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IVS IVLIVS CAESAR. BC 100 ~ BC 44
그는 결코 황제가 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히 황제를 뜻하게 되었다.
개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가 낳은 걸출한 인재이며, 인류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
공화정 체제의 모순으로 혼란을 겪던 로마를 대대적으로 개혁한 위대한 정치가라는 평가와 공화정을 박살낸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갈리아의 제부족을 쓸어버리며 영향력을 높인 후, 로마 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파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구현하려 했던 원수정 체제는 그의 후계자이자 양자인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충실히 구현하였다.
저서로 갈리아 전기, 내전기가 있다. 특히 갈리아 전기는 고전 라틴어를 학습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교본 중 하나이다.
'브루투스 너마저'는 카이사르 본인이 한 말은 아니며,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극의 대사이다.
생애
출신 및 청년기
카이사르 가문은 로마의 유서 깊은 유력 가문이었지만, 카이사르 대에 와서 로마 정계를 휩쓴 유력 인물을 배출하지는 못하여 그 세가 많이 위축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의 고모부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한미한 가문 출신이지만 유구르타 전쟁과 갈리아 족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군공을 세우고 군제 개혁을 실시한 당대의 실력자였다. 마리우스는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지만 평민 출신으로 입지전적인 출세를 한 인물인데다가 평민이 주축을 이루는 군대를 대표하는 실력자로서, 민중파의 상징적 인물이 된다. 거기다가 마리우스의 후계자 노릇을 한 킨나의 딸과의 결혼을 통해 카이사르는 유년기부터 민중파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유년기는 독재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집권시기였다. 때문에 카이사르는 유년기의 많은 시간을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유랑하면서 지내게 된다.
술라의 사후 로마로 돌아와서 변호사 활동과 법무관 활동으로 공직에 발을 디디고 차근 차근 경력을 쌓아 나간다. 동년배의 폼페이우스보다는 한참 느리지만...
제1차 삼두정치
41세가 된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도전할 만한 경력과 나이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 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던 민중파를 상징하던 인물인 탓에 원로원 귀족들의 견제가 매우 심했고, 특별한 전공이나 업적이 없었던 탓에 그 견제를 극복할 만한 열렬한 민중들의 지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와의 야합을 통해 집정관 당선에 성공한다. 폼페이우스 엄청나게 쌓아올린 군공 탓에 민중들의 지지가 확고했으나 원로원의 견제가 워낙 심했고, 때문에 견제가 덜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표를 대신 받아 집정관이 되고, 크라수스가 돈을 대는 3자 협상 구조였다.
결국 집정관이 되는데 성공 한 카이사르는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하여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을 만한 법안을 여럿 내놓는다. 원로원 의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지만 정치적 수완과 폼페이우스의 개인적 인기, 민중의 지지를 적절히 활용 하여 모두 통과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를 통해 폼페이우스의 지지세력을 자신에 대한 지지세력으로 포용하는데 성공하고 유력가문의 정치유망주 A 에서 순식간에 로마 정계의 거물이 된다. 이를 굳히기 위해서 로마 공화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군공이었다. 군공을 세우기 위해 그는 자신의 임지(집정관 임기가 끝난 전직 집정관이 총독으로 부임하는 땅)를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로 선택한다. 카이사르가 더이상 거물이 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던 원로원은 이를 저지하고자 하나 이 또한 실패한다.
갈리아 전쟁
지금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는 것은 경제적인 가치는 딱히 없었으나 기원전 390년 무렵 갈리아 족의 대규모 남하로 인해 로마 시내가 개털리고 초토화 된 기억이 있고, 기원전 102년에도 대규모 남하를 한 적이 있으나 이때는 카이사르의 고모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휘 하에 로마가 막아낸 적이 있다. 갈리아 지역을 재패하는 것은 로마 제국의 안보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모부에 이어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면 민중파의 후계 구도를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다는 부분이 있었다.
로마에 순종적인 부족은 특권을 주어 다른 부족에 대한 지배권을 주고, 반항하는 부족은 군사력으로 짓밟는 정복 작업을 차례 차례 거듭하며 갈리아 지역을 제패해 나가던 가운데, 갈리아 전쟁 7년차에 대위기를 맞이한다. 베르킨게토릭스라고 하는 젊은 대족장을 중심으로 갈리아 전역이 봉기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봉기한 갈리아인들은 친 로마 갈리아 부족을 차례 차례 공격하기 시작했고 카이사르는 이를 막아내기에 급급해진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도 카이사르군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수는 없었고, 결국 청야 전술로 로마를 몰아내기로 결의한다. 유일하게 청야 전술에 참여하지 않은 갈리아인들의 도시 아바리쿰은 카이사르의 공격을 받아 초토화되고 약탈당하는데, 이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중심으로 갈리아인들의 단합이 더욱 굳건해지는 결과를 맞이한다. 청야전술에 말려서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점점 이탈리아 반도 쪽으로 밀려나게되고, 종국에는 전 갈리아 인들이 베르킨게토릭스 휘하의 반 로마 진영에 가담하게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 당시 카이사르의 상황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상태로, 7년간 온갖 고생을 해 가며 정복한 부족들은 다 등을 돌렸고, 점령한 영토는 죄다 잃었으며, 병사도 잃었기에 이 상태로 로마에 귀국하는 순간 카이사르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나는 상태였다.
