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란

오이란(花魁)의 모습

오이란(일본어: 花魁 (おいらん), Oiran)은 일본 에도 시대에서 다이쇼 시대까지 존재했던 유곽(遊廓)에 소속된 매춘부유녀(일본어: 遊女 (ゆうじょ) 유우죠[1])들 중 제일 높거나 최상급인 유녀 계급을 말한다. 현대에는 유녀 전체를 아우르거나 치장이 화려했던 상급 유녀 이상을 오이란으로 칭하고 있으며 드물게는 상류층의 정부를 오이란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본문에도 자세하게 서술되어있지만 유녀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치장이 매우 화려했고 특히 오이란은 유행을 주도하는 아이돌격인 위치였다해도 결국 의사와 관계없이 어릴 때부터 인신매매로 팔려오거나 유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매춘과 가무 만을 배워야했고 강제적인 지출이 많아 빚도 제대로 갚지 못했으며 성병에 걸리면 사망하거나 유곽에 쫓겨나 길거리 매춘부로 추락했으며 운이 좋게 성병에 걸리지 않고 살아서 은퇴를 한다 해도 할 줄 아는게 없었기에 결국 유곽에 남아 후배 유녀를 양성하거나 또다른 오이란의 시중을 드는 등 유녀들은 유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속으로 썩어 곪아가는 직업이었다. 결국 돈많은 손님이 빚을 대신 갚아주어 첩/부인이 되는 것이 유녀들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오이란은 고급 유녀인 만큼 모든 유녀들을 총괄하는 위치이자 아이돌 그 자체였다. 이들의 고객은 왕족 및 귀족, 문인, 무인 계급의 고위층이었기에 외모와 밤 기술만 아닌 악기 연주와 다도, 향도, 문학과 시 등 모든 교양을 배워야 했으며 패션에도 신경을 써야 했었다. 타유는 교토의 유곽, 오이란은 에도의 유곽 요시와라(吉原)에 쓰인 용어지만 타유는 교토의 유곽이 사라지고 요시와라에 흡수되면서 소멸되었다. 이하 전부 오이란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밝힌다.

요시와라 유곽 초창기에는 고급 유녀를 칭하는 계급은 타유(太夫)가 있었기에 오이란으로 불리지 않았다. 『요시와라 세견 (吉原細見)』이라는 서적에 따르면 요시와라 내부에 있는 고급 유녀는 3명이 존재했으며 이외에는 상중하급 유녀들이었다고 한다.

오이란의 유래는 카무로가 상위 유녀를 "언니"라는 의미로 오네상이 아닌 "오이란"라고 부르는 것이 시초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확히는 우리 언니(おいらの所のお姉さん(오이라노 도코로노 오네상))의 준말이 오이란). 타유가 존재했을 적에는 타유가 최상급, 오이란은 타유 다음의 상급으로 여겨졌으나 타유가 소멸되면서 최상급 유녀 전체를 오이란으로 부르게 되었다. 요비다시, 츄산, 츠키마와시 이 셋이 전부 오이란이었지만 에도 시대 말기부터는 유녀 전체를 오이란이라고 하는 식으로 고유명사화, 고급 유녀의 칭호라는 원래 의미가 퇴색했다. 대부분의 오이란은 힛코미카무로와 힛코미신조를 거친 카무로 출신 및 처음부터 유곽에 태어난 경우가 많은데 고급 유녀인만큼 교양 및 다도, 악기 연주, 밤기술 등 온갖 기술들을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녀의 어원[편집 | 원본 편집]

고대 중국에서[편집 | 원본 편집]

고대 중국에서는 예능 및 환락계에 종사하는 여성을 유녀보단 기녀로 칭했는데 이 유녀라는 말은 『시경(詩経)』주남·한광편에 "한나라에 유녀가 있어 사지 말 것"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시경에서의 용례는 "강가에서 노는(遊) 여자(女)" 또는 "강의 여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이토 시게루(齋藤茂)는 일본어의 유녀는 이 시경에서의 "출보놀이를 즐기는 여자"에서 파생된 것으로 언급했다. 즉 일본어에서의 유녀는 "창부", 중국에서의 유녀는 "젊은 여성"을 칭하는 단어였다는 것.

