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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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卨.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0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군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경주 이씨 이행우(李行雨)와 벽진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고려 충선왕 시기 문하시중을 지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23대손이며, 조선 선조와 인조대 영의정을 지낸 이시발(李時發)의 11대손, 조선 현종대 이조판서를 지낸 이경휘(李慶徽)의 10대손이다. 그는 가난한 시골선비였던 부친 밑에서 자라다 7살 때 동부승지를 역임했고 진천군의 부호였던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13세 때인 1882년 4월 양아버지와 친아버지를 여윈 데 이어, 이듬해에는 친어머니마저 잃는 아픔을 겪었다. 3년상을 치른 뒤 16세 때 참판 서공순(徐公淳)의 장녀 달성 서씨와 결혼하였다. 그후 1887년경 서울 장동(長洞)에서 저동(苧洞)으로 이사했다. 이때 이웃에 사는 이회영·이시영 형제와 여준 등과 자주 만나면서 친분을 쌓았다.

송상도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 따르면, 이상설은 어릴 때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는데, 특히 수학 분야를 깊게 공부했으며,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까지 해독하였고, 법률에도 일가견을 보였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율곡 이이를 따라갈 만한 학자라는 평판을 얻었고, 25세 때인 1894년 갑오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 2등으로 급제한 뒤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된 뒤 세자시독관(世子侍讀官)과 비서원랑(秘書院郞) 등을 역임하다가 1896년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되었다. 그는 이 시기 육영공원 교사로 활동하던 호머 헐버트 등과 교류하며 수준 높은 외국어와 서양의 다양한 신학문을 익힘으로써 동서학문을 동시에 학습했다. 이시영은 훗날 이상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보재가 열여섯되던 해인 1885년 봄부터는 8개월 동안 신홍사에 합숙하면서 매일 과정을 써 붙이고 한문, 수학, 영어, 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때 보재의 총명 탁월한 두뇌와 이해력에 같은 학우들이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끈질긴 탐구열과 비상한 기억력은 하나의 기이지사(奇異之事)였다. 보재는 모든 분야의 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득달하였는데, 하루는 논리학에 관한 어떤 문제를 반나절이나 풀려다가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잠속에서 풀었다고 깨어서 기뻐한 일이 있었다. 학구열이 강해 학우들이 다 취침한 후에도 혼자 자지 않고 새벽 두세 시까지 글을 읽고도 아침에는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공부하였다. 기억력이 얼마나 비상하였던지 자는 동안 학우들이 한 이야기를 깨어서 역력히 기억하였다.

이상설은 잠시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맡다가 1896년 6월 탁지부 재무관에 임명되었지만 얼마안가 관직을 사임했다. 1898년 가을 이회영, 여준, 이강연 등 친구들과 회동하여 시국을 논하고자 자신의 서재를 연구실 겸 회의장으로 정하고 매일 회합했다. 그는 신학문을 광범위하게 공부하였는데, 특히 개화와 국권수호를 위한 국제정치와 법률의 대가라는 평판을 받았다.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24일자 기사에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상설씨는 대한에서 학문으로 제일류(第一流)이니, 재성(才性)이 절륜(絶倫)하고 조예가 심독(深篤)하여 동서학문을 실개통효(悉皆通曉) 연정(硏精)하였다. 성리문장 외에 특히 정치, 법률, 수학(算術) 등의 학문이 부강의 발판이 되는 학문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1903년 1월 30일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되었고[1], 1904년 5월 러일전쟁을 치르던 일본이 한국 정부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1906년 6월 22일 박승봉과 연명으로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4년 10월 14일 법부의 형법을 교정하여 편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2] 1904년 10월 29일 외부 교섭국장에 임묭되었다.[3] 이후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가 창립되었을 때 회장을 맡았다. 1905년 9월 6일 학부 협판에 임용되었고[4], 9월 11일 법부 협판에 임용되었으며[5], 11월 2일 의정부 참찬에 임용되었다.[6] 보름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4일에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의 생각에는 이번에 체결된 조약은 강요에 의해서 맺어진 것이니 이치상 무효로 되어야 마땅하고 회의에서 동의한 여러 흉역들은 나라의 역적이니 법에서 용서할 수 없는데도 지금까지도 성토하는 소리가 잠잠하여 수일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폐하가 무효를 극력 주장하고 준절히 따지고 엄하게 물리쳐야 하는데 역시 주벌을 단행하여 빨리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였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도리어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두목을 의정대신의 대리로 임용하여 신으로 하여금 그의 아래 반열에 애써 나가도록 하니, 신은 울분의 피가 가슴에 가득 차고 뜨거운 눈물이 눈가에 넘쳐흘러 정말 당장 죽어버려 모든 것을 잊어버렸으면 합니다.

