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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Ἀλέξανδρος Γ' ο Μέγας(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통칭 Alexander the Great(알렉산더 대왕).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로, 기원전 336년부터 기원전 323년까지 13년간 재위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제압하고 오리엔트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켜 소아시아,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티마아, 이란 일대를 정복하였고, 인더스 강 유역까지 진군한 희대의 정복 군주였다. 또한 그리스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의 문화, 경제적 교류와 이민족들에 대한 포용정책을 시행하여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플루타르코스의 <비교 열전(Vitae parallelae)>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로오스의 초엿새에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 펠라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 날짜를 기원전 356년 7월 20일로 본다. 그는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2세와 에피로스 국왕 네오프톨레모스 1세의 딸인 올림피아스의 아들이다. 필리포스에게는 7~8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올림피아스는 그중 네번째 아내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난 날에 마케도니아의 파르메니온 장군이 일리리아와 파이오니아 연합군을 격파했다는 소식과 필리포스 2세의 말들이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동시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에 필리포스는 크게 기뻐하며 알렉산드로스가 불패의 인물이 될 거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알렌산드로스는 클레이토스의 누이인 라니케(Lanike)에 의해 길려졌다. 이후 어머니의 친척인 레오니다스와 리시마코스의 지도를 받았고, 마케도니아 귀족 청년들과 함께 승마, 전투 기술, 사냥법, 악기 다루는 법, 철학 등 다양한 기술을 익혔다. 그러던 10살 무렵, 도저히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던 명마를 길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말의 이름을 '황소머리'라는 뜻의 부케팔로스라고 지어줬다. 부케팔로스는 알렉산드로스 전용 말이 되어, 기나긴 원정 내내 함께 했다. 13살 때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시며 그로부터 의학, 철학, 도덕, 종교, 논리, 그리고 예술 등을 공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호메로스의 작품, 특히 일리아드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16살 때, 부친 필리포스 2세가 북쪽의 트라키아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 알렉산드로스는 부친이 떠난 동안 후계자로서 국정을 대신 맡았다. 이떼 마케도니아에 복속되었던 마이도이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출정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추방한 뒤, 마에디에 '알렉산드로폴리스'라는 이름의 도시를 세웠다. 이후 부친의 원정을 돕기 위해 그리스 남부에서 병력을 모집하다가 일리리아 인들이 쳐들어오자 곧바로 역공을 가해 격파하였다. 기원전 338년 테베와 아테네가 연합하여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하자,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일으켜 남하하였다. 마케도니아 군과 그리스 연합군은 보이오티아의 카이로네이아에서 회전을 벌였다.(카이로네이아 전투) 이때 필리포스 2세는 우익을 지휘했고,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 2세가 신뢰하는 장군들과 함께 좌익을 지휘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이 전투에서 테베군 우익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면서 아군의 대승에 기여했다.

아버지와의 갈등[편집 | 원본 편집]

필리포스 2세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뒤 스파르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굴복시키고, 헬레닉 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그는 헬레닉 동맹의 총사령관으로 선임되어 페르시아 제국을 침공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수도 펠라로 돌아온 필리포스 2세는 휘하 장군 아탈로스의 조카탈 클레오파트라 에우디케와 사랑에 빠져 곧바로 결혼했다. 아탈로스는 마케도니아의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조카딸인 클레오파트라가 필리포스의 아들을 낳는다면, 어머니가 외국 군주 딸인 알렉산드로스는 후계자 자리를 위협받을 수 있었다.