일본에서[편집 | 원본 편집]

일본에서는 많은 호칭들이 있었다. 『만연집(万葉集)』에서는 유행녀부(遊行女婦)라고 칭했고, 헤이안 시대때부터 유녀(정확히는 유녀 자체보단 遊를 음독으로 읽은 아소비)를 사용했다. 『겐지모노가타리』에서 "아소비와 함께 모인 것도(あそび共の集いまいれるも)" 『에이가모노가타리』에는 "에구치라는 곳에서, 아소비와 삿갓에 달을 씌우고(江口という所なりて、あそびども笠に月をいだし)"가, 『산목집』에서는 "아소비도 수없이 많이 와서(あそびども数多もうで来て)" 『아코우 일기』에서 "아소비 3명(あそび三人)"이라는 구절이 나왔다. 가무를 주로 하는 자들은 "아소비메", "아소비모노"로도 불렀다. 중세에는 괴뢰녀(傀儡女 / 쿠구츠메)나 백박자(や白拍子 / 야시라뵤우시), 경성(傾城, 케이세이), 상연(上臈. 죠로우)로 불렀다.

근세에 와서 여랑(女郎, 죠로우)와 유군(遊君, 유우쿤)이라는 호칭도 나온다. 유곽의 유녀에게는 계급이 있고 최고급 유녀를 타유(太夫)라고 불렀다. 그러나 타유는 교토 유곽에 쓰인 용어로 교토 유곽이 소멸되면서 요시와라 등 에도(도쿄)의 유곽에서 주로 사용한 오이란(花魁)이 고급 유녀를 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대중적이거나 급이 낮은 유녀는 목욕탕에서 일하는 탕녀나 여관에서 일하는 메시모리온나, 교토의 츠지기미, 오사카의 소오카, 에도의 요타카 등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유녀나 유군으로 불리는 매춘부는 이런 잡부보다 유곽에 소속된 중고급 매춘부들을 말한다.

한국에서[편집 | 원본 편집]

한국에서는 고구려와 관련된 기록에서 볼 수 있는데 "남편없이 자유롭게 떠도는 여자"라는 의미가 강했다. 이 설은 고구려를 방문한 중국의 외교관이 연애결혼을 하며 자유롭게 노니는 고구려 여자들을 보고 아무 남자하고 자거나 몸을 판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 것이라고 전해진다.[2] 단 중화권의 영향을 받아 한자는 놀 유(遊)자가 아닌 헤엄칠 유/류(游)로 표기.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고대[편집 | 원본 편집]

매춘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초기부터 나타난 오래된 직종으로 유녀의 본업은 유예라 불리는 예능·가무·접대로 점차 유예 전승이 중심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모계혼이 카마쿠라 초기부터 계속되었지만 점차 부계상속으로 넘어가면서 남성주체의 거처가 성립되고 거기서 시중드는 여성이 상대를 함에 따라 매춘을 업으로 삼는 여성층이 탄생하게 된다. 참고로 고대의 매춘은 토속 종교의 신녀들이 의식의 목적으로 한 것이 시초로 일본도 신사의 무녀가 춤이나 노래를 불렀으나 신사를 떠나면서 매춘까지 하게 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궁중의 무용, 음악 교습소인 「내교방」의 기녀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연구작자도 있다.

중세[편집 | 원본 편집]

가마쿠라 시대에는 백박자와 여관에 소속된 유군이 나타났으나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부치 막부는 유녀들을 단속해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1193년 5월 15일에는 사토미 요시나리(里見義成)가 유녀별당에 임명되어 그때까지 별도의 법 없이 자유롭게 운영되던 유곽과 유녀를 단속하되 제도의 아래에서 영위할 것을 발표했다.

근세[편집 | 원본 편집]

에도 시대의 매춘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유곽으로 불리는 매춘업소에서 전문적으로 손님을 받는 자, 식당이나 여관에서 개인적으로 손님을 받는 자, 개인 소유의 창기이다. 당시에는 의료 기술 수준이 낮아 잘못된 낙태 시술과 성병 감염에 매우 취약했었고 화장도 납이나 수은을 사용했다보니 당연히 수명이 매우 짧았다. 평균 수명이 만 23세로 유녀들의 은퇴 시기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여겨졌는데 정말 오래 살아서 은퇴까지 하는 유녀들은 얼마 없었다.

