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읍성(邑城)은 조선시대에 지방별로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던 을 의미한다. 당연히 해당 지역에서 사람이 많이 사는 중심지 일대에 건설이 되었다. 시대별로 읍성의 수는 다소 변동이 있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당시 335개의 행정구역이 있으며 이 중 읍성이 기록된 곳은 96개소 정도였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당시 330개의 행정구역 중 160개소의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외에 2~3개소의 성곽이 있는 곳도 있어 실제 성곽으로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곳이 190여개소로 나타난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간행된 여지도서에서는 334개의 고을 중 읍성이 있는 고을은 107개로 나타나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비해 대폭 감소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상당수 읍성이 파괴되었으나 후대에 수리를 하지 않으면서 상당수가 퇴락한 것을 반영한다.

특성

한국의 읍성은 지방 행정부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 내에는 관아가 있어서 행정과 군사적인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주로 서남해안 지역과 북부지방에 집중되어 있는데 평지에만 성을 쌓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인근의 야산을 끼고 함께 성을 쌓는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또한 군사 중심지였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방어력은 거의 없고 관의 통치 중심지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형식상의 성을 쌓은 것이 대다수여서 전란이 발생할 때 실질적인 방어는 인근의 산성으로 피난을 하여서 농성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이러한 읍성의 특성은 민과 관이 함께 거주하면서 생활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읍성 내외의 거주민은 일종의 운명공동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영주나 귀족과 같은 지배층만 지키는 역할을 한 서양이나 일본의 성(Castle, Citadel)과는 다른 성격의 방어시설이라 할 수 있다.

읍성의 축조방식과 시설물

읍성의 축조는 기본적으로 토축과 석축을 병행하여 이루어졌으며 체성은 도성 축조기법에 따라 내탁부[1]가 토사로 경사면을 이루도록 축조하였으나 세종 20년에 성벽을 모두 석재로 쌓도록 하고 토사로 이루어진 내탁부도 석재로 계단을 이루도록 하면서 읍성의 석축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석축화 이후 오히려 성이 단기간에 붕괴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5년만에 내탁부를 토사로 경사면을 축조하도록 양식이 바뀌게 되었으며 이러한 양식은 조선시대 건설된 읍성 및 다른 대다수 성곽 구조물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양식이다.

행정시설

  • 객사
  • 아사
  • 향청

읍성 내부에 있는 이 세 시설은 각각 중앙정부의 왕, 고을의 수령, 고을의 향민을 상징하는 건물로 읍성 내 핵심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통상 객사와 아사가 읍성 중앙부에 위치하였으며 이들 건물은 단일 건물로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을 수령의 집무실이라 할 수 있는 동헌과 내아 등에 함께 모여있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외에 읍성의 성격에 따라 읍창, 군기고, 화약고, 환창 등의 창고시설과 향교와 함께 제사를 위한 시설로 문묘와 사직단을 두었다[2] 이외에 읍성의 규모에 따라 읍성 내에 읍시(시장)를 개설한 읍성도 있었다.

방어시설

  • 성문 : 역할에 딸 정문, 간문, 암문, 수문으로 구분하며 성곽의 규모나 목적, 지형 등에 따라 그 수가 결정된다. 문의 형식은 홍예식, 평거식, 개거식이 있으며 홍예식 성문이 가장 높은 등급의 문에 해당한다.
  • 치성 : 성 밑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제도상 전면 15척 좌우 각 20척을 돌출시키는 규모로 규정되어 있으며 설치시 간격은 150척마다 1개소를 두도록 하고 있다. 이를 현대 단위로 환산하면 전면부 7m, 돌출 길이 9.4m이며 70m를 기본간격으로 한다.
  • 옹성 : 공성전에서 가장 공격이 집중되고 취약한 부분인 성문을 보강하기 위한 시설로 개구부는 중앙 또는 좌, 우 한쪽으로 결정된다. 보통 50~60척 정도의 길이로 현대 기준으로는 23.4~28m가량 되는 규모가 일반적이다.
  • 해자 : 성벽 주변에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 하천을 이용하여 장애물을 설치, 성벽의 방어물을 증진시키는 시설이다. 만일 성문 정면부에 해자가 있을 경우 별도의 교량시설을 두도록 하고 있다.