그러나 상황을 오판한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에게 정면 대결, 즉 회전을 걸어버린다. 이 시대의 로마 군단병은 그 구성 성분을 로마 시민으로 제한했기에 머릿수에 있어서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당대 유럽세계 최강이었는데 엄격한 규율, 수백년동안 지중해 각지의 다양한 민족과의 전쟁을 통해 발달한 전투 전술교리, 시민병이기에 유지되는 강한 결속력과 높은 사기로 인해 그냥 아무나 긁어모은 잡병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리엔트 군주들도 2~3배 규모의 용병단을 투입한 로마와의 전쟁에서 번번히 발리곤 했었다. 하물며 오리엔트 용병보다도 질적으로 떨어지는 갈리아 군이 로마군에 정면으로 꼬라박은 것은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인생 최악의 위기를 반전시킬 기회였다. 갈리아 군은 쪽수를 믿고 삼방향으로 포위했지만 되려 삼방향에서 각개격파 당하며 탈탈 털린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서둘러 패잔병을 수습하여 알레시아에 농성하고, 카이사르 휘하의 5만여 로마군은 알레시아를 포위한다. 뒤이어 베르킨게토릭스를 구원하기 위하여 알레시아를 포위한 로마군을 또 다시 갈리아 군이 포위하고, 35만의 갈리아 군을 로마군은 앞뒤로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또 털어버렸다. 되려 갈리아 전역의 군대가 결집되어 로마를 상대했는데도, 전략적으로 우월한 상황임에도 탈탈 털리고 또 털리는 상황이 발생해버리자 베르킨게토릭스도 전의를 완전히 잃고 항복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7년간의 정복활동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으나 총결집된 갈리아 군대를 두 차례 완파함으로써 위기를 반전시키고 갈리아를 완전히 재패할 수 있게 된다. 호전적이고 순종을 모르던 갈리아인은 이후 충실한 로마 속주민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내전
카이사르가 갈리아에 가 있는 10년 동안, 이른바 "삼두정치"에 끌려다니기만 하던 로마 원로원의 정세가 바뀌기 시작한다. 우선 삼두의 한 축인 크라수스가 파르티아로 떠난 원정 도중에 카르헤 전투 라고 일컬어지는, 로마 공화정 역사상 최악의 졸전으로 평가되는 전투 끝에 전사하게 되면서 역사에서 퇴장하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애초에 평민파로 분류되던 인물이 아니라 되려 원로원 보수파를 상징하는 술라의 심복이었고, 술라의 쿠데타 과정에서 평민파를 철저하게 숙청하는데 앞장서던 인물이다. 정치적으로 반대 진영에 속해있었지만 일시적으로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하였고,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의 결혼을 통해서 유지되던 정치적 동맹이었는데, 율리아가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게 되면서 그 결속이 약해지게 된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속주 총독이 되어 있는 동안 원로원에서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뜻대로 정국을 주도해 주길 기대했으나 이는 점차 어긋나기 시작한다.
10년 임기의 총독을 마치고 로마에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갈 준비를 한다. 엄청난 전공을 쌓은 카이사르가 개선식을 마치고 선거에 출마하면 집정관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전에 군대를 해산하고 시민으로서 로마에 들어오라고 명령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반역으로 간주한다는 통첩을 날린다. 10년전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군대를 해산했다가 자기 부하들에게 퇴직금 봉토도 나눠주지 못하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휘둘리는 것을 본 바 있는 카이사르는 이를 따를 수가 없었다. 같은 보수파였던 폼페이우스에게도 그러했는데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인 자신이 그대로 이행했다가는 정치적 생명 뿐만 아니라 일신이 정말로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 주사위는 던져졌다 “
뭔가 단호한 결심을 한 후 할 수 있는 간지나는 대사로 알려진 이 유명한 발언은 이때 나왔다. 다만 카이사르는 세간에 알려진 거침없고 고민없는 행동파스러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개인적으로는 예민하면서도 결단의 시기에 수없이 전전긍긍하며 갈등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물론 우유부단한 것과는 다르다. 결정을 내린 뒤에는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타입. 다만 저 발언은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다가 '씁 어쩔수 없지. 주사위는 다시 주울 수 없는걸' 하는 심정으로 한 말이지 '너이 원로원노무 xx야 내가 당장 군단병을 이끌고 가서 니놈들의 xxx를 박살내 버리겠어' 하는 심정으로 호쾌하게 한 발언은 아닌데 세간에는 후자와 같은 느낌으로 알려져 있다.