급기야 필리포스 2세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아탈로스가 술에 취한 채 "이번 결혼을 통해 왕국의 합법적인 후계자가 태어나길 바랍니다."라고 발언했다. 이에 분노한 알렉산드로스가 술잔을 집어던지며 "이 악당아! 그럼 나는 사생아란 말이냐?"라고 외쳤다. 필리포스 2세는 이 광경을 보고 분노하여 칼을 빼들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뎌서 바닥에 쓰러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쓰러진 아버지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저길 보시오! 유럽을 떠나 아시아로 건너갈 준비를 하는 사람이 걸려 넘어져 누워 있소!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7년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함께 마케도니아에서 추방되어 일리리아로 망명했다. 하지만 6개월 뒤 데마라토스의 설득으로 화가 풀린 필리포스 2세의 허락으로 마케도니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얼마 후 클레오파트라가 아들을 낳으면서, 알렉산드로스의 입지는 약해졌다. 그러던 기원전 336년, 페르시아 사트라프 픽소다로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이복동생인 아리다리우스에게 큰 딸을 주려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몇몇 친구들과 올림피아스는 이것이 필리포스 2세가 아리다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징조라고 경고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픽소다로스에게 코린토스의 희극 배우 테살루스를 보내 "아리다리우스는 사생아이니 대신 내게 딸을 달라"라고 요구했다.

픽소다로스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필리포스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를 불러 "일국의 왕자가 한낱 사트라프의 딸과 결혼하려 하다니!"라고 꾸짖고, 알렉산드로스의 친구 하팔로스, 네아르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에리기우스를 추방했다. 또한 코린토스 주민들에게 테살루스를 쇠사슬로 묶어서 마케도니아로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이렇듯 부자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던 기원전 336년 여름, 필리포스 2세는 자기 딸 클레오파트라가 올림피아스의 동생 알렉산드로스 1세와 결혼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이때 경호대장인 파우사니아스가 돌연 필리포스 2세를 습격하여 암살해버렸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리스의 반란을 진압하다[편집 | 원본 편집]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른 직후 사촌 아민타스 4세를 죽였고, 필리포스 2세의 새 아내였던 클레오파트라와 어린 아들, 그리고 일전에 알렉산드로스 앞에서 '합법적인 후계자'를 운운했던 아탈로스를 처형했다. 올림피아스는 한 술 더 떠서 필리포스의 딸 에우로파를 산채로 불태웠으며, 아리다이오스에게 독을 먹여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게 만들어 버렸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어머니의 잔혹한 행위에 분노했다고 한다. 얼마 후, 테베, 아테네, 테살리아, 그리고 트라키아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20세 밖에 안된 왕이 갓 즉위한 만큼 마케도니아가 빨리 대응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측근들은 외교로 대응하라고 조언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기병 3,000명을 이끌고 테살리아로 남하했다.

그는 올림푸스 산과 오사 산 사이의 고갯길에 테살리아군이 진을 치고 있는 걸 발견하고, 병사들에게 오사 산을 건너 적의 뒤편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헀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테살리아군은 마케도니아 기병대가 후방에 있는 걸 깨닫자 화들짝 놀라며 항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들 중 기병을 자기 부대에 가담시킨 뒤,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계속 진격했다. 테르모필레에 들러서 연맹의 지도자로 인정받은 뒤, 아테네로 향했다. 이에 아테네에서 항복할 테니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했고, 알렉산드로스는 흔쾌히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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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알렉산드로스는 코린토스에 머무를 때 '개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만났다. 알렉산드로스가 양지 바른 곳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디오게네스에게 원하는 걸 묻자, 디오게네스는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주시오"라고 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말을 듣고 감탄하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후 부친의 뒤를 이어 헬레닉 동맹의 총사령관이 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기 전 북쪽 국경지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트라키아 부족을 처리하기로 했다. 기원전 335년 봄 출정한 그는 하이무스 산에서 고지를 지키는 트라키아군과 교전해 승리했다. 이후 트리발리 강으로 진군하여 리기누스 강 근처에서 트라키아군을 다시 격파했다. 알렉산드로스는 3일 동안 도나우 강변을 행진하다가 반대편 강변에 있는 게타이 부족과 마주쳤다. 이에 야밤에 강을 건너서 기병대를 몸소 이끌고 그들을 습격해 격파했다. 얼마 후 일리리아의 왕 클레이투스와 타울란티 족의 왕 글라우키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일리리아로 진군하여 모조리 격파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헛소문이 그리스 각지에 퍼졌다. 이에 테베와 아테네가 다시 한 번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남하했는데, 아테네는 곧바로 반란을 그만뒀지만 테베는 항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테베를 수개월간 공격한 끝에 함락시킨 뒤 주민들을 모조리 노예로 팔아버리고 시가지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전역의 도시국가들은 테베의 비극적인 운명에 겁을 집어먹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복종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안티파트로스를 섭정으로 남겨둔 뒤,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했다.