폐하가 만약 역적을 비호한다면 무엇이 아까워서 신을 그냥 두며 또 신을 그냥 둔다면 무엇이 두려워 역적을 등용합니까? 아! 장차 황실이 쇠해지고 종묘(宗廟)가 무너질 것이며 조종조(祖宗朝)의 유민(遺民)들이 서로 이끌고 들어가 남의 신하와 종으로 되어버릴 것입니다. 신도 사람입니다. 어찌 치욕을 머금고 수치를 참으며 천연스럽게 다시 더러운 역적들과 함께 한 관청에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 신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고 신의 말도 이미 다하였습니다. 이후로 열번 상소문을 올려서라도 벼슬에서 반드시 교체되기를 힘써서 삼가 엄한 처단을 기다릴 뿐이니 폐하는 특별히 가엾게 여겨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더는 번거롭게 사임하지 마라."

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42년 11월 24일자 기사.

1906년 4월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자, 이상설은 이회영, 이동녕 등과 의논한 뒤 국외 망명을 결심했다. 그는 살던 집을 포함하여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그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삼아, 항일투쟁과 인재 양성을 위해 인천항에서 중국인의 상선에 올라 상하이로 갔고, 그 곳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8월 북간도 용정촌에 도착했다. 그해 10월 북간도 용정의 부호로서 천주교를 이끌던 최병익(崔秉翼)이 소유하고 있던 신축가옥을 교사로 매임하여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개설했다. 그는 서전서숙의 숙장으로서 교사 구입뿐만 아니라 교원의 월급, 교재 구입비, 학생들의 지필묵 구입비 등 운영 경비 전체를 전담하였고, 산술신서((筭術新書) 상하권을 지어 서양의 산술을 가르쳤다.

서전서숙의 교사 구입과 각종 운영경비 조달에는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했다. 서전서숙은 1907년 9, 10월경 폐교될 때까지 약 1년간 운영되었는데, 최대 7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의 기숙에 소요되는 경비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상설은 이 많은 돈을 오직 고향에서 정리한 재산으로 충당했다. <충청북도 진천군 양안((忠淸北道 鎭川郡 量案)>에 따르면, 이상설이 망명 이전에 소유한 토지는 진천군내 4개면(남변면, 북변면, 초평면, 월촌면)에 걸쳐 분포되었는데, 총 19.7정보에 이르며, 현 시가로 80~100억원을 호가했다. 이는 당시 진천군 상위 지주 18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가운데 논이 47필지에 7결31부5속이고, 밭이 25필지에 3결37부4속이며, 대지가 11필지에 70부1속이다. 또한 기와 1채와 초가 10채 등 11채의 가옥이 있었다. 이상설이 양부로부터 상속받은 서울의 가옥과 토지도 상당했는데, 대지가 약 500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듯 서전서숙을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근대학문을 가르치던 그는 1907년 4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준과 회견하여 그로부터 자신이 헤이그 특사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이상설은 서전서숙의 운영비 일체를 헤이그에 가는 비용으로 댔고, 서전서숙은 그 여파로 운영난에 빠져 1907년 9~10월에 폐교되었다. 이상설과 이준은 1907년 5월 21일 시베리아 철도 편으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여 6월 중순에 도착한 뒤, 러시아 주재공사 이범진과 아들 이위종을 만났다. 그들이 가지고 간 황제의 신임장과 각국 황제 및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황제의 친서는 경운궁에서 광무(光武) 11년 4월 20일자로 국새(國璽)와 황제의 수결(手決)을 찍은 백지 위임장이었다.

