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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케(身請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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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은 낙적으로 돈이 많은 남자(대개 고위 관리직이나 상인, 부자 등)가 유녀가 진 빚을 갚아주는 대신 빚을 갚아준 남자의 첩(내지는 부인)이 되어 유곽을 나가는 것을 말한다. 즉 유녀 은퇴. 유녀들은 대개 친족의 빚을 대신 갚는다는 목적으로 유곽에 팔려왔고 유곽은 이 유녀들이 버는 수입으로 다른 유녀와 카무로의 의식주와 교육비, 옷과 화장값에 쓰여서 유녀 혼자 빚을 갚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유곽에 나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30세가 되서 유곽에 나간다해도 가무와 매음을 빼면 할 줄 아는게 없었으며 각종 성병 및 화장독에 시달렸으니 유녀들이 자유의 몸이 되는건 30세가 되기 전에 유곽에서 도망치거나 단골 손님이 미우케를 해주는 것 밖에 없었다.
:다른 말은 낙적으로 돈이 많은 남자(대개 고위 관리직이나 상인, 부자 등)가 유녀가 진 빚을 갚아주는 대신 빚을 갚아준 남자의 첩(내지는 부인)이 되어 유곽을 나가는 것을 말한다. 즉 유녀 은퇴. 유녀들은 대개 친족의 빚을 대신 갚는다는 목적으로 유곽에 팔려왔고 유곽은 이 유녀들이 버는 수입으로 다른 유녀와 카무로의 의식주와 교육비, 옷과 화장값에 쓰여서 유녀 혼자 빚을 갚을 수 없었다. 그래서 빚을 다 갚는 식으로 유곽에 나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30세가 되서 유곽에 나간다해도 가무와 매음을 빼면 할 줄 아는게 없었으며 각종 성병 및 화장독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 30세가 되서 나간다는 것도 말이 좋아서 은퇴지 사실은 상품가치가 없어져서 퇴출당하는 것. 고로 유녀들이 자유의 몸이 되는건 30세가 되기 전에 유곽에서 도망치거나 단골 손님이 미우케를 해주는 것 밖에 없었다.


;쿠루와코토바(廓詞)
;쿠루와코토바(廓詞)

2019년 2월 17일 (일) 20:15 판

유녀(遊女, 일본어: ゆうじょ[1], あそびめ 유우죠, 아소비메)는 일본의 에도시대때 존재했던 유곽(遊廓)에 소속된 매춘부들을 일컫는 말이다. 다만 유녀라는 호칭은 일본 고유의 호칭이 아닌 한자 문화권에서 있었던 말로 대한민국에는 고구려 시기때부터 사용되었고, 전체적으로는 예능·가무를 종사하며 접객을 하는 여성을 일컫는 것이였다.

상세

고대 중국에서

고대 중국에서는 예능 및 환락계에 종사하는 여성을 유녀보단 기녀로 칭했는데 이 유녀라는 말은 『시경(詩経)』주남·한광편에 "한나라에 유녀가 있어 사지 말 것"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시경에서의 용례는 "강가에서 노는(遊) 여자(女)" 또는 "강의 여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이토 시게루(齋藤茂)는 일본어의 유녀는 이 시경에서의 "출보놀이를 즐기는 여자"에서 파생된 것으로 언급했다. 즉 일본어에서의 유녀는 "창부", 중국에서의 유녀는 "젊은 여성"을 칭하는 단어였다는 것.

일본에서

일본에서는 많은 호칭들이 있었다. 『만연집(万葉集)』에서는 유행녀부(遊行女婦)라고 칭했고, 헤이안 시대때부터 유녀(정확히는 유녀 자체보단 遊를 음독으로 읽은 아소비)를 사용했다. 『겐지모노가타리』에서 "아소비와 함께 모인 것도(あそび共の集いまいれるも)" 『에이가모노가타리』에는 "에구치라는 곳에서, 아소비와 삿갓에 달을 씌우고(江口という所なりて、あそびども笠に月をいだし)"가, 『산목집』에서는 "아소비도 수없이 많이 와서(あそびども数多もうで来て)" 『아코우 일기』에서 "아소비 3명(あそび三人)"이라는 구절이 나왔다. 가무를 주로 하는 자들은 "아소비메", "아소비모노"로도 불렀다. 중세에는 괴뢰녀(傀儡女 / 쿠구츠메)나 백박자(や白拍子 / 야시라뵤우시), 경성(傾城, 케이세이), 상연(上臈. 죠로우)로 불렀다.