메이지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유녀는 공창제 폐지 발표 이전부터 몰락하기 시작했는데 상인으로 대표되는 신흥 귀족들이 비싸고 까다로운 유녀보다 싸고 접객이 단순한 게이샤를 선호하면서 게이샤의 인기가 올라갔고, 재계의 중심지도 요시와라 유곽이 아닌 게이샤의 마을인 하나마치로 옮겨졌고, 유녀들의 주 고객인 무사나 구 귀족들이 몰락한 것이 이유이다. 결국 1750년대에 오이란들 대다수가 게이샤로 이탈하고 유곽은 근근이 이어가다 1958년 성매매 방지법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현대[편집 | 원본 편집]

성매매 방지법으로 오이란과 유녀는 사라졌지만 대신 유곽과 오이란으로 유명했던 거리에서 문화 행사로 오이란도츄를 시연하는 식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특히 니가타 시 분수이에는 매년 4월 오이란도츄를 선보이고 있다.

특징[편집 | 원본 편집]

외형
법적으로 유녀들의 치장도 선을 넘지 않는 선 한해서 금지했다고 하지만 별 소용이 없어서 유녀 자신들의 사비로 꾸밈비를 지출했기에 다른 귀부인 여성들보다 매우 화려했다. 일반 유녀들도 오이란보다 덜 화려했다는 정도지 꾸미지 않는 게이샤나 일반 여성과 비교하면 형형색색으로 비교적 화려했다. 유녀와 일반 여성을 분간하는 건 오비(매듭)의 방향인데 유녀들의 기모노는 오비가 앞으로 향해있다. 이는 기모노는 옷을 벗기게끔 어렵게 구성되어 치마폭이 극단적으로 좁고 오비를 못풀게끔 막은 것인데 유녀들은 매춘부다보니 벗기기 쉽게 앞으로 향해있는 것. 게이샤의 기모노가 일반 기모노로 되어있는 것도 게이샤의 매춘을 금지하면서 기모노를 못 벗기게끔 막은 것이다.
유녀가 되는 법
선두에 요약하자면 정말 매춘을 해야 할 정도로 생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유녀들 전부는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난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진 가족이 어린 딸을 유곽에 팔거나 처음부터 유곽에서 태어나 카무로로부터 시작해 유녀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유녀들은 가족의 빚을 대신 갚는다는 목적으로 일을 했었다. 그러나 의사없이 강제적으로 매춘을 하게 된 여성을 빚을 대신 갚는다는 핑계로 가치가 없어질 때까지 이용한 거고, 후술하듯 수입 대부분이 유곽 운영비나 카무로 식비, 유녀 자신들의 꾸밈비, 중급 이상부터는 개인 침실 방세 등으로 지출되었기에 유녀 개인이 빚을 다 갚아서 유곽에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었다. 특히 오이란들은 수입이 많은 만큼 지출비용도 매우 많았기에 오이란도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은퇴하는 법?
고로 유녀의 은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27세가 넘어서 계약이 해지되어 나가는 것, 단골 손님이 대신 빚을 갚아주어 낙적, 첩 내지는 부인이 되는 것(미우케), 몰래 야반도주를 하는 것(아시누케). 그나마 나은 결말이 미우케였지만 후술할 듯 미우케는 화대비용보다 엄청 비쌌기 때문에 어지간한 재력자들도 미우케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게이샤와 차이
둘다 예능과 접객을 한다는 점에서 게이샤(芸者)와 헷갈려하거나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게이샤는 유녀에서 파생되었고 초창기에는 게이샤와 유녀의 분간이 없었기에 게이샤도 매춘을 했었고 오이란이나 유녀 중에서도 인기가 떨어지거나 은퇴 시엔 게이샤로 전향하는 일이 있었으나 에도 시대 중기부터 게이샤의 매춘을 법으로 금지하면서 게이샤는 예능인, 유녀는 매춘부로 갈라지게 되었다. 즉 게이샤는 세간의 편견과 다르게 공식적으로 매춘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녀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오이란들이 게이샤로 흡수되고 단나(남편/주인)로 불리는 게이샤의 손님들이 뒤로 매춘을 하는 문제를 낳아 메이지 중기부터 강력히 처벌, 가난하거나 빚이 있다는 이유로 소녀들을 꽃마을(하나마치)에 파는 행위를 금지시키면서 게이샤의 매춘 문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외모도 차이가 많아 유녀는 다테 효우코 머리 스타일을 위시로 옷차림부터해서 치장이 매우 화려했던 반면 게이샤는 수습 게이샤인 마이코만 화장을 하거나 화려한 기모노를 입을 뿐 정식적인 게이샤는 화장도 안하고 기모노도 평범한 것을 입었다. 결정적으로 유녀는 오비를 앞으로 메고 게이샤는 일반 기모노처럼 오비가 뒤로 가있었다.
어두운 면
아무리 고급 매춘부라해도 매춘부 특성상 사회적 인식 및 인권문제은 물론이고 성병(특히 매독) 감염에 매우 취약했다. 자세한 설명은 요시와라 유곽 문서의 어두운 면 문단을 참고할 것.

