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네덜란드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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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네덜란드가 너무나 많은 이익을 누리고 있는데, 영국은 그 이익을 탈취하려고 결심하였다.|S.W.Roskill|The Strategy of Sea Power<ref>London : Collins, 1962, p33</ref>}}
{{인용문|네덜란드가 너무나 많은 이익을 누리고 있는데, 영국은 그 이익을 탈취하려고 결심하였다.|S.W.Roskill|The Strategy of Sea Power<ref>London : Collins, 1962, p33</ref>}}
*Angle-Dutch War(1652~1674)
*Anglo-Dutch War(1652~1674)
==개요==
==개요==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17세기 말엽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서 일어났던 3차례의 전쟁을 의미한다. 한문으로는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고 표기하기 때문에 줄여서 영란전쟁이라 하기도 하기도 한다. {{ㅊ|절대 [[국회의원]] [[김영란]] 씨가 참전한 전쟁이 아니다}}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17세기 말엽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서 일어났던 3차례의 전쟁을 의미한다. 한문으로는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고 표기하기 때문에 줄여서 영란전쟁(英蘭戰爭)이라 하기도 하기도 한다. {{ㅊ|절대 [[국회의원]] [[김영란]] 씨가 참전한 전쟁이 아니다}}


==전쟁의 배경==
==전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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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특성==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3차례에 걸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전쟁의 원인이 원인이다 보니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무역전쟁이 실제 전쟁으로 격화된 것에 해당하는 전쟁 중 하나이다. 이외에 당시 네덜란드의 교통로는 [[도버 해협]]을 지나던지 아니면 [[스코틀랜드]] 북단을 우회해야만 하는 길 둘 뿐이었는데 어느 쪽으로 가건 영국 해군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코스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는 이들 항로를 지나는 선박들을 호송하는 함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함대와 관련한 전투가 주요 전장이 되었다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3차례에 걸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전쟁의 원인이 원인이다 보니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무역전쟁이 실제 전쟁으로 격화된 것에 해당하는 전쟁 중 하나이다. 이외에 당시 네덜란드의 교통로는 [[도버 해협]]을 지나던지 아니면 [[스코틀랜드]] 북단을 우회해야만 하는 길 둘 뿐이었는데 어느 쪽으로 가건 영국 해군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코스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는 이들 항로를 지나는 선박들을 호송하는 함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함대와 관련한 전투가 주요 전장이 되었다는 특성이 있다.
각 차수별 전쟁 양상을 보면 1차 전쟁은 주로 네덜란드 선단에 대한 영국의 공격과 이를 방어하기 위한 네덜란드의 대응이 전투로 이어졌고, 2차 전쟁은 제해권 경쟁을 위한 양측의 전투함대간의 전투로 진행되었으며, 3차 전쟁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막기 위한 네덜란드 해군의 대응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1차 전쟁==
==1차 전쟁==
*1652~1674
*1652~1674
1차 전쟁에서는 영국 함대가 네덜란드의 해상무역을 봉쇄하고자 하였으며 네덜란ㄷ 함대는 상선대를 보호하면서 영국함대와 해상전투를 치를 수 밖에 없었다. 주요 전장은 영국해협 인근에 해당되었으며 양측의 일진일퇴가 거듭되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친 양국은 1654년 4월 1차 웨스트민스터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 네덜란드는 항해조례의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엣 사실상 영국의 승리로 볼 수 있다.
1차 전쟁에서는 영국 함대가 네덜란드의 해상무역을 봉쇄하고자 하였으며 네덜란드 함대는 상선대를 보호하면서 영국함대와 해상전투를 치를 수 밖에 없었다. 주요 전장은 영국해협 인근에 해당되었으며 양측의 일진일퇴가 거듭되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친 양국은 1654년 4월 1차 웨스트민스터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 네덜란드는 항해조례의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영국의 승리로 볼 수 있다.


