검거된 사람 중 10명은 혹독한 고문과 악형을 견디지 못하고 1943년 5월부터 1944년 1월 사이에 옥사했다. 대종교에서는 이들을 '임오십현', 또는 '순교십현'으로 지정하고 오늘날까지 기리고 있다.

이용태는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45년 8월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그는 <구금고황>이라는 옥중일기를 남겼는데, 검거 당시와 순교십현의 최후 상황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또한 옥중시 4수를 남겼는데, 영안현 유치감에서 지은 2수와 액하감옥으로 이감되어 지은 1수, 그리고 판결서를 받고 난후 지은 1수가 있다. 이중 판결서를 받고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서너해 갇혔으니 오랜 세월에 얼마나 많은 취조 받아 왔던가.


이제야 끝났다고 알려 오는데 액하의 감옥에서 살라고 한다.

일생을 마칠 것을 각오한 이몸 무엇을 바라고 기대할건가.

팔년 형 받았다고 근심을 할까 마음은 거울같이 고요하다.

광복 후 조국으로 귀환한 그는 상교 승질에 선임되었고, 경의원장에 피임되었다. 1946년 3월 6일 경의원 참의에 전임되었으며, 4월 1일 남도본사 선리에 임명되었고, 12월 1일 총본부 찬리를 맡았다. 1949년 2월 15일 남이도본사 선리에 임명되었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신하였다. 1956년 10월 8일 정교가대형호로 승질하였고, 1958년 6월 23일 종사편집부 주간에 임명되었고, 1959년 삼일원 대덕에 선임되었다. 1960년 2월 29일 총본사 부전무에 선임되어 2년간 역임하였고, 그해 4월 17일 경리감을 겸임하였다. 1961년 11월 17일 삼일원주에 피명되었으며, 1963년 5월 27일 총본부 교무부장에 전임되어 3개월간 맡다가 건강악화로 물러났다.

1964년 8월 15일 서울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9월 27일 정교가도형호에 추앙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유해를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