페르시아 전쟁[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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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4만 8천 보병대, 6,000 기병대, 120척의 함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이때 그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왕실의 재산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이에 부하 페르디카스가 물었다.

대왕께서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남겨놓으셨습니까?

알렉산드로스가 대답했다.

희망.

페르디카스가 대답했다.

그럼 저희도 그 희망을 나누어 갖겠습니다.

그후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 해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창을 땅에 꽂으며, "신들이 선물하신 아시아를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했다. 소아시아 지방의 페르시아 사트라프 스피트리다테스와 아르시테스는 젤레리아에서 군대를 집결한 뒤 그라니코스 강에서 알렉산드로스를 막아섰다. 마케도니아의 노장 파르메니온은 야간에 강의 상류로 올라가서 건너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라니코스를 두려워한다면 헬레스폰트에게는 불명예일 것이오.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페르시아군을 공격했다. 이후 벌어진 격전 도중,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의 사위인 미트리다테스가 페르시아 주력군과 떨어진 채 일부 기병대와 함께 싸우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즉각 그쪽으로 달려가 미트리다네스의 얼굴을 검으로 후려쳤다. 이 광경을 목격한 로이사케스 장군이 미트리다테스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어 알렉산드로스의 투구를 후려쳤다. 이로 인해 투구가 깨졌고 깃털 일부가 잘려나갔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로이사케스의 목을 베었다.

이때 사트라프이자 로이사케스의 형인 스피트리다테스가 알렉산드로스의 바로 뒤에서 도끼를 들어 내리찍으려 했다. 그러자 클레이토스 장군이 곧바로 검을 휘둘러 스피트리다테스의 팔을 베어버렸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렇듯 지휘관들이 무력화되자, 페르시아 기병대는 사기가 뚝 떨어져 사방으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군과의 첫번째 전투인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후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 해안 도시들을 휩쓸며 항복을 받아내고, 그들이 자치권을 누리게 해줬다. 그러던 어느날, 고대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에서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관한 이야기를 접했다. 사바시오스 신전에 바쳐진 우마차를 묶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자는 아시아의 왕이 된다는 전설이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신전을 찾아가 매듭을 풀려고 했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어떻게 푸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라며 검으로 매듭을 끊었다고 한다. 반면에 플루타르코스는 이 이야긴느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아리스타불루스의 기록을 인용해서 알렉산드로스가 매듭을 고정하고 있던 못을 찾아내 그것을 뽑아서 매듭 끈의 양쪽 끝을 찾아서 풀어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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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33년 봄,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를 거쳐 킬리키아로 진격했다. 이후 병에 걸려 오랫동안 앓은 후 몸이 회복되자 시리아를 향해 행진했다. 이때 페르시아의 왕중왕 다리우스 3세가 대군을 이끌고 이수스에 이르렀다. 이후에 벌어진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4만 병력으로 페르시아의 10만 대군을 격파했다. 다리우스 3세는 메소포타이아로 달아났고, 아내와 두 딸, 그리고 다리우스의 어머니 시시감비스는 포로로 잡혔다. 이후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네가 점령한 땅을 모두 넘겨주고, 10,000달란트의 몸값을 줄 테니 전쟁을 끝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난 이제 아시아의 왕이므로 영토 분활을 결정하는 건 내 권한이다"라며 거부했다.