근세에 와서 여랑(女郎, 죠로우)와 유군(遊君, 유우쿤)이라는 호칭도 나온다. 유곽의 유녀에게는 계급이 있고 최고급 유녀를 타유(太夫)라고 불렀다. 에도의 요시와라 유곽에서 타유가 소멸되자 대체 용어로 오이란(花魁)이라고 불렀다. 대중적이거나 급이 낮은 유녀는 목욕탕에서 일하는 탕녀나 여관에서 일하는 메시모리온나, 교토의 츠지기미, 오사카의 소오카, 에도의 요타카 등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유녀나 유군으로 불리는 매춘부는 이런 잡부보다 유곽에 소속된 중고급 매춘부들을 말한다.

한국에서

한국에서는 고구려와 관련된 기록에서 볼 수 있는데 "남편없이 자유롭게 떠도는 여자"라는 의미가 강했다. 이 설은 고구려를 방문한 중국의 외교관이 연애결혼을 하며 자유롭게 노니는 고구려 여자들을 보고 아무 남자하고 자거나 몸을 판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 것이라고 전해진다.[2]

역사

고대

매춘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초기부터 나타난 오래된 직종으로 유녀의 본업은 유예라 불리는 예능·가무·접대로 점차 유예 전승이 중심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모계혼이 카마쿠라 초기부터 계속되었지만 점차 부계상속으로 넘어가면서 남성주체의 거처가 성립되고 거기서 시중드는 여성이 상대를 함에따라 매춘을 업으로 삼는 여성층이 탄생하게 된다. 참고로 고대의 매춘은 토속 종교의 신녀들이 의식의 목적으로 한 것이 시초로 일본도 신사의 무녀가 춤이나 노래를 불렀으나 신사를 떠나면서 매춘까지 하게 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궁중의 무용, 음악 교습소인 「내교방」의 기녀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연구작자도 있다.

중세

가마쿠라 시대에는 백박자와 여관에 소속된 유군이 나타났으나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부치 막부는 유녀들을 단속해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1193년 5월 15일에는 사토미 요시나리(里見義成)가 유녀별당에 임명되어 그때까지 별도의 법없이 자유롭게 운영되던 유곽과 유녀를 단속하되 제도의 아래에서 영위할 것을 발표했다.

근세

에도 시대의 매춘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유곽으로 불리는 매춘업소에서 전문적으로 손님을 받는 자, 식당이나 여관에서 개인적으로 손님을 받는 자, 개인 소유의 창기이다. 당시에는 의료 기술 수준이 낮아 성병 감염에 매우 취약했었고 화장도 납이나 수은을 사용했다보니 당연히 수명이 매우 짧았다.