쿠루와코토바[편집 | 원본 편집]

오이란을 만나는 법[편집 | 원본 편집]

오이란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은 매우 어려웠는데 일반 유녀와 다르게 고급 유녀는 손님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고 만나는 과정도 복잡했다. 먼저 찻집에 가서 특정 고급 유녀를 지명한 뒤 연회를 열어 오이란과 1차 대면을 하는데 여기에서 오이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칼에 거절당하고(그러나 비용은 환불받지 않았다) 설령 마음에 들었다해도 바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해 2회차에 연회를 열어 다시 대면한다. 이때부터 오이란이 마음에 들면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고 자신의 방으로 안내해 밤을 보내는 식. 이 오이란 화대부터 연회비용만 해도 약 1~400만 엔(약 1~4천만 원)이 들었다고. 그러나 이는 최전성기때나 했던 방식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연회, 지명 방식이 단순화되었기에 사장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후대의 창작이 아니냐는 설이 있을 정도로 저런 연회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오이란이 마음에 안들면 눈을 안마주치거나 바로 나가고 마음에 들면 술을 따라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관련용어[편집 | 원본 편집]

하리미세에 있는 유녀들의 모습 (기타가와 우타마로 (喜多川歌麿) 作)
하리미세(張見世)
일반적인 유곽으로 흔히 유곽 풍속화 및 유곽을 묘사한 창작물에서 나오는 격자창의 안에서 손님을 호객하는 유녀들이 있는 가게가 하리미세다. 오이란, 타유급의 고급 유녀들은 하리미세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지미(馴染み)
오이란, 타유의 단골 손님. 소꿉친구에서 따왔다. 다른 말로는 남편(단나). 그러나 다른 자료에는 나지미는 모든 유녀들의 단골 손님, 단나가 오이란의 단골 손님으로 쓰였다는 말이 있다. 나지미가 된 손님들은 절대 다른 가게의 유녀나 오이란을 살 수 없었으며 들킬 시에는 위자료를 지불하고 여장당하거나 조리돌림을 당하는 식으로 놀림거리가 되었다.
미우케(身請け)
다른 말은 낙적으로 돈이 많은 남자(대개 고위 관리직이나 상인, 부자 등)가 유녀가 진 빚을 갚아주는 대신 빚을 갚아준 남자의 첩(내지는 부인)이 되어 유곽을 나가는 것을 말한다. 즉 유녀 은퇴. 유녀들은 대개 친족의 빚을 대신 갚는다는 목적으로 유곽에 팔려왔고 이 유녀들이 버는 수입으로 유곽 운영비부터 다른 유녀와 카무로의 의식주와 교육비, 옷과 화장값에 쓰여서 유녀 혼자 빚을 갚을 수 없었다. 그래서 빚을 다 갚는 식으로 유곽에 나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30세가 돼서 유곽에 나간다해도 가무와 매음을 빼면 할 줄 아는게 없었으며 각종 성병 및 화장독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 30세가 돼서 나간다는 것도 말이 좋아서 은퇴지 사실은 상품가치가 없어져서 퇴출당하는 것. 고로 유녀들이 자유의 몸이 되는 건 30세가 되기 전에 유곽에서 도망치거나 단골 손님이 미우케를 해주는 것 밖에 없었으며 유곽을 나가지 않는다면 반토신조가 되어 신조들의 매니저가 되었다. 당연히 미우케 비용은 일반 화대 비용보다 무지막지하게 비쌌고 특히 오이란이라면 몇 배로 올려서 미우케가 되지 못하게끔 막았다.
아시누케(足抜け)
미우케와 다르게 유녀가 빚을 갚지 않고 유곽에서 탈출하는 행위를 말한다. 즉 야반도주. 유녀들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유곽에 나갈 수 없었고 미우케도 소수의 상류층이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몰래 유곽에 나가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들키면 남녀모두 처벌을 받았는데 대개 남자는 처형. 여자는 고문을 당해 다시 유곽으로 돌아갔는데 만일 얼굴이나 몸에 상처가 나면 몸값이 떨어져 일하는데 지장이 생겼다고 한다.
미아가리(身上がり, 身揚がり)
유녀가 자의로 일을 쉬는 것을 말한다. 대신 쉬는 날 만큼 손해배상은 유녀 자신의 사비로 지출했다. 주로 애인을 둔 유녀들이 미아가리를 자주 했다고.
쿠루와코토바(廓詞)
유녀들이 즐겨사용한 말투로 1인칭은 와치키나 왓치, 아치키, 2인칭은 누시, 어미는 린스와 아린스(일반어로는 데스, 소오데스에 해당), 난시(일반어로는 쿠다사이에 해당)와 난스, 노쟈로 끝난다. 다른 말로 사토코토바(里詞)나 오이란코토바(花魁詞), 아린스코토바(ありんす詞)로도 불린다. 자세한 것은 하단의 쿠루와코토바 문단을 확인바람.
오이란도츄를 묘사한 그림
오이란도츄(花魁道中)
다른 이름은 스베리도츄(滑り道中). 오이란이 손님에게 지명받아 손님이 있는 찻집이나 연회장으로 갈 때 하는 행차로 연례 행사 같은 개념이었다. 인기 오이란들일수록 행렬이 화려하거나 길었기에 경쟁을 하는 일이 많아 막부에서 오이란도츄를 하루에 한번으로 제한을 건 적이 있었다.
삼중 타카게다(三枚歯高下駄)
게다의 일종으로 굽이 매우 높다. 즉 나막신 버전 하이힐. 오이란이 오이란도츄(花魁道中)를 할 때 신는 나막신. 에도시대때는 미인의 조건으로 발도 보았기에 발을 포함한 오이란의 외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긴 것.
카미유이(髪結)
유녀들의 전속 미용사로 전원 여성. 하단에 서술된 유녀들의 머리 스타일이 대중적으로 퍼진 것도 카미유이가 전국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유녀의 머리 스타일[편집 | 원본 편집]