그후 알렉산드로스는 시리아와 레반트 해안을 휩쓸기 시작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는 9개월에 걸친 힘겨운 공방전 끝에 티레를 공략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했고,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그후 대다수 도시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지만, 가자 요새 만은 버텼다. 알렉산드로스는 요새를 친히 공격하다가 심각한 어깨부상을 입었다. 이후 요새가 함락되자, 그는 보복으로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팔았으며,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이리하여 이집트로 가는 길이 열리자, 알렉산드로스는 위풍당당하게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에 도착했다. 이때 이집트 주민들은 페르시아에게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알렉산드로스를 해방자로 여기고 성대히 환영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이집트 신전들을 복원하고 이집트 신들에게 기념물들을 바쳤으며,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이후 시와의 아문 신전에 방문했을 때 자신이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이 아닌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그는 이 신탁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이 아문 신과 동급인 제우스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기념하는 동전을 발행했다. 그렇게 몇달간 이집트에 머물던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1년 초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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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31년 10월 1일, 알렉산드로스는 메소포타미아 아르벨라 근교의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다리우스 3세가 지휘하는 페르시아군과 격돌했다. 마케도니아군은 4만 7천명이었고, 페르시아군은 9만 가량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기병대를 친히 이끌어 또다시 완승을 거두었고, 다리우스 3세는 자기를 잡으려드는 알렉산드로스를 피해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장을 정리한 뒤 다리우스 3세를 추격했지만, 다리우스 3세는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달아났다. 결국 추격을 포기한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 입성하였고, 뒤이어 페르시아의 수도 중 하나인 수사로 가서 국고를 탈취했다. 이후 군대 대부분을 왕도를 통해 페르세폴리스로 보내고, 자신은 페르세폴리스로 직행할 수 있는 산길을 향해 별동대를 이끌고 갔다. 그러다 도중에 아리오바르자네스가 이끄는 소규모 페르시아군에게 가로막혀 고전했지만,(페르시아 관문 전투) 끝내 돌파에 성공하고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일찍이 그리스를 침공하여 아테네를 불태웠던 크세르크세스 1세의 석상을 파괴하고, 페르세폴리스에 불을 질렀다. 아리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파르메니온이 방화에 반대했다고 한다.

페르세폴리스는 이미 폐하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파괴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페하께서 아시아를 안전하게 다스리기보다 정복하는데 급급한 인상을 보인다면, 아시아인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스를 침략헀던 페르시아인들에게 벌을 내려야 하오.

그렇게 페르세폴리스를 불사른 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를 맹렬히 추격했다. 다리우스 3세는 도망치면서 병사들을 규합해 다시 한 번 맞서려 했지만, 박트리아 사트라프이자 친척인 베수스에 의해 붙들렸다. 베수스는 자기를 총사령관으로 세워달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다리우스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가 접근해오자 부하들에게 다리우스를 죽이게 한 후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로부터 페르시아 국왕으로 인정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의 유해를 접하자 크게 실망했다. 그는 유해를 역대 페르시아 국왕들이 묻힌 무덤에 같이 묻어준 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칭한 베수스 토벌에 나섰다.

마케도니아군은 알렉산드로스의 지휘를 받으며 중앙아시아를 순회하였고, 그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를 곳곳에 세웠다. 알렉산드로스는 메디아, 파르티아, 아리아, 드랑기아나, 아라코시아, 박트리아, 스키티아를 통과하며 베수스를 추격했고, 베수스는 청야 전술을 벌이며 마케도니아군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원전 329년, 베수스의 부하인 스피타메네스와 다타페르네스가 베수스를 체포한 뒤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줬다. 알렉산드로스는 베수스를 발가벗긴 뒤 목줄을 매어 끌고다니면서 모욕한 뒤 다리우스 살해를 추궁했다. 베수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호의를 얻기 위해 다리우스를 살해했다고 변론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베수스를 처형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뒤이어 스키타이 족의 침략에 맞서 야사르테스로 진격했다. 이때 베수스를 넘겨줬던 스피타메네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야사르테스 전투에서 스키타이족을 물리친 뒤 가바이 전투에서 스피타메네스를 격멸했다. 이리하여 페르시아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완전히 정복되었다.

부하들을 숙청하다[편집 | 원본 편집]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지배자가 된 뒤 페르시아의 복장과 관습의 일부 요소를 궁정에 채택했다. 특히 땅에 엎드린 채 군주의 손에 입을 맞추는 관습을 적극 도입했다. 마케도니아 귀족들은 이를 굴욕으로 간주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비위를 잘 맞추는 페르시아인들을 가까이 두고, 논공행상을 할 때 많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높은 지위를 줬으며, 페르시아 병사들을 마케도니아 군에 편입시켰다.

