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카프룬 스키장 터널 화재

Mykim5902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8월 13일 (목) 00:04 판 (→‎사고 이후)
{{{사건이름}}}
Kaprun 2 rail.jpg
참사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 찍힌 퍼니큘러 선로의 모습.
사건 정보
원인 전기히터 화재

카프룬 참사(Kaprun disaster)는 2000년 11월 11일 오전 8시 57분, 산 아래 계곡역을 출발한 카프룬 스키장의 셔틀트레인 퍼니큘러(Funicular)에 화재가 발생하여 무려 155명의 인명피해를 낳은 사건이다.

카프룬 셔틀트레인의 정보

해당 열차는 1974년에 운행을 시작하여 당시 26년째 운행 중이었으며, 8량 1편성의 무인운전 강삭철도였다. 열차는 총 2편성이 운행 중에 있었는데, 상행 열차와 하행 열차가 케이블과 도르래로 연결되어 있어 케이블카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행되고 있었다.[1] 무인운전 방식의 열차였기에 기관사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맨 앞 칸과 맨 뒷 칸의 기관실에 차장 2명만이 타서 고장 시 열차를 제어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열차는 9분 동안 3.9km 길이, 30도의 경사를 가진 선로를 25km/h의 속도로 운행중이었으며, 당시 케이블카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선로에 대해 설명을 해보자면 길이는 총 3.9km, 경사도는 30도였으며, 이 구간을 열차가 운행하는 것이었다. 흔히 산악열차를 떠올리면서 근처 산의 경치를 다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으나, 이 곳은 특이하게도 3.9km 중 3.3km, 즉 대부분이 터널 구간이었다. 이는 무슨 얘기냐면 산 아래 계곡역과 그로부터 600m 구간만 지상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터널구간 및 지하구간이었다.

사고 과정

2000년 11월 11일, 오전 8시 57분, 겨울 시즌이 되자 예상대로 퍼니큘러는 북적이기 시작했다. 사실 이 곳이 워낙 스키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고, 퍼니큘러가 워낙 인기도 많았기에, 아침부터 퍼니큘러는 스키를 탈 생각에 기대로 부풀어있는 스키어들로 가득했다.

8시 57분 상행열차 탑승
산 아래의 계곡역에 상행 열차가 도착하자, 스키어들은 한껏 기대를 안은 채 열차에 올랐고, 해당 열차는 167명의 스키어들을 태운 채 잠시 후 열차가 계곡역을 출발했다. 신난 스키어들을 태운 열차는 계곡역을 출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터널구간으로 진입했다.
9시 2분 발차 및 화재발생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뒤쪽 기관실에서 갑자기 연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승객들은 열차에 사소한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고 아직까지는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연기가 점점 진해졌고, 승객들이 화재가 발생하였음을 깨달았으며, 열차 안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많은 승객들이 화재가 발생했다고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열차는 통로문이 없는 구조였기에 앞쪽에서는 상황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한 승객은 휴대폰을 꺼내서 소방대에 신고를 시도했으나, 이 곳은 첩첩산중의 스키장이었고 게다가 터널 안이었기 때문에 휴대폰의 전화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9시 5분 열차 정지
화재로 인해 열차의 제동관이 녹아내려 비상정지가 걸려서 터널의 기점 600m 지점, 계곡역으로부터 불과 1.3k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멈춰버렸고, 아직 화재의 사실을 모르는 승객들과 차장은 어리둥절했다. 그 시간, 열차가 멈추었다는 것을 발견한 알파인 센터 역의 관제사는 해당 열차의 차장을 무전하여 열차가 멈춘 이유를 묻는다. 차장 본인이 열차를 정지시킨 것이 아니었으므로, 차장은 무슨 상황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같은 시각, 화재의 발원지인 뒤쪽 칸은 이미 연기가 가득 차 시야 확보도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였고, 그 중 독성 연기를 마신 일부 승객들은 이미 질식사한 상태였다. 서서히 질식하는 승객들을 본 다른 승객들은 미처 날뛰고 있었고, 열차의 출입문을 강제로 열어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열차에는 승객이 직접 열수 있는 수동개폐장치가 없었다. 결국 승객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스키 폴대로 창문을 깨기 시작하였으나, 창문은 깨짐 방지를 위한 아크릴 재질이라 유리와 달리 쉽게 깨지지 않았다.
9시 8분 화재 인지
드디어 열차의 차장이 차량 내에 화재가 발생하였음을 인지하고 이를 알파인 센터 역의 관제실에 통보하게 된다. 관제실에서는 열차의 출입문을 전부 개방하고 승객들을 대피시키라고 지시하였고 차장은 출입문을 열려고 시도하였으나, 화재로 인해 단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압이 소실되어 열차의 출입문이 열리지 않았다.
같은 시각, 뒷 칸에서는 많은 승객들이 창문을 깨려고 미친 듯이 폴로 찍고 있었으며, 그 중 한 사람이었던 '토르스텐 그래틀러'라는 이름을 가진 승객이 드디어 창문 한 개를 깼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승객들은 황급히 토르스텐이 깬 창문을 통해 열차의 밖으로 탈출하였으나, 많은 승객들이 유독 가스를 어느 정도 마셨기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탈출한 토르스텐은 함께 탈출한 승객들에게 불이 났을 때는 아래로 가야 한다고 설명하였으며, 승객들을 데리고 선로 옆의 비상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탈출하려고 했다.
시간 미상 탈출
전직 의용소방관이었던 토르스텐의 말대로 불과 연기는 위로 이동하기에 이와 같은 화재가 발생 시에는 반드시 방화구역을 따라 대피해야 하는데, 이 곳은 터널이라 방화구역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아래로 대피했어야 했다. 그러나 화재는 열차의 뒷쪽 후두부 쪽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에 아래쪽으로 대피하기 위해서는 불길을 뚫다시피 가야 했고, 이 때문에 대다수의 승객들은 토르스텐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12명 만이 토르스텐을 따라 아래로 대피하고, 나머지는 모두 위쪽으로 대피하게 된다.
그로부터 잠시 후, 드디어 열차의 차장이 모든 출입문의 잠금 장치를 해제하였고, 승객들은 열차의 출입문을 모두 열어 차량 밖으로 모두 탈출했다. 그러나 이 승객들도 스키 부츠를 신고 있어 내려가는 것보단 올라가는 것이 더 수월했을 뿐만 아니라 열차의 후두부에서 불이 나고 있었기에 하나같이 모두 위쪽으로 대피를 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불과 연기는 위로 이동하며, 이 상황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결국 불길은 위쪽으로 대피하던 승객들을 순식간에 덮쳤으며, 화재가 확대되면서 굴뚝 효과를 일으켜 불길과 유독가스가 위쪽으로 순식간에 치솟았다. 결국 위쪽으로 대피하던 승객들은 모두 불길에 휩싸이거나 연기를 들이마시고 사망하였으며, 열차 내에 탑승하였던 167명 중 155명이 사망했다. 즉, 생존자는 토르스텐과 함께 아래쪽으로 대피했던 토르스텐 포함 12명이 전부였다.

