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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맥락에서 미우라는 훈련대가 해산되기 전에 민씨를 살해할 계획을 세워, 훈련대 해산 문제로 불만을 품은 조선인 장교들을 포섭해 두고 있었다. 10월 7일 훈련대 해산이 공식 통보되자 미우라는 훈련대의 무장이 해제되기 전인 10월 8일을 거사일로 정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낭인, 일부 훈련대 소속 군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민씨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이 자행된다.
이 같은 맥락에서 미우라는 훈련대가 해산되기 전에 민씨를 살해할 계획을 세워, 훈련대 해산 문제로 불만을 품은 조선인 장교들을 포섭해 두고 있었다. 10월 7일 훈련대 해산이 공식 통보되자 미우라는 훈련대의 무장이 해제되기 전인 10월 8일을 거사일로 정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낭인, 일부 훈련대 소속 군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민씨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이 자행된다.
을미사변 직후 일본 공사관은 조정에 압력을 행사하여 정동파가 주도하는 제3차 김홍집 내각을 붕괴시키고 친일 내각인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킨다. 어윤중과 유길준 등 갑오파 인사가 재임용되었고, 정동파 인사들은 해임되었으며, 박정양은 을미사변의 주동자를 훈련대 해산에 반발한 군인들로 지목하는 내부 고시에 서명할 것을 거부하다가 좌천되었다.

2018년 11월 9일 (금) 19:32 판

을미개혁은 일반적으로 을미사변이 발생한 1895년 10월 8일부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친일 개화파 정권이 붕괴한 1896년 2월 11일까지의 기간에 일본의 압력 하에 조선에서 추진된 개혁 시도들을 일컫는다. 이를 1894년부터 추진된 갑오개혁의 연장선에서 보아 제3차 갑오개혁이라 하기도 하는데, 제2차 갑오개혁이 종료된 시점이 박영효가 일본으로 2차 망명한 1895년 7월 6일이므로 이 시점 이후를 제3차 개혁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볼 수도 있다.

을미개혁의 배경 : 을미사변

2차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고 박영효 내각이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은 이노우에 카오루 공사가 주도한 조선의 보호국화 정책이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씨 세력을 포섭하여 김홍집 일파와 함께 새로운 친일 정권을 구성하게 하려 공작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후임 미우라 고로에게 공사직을 내주고 귀국하게 된다.

1895년 8월 24일에 조각(組閣)이 완료된 제3차 김홍집(김홍집-박정양 연립)내각에는, 조정 내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밀어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고종과 민씨의 의중에 따라 친미·친러 성향의 정동파 인사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또한 박영효 망명 후 기존에 갑신파로 분류되던 서광범이나 윤치호 등도 정동파에 가담했기 때문에 정동파의 주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정동파가 주도한 제3차 김홍집 내각은 내정에서 일본 영향력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을 주된 사명으로 삼았다. 1895년 10월 초에 어윤중, 유길준 등 친일 개화파(갑오파) 관료들이 해임되었으며, 특히 훈련대 장교들이 대거 해임되어 군권에서 친일파의 영향력이 제거되었다. 나아가 이범진 등 정동파는 훈련대를 아예 해산하고 시위대만을 존치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 같은 결정은 10월 7일에는 공식적으로 미우라 일본 공사에게 통보되었다.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예비역 육군 중장 출신으로서 조선 사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인물이었다. 미우라가 주 조선 일본 공사로 임명됐다는 것은 일본의 한반도 정책 변화를 상징한다. 즉, 미우라는 일본이 다른 열강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일본 단독으로 한반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로서, 미우라의 임용은 이노우에 시기보다도 더욱 강압적으로 조선을 압박하여 사실상의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일본의 의중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미우라는 훈련대가 해산되기 전에 민씨를 살해할 계획을 세워, 훈련대 해산 문제로 불만을 품은 조선인 장교들을 포섭해 두고 있었다. 10월 7일 훈련대 해산이 공식 통보되자 미우라는 훈련대의 무장이 해제되기 전인 10월 8일을 거사일로 정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낭인, 일부 훈련대 소속 군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민씨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이 자행된다.

을미사변 직후 일본 공사관은 조정에 압력을 행사하여 정동파가 주도하는 제3차 김홍집 내각을 붕괴시키고 친일 내각인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킨다. 어윤중과 유길준 등 갑오파 인사가 재임용되었고, 정동파 인사들은 해임되었으며, 박정양은 을미사변의 주동자를 훈련대 해산에 반발한 군인들로 지목하는 내부 고시에 서명할 것을 거부하다가 좌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