==2차 전쟁==
==2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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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웨스토프트 해전]]
*[[로웨스토프트 해전]]
*[[4일 해전]]
*[[4일 해전]]
*솔베이 해전
*순네벨트 해전
*[[텍셀 해전]]
*[[텍셀 해전]]
==해전 전술의 변화==
*1차 전쟁에서 있었던 [[포틀랜드 해전]]의 경험을 살려서 이후 벌어진 해전에서는 양측이 종열진을 형성하고 포격전을 하는 양상으로 해전의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이전에는 서로 상대의 함선에 달라붙어 난전을 펼치는 개싸움이었다면 이 1차 전쟁을 기점으로 유럽 국가들의 해전 양상은 현측의 화포를 최대한 사용하는 함선간 1:1 전투를 수행하면서 부가적으로 함상 백병전을 펼치는 식으로 해전 교리가 바뀌게 되었다.
*기존에는 무장상선까지 사용하여서 전투를 벌였으나 해상에서의 전술이 복잡하게 변화하게 되면서 함대의 구성에서 점차 무장한 상선이 제외되고 표준화된 전열함이 증가하는 양상으로 함선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무장 상선이 빠지고 전열함에 가능한 많은 화포를 싣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함대를 구성하는 함선의 수는 오히려 감소하게 되었다.
*이 전쟁까지는 양측 함대가 화공선을 예인하는 방식으로 화공선을 동행시켰으나 속력이 느리고 예인의 불편함으로 점차 화공선의 사용을 기피하게 되면서 해전에서 화공선의 사용은 거의 사라졌다. 다만 이 화공선은 이후 19세기 후반 어뢰정이 등장하면서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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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8일 (수) 11:00 판

네덜란드가 너무나 많은 이익을 누리고 있는데, 영국은 그 이익을 탈취하려고 결심하였다.
— S.W.Roskill, The Strategy of Sea Power[1]
  • Anglo-Dutch War(1652~1674)

개요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17세기 말엽 영국네덜란드 사이에서 일어났던 3차례의 전쟁을 의미한다. 한문으로는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고 표기하기 때문에 줄여서 영란전쟁(英蘭戰爭)이라 하기도 하기도 한다. 절대 국회의원 김영란 씨가 참전한 전쟁이 아니다

전쟁의 배경

영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영국에게 패배하면서 그동안 스페인이 누리던 번영의 계승자는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된 네덜란드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독립시에 이미 무역의 범위를 전 세계에 확장하고 있었으며, 암스테르담은 당시 온 유럽의 경제적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특히 네덜란드는 1602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이를 중심으로 중개무역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로 인해 불과 1세기 아지너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동방무역의 패권을 네덜란드가 그대로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1651년에 그 유명한 항해조례를 선포하였다. 이 조례에 의하면 영국과 그 식민지로부터 반입되는 상품은 영국의 선박 또는 해당 상품의 생산지 선박에 의해서만 수송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이 조례의 목적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네덜란드의 중개무역업에 타격을 입히는 것으로 국토 거의 전체가 저지대에 해당하는 국가인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상당수의 생계를 해양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선의 활동 감소는 곧바로 국가 수입의 감소로 이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쟁 준비 자체는 되어있지 않았지만 기존의 해군에 의존하여 영국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성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3차례에 걸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전쟁의 원인이 원인이다 보니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무역전쟁이 실제 전쟁으로 격화된 것에 해당하는 전쟁 중 하나이다. 이외에 당시 네덜란드의 교통로는 도버 해협을 지나던지 아니면 스코틀랜드 북단을 우회해야만 하는 길 둘 뿐이었는데 어느 쪽으로 가건 영국 해군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코스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는 이들 항로를 지나는 선박들을 호송하는 함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함대와 관련한 전투가 주요 전장이 되었다는 특성이 있다.

각 차수별 전쟁 양상을 보면 1차 전쟁은 주로 네덜란드 선단에 대한 영국의 공격과 이를 방어하기 위한 네덜란드의 대응이 전투로 이어졌고, 2차 전쟁은 제해권 경쟁을 위한 양측의 전투함대간의 전투로 진행되었으며, 3차 전쟁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막기 위한 네덜란드 해군의 대응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1차 전쟁

  • 1652~1674

1차 전쟁에서는 영국 함대가 네덜란드의 해상무역을 봉쇄하고자 하였으며 네덜란드 함대는 상선대를 보호하면서 영국함대와 해상전투를 치를 수 밖에 없었다. 주요 전장은 영국해협 인근에 해당되었으며 양측의 일진일퇴가 거듭되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친 양국은 1654년 4월 1차 웨스트민스터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 네덜란드는 항해조례의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영국의 승리로 볼 수 있다.

