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Liberulo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6월 8일 (월) 11:08 판

CAIVS IVLIVS CAESAR. BC 100 ~ BC 44

그는 결코 황제가 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히 황제를 뜻하게 되었다.

개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가 낳은 걸출한 인재이며, 인류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

공화정 체제의 모순으로 혼란을 겪던 로마를 대대적으로 개혁한 위대한 정치가라는 평가와 공화정을 박살낸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갈리아의 제부족을 쓸어버리며 영향력을 높인 후, 로마 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파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구현하려 했던 원수정 체제는 그의 후계자이자 양자인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충실히 구현하였다.

저서로 갈리아 전기, 내전기가 있다. 특히 갈리아 전기는 고전 라틴어를 학습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교본 중 하나이다.

'브루투스 너마저'는 카이사르 본인이 한 말은 아니며,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극의 대사이다.

생애

출신 및 청년기

카이사르 가문은 로마의 유서 깊은 유력 가문이었지만, 카이사르 대에 와서 로마 정계를 휩쓴 유력 인물을 배출하지는 못하여 그 세가 많이 위축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의 고모부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한미한 가문 출신이지만 유구르타 전쟁과 갈리아 족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군공을 세우고 군제 개혁을 실시한 당대의 실력자였다. 마리우스는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지만 평민 출신으로 입지전적인 출세를 한 인물인데다가 평민이 주축을 이루는 군대를 대표하는 실력자로서, 민중파의 상징적 인물이 된다. 거기다가 마리우스의 후계자 노릇을 한 킨나의 딸과의 결혼을 통해 카이사르는 유년기부터 민중파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유년기는 독재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집권시기였다. 때문에 카이사르는 유년기의 많은 시간을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유랑하면서 지내게 된다.

술라의 사후 로마로 돌아와서 변호사 활동과 법무관 활동으로 공직에 발을 디디고 차근 차근 경력을 쌓아 나간다. 동년배의 폼페이우스보다는 한참 느리지만...

제1차 삼두정치

41세가 된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도전할 만한 경력과 나이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 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던 민중파를 상징하던 인물인 탓에 원로원 귀족들의 견제가 매우 심했고, 특별한 전공이나 업적이 없었던 탓에 그 견제를 극복할 만한 열렬한 민중들의 지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폼페이우스크라수스 와의 야합을 통해 집정관 당선에 성공한다. 폼페이우스 엄청나게 쌓아올린 군공 탓에 민중들의 지지가 확고했으나 원로원의 견제가 워낙 심했고, 때문에 견제가 덜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표를 대신 받아 집정관이 되고, 크라수스가 돈을 대는 3자 협상 구조였다.

결국 집정관이 되는데 성공 한 카이사르는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하여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을 만한 법안을 여럿 내놓는다. 원로원 의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지만 정치적 수완과 폼페이우스의 개인적 인기, 민중의 지지를 적절히 활용 하여 모두 통과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를 통해 폼페이우스의 지지세력을 자신에 대한 지지세력으로 포용하는데 성공하고 유력가문의 정치유망주 A 에서 순식간에 로마 정계의 거물이 된다. 이를 굳히기 위해서 로마 공화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군공이었다. 군공을 세우기 위해 그는 자신의 임지(집정관 임기가 끝난 전직 집정관이 총독으로 부임하는 땅)를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로 선택한다. 카이사르가 더이상 거물이 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던 원로원은 이를 저지하고자 하나 이 또한 실패한다.

갈리아 전쟁

지금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는 것은 경제적인 가치는 딱히 없었으나 기원전 390년 무렵 갈리아 족의 대규모 남하로 인해 로마 시내가 개털리고 초토화 된 기억이 있고, 기원전 102년에도 대규모 남하를 한 적이 있으나 이때는 카이사르의 고모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휘 하에 로마가 막아낸 적이 있다. 갈리아 지역을 재패하는 것은 로마 제국의 안보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모부에 이어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면 민중파의 후계 구도를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다는 부분이 있었다.

