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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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信愛.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1년 1월 20일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이건세(李建世)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한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홀어머니를 따라 원산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고, 개성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塾)에 진학하여 낮에는 편물(編物)로 학자금을 벌고 밤에 공부를 하던 중 결핵에 걸려 1913년 3학년 때 중퇴했다. 다시 원산으로 돌아온 그녀는 1914년 성경여학교(聖經女學校)에서 공부한 다음 1918년부터 루씨여학교 두산리분교에서 교사로서 활동했다.

그녀는 교사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원산남감리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정춘수 목사가 그녀의 신심을 높이 평가하고 전도사로 임명했다. 이후 그녀는 손정도 목사와 현순 목사를 만나 그들의 영향을 받았고, 1919년 5월 장선희의 권유에 따라 혈성부인회(血誠婦人會)에 가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에 주력했다.

1919년 9월 강우규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을 계획하고 있을 때, 이신애는 한기동과 함께 강우규를 찾아가 군자금 모금을 부탁받고 민대식(閔大植)을 찾아가 군자금의 제공을 요구하는 한편,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탁명숙(卓明淑)을 통해 경성부 누하동 임재화(林在和)의 집에 강우규를 은닉시켜주고 의거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했다. 이 일로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그녀는 한동안 숨어지내야 했다.

이후 경성부 인사동에 거주하는 김상열(金商說)의 집에 기거하던 그녀는 한기동의 소개로 전협, 나창헌을 만나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해 여성 대표를 맡기로 하고 박정선과 한일호(韓逸浩) 등의 여성 동지를 규합하였다. 또한 11월 초순까지 김상열(金商說), 김익하(金益夏)·이종춘(李種春)·이겸용(李謙容)·김종진 등을 권유하여 대동단의 동지로 참가하게 했다.

그러나 1919년 11월 전협 등의 의친왕 망명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뒤, 대동단은 일제의 대대적인 수사로 인해 붕괴되었다. 그녀는 체포를 모면하여 한동안 은신하면서 나창헌, 정규식 등과 협의해 11월 25일 경성부 내에서 등사기를 사용하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유민임을 천하만국에 선언할 것을 계획했다. 그녀는 곧장 종교예배당에서 알고 지내던 박원식을 찾아가 독립선언서 1매를 보여주며 등사를 부탁했다. 그러나 박원식은 자신은 시골 출생이므로 글쓰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동대문 밖에 있는 안교일을 찾아가 그 뜻을 전했다.

안교일은 곧 승낙했지만 자신은 등사판기를 소지하지 않았으므로 원고와 등사원지를 마련하여 정희종이 봉직하고 있는 흥인학교(興仁學校)의 등사기를 빌려 창신동 93번지에 있는 그의 방에서 안교일의 주도 아래 「선언서」와 『독립신문』 호외를 8절지에 인쇄하여 김종진 숙소에서 나창헌과 이신애에게 교부했다. 그 후 이신애는 여러 차례 그 계획에 대하여 협의하면서 한일호·김상열·김익하·이종춘·이겸용 등에게 같은 계획을 알리고 함께 서명자가 되기를 권유했다. 박정선·김상열·이종춘·김익하는 선언서의 문사(文詞) 등에 대하여는 이를 간부에게 일임했다. 제2 독립선언의 의미를 담고자 서명자의 숫자는 상징적으로 33인으로 구성했다.

11월 26일에 박원식은 이신애와 만나 다음 날 선언서를 자동차로 뿌릴 뜻을 전달하였으며, 27일 밤에 정규식, 나창헌, 이신애, 박정선, 김종진 등을 만나 28일 오후 4시 30분에 안국동 광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했다. 이들은 26일 오후 3시경에 다시 만나 정규식과 이신애에게 1원을 주어 안국동 중국인의 집에서 당목(唐木)과 잉크를 사서 교부했다. 이에 이신애는 정규식과 함께 김종진의 집에서 정순화(鄭順和)·김종진을 만난 뒤 다음날부터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를 먹으로 쓴 깃발 두 장을 제작하여 휴대하고 안국동 광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틀간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점 조직 이외의 대중 동원 체제를 갖추지 못한 이들로서는 지난날 3·1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선동적인 방법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들이 구상한 방법에 따르면, 자동차 세 대를 구하여 오후 5시를 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하는데, 제1대에는 정규식이 타고 남대문의 조선은행 앞에서 출발하여 하세가와정과 광화문을 향하여 달리면서 전단을 뿌리도록 하고, 제2대는 이신애와 박정선이 타고 동대문의 한일은행 지점 앞을 출발하여 종로경찰서로 향하면서 선언서를 뿌리며 보신각 쪽으로 달려가도록 하며, 제3대는 이정이 정동 배재학당 앞을 출발하여 종로경찰서를 향하여 달리면서 전단을 뿌리도록 했다.

같은 날 저녁에 안교일은 나창헌으로부터 이강 공 외 32인 명의로 등사한 독립선언서 약 50매와 최은식(崔殷植) 외 29인 명의의 활판인쇄 선언서 약 50매를 26일 밤에 배포하라는 의뢰를 받고 이를 받아 강정희(姜正熙)로 하여금 이를 정희종의 집으로 보내 종로 5정목과 6정목의 민가에 배포하기를 의뢰하였다. 정희종은 다음날인 26일 아침에 선언서를 효제동 202번지 전대진(全大振)의 집에 가지고 가서 27일 만세운동의 계획 개요를 말하고 그에게 교부하였으며, 전대진은 이를 승낙하고 받아 같은 날 밤에 종로 5정목 노상에서 박용주(朴龍柱)에게 계획을 알리고 배포 분담을 의뢰하여 그 선언서 약 50매를 교부하고 두 사람은 각각 분담 구역을 정한 뒤에 종로 5정목과 6정목 각 민가의 대문 안에 선언서를 투입하여 배포했다.

이신애는 계획에 따라 자동차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자동차가 오지 않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김종진의 집에 가서 나창헌, 박원식, 전협의 아내 변화(卞和) 등과 만난 뒤 다음날인 11월 28일에 안국동 경찰관주재소 앞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다음날 28일 아침에 이신애는 박정선의 집에 도착하여 해당 계획을 알리고 참가를 요구했다. 같은 날 오후에 이신애, 정규식, 박원식 등은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라 쓴 깃발 각 한 폭을 제작했다. 오후 4시 반경에 이신애, 박정선, 정규식, 박원식은 차례로 안국동 광장에 모였다. 계획을 들어 알고 있던 이종진도 역시 그 운동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통행인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서 이신애와 정규식은 깃발을 흔들며 앞장서 조선 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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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이에 안국동주재소의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이신애를 비롯한 모든 인사들을 체포했고, 이신애는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 신분으로 수감되어 재판을 기다렸다. 그러던 1920년 3월 1일, 유관순과 같은 동에 수감되어 있던 이신애와 박정선 등은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해 옥중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미와 경부로부터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신애는 이로 말미암아 고막과 유방 파열의 고통을 받았으며, 나체로 신문을 받았다. 그후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 1심 판결에서 불온문서 반포죄와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안녕 질서를 방해한 정치범죄처벌령 및 조선형사령에 따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1922년 6월 1일 가출옥한 그녀는 일제 형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내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뒤 공주에서 한국부인회(韓國婦人會)를 조직하였고, 1947년부터 11년간 부녀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정부에서 마련해 준 대전시 문화동 자택에서 남편 문홍범(文洪範)과 함께 병고를 치르다 1982년 9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신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5년 그녀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