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생애 ==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하 '우병우'라 기술한다)은 1967년 1월 28일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태어났다. 영주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던 부친을 따라 영주에서 학창생활을 하였으며,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제 29회 [[사법고시]]에 최연소로 합격하였으며 검사, 민정수석 등을 역임하였다. === 학창 시절 === {{인용문2|(검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정의로운 사회와 부정과 부패가 없는 국가를 만들겠다’|우병우}} 영주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던 부친을 따라 영주에서 학창생활을 하였으며,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3 시절, 모의고사에서 항상 전국 100등 안에 들었다고 한다. 그의 성실성과 관련, 한병태 전 영주고등학교 교장은 “우리 반은 7시30분까지 등교를 권장했는데 일찍 오는 순으로 자기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게 했다. 우 수석은 1년 동안 늘 앞에서 셋째 줄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력이 떨어져 너무 멀리 앉거나 너무 가까이 앉으면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다고 했다”고 말했다.<ref>[http://www.business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834 Who Is ?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비지니스 포스트, 2016.10.24.</ref> 학력고사 상위 0.01%(전국 53등)를 기록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법대 3학년에 재학중인 1987년에 만 20세라는 이른 나이로 제 29회 사법시험에 당대 최연소로 합격하였다. 1990년에 사법연수원(19기)을 수료한 이래 검찰직을 수행하였다. 병역이 면제되었기에 만 23세라는 이른 나이에 임직할 수 있었다. === 검사 시절 === {{인용문2|“맡은 사건을 며칠 만에 완전히 파악하더라”|[[채동욱]] 전 검찰총장}} 우병우는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검사생활은 대체로 순탄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와 함께 일하였던 검사들은 하나같이 우병우의 수사실력이 탁월하다고 평가하였다. 아래 검사로서의 수사경력과 관련, 보다 자세한 사항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2537&PAGE_CD=ET001&BLCK_NO=1&CMPT_CD=T0016 기사 참조] 한편 초임시절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을 수사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밀양지청으로 발령이 났고 이후 지방을 전전한 적이 있는데 우병우는 이 시절이 자신의 검사시절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라도 회고하면서 조직에 대한 배신감으로 ‘법원 갈 걸(판사 할 걸)’ 하며 후회한 적이 있다고 한다.<ref>[http://m.segye.com/content/html/2016/11/08/20161108003433.html 우병우 "지방경찰청장 내 가방 들어줬다"… 권위주의 성향 표출], 세계일보, 2016.11.08.</ref> 일부 언론에서는 이 사건이 소신있던 검사 우병우가 변한 계기 중 하나로 본다.<ref>[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_m.aspx?CNTN_CD=A0002277854#cb 우병우의 과거, 두 번의 좌절... 그의 '추악한 민낯'], 오마이스타, 2017.1.9.</ref> 우병우는 평검사 시절 아파트 감리와 관련해 비리를 저지른 경주시 건축과장 등을, 서방파 행동대장과 대전진술파 두목 등을 경주대 설립자인 김일윤 전 민자당 의원을 학교공금 53억원 횡령 혐의로 구속하여 주목받았고, 그 외에도 서울 시내 폐수·소음·진동을 배출한 환경오염 업체 55곳에 이어 세균폐수를 방출한 을지병원·백병원·차병원·중대부속병원을 적발하는 등 엄청난 실적을 자랑하였다. 이후 2001년 [[이영호 게이트]]의 특별검사 팀에서 활동하였고, 상당한 수사 성과를 거두었다. 송해운·윤대진 검사와 함께 ‘이용호 게이트 특검’(차정일 특검) 특별수사관 3인방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차정일 특검이 우 병우에 대하여 “매우 훌륭한 검사”라고 평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후 이른바 '특수통 검사'로서의 길에 접어들었는데, 2003년~2004년에는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벌어진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의혹에서도 삼성그룹이 온갖 인맥을 동원했으나 부부장이었던 우병우는 삼성그룹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이 과정에서 허태학·박노빈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의 기소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후 2005년에는 대구 유니버시아드 휘장 비리를 수사하면서 [[신성일|강신성일]] 의원, 박주천 전 의원, 김명규 가스공사 사장, 박명환 전 의원 등을 구속시키기도 했다. 2009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게이트인 [[박연차 게이트]]의 수사를 맡으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을 수사하는데 총책임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검사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에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충격이었다고 하는데, 우병우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눈앞이 캄캄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ref>[http://www.huffingtonpost.kr/2016/07/28/story_n_11235094.html 이ㅔ것은 우병우 수석에 관한 빼곡한 인생 이야기다], 허핑턴포스트, 2016. 7. 28.</ref>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 사건이었음에도 불구, 무리하게 수사를 진행한 까닭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였다는 비판이 검찰 측에 쏟아졌다.<ref>[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_m.aspx?CNTN_CD=A0002277854#cb 우병우의 과거, 두 번의 좌절... 그의 '추악한 민낯'], 오마이스타, 2017.1.9.</ref> 그러나 우병우는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에도 핵심 요직인 대검 범죄정보기획관과 수사기획관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였다. 