1907년 6월 24~25일경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뒤, 헤이그 시내 바겐슈트라트 124번지에 있는 융호텔(Hotel De Jong)에 숙소를 정하고, 거기서 태극기를 계양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하였다. 세 사람은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일제의 침략상을 널리 알려 열강의 후원을 얻고자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과 네덜란드 외무대신 후온데스를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넬리도프(Nelidof) 백작은 네덜란드에 책임을 미루었고, 후온데스는 이미 각국정부가 을사조약을 승인하여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했다. 세 사람은 미국, 프랑스, 중국, 독일 등 각국 대표들에게 협조를 청했으나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이에 7월 9일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했다. 이때 이위종은 자들에게 한국의 비참한 실정을 알리고 주권 회복의 지원을 호소했다. 그의 호소는 이른바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롤 명명되었고, 신문기자단 국제협회는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체택했으며, 현지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1907년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에서 사망하자, 이상설과 이위종은 유해를 헤이그의 뉴 아이큰다우(Nieuw Eykendunen) 공동묘지에 가매장한 뒤 유럽 각지를 순방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은 헤이그 특사를 한국 침략을 촉진하는 구실로 삼고, 1907년 7월 18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후 1907년 8월 8일, '밀사를 참칭하여 나라의 외교를 망친' 혐의로 이상셜을 교수형, 이위종과 이준을 종신징역에 처했다.[7] 이리하여 조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이상설은 1908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갔고, 1908년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시베리아 위임대표로 참석하여 대한인국민회 창설에 기여했다. 1909년 4월 정재관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 뒤 한민회 회장 김학만, 해조신문 주관 정순만, 윤일병 등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공동출자 회사인 원동임야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중국-러시아 접경지인 봉밀산을 독립운동기지로 삼기로 했다. 그는 봉밀산 일대를 사들여 개척하기 위해 저명한 유학자 이승희와 함께 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이 시기 의병 및 의거 활동을 전개하던 안중근과 교류했다.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뒤, 일제는 '공범자'로 한인 사회에서 가장 세력이 있던 최재형을 첫번째 인물로 거론하고, 두번째로 이상설을 주목했다. 일제 정보기록은 이상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원 학자로 족히 명망이 있다. 명치 38년(1905년) 한일협약 당시에 있어서는 의정부 참찬이었는데, 협약이 성립되자 이를 개탄하여 혐약반대의 상소주선자가 되어 동지와 더불어 경성 서대문, 동대문간을 분주하면서 국가장망이라 호언하며 이를 호소, 인심을 크게 동요케 하였다. 명치 39년(1906년) 3월 국권이 회복 안 되면 맹세코 경성 땅을 밟지 않겠다 하고 남부 저동 저택을 매각하고 간도로 가서 새로이 학교를 창설하고 배일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는데, 이준이 해아평화회의에 가게 됨에 당하여 공히 화란에 이르러 목적이 실패되자 헐버트와 공히 미국에 이르렀는데, 최재형 등은 이를 맞아서 모주(謀主)로 삼고자 여비를 보내어 블라디보스토크로 오게 하였다. 이래 노우에프스키, 블라디보스톡간을 왕래하면서 항상 극동총독부에 출입하여 최재형에 다음가는 제이위의 세력자였다.