이에 반감을 품은 장수들은 반란을 꾀했으나, 곧 발각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모조리 숙청했는데, 그 과정에서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경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당시 메디아에 있던 파르메니온이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되면 복수하려고 반란을 일으킬 거라 여기고, 사람을 보내 암살했다.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두번째 음모가 발각되어 수많은 장교가 처단되었다. 이때 올린토스의 역사가 칼리스테네스도 음모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그가 실제로 이 음모에 가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렇듯 부하들과 점점 멀어지는 걸 걱정한 알렉산드로스는 그들과 화해하기 위해 술자리를 벌였다. 이때 그는 장수들 앞에서 "내가 필리포스를 능가하는 업적을 세웠다"고 자랑했다. 이후 페르시아 출신의 악사가 페르시아의 승리와 마케도니아의 패배를 의미하는 노래를 불렀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다른 왕들은 실패했지만 난 이겼으니 별 상관이 없다"며 기분 좋게 들었다.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이에 불편해하고 있었는데, 클레이토스가 벌떡 일어나 화를 냈다.

우리가 운이 없어 패했는데, 그걸 어째서 들추는가?

알렉산드로스가 빈정댔다.

운이 아니라 용기가 없었던 거다.

클레이토스가 대꾸했다.

그럼 소신이 용기가 없어서 그라니코스에서 폐하를 구해드렸단 말입니까?

클레이토스는 뒤이어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은 부친 필리포스 덕분이며, 이를 잊어선 안 된다며 알렉산드로스를 비난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만류했지만, 클레이토스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정녕 자유를 빼앗으려 하신다면, 우리를 모두 쫓아내고 노예들만 데려다 잔치를 벌이십시오!

알렉산드로스가 격분하여 칼을 뽑으려 하자, 신하들은 왕을 진정시키고 클레이토스를 내쫓았다. 그러나 클레이토스는 다른 문으로 도로 들어와 소리질렀다.

수많은 용사가 세운 공적을 왕이 빼앗아갔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성을 잃고 호위병의 창을 빼앗아 클레이토스를 꿰뚫어 죽여버렸다. 그후 정신이 든 그는 자기를 구해줬던 클레이토스를 자기 손으로 죽인 것에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창으로 목을 찌르려 했다. 신하들과 근위병들이 이를 황급히 제지하여 방으로 끌고 갔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사흘간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 틀어박혔다. 그러다 신하들이 재판을 열어 클레이토스가 죽을 짓을 해서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간절히 설득해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인도 원정[편집 | 원본 편집]

아프가니스탄에서 스피타메네스를 죽이고 록사나와 결혼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로 눈을 돌렸다. 그는 간다라의 족장들을 소집해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타실라의 통치자 옴피스는 즉각 찾아와서 충성을 맹세하고, 페르시아의 예복과 장식품, 30마리의 말과 천 달란트의 금을 바쳤다. 그러나 캄보야스의 아스파시오이족과 아사케노이족을 포함한 일부 산간 부족의 족장들은 거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반역자로 간주해 토벌하여 사로잡은 족장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에 족장들은 알렉산드로스를 두려워하여 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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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를 정복하고 인도 대륙의 끝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세우겠다고 선포하고, 인더스 강을 건넌 뒤 파우라바의 왕 포루스를 상대로 히다스페스 전투를 치렀다. 알렉산드로스는 격전 끝에 적군을 무찌르고 포루스를 생포했지만, 포루스의 용맹에 감명을 받아 그를 풀어주고 사트라프로 임명했으며, 새 영토를 주기까지 했다. 이 무렵 그동안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전장을 질주했던 명마 부케팔로스가 죽자,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강의 반대편에 부케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다. 알렉산드로스는 뒤이어 갠지스 강을 건너 난다 왕국을 치려 했지만, 포루스로부터 난다 왕국이 "기병 8만 명, 보병 20만 명, 병거 8천 대, 코끼리 6천 마리"에 달하는 대군을 보유한 강대국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병사들이 행군을 거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코에누스를 피롯한 장교들은 "부모, 아내, 자식들과 조국을 다시 보고 싶다"고 간청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격분하여 천막에 틀어박혀 사흘간 버텼지만, 병사들이 끝내 말을 듣지 않자 결국 더 이상 원정을 벌이지 않기로 하고 귀환길에 올랐다. 그는 인더스 강을 따라 배를 타고 회군하면서, 이를 막으려는 부족들을 물리쳤다. 그 과정에서 독화살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이후 군대를 2개로 나눠서 한 부대는 페르시아만을 따라 해로로 이동하고, 나머지는 본인이 직접 게드로시아 사막을 통과하는 육로로 이끌고 갔다. 그 과정에서 보급을 담당한 함대가 바다 멀리 밀려가 버려서, 물을 구할 길이 없어 수많은 병사가 죽어갔다. 바빌론에 도착했을 때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한 병사는 인도에서 출발했을 때의 1/10에 불과했다고 한다.