유녀의 머리스타일(등롱빈과 다테 효우코, 카츠야마미게)
  • 다테 효우코(伊達兵庫)
효우코(横兵庫)의 파생형으로 오이란, 타유 등 고급 유녀들이 주로 한 머리 스타일이다. 흔히 유녀 관련 매체에서 묘사되는 큰 가발에 머리 뒤쪽은 끈으로 묶고 꽃비녀나 복잡한 장식이 달린 비녀들을 여러 개 꽂는 화려한 머리 스타일이 다테 효우코이다.
  • 카츠야마미게(勝山髷)
선녀 머리처럼 뒷 머리를 원형으로 고정시키는 머리 스타일로 실제 카츠야마(勝山)라는 오이란이 한 머리 스타일이다. 예시 사진에서 왼쪽에서 다테 효우코 밑에 있는 머리모양이 카츠야마미게.
  • 등롱빈(燈籠鬢))
고래수염을 사용한 봉을 머리카락 안에 넣고 부풀리는 머리 스타일. 예시 사진에서는 모두 등롱빈을 하고 있다. 원래는 유녀들의 머리 스타일이었지만 유행을 탐으로서 일반 여성들도 하게 된 머리 스타일이다.
  • 유이와타(結綿)
비녀가 아닌 붉은 끈으로 머리카락을 상투를 틀어 고정하고 단순하고 적은 비녀를 꽂은 머리 스타일로 신조들이 주로 한 머리 스타일.
  • 츠부시 사미다(つぶし島田)
상투를 트는 머리로 빗으로 고정하는 머리.
  • 마루마게(丸髷)
오이란이 아닌 일반 유녀들이 주로 한 머리 스타일로 비녀가 매우 적다. 다테 효우코와 비슷해보이지만 다테 효우코와 달리 가발이 없고 장식이 단순하다.

유녀의 계급[편집 | 원본 편집]

유녀들은 처음부터 오이란이 될 수 없었다. 카무로부터 시작해서 신조 계급을 거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그마저도 고급 유녀들은 교육 비용이 많이 들어가 카무로 중 소질이 있는 자(힛코미카무로)들만 뽑아 양성을 했기에 고급 유녀를 보유한 가게 수는 적었다.

유녀의 등급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기에 본 문서만 아닌 자료에서도 일정하지가 않다. 해당 분류는 전체적으로 알려진 계급.