읍성의 철거

한반도에 있는 읍성은 대구읍성이 1906년 경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이 일본인들의 주장을 등에 업고[3] 철거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읍성철거령에 의하여 전국의 거의 모든 읍성이 헐려버리고 말았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도시들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도로를 건설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실제로는 한국을 식민지화 하는 데 있어서 한국의 방어거점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와 각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읍성을 없애버리면서 정신적으로 한국인들이 모일만한 구심점을 제거하여 식민통치를 수월하게 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 결국 이 틈바구니에서 온전히 살아남은 읍성은 얼마 되지 않고 나머지 읍성들은 아예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거나 일부분만 남아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나마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한 채 남아있는 읍성은 고창읍성, 낙안읍성, 해미읍성 정도가 있다. 고창읍성은 입구만 평지이고 사실상 산성이라 도시를 만든다는 명분이 서지 않았고, 낙안읍성은 성 뒤편이 죄다 산이라서 새로 길을 내기 위해 성을 허문다는 명분이 전혀 서지 않아서 살아남았으며, 해미읍성의 경우는 내부를 텅 비워버리고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신사를 세우게 되면서 살아남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존 읍성들의 경우 원형을 보존한 경우는 거의 없으며 생활 중심지에 자리한 이유로 도시 개발에 따라 그 성곽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경우도 성문이나 성벽 일부 구간 정도만 남아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다만 읍성 내부의 마을은 지명에 그대로 잔존한 경우가 많으며 현재 지적도상에서 성내리, 성내동과 같은 지명으로 해당 동리의 경계와 도로 가로망으로 당시 읍성이 있었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지방자치제도 시행 이후 읍성이 일종의 관광자원에 해당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일부 구간이라도 복원을 하거나 남아있는 성벽을 활용하여 공원으로 꾸민 경우도 있다.

현존 읍성

명칭은 읍성이 아니지만 읍성의 기능을 수행한 성

  • 한양도성 : 엄밀히 말하면 왕성으로 읍성의 등급은 아니다.
  • 수원화성 : 본래 수원읍성은 다른 곳[4]에 있었으나 화성 건설로 읍치가 이쪽으로 옮겨졌다. 이쪽은 왕이 오갈 수 있는 행궁이 있어서 일반적인 읍성이 아닌 행재성이라는 별도의 등급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 진주성 : 읍성의 명칭은 붙어있지 않지만 읍성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형태상으로는 산성에 더 가까우며 군사적 목적으로도 함께 사용된 병영성에 해당한다.
  • 공산성 : 이름부터 대놓고 산성이지만 당시 공주 일대의 행정, 군사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하였다.
  • 남한산성 : 숙종 이후 광주부를 광주유수부로 승격하고 유수부 관아를 아예 산성 안으로 옮겨버렸다. 남한산성 행궁에 있는 집무실이 바로 그것.

원형을 완전히 보존한 읍성

일부라도 남아있거나 후대에 복원한 읍성

터만 남아있거나 기록만으로 존재하는 곳

무지하게 많다. 지방 도시나 읍면소재지에 성내리, 성내동, ○문리[5] 같은 지명이 있으면 성의 흔적이 전혀 없더라도 읍성이 있었던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 심지어 지적도를 확인하면 당시 성의 모습 그대로 지적도에 반영된 경우도 있다.

참조

각주

  1. 성벽 안쪽부분
  2. 읍성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자리한 경우도 꽤 많은 편
  3. 실제로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정부의 승인도 받지 않고 읍성을 철거한 그를 징계하려고 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가 그를 비호하여 징계안을 철회하게 했다.
  4.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5. 동문, 서문, 남문, 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