10년간 변방에서 구르고 구른 카이사르의 군단병이 루비콘 강(이탈리아와 속주의 경계)을 건너자 원로원은 난리가 났다. 휘하의 병사들 또한 카이사르가 실각하면 자신들은 십년 넘게 군대에서 생사를 넘나든 것에 대한 보상 한푼 못받고 무일푼이 될 처지였기 때문에 결속력은 대단했다. 폼페이우스를 위시한 원로원파는 처음에는 이탈리아 내에서 카이사르와 싸우려고 생각했지만 이탈리아 내의 로마 동맹시민들의 여론이 카이사르 쪽이었다. 로마 시민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던 동맹시민들은 당연히 기득권의 반대파인 카이사르를 지지했고 배후지의 지지 없이 이탈리아 내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의원을 비롯한 지지세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떠난다.
폼페이우스는 전성기때 지중해와 동방 전역에서 화려한 전공을 쌓았기 때문에 이탈리아 밖에서도 지지 세력이 많았다. 이탈리아만 떠나면 폼페이우스 파 세상이었고 이 덕분에 오히려 전황은 폼페이우스에게 유리한 편이었다. 다만 카이사르 세력은 카이사르 1인을 중심으로 같은 이해 관계를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라 지휘 체계가 간결하고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10년을 변방에서 구른 정예병들이 남아있었다.
카이사르는 단기 결전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하여 군대를 이끌고 폼페이우스의 근거지인 발칸 반도 쪽으로 떠난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폼페이우스의 보급기지를 점거해 나갈 계획을 세우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항구도시인 디라키움 이었다. 폼페이우스도 디라키움을 잃을 수는 없었기에 병력을 집결시키는데 그 규모가 카이사르보다 컸다. 갈리아에서 적은 병력으로 더 많은 적을 포위해서 대승을 거둔 기억 때문인지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을 둘러싼 포위망을 구축하는데, 재해권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사실 큰 의미가 있는 포위망이라기보다는 결전을 유도하기 위해 싸움을 거는 목적이었다. 폼페이우스도 당대의 명장인지라 그 목적을 뻔히 알고 말려들지 않았다. 소모전으로 출혈을 유도하다가 한번의 공세로 포위망을 허물어 버리는데 성공한다. 전략/전술적으로 카이사르의 명백한 오판이었지만 임기응변과 행동의 카이사르 답게 전황이 불리하자 지체없이 퇴각을 명령하여 주 전력을 보존한 채로 퇴각하는데 성공한다.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패배했지만 카이사르는 여전히 발칸 반도 쪽에 남아서 폼페이우스의 보급선을 교란하며 깽판을 친다. 하지만 깽판이라고 해 봐야 발칸 반도 전 지역이 폼페이우스의 근거지인지라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운영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재해권이 없는 카이사르 쪽의 보급 및 운영이 훨씬 빡빡했다. 사실 폼페이우스는 버티기만 하면 자신이 이긴다는 것을 분명히 알 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근거지 내에서 카이사르가 깽판치는 것을 방조하는 것은 그의 평판을 나쁘게 만들 것이었으며 원로원 의원들도 결전을 주장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세간의 이목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게 신경쓰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알면서도 카이사르가 던진 떡밥을 덥썩 물고 결전에 나선다.
파르살로스 회전이라고 알려진 이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측의 병력은 보병 45,000에 기병 7,000이었고, 카이사르 측은 보병 22,000에 기병 1,000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분명 명장이었지만 임기응변이나 승기포착에 능하기 보다는 실수를 하지 않고 견실하게 병력을 운영하는 타입이었다. 보병전력과 기병 전력 모두 우세하지만 카이사르의 중보병은 10년을 전장에서 구른 최정예 베테랑이었고, 반면 폼페이우스의 중보병은 실전 경험이 적었다. 따라서 상식인인 폼페이우스는 숫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기병 전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측면을 분쇄하고 포위 섬멸해서 단번에 내전을 끝낼 전술을 세운다.하지만 임기응변과 꼼수의 달인인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싸움에서 어떤 전술을 쓸지 훤히 알고 있었다.