  1. 구 요시와라 초기: 타유 > 코우시 > 하시타
  2. 구 요시와라 말기: 타유 > 코우시 > 츠보네 > 하시타 > 키리미세
  3. 신 요시와라 초기: 타유 > 코우시 > 산챠 > 츠보네 > 키리미세
  4. 신 요시와라 중기: 타유 > 코우시 > 산챠 > 우메챠 > 키리미세
  5. 중기 이후: 요비다시 > 츄산 > 츠키마와시[3] > 자시키모치 > 헤야모치 > 키리미세

고급[편집 | 원본 편집]

오이란을 재현한 모습
타유 (太夫)
타유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가무극의 뛰어난 여배우를 자칭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풍기문란 문제로 여성의 연극·가부키 출연이 법적으로 금지되면서 여배우들이 유녀로 흡수되면서 변형된 것. 그러나 교토의 유곽이 소멸되면서 타유 단어도 소멸. 오이란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이란 (花魁)
오이란의 전체적인 설명은 위 단락을 참조. 여기에서는 오이란의 세부 계급만을 설명한다.
  • 요비다시(呼出し)
오이란 세부 계급으로 제일 최상위. 원래는 유녀 전체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상급 유녀로 변했다. 단 일부 자료에서는 오이란보다 아래였다는 기록이 있고 찻집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상급 유녀라는 설이 있다. 대중매체의 오이란들은 전부 요비다시에 속했다고 보면 된다.
  • 츄산(昼三)
요비다시 다음 아래 계급인 오이란에 속하는 유녀.
  • 츠키마와시(附廻し)
오이란 계급 중 제일 낮은 계급. 코우시보다 위.

상급[편집 | 원본 편집]

상급은 오이란에 속해있었다는 설이 있었고 오이란이 제일 위, 상급 유녀는 별개였다는 설도 있었다.

코우시(格子)
오이란, 타유 다음의 상급 유녀로 격자창 너머에 있다고 해서 코우시로 불렸다. 코우시까지는 하리미세(張見世)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이란이 아이돌이라면 코우시는 에이스 정도에 속했다.
산챠(散茶)
코우시 다음의 상급 유녀 계급으로 산챠죠로에서 유래되었다. 상급 유녀 중에서 낮은 계급으로 여겨졌다.

중급[편집 | 원본 편집]

중급 유녀부터는 개인 침실 및 사실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부 유녀 자신의 비용에서 빠져나갔다.

자시키모치(座敷持ち)
중급 유녀들 중 제일 높은 단계로 화대는 오늘날 기준으로 약 2만 엔(한화로 20만 원). 지시키모치는 자료에 따라 상급 유녀로 분류하거나 오이란으로 치는 경우가 있다.
헤야모치(部屋持ち)
자시키모치보다 낮은 단계의 중상급으로 화대는 자시키모치보다 쌌다.
우메챠죠로(梅茶女郎)
준말로 우메챠.
츠보네죠로(局女郎)
준말로 츠보네
하시타죠로(端女郎)
준말로는 하시타. 중하급 유녀들 중 제일 낮은 단계.

하급[편집 | 원본 편집]

하급은 세분화된 계급없이 전부 키리미세, 미세죠로로 불렀는데 말그대로 단 돈 몇푼에 팔리는 싸구려 유녀들을 전부 키리미세라고 했다.

키리미세(切見世)
다른 말은 가시죠로, 카네미세, 미세죠로. 일반적인 하급 유녀다. 어원은 하리미세보다 격이 낮은 싸구려 가게인 키리미세에서 따온 것. 키리미세는 격자창(코우시)가 없었다.

견습[편집 | 원본 편집]

견습 단계는 15살 이전까지로 손님을 받지 않았다.