일제는 안중근 의거의 수령은 최재형이고, 이상설이 그의 지시를 받들어 부하를 사주하여 벌인 일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일제는 안중근이 간도에서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어 그에게 사사하였고, 이상설이 헤이그로 떠나자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최재형의 부하가 된 것으로 여겼다. 즉, 일제는 안중근 의거의 정신적 배경이 이상설과 안중근의 만남에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의거 직전인 1909년 10월 14일 이상설이 하바로프스크로 떠났고, 안중근은 그 며칠전인 10월 9일 연추로 떠났다. 일제는 이상설의 하바로프스크 행을 '흉행'의 동지를 모집하기 위한 행동으로, 안중근의 연추행을 최재형을 만나 계획을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봤다. 안중근은 제3회 공술(1909.11.29)에서 거사 직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려 했지만 이상설이 다른 곳에 가버려서 만나지 못했다며, 이점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상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상설은 금년(1909년) 여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동인의 포부는 매우 크다. 세계대세에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범윤 따위는 만인이 모여도 상설에는 미치지 못한다. 동인의 의병에 대한 관념은 의병을 일으키니 한인은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을 기뻐한다고 이토가 중외에 선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코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으로서는 굳이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 사이에 불화를 초래하여 인심의 일치를 맺지 못하게 되면 동양의 평화가 스스로 파괴도는 것을 우려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수회 면회하여 그의 인물을 보니 기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의 그릇됨을 잃지 않았다.

안중근은 제5회 공술(1909.12.2)에서 이상설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상설은 재사이며 법률에 밝고 수리에 통달하며 영, 불, 일어에 통한다. 사람은 지위에 따라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므로 최익현, 허위 등에 견주면 용맹한 기상은 혹 적겠으나, 지위를 달리하므로 하는 수 없다. 세계대세에 통하고 애국심이 강해 교육발달을 도모하고 국가백년의 대계를 세우는 자는 이 사람일 것이다. 또 동양평화주의를 가지는 데에 있어 이 사람과 같은 친절한 마음을 가진 이는 드물다.

한편, 그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통합에 진력했다.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 갈등을 빛었다. 일제는 연해주 한인사회를 이범윤, 이갑, 최봉준, 정순만 등 '유력한 파의 수장' 휘하 및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는 자 등 5개의 파로 구분하거나, 지역을 중심으로 경성파(서울파), 서파(평안도파), 북파(함경도파) 등 3개 파로 나눠 파악했다. 이상설은 이렇듯 갈라진 연해주 한인사회의 통합을 이끌고자 했다. 이완희(李完熙)는 <범재 이상설선생전기소>에서 이상설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정치가로서의 선생은 본시 물욕이나 영달에 뜻이 없었던 만큼 행정에 있어서도 불의를 남달리 미워하여 그 행적은 공평무사하였고, 열렬한 애국심은 오히려 명리를 초개시한 것으로 미루어 만일 평화시였다면 그의 경륜을 펴고 현명한 재상으로서 후세의 공덕을 많이 남겼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

1910년 6월 21일 유인석과 함께 이범윤, 최봉준 등을 중재하여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통합한 13도의군을 창설하고 외교통신원을 맡았다. 1910년 7월 유인석과 함께 퇴위한 고종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줄 것, 고종이 직접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영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10년 8월 초 외신과 국내소식을 통해 한일병합이 임박하자, 이상설은 동지들과 함께 한일병합 무효를 선언할 항일단체로 성명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성명회는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하여 독립의 결의를 표방하였고, 일본 정부에 국제공약의 배신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보냈으며, 각국 정부에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가 항의하자, 러시아 정부는 1910년 8월 30일 이범윤을 비롯한 성명회와 13도 의군 주요 인물 42명을 체포하고 성명회와 13도 의군을 강제 해산했다. 이상설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다가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11년 6월 21일, 이상설의 절친한 동지였던 정순만양성춘 피살 사건의 여파로 양성춘의 부인 전소사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상설은 소식을 듣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가서 러시아 경관에게 형제간이라 칭한 뒤 정순만의 시체를 확인헀다. 이때 서북파인 최공도가 와서 악수를 청했지만, 이상설은 이를 외면했다. 이후 정순만의 장례를 둘러싸고 계파간 논쟁이 벌어지다가, 이상설의 주선으로 무사히 치를 수 있었따. 그러나 이 사건으로 경성파와 서북파의 반목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이는 곧 현실이 되었다.