사고 여파

155명의 승객들이 사망하였으며, 희생자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 92명, 독일인 37명, 일본인 10명, 미국인 8명, 슬로베니아인 4명, 네덜란드인이 2명, 영국인 1명, 크림 공화국인 1명이었다. 사고 열차는 완전히 전소되었다.

이 화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키장 전체에 영향을 미쳤는데, 터널을 따라 송전선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송전선이 전소하여 스키장 전체가 정전되었다. 또한 꼭대기 역의 승강장과 건물에 연기가 완전히 들어차게 되었고, 결국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대피하였다.

사고 원인

전혀 원인 모를 갑작스런 화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방화가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방화범이 열차에 탑승하여 불을 지르고 탈출할 시간은 길어야 5분 남짓으로 너무 짧았고, 열차의 불이 처음부터 갑자기 확 치솟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방화의 가능성은 배제되었다.

그러다가 조사 도중, 조사팀에서 선로에 떨어져 있는 특정 기름을 발견하였고, 이 기름은 열차의 유압유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유압라인 근처에 히터가 있었다는 점에서 화재의 원인이 밝혀지게 되는데, 기관실의 유압탱크에서 새어나온 기름이 바로 옆 팬히터에 떨어지면서 히터에 처음으로 불이 붙었고, 이 불이 유압라인을 녹이면서 유압유가 대량으로 새어 나와 화재가 삽시간에 확대된 것이다. 해당 유압라인은 제동장치 및 출입문 개폐장치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압의 소실로 열차가 터널 내에서 정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차장이 문을 열 수도 없게 되었다.

이중 확인을 위한 승무원 2명 탑승, 유리파편 상해를 막기 위한 아크릴 창문 등 평시 안전사고를 막기 위한 부분에는 신경을 많이 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비상 수동 출입문 개폐 장치, 화재감지기, 비상벨 등의 긴급수단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승객들의 자력 대피가 늦어져 사고의 피해가 더욱 커지게 된 것이며, 이는 안전불감증이라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터널 구간인지라 화재로부터 대피하거나 구조를 요청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고 이후

추모관

현재도 오스트리아 카프룬 터널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 참사는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2004년 11월 11일, 사고 4주기를 기념하여 사고 열차가 운행하던 계곡역 인근에 추모관이 설립되어 운영중이다.

해당 퍼니큘러는 폐쇄되어 2014년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역과 열차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정상으로 올라가려면, 속도가 더 빨라진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된다.

사고 이후, 열차 관련 업체의 관계자 16명이 2002년 과실치사 혐의로 유족들로부터 고소를 당해 법정에 서게 되었으나, 2004년, 결국 무죄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오스트리아와 알프스 측은 이런 대참사의 재발을 막고자 차량 내 비상벨과 수동 개폐 장치, 창문 파괴용 비상 망치를 모든 강삭철도의 열차 내에 도입했으며, 터널 내에서도 핸드폰이 수신되도록 시스템을 개선하였다.

같이 보기

각주

  1. 아래쪽 역에서 열차가 상행하면, 반대쪽 열차는 윗쪽 역에서 하행하던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