로마에 순종적인 부족은 특권을 주어 다른 부족에 대한 지배권을 주고, 반항하는 부족은 군사력으로 짓밟는 정복 작업을 차례 차례 거듭하며 갈리아 지역을 제패해 나가던 가운데, 갈리아 전쟁 7년차에 대위기를 맞이한다. 베르킨게토릭스라고 하는 젊은 대족장을 중심으로 갈리아 전역이 봉기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봉기한 갈리아인들은 친 로마 갈리아 부족을 차례 차례 공격하기 시작했고 카이사르는 이를 막아내기에 급급해진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도 카이사르군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수는 없었고, 결국 청야 전술로 로마를 몰아내기로 결의한다. 유일하게 청야 전술에 참여하지 않은 갈리아인들의 도시 아바리쿰은 카이사르의 공격을 받아 초토화되고 약탈당하는데, 이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중심으로 갈리아인들의 단합이 더욱 굳건해지는 결과를 맞이한다. 청야전술에 말려서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점점 이탈리아 반도 쪽으로 밀려나게되고, 종국에는 전 갈리아 인들이 베르킨게토릭스 휘하의 반 로마 진영에 가담하게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 당시 카이사르의 상황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상태로, 7년간 온갖 고생을 해 가며 정복한 부족들은 다 등을 돌렸고, 점령한 영토는 죄다 잃었으며, 병사도 잃었기에 이 상태로 로마에 귀국하는 순간 카이사르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나는 상태였다.

그러나 상황을 오판한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에게 정면 대결, 즉 회전을 걸어버린다. 이 시대의 로마 군단병은 그 구성 성분을 로마 시민으로 제한했기에 머릿수에 있어서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당대 유럽세계 최강이었는데 엄격한 규율, 수백년의 다양한 전쟁을 통해 습득된 전투 전술교리, 시민병이기에 유지되는 강한 결속력과 높은 사기로 인해 무기 들 힘만 있으면 박박 긁어모은 잡병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리엔트 군주들도 2~3배 규모의 용병단을 투입한 로마와의 전쟁에서 번번히 발리곤 했었다. 하물며 오리엔트 용병보다도 질적으로 떨어지는 갈리아 군이 로마군에 정면으로 꼬라박은 것은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인생 최악의 위기를 반전시킬 기회였다. 갈리아 군은 쪽수를 믿고 삼방향으로 포위했지만 되려 삼방향에서 각개격파 당하며 탈탈 털린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서둘러 패잔병을 수습하여 알레시아에 농성하고, 카이사르 휘하의 5만여 로마군은 알레시아를 포위한다. 뒤이어 베르킨게토릭스를 구원하기 위하여 알레시아를 포위한 로마군을 또 다시 갈리아 군이 포위하고, 35만의 갈리아 군을 로마군은 앞뒤로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또 털어버렸다. 되려 갈리아 전역의 군대가 결집되어 로마를 상대했는데도, 전략적으로 우월한 상황임에도 탈탈 털리고 또 털리는 상황이 발생해버리자 베르킨게토릭스도 전의를 완전히 잃고 항복하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탄탄 대로에 놓이게 된다.

내전기

독재관 취임

암살 =

평가

정치적 평가

군사적 평가

당대 로마 최고의 장군이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당대 최강의 로마 장군 후보였던 폼페이우스를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털어버림으로 이를 확실하게 증명한 바 있다. 부대에 대한 장악력과 통솔력은 최고였고,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과 순발력이 엄청났다. 다만 전략/전술적인 측면에서는 이게무슨 명장이야 싶은 OME스러운 삽질도 심심찮게 했다. 그런데 그런 삽질을 일거에 뒤집어버리는 임기응변과 순발력, 결정적인 기동 한방으로 상황을 뒤집어버리는 승부사 기질이 탁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