  • 신조(新造)
카무로 중 유녀로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뽑아 다도 및 가무, 예절 교육을 시켰다. 아직 정식 유녀가 아닌 만큼 손님을 받지 않았지만 외모는 정식 유녀처럼 오비가 앞으로간 기모노를 입되 머리는 유이와타(結綿) 방식을 했다. 일반적으로는 「후리소데신조(振袖新造)」라고 했으나 세분화된 계급이 있어 신조들중 기량이 뛰어난 "힛코미신조(引込新造)"와 카무로를 거치지 않고 10대 넘어서 유곽에 들어선 "토메소데신조(留袖新造)", 유녀일은 은퇴했으나 신조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반토신조(番頭新造)" 가 있었다.
    • 힛코미신조(引込新造)
후리소데 신조들중 유녀로서 기질이 특출난 신조를 말하며 오이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 토미소데신조(留袖新造)
토미소데 신조는 약 10대 넘어서 카무로를 거치지 않고 들어온 신조로 늦깍이이다. 나이가 차서 들어온 만큼 교양 및 기술이 부족해 고급 유녀가 될 수 없다고 여겨졌으며 토메소데신조는 일반 신조와 다르게 손님을 받았다.
    • 반토신조(番頭新造)
반토신조는 유녀로서 재능이 없거나 나이가 들어서 은퇴한 유녀들이 맡는 직종으로 카무로와 신조의 교육을 담당하거나 오이란의 시중을 들었다.
카무로의 모습
  • 카무로(禿)
10세 이하의 견습 유녀들. 토미소데신조들을 제외한 모든 유녀들의 시작 계급이다. 유래는 머리카락이 없다는 의미로 올림머리를 못할 정도로 머리가 짧아서(즉 어리다) 붙여진 것. 빚으로 팔려와 유곽에 들어서거나 처음부터 유곽에 태어난 소녀들이 카무로가 되었다. 이들은 오이란, 중상급 유녀들의 소유물이었기에 카무로의 의식주는 전부 오이란이 담당했으며 여러 명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카무로들도 이런 유녀들을 언니라 부르며 시중을 담당하고 유녀의 기술을 배우는 식. 카무로라고 성장하면 무조건 유녀가 된 것은 아니고 외모가 예쁘거나 재능이 있는 카무로만 뽑아서 후리소데 신조로 키운 뒤 나이가 만 15세가 되면 정식 유녀로 승격시키는 식. 카무로가 대머리(하게)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일부 매체에서는 머리를 민 대머리로 묘사되지만 원래는 단발머리를 유지했다.

번외[편집 | 원본 편집]

해당 문단은 유녀가 아닌 개인 소유의 사창, 즉 일반적인 매춘부이다.

유나(湯女)
목욕탕에 소속된 매춘부.
산차죠로
찻집에 소속된 매춘부.
메시모노리온나
이름 그대로 밥을 짓는 여자라는 뜻에 걸맞게 여관 등 숙식을 제공하는 가게에서 매춘 및 접객을 하는 여성을 말했다.
요타카를 묘사한 우키요에
요타카(夜鷹)
유곽 소속조차 아닌 돗자리를 들고 길거리 등지에서 몸을 파는 매춘부를 말하며 현대에 길거리 호객 매춘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강가나 길가, 숲을 배경으로 돗자리를 들고 있는 여성이 그려진 우키요에들은 요타카를 묘사한 것이다. 즉, 매춘부들 중 제일 최하위에 속하는 계층으로 요타카들은 토미소데신조조차 못될 많은 나이(20대 이상)에 매춘에 뛰어들거나 성병에 걸리거나 반토신조조차 못될 정도로 실력이나 가치가 떨어져 유곽에 쫓겨난 유녀 출신들이 대부분으로 길거리에서조차 일을 못하면 강가 등지에 뗏목을 띄우고 일을 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40대부터 70대까지 고연령들도 종사했었다고 한다.

실존한 오이란[편집 | 원본 편집]

  • 우스구모 타유 (薄雲太夫)
겐지모노가타리에서 이름을 따온 오이란으로 우스구모라는 이름을 가진 오이란은 3명이었기에 세습명인지 동명이인인지는 불명. 일본 대중에게 알려진 우스구모 타유는 현 나가노 현 출신으로 고양이 애호가라고 한다.
  • 타카오 타유 (高尾太夫)
타카오는 개인의 이름이 아닌 세습명으로 대대로 오이란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 카츠야마 타유 (勝山太夫)
상기 언급된 카츠야마미게를 탄생시킨 오이란이다. 요시와라가 아닌 시켄쵸치쵸에 있던 목욕탕 출신의 죠로로 인기가 많았지만 요시와라 이외의 지역에서 매춘을 하는건 불법이었기에 요시와라로 갔다고 한다.

갤러리[편집 | 원본 편집]

대중매체[편집 | 원본 편집]

작품[편집 | 원본 편집]

해당 소재가 중심이 되는 창작물
해당 소재가 부가로 등장하는 창작물

캐릭터[편집 | 원본 편집]

  • 슈퍼전대 시리즈
  • 역전재판 시리즈
    • 역전재판 6 - 센푸테이 비푸★ - [역재 6 스포일러] 정확히는 그의 인격 중 하나인 키세가와가 오이란. 키세가와 인격일 경우에는 쿠루와코토바를 사용한다. 키세가와라는 이름 자체가 お見立て(내지는 墓違い)라는 오이란을 소재로 삼은 라쿠고의 등장인물에서 따온 것.