2차 전쟁

  • 1665~1667

1차 전쟁을 종결지은 1차 웨스트민스터 평화조약은 사실상 일시적인 휴전에 불과하였다. 역시나 무역을 둘러싼 해양패권의 경쟁은 지속되었으며 결국 1665년 2차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2차 전쟁에서는 드루이터 제독이 지휘한 네덜란드의 함대가 대체적으로 해전에서 우위를 유지하였으나 국력의 소모는 네덜란드측이 훨씬 더 빨랐기 때문에 결국 네덜란드가 먼저 휴전을 요청하여 1667년 8월에 양국은 브레다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결과 네덜란드는 현재의 뉴욕에 해당하는 뉴암스테르담을 포기하고, 북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의 지배권을 영국에 양도하게 되었다.


3차 전쟁

  • 1672~1674

3차 전쟁은 영국의 찰스 2세와 동맹을 맺은 프랑스루이 14세가 네덜란드를 공격하는 일 까지 벌어지면서 일종의 국제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두 국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국토와 인구가 작은 네덜란드는 바다에서는 영국과, 육지에서는 프랑스와 싸워야 하는 이중고를 치러야만 했다. 결국 2년에 걸친 전쟁으로 네덜란드는 국력을 거의 다 소모하게 되고 결국 1674년 영국과 2차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해상에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게 되었다. 참고로 2차 웨스트민스터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 전쟁 중에 네덜란드가 점거하였던 뉴욕(뉴암스테르담)을 다시 영국에 양도한다.
  2. 동인도에서 무역할 때 네덜란드는 영국에게 유리한 조건을 부여한다.
  3. 네덜란드는 전쟁 배상금으로 영국에 800,000파운드를 지불한다.
  4. 네덜란드 해군의 함선은 영국 해군의 함선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2]
— 1672년 2월 19일, 2차 웨스트민스터 조약 주요 내용

이 와중에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해상무역은 점진적으로 영국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해상 무역의 패권은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거기에 이 전쟁이 끝나고 15년이 지나서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William of Orange)이 명예혁명을 통해 영국 왕 윌리엄 3세를 겸하게 되면서 네덜란드 해군은 영국 해군과 병합하게 되었다.

주요 전투

해전 전술의 변화

  • 1차 전쟁에서 있었던 포틀랜드 해전의 경험을 살려서 이후 벌어진 해전에서는 양측이 종열진을 형성하고 포격전을 하는 양상으로 해전의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이전에는 서로 상대의 함선에 달라붙어 난전을 펼치는 개싸움이었다면 이 1차 전쟁을 기점으로 유럽 국가들의 해전 양상은 현측의 화포를 최대한 사용하는 함선간 1:1 전투를 수행하면서 부가적으로 함상 백병전을 펼치는 식으로 해전 교리가 바뀌게 되었다.
  • 기존에는 무장상선까지 사용하여서 전투를 벌였으나 해상에서의 전술이 복잡하게 변화하게 되면서 함대의 구성에서 점차 무장한 상선이 제외되고 표준화된 전열함이 증가하는 양상으로 함선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무장 상선이 빠지고 전열함에 가능한 많은 화포를 싣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함대를 구성하는 함선의 수는 오히려 감소하게 되었다.
  • 이 전쟁까지는 양측 함대가 화공선을 예인하는 방식으로 화공선을 동행시켰으나 속력이 느리고 예인의 불편함으로 점차 화공선의 사용을 기피하게 되면서 해전에서 화공선의 사용은 거의 사라졌다. 다만 이 화공선은 이후 19세기 후반 어뢰정이 등장하면서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각주

  1. London : Collins, 1962, p33
  2. 오늘날의 대함경례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영국 해군의 서열이 더 높음을 인정하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