메이지 이후

용어

오이란의 모습
오이란(花魁), 타유(太夫)
고급 유녀를 칭하는 별칭. 이들은 카무로와 하급 유녀들을 관리했으며 타유는 교토의 유곽, 오이란은 에도의 유곽 요시와라(吉原)에 쓰인 용어다. 타유는 원래 가무극의 뛰어난 여배우를 자칭하는 말이였으나 여성의 연극·가부키 출연이 법적으로 금지되면서 여배우들이 유녀로 흡수되면서 변형된 것. 그러나 교토의 유곽이 소멸되면서 타유 단어도 소멸. 오이란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이란의 유래는 카무로가 상위 유녀를 "언니"라는 의미로 오네상이 아닌 "오이란"라고 부르는 것이 시초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급 유녀인만큼 이들과 밤을 보내는 것은 매우 어려웠는데 중하급 유녀와 다르게 오이란은 손님을 거절할 권리가 있었고 만나는 과정도 복잡했다. 먼저 오이란이 있는 찻집에 가서 지명을 한뒤 연회를 열어 오이란과 1차 대면을 하는데 여기에서 오이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칼에 거절당하고 설령 마음에 들었다해도 바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해 2회차에 연회를 열어 다시 대면한다. 이때부터 오이란이 마음에 들면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고 자신의 방으로 안내해 밤을 보내는 식. 이 오이란 중개비부터 연회비용만 해도 약 200만엔(약 2천만원)이였다고. 그리고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서 오이란과 한번 정을 통한 손님은 사실상 남편 취급을 받아 다른 유곽의 오이란이나 유녀를 살 수 없었고 만일 들키면 바람핀 것으로 간주되어 오이란과 오이란이 있는 가게에 위자료를 물어주고 여장을 당하는 등 놀림 및 조롱을 당했다고한다.
사진에도 나온 것처럼 오이란은 복식이 매우 화려했고 다테 효우코(伊達兵庫) 머리 스타일을 많이 했다.
카무로(禿)
오이란의 시중 담당 소녀들. 오이란의 소유물이였기에 카무로의 의식주는 전부 오이란이 담당했으며 여러 명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카무로라고 성장하면 무조건 유녀가 된 것은 아니고 외모가 예쁘거나 재능이 있는 카무로만 뽑아서 후리소데 신조로 키운 뒤 나이가 만 15살이 되면 정식 유녀로 승격시키는 식.
신조
후리소데 신조의 약자로 카무로 중 유녀로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뽑아 다도 및 가무, 예절 교육을 시켰다. 아직 정식 유녀가 아닌 만큼 손님을 받지 않았다.
미우케(身請け)
다른 말은 낙적으로 돈이 많은 남자(대개 고위 관리직이나 상인, 부자 등)가 유녀가 진 빚을 갚아주는 대신 빚을 갚아준 남자의 첩(내지는 부인)이 되어 유곽을 나가는 것을 말한다. 즉 유녀 은퇴. 유녀들은 대개 친족의 빚을 대신 갚는다는 목적으로 유곽에 팔려왔고 유곽은 이 유녀들이 버는 수입으로 다른 유녀와 카무로의 의식주와 교육비, 옷과 화장값에 쓰여서 유녀 혼자 빚을 갚을 수 없었다. 그래서 빚을 다 갚는 식으로 유곽에 나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30세가 되서 유곽에 나간다해도 가무와 매음을 빼면 할 줄 아는게 없었으며 각종 성병 및 화장독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 30세가 되서 나간다는 것도 말이 좋아서 은퇴지 사실은 상품가치가 없어져서 퇴출당하는 것. 고로 유녀들이 자유의 몸이 되는건 30세가 되기 전에 유곽에서 도망치거나 단골 손님이 미우케를 해주는 것 밖에 없었다.
쿠루와코토바(廓詞)
유녀들이 즐겨사용한 말투로 1인칭은 와치키나 왓치, 아치키, 2인칭은 누시, 어미는 린스나 아린스로 끝난다.[3] 다른 말로 사토코토바(里詞)나 오이란코토바(花魁詞), 아린스코토바(ありんす詞)로도 불린다. 한국어로 번역 시 대체 용어가 없기에 일반적인 말투로 변경되거나 사극의 여성어(흔히 하였사옵니다, 하였시와요)로 바뀌는 일이 종종 있다.
삼중 타카게다(三枚歯高下駄)
게다의 일종으로 주로 오이란이 오이란도츄(花魁道中)를 할 때 신는 나막신. 에도시대때는 미인의 조건으로 발도 보았기에 발을 포함한 오이란의 외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긴 것.

게이샤와 차이

둘다 예능을 하고 화류계 종사자라는 점에서 게이샤(芸者)와 헷갈려하거나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초창기에는 게이샤도 매춘을 했었고 오이란이나 유녀중에서도 게이샤로 빠지는 일이 있었으나 에도 시대 중기부터 게이샤의 매춘을 법으로 금지하면서 게이샤는 예능 전문, 유녀는 매춘 전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때 유곽이 사라지며 유녀들이 게이샤로 흡수되었고 단나(남편/주인)로 불리는 게이샤의 후원자들이 뒤로 매춘을 하는 문제를 낳아 메이지 유신 이후 엄격하게 금지시키고 가난하거나 빚이 있다는 이유로 소녀들을 꽃마을(하나마치)에 파는 행위를 금지시키면서 표면적으로는 매춘을 안하게 된 것.

외모도 차이가 많아 유녀, 오이란은 다테 효우코 머리 스타일을 위시로 옷차림부터해서 치장이 매우 화려했던 반면 게이샤는 수습 게이샤인 마이코만 화장을 하거나 화려한 기모노를 입을 뿐 일반적인 게이샤는 화장도 안하고 기모노도 평범한 것을 입었다. 결정적으로 유녀는 오비를 앞으로 메고 게이샤는 일반 기모노처럼 오비가 뒤로 가있었다.

유녀/유곽이 등장하는 창작물

해당 소재가 중심이 되는 창작물
해당 소재가 부가로 등장하는 창작물

기타

  • 대한민국에서 유녀가 등장하는 에도시대 배경 창작물을 번역할 때 현지화로 기생(기녀)으로 번역하는 일이 많은데 기생은 게이샤와 비견되어야 할 예능인으로 예능과 가무를 했을지라도 매춘이 주업인 유녀와는 다른 직종이다. 굳이 따지면 삼패기생은 매춘이 주업이였고 일패기생은 예능과 가무가 주업.

같이 보기

각주

  1. 우정(宥恕)과 발음이 비슷하니 주의
  2. 참고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고구려 때 ‘노는 여자들’이 참 많았다는데…] 2012년 3월 7일
  3. 참조 : 廓詞(廓言葉)について(쿠루와코토바에 대해)
Wikipedia-ico-48px.png이 문서에는 일본어판 위키백과의 遊女 문서를 번역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