당시 이상설은 러시아 관헌에게 한인사회의 정보를 알려주면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10여 명의 기호 출신 인사들을 러시아 헌병사무소에 정보원으로 배치했다. 이는 서북파를 견제하고 경성파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한 조치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점을 살려 서북파를 공격했다. 러시아 관헌에 안창호, 정재관, 이강, 김성무 등 서북파 4인을 고소한 것이다. 사유는 이들이 양성춘의 형 양덕춘과 미망인에게 정순만 살해를 교사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관헌은 이에 따라 4명에게 구인장을 발부하였고, 이강과 정재관은 이 사실을 눈치채고 미리 도피하였으나, 곧 법정에 출두하여 자신들이 무고하다는 걸 입증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상설은 이같은 대치 국면을 오래 끌고 가지 않았다. 그는 먼저 대립관계에 있던 이종호와 화해했다. 이보다 앞서, 연해주 한인 인사들은 1911년 6월 1일 권업회 발기회를 열었다. 그러나 기관지 <대양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서도파와 북도파간의 대립이 있었다. 급기야 북도파의 대표격인 이종호가 서도파 인사들의 권업회 참가를 저지하기 위해 이들을 구타하고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이상설이 러시아 헌병사령부에 정보원을 배치한 것이 이종호를 모해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경성파와 북도파간의 충돌이 일어나는 등 각파 간의 분쟁이 심했다. 이로 인해 권업회의 정식 창립은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했다.

그러다 정순만이 피살된 후, 이상설은 직접 이종호를 찾아가 오해를 풀었다. 그후 앞서 고소했던 정재관에게 편지를 보내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는 편지에서 신해혁명을 거론하며 조국의 참상을 애통해하고, 통일 단합을 이루고자 하나 세인이 모두 연해주의 당포는 '정모, 이모의 분위'라 하니, 우선 힘을 합쳐서 세인의 편견을 깨뜨리자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여비를 줄 테니, 치타에 있는 정재관더러 속히 여장을 꾸려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라고 했다. 이에 정재관이 응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왔고, 1911년 12월 19일 권업회가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이상설은 권업회 임시의장으로서 창립총회를 주재하였고, 의사부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신채호에 이어 <권업신문>의 주필 및 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한인사회의 계파간 화해와 단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북파 출신인 백원보는 안창호에게 권업회 조직 직후 정황을 편지로 알리면서, 이상설이 권업회 창립의 주역임을 인정하면서도 권립회 창립 주도를 비루한 생각에서 비롯된 운동으로 평가절하 했다.또한 창립 당시 권업회를 '비우비마(非牛非馬)의 임원조직'이라고 하여 계파간 연합체적 성격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편지는 서북파의 권업회에 대한 인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미봉적 연합이 언제든지 파열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결국 1913년 2월 초순,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발행되던 어느 신문에 이상설이 권업신문의 주필을 그만두고 러시아 당국과 한인 동포들의 내정을 일본인에게 밀고한다는 기사가 보도된 것이다. 이상설은 음해성 기사에 격분해, 하바로프스크를 향해 출발하면서 동지들을 향해 말했다.

이 기사는 이종호의 간계에서 나온 것이다. 도저히 장래에는 북파와 화합할 수 없을 것이다.