결전 당일, 카이사르의 주전력인 중무장 보병의 돌격으로 전투가 개시된다. 역시나 견실한 폼페이우스는 돌격에 돌격으로 응수하지 않고, 카이사르 보병대가 먼 거리를 달려와 숨이 차고 대열이 흐트러 질 때 공격을 하려고 생각하지만 경험으로 다져진 카이사르 보병대는 '어? 쟤들은 맞돌격 안하네?' 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멈췄다. 그리고 숨을 고르고 전열을 갖춘 후 재돌격을 개시한다. 그리하여 전황은 카이사르의 공세로 시작된다. 인간흉기들이 득시글 하는 카이사르 군단병이었지만 어쨋든 숫적으로 두배 이상 우위인 폼페이우스는 그럭 저럭 공세를 막아낸다.
보병전이 교착상태가 되자 폼페이우스는 정석대로 기병대를 투입해 측면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한다. 카이사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초라한 기병대와, 숫적 불리를 극복하기 위해 같이 편성해둔 경보병들과, 베테랑 카이사르 군단 중에서도 정예병들만 가려뽑아 구성해 둔 2천의 별동대를 투입한다. 고대 로마 당시의 기병은 등자와 안장도 없었고, 말의 덩치도 품종개량이 이루어지기 전이라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과 말이 합쳐진 질량 덩어리가 돌격력을 살려 공격한다면 보병대가 이를 방어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돌격력이 적은 상태라면? 돌격력이 줄어든 상태에서 안장도 등자도 없이 다리힘만으로 말 허리를 눌러 말을 컨트롤하는 이 시대의 기병을 제압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7천의 폼페이우스 기병대와 1천의 카이사르 기병대가 서로를 향해 돌격하고, 한 차례의 충돌이 있고 난 후 카이사르 기병대는 충분한 공간으로 전진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기수를 돌려 상대 기병대를 향해 다시 돌격할 준비를 한다. 7천의 폼페이우스 기병대가 카이사르 기병대와의 충돌 이후 눈앞에 보게 된 것은 최정예 병사들로 편성된 2천의 중보병 별동대였다. 한차례의 충돌 이후 돌격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 말의 습성을 잘 아는 용맹한 보병이 이들을 덮치고, 전열을 가다듬은 카이사르 기병대가 이들의 뒤를 다시 공격한다. 게다가 회전이 벌어진 파르살루스 평원은 대규모 기병을 운영하기에 썩 좋은 지형도 아니었다.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는 허무하게 분쇄된다. 설령 기병 전력을 제외하고라도 폼페이우스가 불리한 전황은 아니었건만, 측면 교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재빠르게 측면과 배후로 병력을 투입하였고, 한번 포위에 성공하게 되자 전투는 그대로 끝나버린다. 카이사르 쪽의 사상자는 6백 남짓한 반면 폼페이우스는 6천여 명이 전사하고 2만 4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게 된다.
카이사르는 의도대로 단기 결전을 통해 적의 주력을 분쇄하는데 성공하게 되고, 우세한 병력과 유리한 보급선을 가지고도 한큐에 주력군을 다 날려버린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를 떠나 이집트로 도망간다. 폼페이우스가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자 지중해 세계의 여론은 단번에 카이사르 지지 쪽으로 뒤집어지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와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나일강변에서 암살당한다.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폼페이우스를 생포하게 되면 그래도 구국의 영웅이었던 그를 로마법으로 처형할 수는 없고, 살려두면 평생 우환이 될 것이었기에 난감했을 텐데 매우 땡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나 정치9단. 로마 구국의 영웅을 함부로 죽였다고 폭풍분노하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헤헤 저 당신의 원수인 폼페이우스 죽였는데 고맙져?' 라고 하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세력을 몰아내고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를 통치자의 자리에 앉혀놓는다. 피 안묻히고 폼페이우스 제거하고, 고대 지중해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었던 이집트를 수중에 넣으면서도 민중에게 내세울 명분까지 얻어냈다.
독재관 취임
암살
평가
정치적 평가
군사적 평가
당대 로마 최고의 장군이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당대 최강의 로마 장군 후보였던 폼페이우스를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털어버림으로 이를 확실하게 증명한 바 있다. 부대에 대한 장악력과 통솔력은 최고였고,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과 순발력이 엄청났다. 다만 전략/전술적인 측면에서는 이게무슨 명장이야 싶은 OME스러운 삽질도 심심찮게 했다. 그런데 그런 삽질을 일거에 뒤집어버리는 임기응변과 순발력, 결정적인 기동 한방으로 상황을 뒤집어버리는 승부사 기질이 탁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