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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의 특징==
==왜성의 특징==
오로지 전투만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기본적으로 높은 지대를 끼고있는 [[산성]] 혹은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물자의 보급을 쉽게 하기 위해 상당수 왜성들은 해안가나 강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평지부터 시작하여 정상부로 올라가는 구간을 여러 단계로 나누고 그 구간마다 성책과 성문을 설치한 다층 방어구조를 채택하고 있어 성벽 방어선이 뚫리면 그대로 성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한국식 산성이나 읍성보다 훨씬 더 강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전투만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기본적으로 높은 지대를 끼고있는 [[산성]] 혹은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물자의 보급을 쉽게 하기 위해 상당수 왜성들은 해안가나 강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평지부터 시작하여 정상부로 올라가는 구간을 여러 단계로 나누고 그 구간마다 성책과 성문을 설치한 다층 방어구조를 채택하고 있어 성벽 방어선이 뚫리면 그대로 성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한국식 산성이나 [[읍성]]보다 훨씬 더 강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왜성은 전략적인 가치를 상실, 후대에 보수하거나 재사용한 경우는 없으며 이런 이유로 현존 왜성의 경우 그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않은 편이다.
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왜성은 전략적인 가치를 상실, 후대에 보수하거나 재사용한 경우는 없으며 이런 이유로 현존 왜성의 경우 그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않은 편이다.

2019년 7월 16일 (화) 16:21 판

  • 倭城

개요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침공해 온 일본군에 의해 축성된 일본식 성곽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당시 명의 지원군이 조선에 진주하면서 일시적으로승승장구하던 일본군과의 대치상태가 이어지게 된다. 이어 강화협상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일본군은 점령지를 수비하고 각 군영별 연락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해안 곳곳에 30여개의 성을 축성한 성곽이다. 이외에 전선 확장에 따라 보급로의 확보를 위해 축성한 성이나 조선 정복 후 넘어올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위해 한성, 평양, 부산에 쌓았던 것으로 알려진 고죠쇼(御座所), 왜란 초기 일본군이 조선 내 읍성을 이용하여 축조한 읍성 내 일본식 성벽 같은 것도 광의의 왜성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왜성의 축조 현황

임진왜란기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직후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바로 보급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왜성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11월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군이 평양에 왜성을 축성하였고 우키다는 한성 남쪽인 남산에 왜성을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쫓기기 시작한 일본군은 1593년 5월부터 지금의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 20여곳의 왜성을 축조하였다.

정유재란기

임진왜란 강화교섭이 결렬되면서 재침공해온 일본군은 기존에 축성하였던 왜성을 재차 점거하고 일본 수군은 웅천왜성을 점거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이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를 확실하게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 본토와의 연결을 위해 기존 축성한 해안가 일대의 왜성을 보수하고 동편으로는 울산, 서쪽으로는 순천까지 전선이 확대되면서 이 일대에도 왜성이 새로 축성되었다.

목록

왜성의 특징

오로지 전투만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기본적으로 높은 지대를 끼고있는 산성 혹은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물자의 보급을 쉽게 하기 위해 상당수 왜성들은 해안가나 강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평지부터 시작하여 정상부로 올라가는 구간을 여러 단계로 나누고 그 구간마다 성책과 성문을 설치한 다층 방어구조를 채택하고 있어 성벽 방어선이 뚫리면 그대로 성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한국식 산성이나 읍성보다 훨씬 더 강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왜성은 전략적인 가치를 상실, 후대에 보수하거나 재사용한 경우는 없으며 이런 이유로 현존 왜성의 경우 그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않은 편이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