굿즈[편집 | 원본 편집]

외형이 매우 화려했기에 에도 시대 기반 창작물만 아닌 오이란 복식을 차용한 캐릭터 상품이 종종 나오기도 한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대한민국에서 유녀가 등장하는 에도 시대 배경 창작물을 번역할 때 현지화로 기생(기녀)으로 번역하는 일이 많은데 기생은 게이샤와 비견되어야 할 예능인으로 예능과 가무를 했을지라도 매춘이 주업인 유녀와는 다른 직종이다. 사실 기생의 매춘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매춘금지법이 실시되었고 기생의 목적도 춤과 노래만 팔아야 하는 공식적으로는 성애 대상이 아니었다. 매춘을 대놓고 한 건 급이 매우 낮은 삼패기생(더벅머리), 은밀히 매춘을 한 건 이패기생(은근짜)이었다. 이들은 창기라고 했으며 최고급인 일패기생은 공식적으로 매춘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반들이 법을 어기면서 기생들에게 성접대를 강요하거나, 예쁘거나 능력이 뛰어난 기생은 첩으로 삼아 빼내고 기생에게 휘둘려 패가망신했다거나 한 기생을 두고 서로가 치정 싸움을 벌였다는 기록, 《구운몽》처럼 명백히 매춘을 했다는 서술이 있는 창작물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성접대를 거부하거나 남편을 둔 일패기생이 있었다. 즉, 기생은 공인 매춘부는 아니었고 함부로 건드리거나 범하려는 시도만 해도 처벌을 했다고 하지만 잘 나가는 기생도 외모가 아름다워야 했고 양반들부터가 법을 어겨가며 성애 대상으로 보았기에 매춘을 아예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기생을 꽃으로 비유하거나 기생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경고, 기생들의 외형이 일반 규수보다 화려하거나 저고리가 짧았다는 것이 가무만 한 게 아니었다는 증거고, 기생들의 신분은 공식적으로 천민이거나 천민만이 될 수 있었기에 취급은 좋지 못했다. 기생은 원래 매춘부가 아니고 풍류만 읊는 예능인이고 존경을 받다가 일제강점기 때 유곽 문화가 들어서면서 매춘부로 전락했다는건 매우 과장된 말이다. 하다못해 순수 예능 전문인 게이샤도 결국 남성을 위한 접객이 우선시되었고, 본문에 서술된 것처럼 뒤로는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매춘을 하는 문제를 일으켰기에 전 세계 역사 속의 여성 예능인들은 공인 매춘부인 유녀(일본)와 코르티잔(유럽 전체), 헤타이라(그리스)와 달리 공식적으로 매춘이 주업이 아니었다 해도 당시 사회상 문제와 신분 문제때문에 성접대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했다. 애당초 여성 예능인과 풍류와 교양을 갖춘 고급 매춘부가 탄생하게 된 계기부터가 당시 사회 주류층인 남성 상류층들의 유흥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음을 명시해야한다.
  • 일본은 남색 문화가 유행했기에 요시와라 유곽에도 남창 전문 유곽이 있었다. 단, 남색 문화는 일부의 유행일 뿐 수요가 적었다보니 당연히 고급 남창은 없었다.
  • 최근 오이란에 대한 정보가 퍼지면서 오해와 잘못된 정보도 돌아다니는데 대표적으로 오이란은 상황에 따라 매춘을 안했다, 오이란이 되면 매춘을 안했다는 오보다. 전자는 오이란에겐 손님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서 마음에 안 드는 손님만 거절하거나 다른 손님을 상대할 때 대기 손님들이 많았다면 휘하 신조를 대신 보내는 거였지, 매춘 자체를 하지 않았으면 생계에 문제가 생겼기에 매춘을 아예 하지 않기는 불가능했었다. 후자는 게이샤와 대한민국의 일패기생과 동일시해서 헷갈린 것으로 오이란은 상류층을 상대하기 위해 귀족 여성 못지 않게 교양과 가무를 빡세게 배웠다 해도 일본 막부가 공인한 고급 매춘부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유녀와 관련된 문서
유사직종

외부 참조[편집 | 원본 편집]

티스토리 블로그 포스팅
이글루스 블로그 포스팅
온라인 사전

각주

  1. 훈독으로는 あそびめ(아소비메), 매춘부의 속어 논다니가 유녀에서 유래된 것이다. 말그대로 노는(遊) 여자(女).
  2. 참고: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고구려 때 ‘노는 여자들’이 참 많았다는데… 2012년 3월 7일
  3. 이 세 계급은 상급으로 전부 오이란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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