이후 이상설은 아무 변명도 없이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하바로프스크에서 잠시 은거했다. 그러다 밀정이란 오해가 풀리면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여 권업회를 이끌었다. 그리고 1914년 연해주를 비롯하여 북간도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을 규합하여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정도령(正都領)을 맡아 부도령 이동휘 등과 함께 정부를 이끌었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는 대한광복군정부가 한인 최초의 망명정부라고 평했고, 이상설이 '정통령'에 피선되면서 공화 정부를 수립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의 비서로 활동한 계봉우의 기록에 따르면, 대한광복군정부는 군대를 극비리에 편성하고 군자금을 수취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는 대한광복군정부가 '망명정부'가 아니라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조직이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계봉우는 3군구(제1군구: 연해주, 제2군구: 북간도, 제3군구: 서간도)로 나누고, 군구의 통제권은 '정도령'에게 있다고 했다. 그는 정도령이 <정감록> 이래로 조선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을 착안하여 고안된 명칭이라고 설명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기록에는 대한광복군 정부의 수장이 '정통령'이라 하였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설령 정통령을 쓴게 맞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에게 친숙한 대통령과는 거리가 멀다. 동양사회에서 '통령'이라는 용어는 예로부터 무관 직책 또는 군사와 관련된 직책에 사용되었다. 손병희는 동학의 통령이었는데, 3.1 운동 직후 체포된 뒤 1919년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예심을 받을 때 '통령'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심문을 받았다.

문:그때(동학 농민 혁명) 동학의 수령은 누구인가?


답: 최시형이었으나 연로하므로 나를 통령으로 추천하여 사실상 내가 수령으로 있었고, 전라도 전봉준과 3인이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문: 그때 피고는 신정부를 수립하려면 어떤 정체를 하려고 생각하였는가?

답: 그 당시 정부 체제를 논할 시대는 아니었고, 착실한 사람을 택하여 정부를 다시 조직할 생각이었고, 이조(李朝)를 전복할 목적은 아니었다.

문: 피고는 동학의 통령으로 있을 때 정부를 없애고 자신이 정치를 할 포부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답: 통령이라고 하는 것은 군사를 일으키는 데 있어 통솔하는 것을 명명한 것이지, 정부를 정복하고 내가 정부를 조직한다는 것은 아니다.

즉, 통령이란 정부를 대표하는 수반인 대통령의 개념이 아니라 군사 단위의 지휘자를 일컫는 것이었다. 이상설은 고종 황제를 연해주로 망명시킨 뒤 독립운동의 수장으로 옹립할 뜻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다. 고종이 자신을 헤이그 특사로 보내는 등 항일운동에 헌신한 점을 강조하며, 모든 인민이 고종을 받들어 독립을 쟁취하자는 논설을 쓰기도 했다. 그런 그가 국왕을 부정하는 공화정을 기반으로 한 정부를 수립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한편 계봉우의 기록에 따르면, 이상설은 '정도령'의 직책을 곧 '자퇴'하였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관련 기록이 부족해 확실하지 않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과 동맹을 맺은 러시아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의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했다. 이로 인해 권업회와 대한군정부 모두 강제해산되었다. 이상설은 러시아에서는 더 이상 독립운동을 이룰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상하이로 이동한 뒤 신규식, 박은식, 유동열 등과 연합하여 1915년 3월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그는 당의 본부장을 맡았고, 박은식이 감독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916년 10월부터 중병에 걸려 니콜리스크 병원에서 요양했다.

윤병석은 <이상설전>에서 이상설이 1917년 3월 2일에 사망했다고 주장하였고, 국가보훈처는 이 날짜를 음력으로 보고 양력으로 환산한 4월 22일로 순국일을 확정했다. 그러나 1917년 4월 4일자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대리가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이상설은 1919년 4월 1일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시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1917년 4월 10일자 블라디보스토크 파견원의 보고는 더욱 구체적이다. 이에 따르면, 이상설은 전년도 10월부터 병원에 입원, 요양 중이었다가 중환으로 '대년병원(大年病院)'에 입원해 치료받던 중 4월 1일 오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상설의 사망 소식은 <매일신보> 1917년 4월 17일자 '이상설이 노령에 객사'라는 기사를 통해 국내에도 전해졌다. 기사에 따르면 그가 신병에 걸려 음력 윤 2월 10일 시베리아의 니콜라에프스크에서 사망했는데, 4월 15일 경성에 있는 아우에게 부음이 도착했다고 한다. 1917년 윤 2월 10일은 양력으로 4월 1일이다. 이러한 정황을 볼때, 이상설의 정확한 사망 일자는 1917년 4월 1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상설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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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