이후 정권이 교체된 2013년,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하자 검찰에서 퇴직하고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인용문2|"23년 검사로 살아오면서 보람을 느낀 때도 많았고, 실체적 진실을 파헤쳐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힘겨운 적도 많았다. 이제 보람은 가슴에 품고 짐을 내려놓고자 한다."|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 가운데}} 한편, 우병우가 검사장이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1) [[채병욱]] 전 검찰총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는 우병우를 승진시키는 것을 꺼렸다는 설과, 2) 금 400억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는 우병우를 검사장에 승진하는 것이 대국민 이미지상 좋지 않았기에 마다하였다는 설이 있다.<ref>[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5420 정권 후반기 위기관리자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 ‘원샷원킬'의 군기반장], 중앙시사매거진</ref> === 변호사 시절 === 우병우는 검찰직을 박차고 나온 직후인 2013년 5월, '우병우 법률사무소'를 설립하고 약 1년 간 변호사활동을 하였다. 약 1년 간 총 40 여건을 수임하였던바, 순소득액이 62억원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2016년 11월 기준 탈세의혹이 있다.<ref>[http://news.donga.com/3/00/20161128/81550249/1 “우병우, 변호사 1년간 62억 순소득”], 동아일보, 2016. 11. 28.</ref>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우병우는 후배 검사들이 자신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검찰 측에서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혹자는 이를 잘 나가던 변호사 생활을 접고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가게 된 계기로 보기도 한다. 한편, 이 시절 홍만표 변호사와 '''몰래 변론'''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바, 자세한 사항은 후술한다. === 청와대 정무직 공무원 시절 === {{인용문2|“권력의 정점에 서면 부나방이 꼬인다. 결국 권력은 물론 거기 붙은 부나방까지 타 죽는다. 사람은 돈을 좇고, 그 뒤에 권력을 좇고, 마지막으로 명예를 좇는다. 여기서 제일 위험한 사람은 명예를 좇는 사람이다.”|우병우}} 우병우는 검찰을 떠난 이후 약 1년 뒤인 2014년 5월, 청와대 개각에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민정비서관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이는 역대 최연소이다. 만약 청와대에 줄이 있었다면 애초에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 우병우가 어떻게 민정수석실로 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설왕설래가 있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울고등법원 판사 출신의 만 46세의 여성,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장관에 전격 기용해 사법연수원 기수 문화가 중심이 되던 기존 법조계의 ‘판’을 흔들어 놓으려 했던 것과 유사한 효과를 기대하고, 검사장을 지내지 못한 우병우를 전격발탁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ef>[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5420 정권 후반기 위기관리자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 ‘원샷원킬'의 군기반장], 중앙시사매거진</ref> 그러나 2016년 12월, 국민의당 김경진 의원은 '''최순실이 우병우를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발탁하였다.'''라는 내용의 녹취파일을 공개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병우는 "제 전임 민정비서관은 4년 후배다. 4년 아래 후배가 일한 자리에 가는 게 무슨 영전이겠냐"며 "김기춘 실장이 제안해서 승낙했지만 동기들이 검사장된지 1년에서 1년반 됐는데 4년 후배 자리로 가는게 맞느냐. 사실 고민 많이 했다"며, "저런 얘기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강력 부인하였다.<ref>[http://www.nocutnews.co.kr/news/4705949#csidxd0aa96003ec22a1b2ff0455798fec3e "최순실이 우병우 청와대에 꽂아" 녹취파일 공개], 노컷뉴스, 2016. 12. 22.</ref> 우병우는 민정수석실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는바, 구체적으로는 A일 수도 있고, B일 수도 있다. 라는 식의 추상적인 답변이 아닌, 어떤 문제점에 대한 해결방안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주었다고 한다. 이에 당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우병우의 상관인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건너띄고 직접 우병우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우병우는 전임자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물러난 이후 새로이 청와대 민정수석에 임명되였다. 민정수석실로 발탁된 이후 검찰과 국정원 인사는 우병우의 손길이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평을 듣는데, 예컨대 정치인과 경제인 등에 대한 대형 비리 사건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줄곧 우 수석의 측근들로 포진됐다.<ref>[http://www.huffingtonpost.kr/2016/07/28/story_n_11235094.html 이것은 우병우 수석에 관한 빼곡한 인생 이야기다], 허핑턴포스트, 2016. 7. 28.</ref> 이를 꼬집어 ‘우병우 사단’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우병우의 능력을 높이 산 박근혜 정부는 2016년 4.13 총선에도 그를 '차출'하지 않고 계속 유임하였다. 민정수석 시절의 우병우는 정부공직자 중 재산액 1위를 놓치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6년 3월 재산공개 당시 우병우의 재산 신고액은 393억원에 달했다. 그는 시가 1500만원 상당의 롤렉스 시계와 해외국채 99만5000주(2억3500만원 상당)를 신고했다. 부인은 경기도 화성시 임야와 밭, 서울 서초구 반포동 빌딩 등을 신고하였다.<ref>[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072110420143596 우병우 미스터리 '검사장' 탈락부터 '檢 사단' 형성까지], 아경e, 2016. 7. 21.</ref>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1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퍼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