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개혁

을미개혁은 일반적으로 을미사변이 발생한 1895년 10월 8일부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친일 개화파 정권이 붕괴한 1896년 2월 11일까지의 기간에 일본의 압력 하에 조선에서 추진된 개혁 시도들을 일컫는다.[1] 이를 1894년부터 추진된 갑오개혁의 연장선에서 보아 제3차 갑오개혁이라 하기도 하는데, 제2차 갑오개혁이 종료된 시점이 박영효가 일본으로 2차 망명한 1895년 7월 7일이므로 이 날짜부터를, 혹은 그 후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한 1895년 8월 24일 이후부터를 제3차 갑오개혁의 기간으로 보기도 한다.[2]

을미개혁의 배경 : 을미사변

2차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고 박영효 내각이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은 이노우에 카오루 공사가 주도한 조선의 보호국화 정책이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씨 세력을 포섭하여 김홍집 일파와 함께 새로운 친일 정권을 구성하게 하려 공작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후임 미우라 고로에게 공사직을 내주고 귀국하게 된다.

1895년 8월 24일에 조각(組閣)이 완료된 제3차 김홍집(김홍집-박정양 연립)내각에는, 조정 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밀어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고종과 민씨의 의중에 따라 친미·친러 성향의 정동파 인사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또한 박영효 망명 후 기존에 갑신파로 분류되던 서광범이나 윤치호 등도 정동파에 가담했기 때문에 정동파의 주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정동파가 주도한 제3차 김홍집 내각은 내정에서 일본 영향력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을 주된 사명으로 삼았다. 1895년 10월 초에 어윤중, 유길준 등 친일 개화파(갑오파) 관료들이 해임되었으며, 특히 훈련대 장교들이 대거 해임되어 군권에서 친일파의 영향력이 제거되었다. 나아가 이범진 등 정동파는 훈련대를 아예 해산하고 시위대만을 존치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 같은 결정은 10월 7일에는 공식적으로 미우라 일본 공사에게 통보되었다.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예비역 육군 중장 출신으로서 조선 사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인물이었다. 미우라가 주 조선 일본 공사로 임명됐다는 것은 일본의 한반도 정책 변화를 상징한다. 즉, 미우라는 일본이 다른 열강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일본 단독으로 한반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로서, 미우라의 임용은 이노우에 시기보다도 더욱 강압적으로 조선을 압박하여 사실상의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일본의 의중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미우라는 훈련대가 해산되기 전에 민씨를 살해할 계획을 세워, 훈련대 해산 문제로 불만을 품은 조선인 장교들을 포섭해 두고 있었다. 10월 7일 훈련대 해산이 공식 통보되자 미우라는 훈련대의 무장이 해제되기 전인 10월 8일을 거사일로 정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낭인, 일부 훈련대 소속 군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민씨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이 자행된다.

을미사변 직후 일본 공사관은 조정에 압력을 행사하여 정동파가 주도하는 제3차 김홍집 내각을 붕괴시키고 친일 내각인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킨다. 어윤중과 유길준 등 갑오파 인사가 재임용되었고, 정동파 인사들은 해임되었으며, 박정양은 을미사변의 주동자를 훈련대 해산에 반발한 군인들로 지목하는 내부 고시에 서명할 것을 거부하다가 지방직으로 좌천되었다.

을미개혁의 내용

대외관계 관련

  • 국호를 '대조선국'에서 '대조선제국'으로 격상 (1895년 10월 15일, 을미사변 직후, 제4차 김홍집 내각(갑오파 주도))
  • 독자적 연호 '건양' 제정 (1895년 12월 30일)
  • 원구단(圜丘壇) 건립 결의 (1895년 7월 12일, 제3차 김홍집 내각(정동파 주도)) : 영·러·미·일 등의 반대로 보류됨

정부 기구 개편

내각-궁내부 간 분리를 통해 왕실의 권한을 제한하고 행정부인 내각의 독립적 권한을 확보 및 강화하고자 하는 조치는 1~3차 개혁 전반에 걸쳐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3차 개혁 시기에 있어서 이 조치가 새삼스럽게 다시 필요해진 부분은 박영효가 실각하는 과정에서 왕비 민씨가 정계의 전면으로 재진출하여 민씨 일파의 영향력이 다시 증대했기 때문이다. 김홍집 등 갑오파는 내각과 궁내부 간 권한 영역 분리에 관해 고종이 조칙을 반포하게 함으로써 왕실의 내정 관여를 제한하려 하였다.

을미사변 이후인 1895년 12월 25일에는 <궁내부 관제(宮內府官制)>가 개정된다. 이 개정은 앞선 고종의 조칙에서 "내각과 궁내부는 관제의 정한 대로 각기 권위를 격수하여..." 하라고 한 것에 따른 것인데, 이 시기의 개정에 따라 궁내부의 관제는 오히려 2차 개혁 때보다 덜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이는 을미사변으로 국내외의 대일 여론이 악화되어 친일 개화파 정권의 기반이 취약해지는 상황에서 내각의 왕실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음을 반영한다.[3]

지방행정제도 개혁

박영효 내각 당시인 1895년 6월 18일에 23부제 지방제도 개편이 있었으나, 지방 행정구역 체계가 갑작스럽게 큰 규모의 변화를 겪자 군·현의 병합 사무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지체되고 있었다. 제4차 김홍집 내각은 1895년 10월 25일 군현의 현황 파악을 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또한 12월 12일에는 <향회조규(鄕會條規)>와 <향약판무규정(鄕約辦務規程)>을 제정했는데, 이는 초보적인 민주적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자 했던 시도의 성격이 있다. 이(里)·촌·동의 대표인 '존위'와 면의 대표인 '집강'을 "반상(班常; 양반인지 상민인지)을 구(拘; 구애)치 물(勿; 아니)하고 권선(圈選; 투표로 선출)"했고, 각급의 향회(鄕會)인 이회·면회·군회에서 공동 회의를 통해 교육, 산업 진흥, 공공사업, 재난 대응 등에 관한 사항을 자체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 갑오개혁 시기의 개혁 주체들은 전국 규모의 의회 설치는 시기 상조라 판단하여 추진을 보류한 대신, 기초 지방 단위에서부터 자치 조직을 보급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도입하려고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4]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을미개혁(乙未改革)' 항목
  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제3차 개혁의 내용>
  3.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정치제도의 개혁>
  4.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지방행정제도의 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