말년[편집 | 원본 편집]

바빌론에 도착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많은 사트라프들과 관료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는 걸 확인하고 모조리 처형했다. 이후 병사들에게 포상금을 지불하고 마케도니아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곁에서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고 싶었던 장병들은 오피우스 마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나아가 이들을 꾸짖고 주동자들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야밤에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막사를 포위하고 해가 뜰 때까지 통곡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계획을 철회하고 이들을 용서했으며, 모두를 일족으로 삼았다.

그후 알렉산드로스는 수사에서 수천 명의 부하들과 함께 대규모 연회를 열고, 페르시아 왕실 및 귀족 여성들과 혼인시켰다. 그는 이를 통해 마케도니아, 그리스와 페르시아인들이 서로 융합하기를 희망했으나, 대다수가 1년 만에 이혼했다. 한편 키루스 대왕의 무덤을 파헤친 장병들을 처형했으며, 건축가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무덤을 재건하고 내부를 장식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얼마 후, 그의 동성 연인인 헤파이스티온이 병사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로 인해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그는 헤파이스티온을 기리기 위한 거대한 기념물들을 짓게 하였고, 헤파이스티온을 회복시키지 못한 의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후 콧사이오이 부족을 정벌하여 장정들을 모조리 학살해,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으로 입은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려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뒤이어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한 뒤 바다를 통해서 아프리카를 돌아가 카르타고를 친 후, 지중해를 정복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부친 필리포스 2세의 무덤을 피라미드와 맞먹게 지으려 했으며, 그리스 인을 페르시아로 이주시키고, 페르시아인을 그리스로 이주시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갑작스런 열병에 걸려버려 며칠간 앓아눕다가 기원전 323년 6월 10일 또는 11일에 바빌론 궁정에서 사망했다. 향년 32세.

사후[편집 | 원본 편집]

알렉산드로스가 이른 나이에 갑자기 죽어버렸을 때,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는 딱히 없었다. 단지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는 이복 동생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와 록사나의 뱃속에 든 태아만 있을 뿐이었다. 사생아 헤라클레스도 지목되었으나, "페르시아의 첩에게서 나온 아들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며 배제되었다. 장군들은 장시간 논의한 끝에 일단 아르다이오스를 왕으로 세워놓고, 록사나가 아들을 낳으면 공동 왕으로 삼자고 결의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가 죽기 직전에 세워뒀던 대규모 원정 및 건축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후 록사나가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으면서, 그와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는 공동 왕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정신 착란 증세를 앓는 왕과 유복자로는 통치가 불가능했기에, 근위기병대의 최선임 대장 페르디카스가 섭정을 맡았다. 페르디카스는 제국을 분할하여 장군들에게 나눠줬다. 마케도니아와 일리리아는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에게, 트라키아는 리시마코스에게, 프리기아, 팜필리아, 리키아는 안티고노스에게, 리디아는 메난드로스에게, 킬리이아는 필로타스에게, 그리고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장군들은 곧 더 많은 영토와 권력을 얻기 위해 분쟁을 벌였다. 페르디카스가 마케도니아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유해를 넣은 관을 보낸 걸 프톨레마이오스가 탈취하여 알렉산드리아로 가져가면서, 내란의 막이 올랐다. 페르디카스는 즉각 프톨레마이오스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토벌에 나섰으나 지지부진하다가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페르디카스가 죽은 후 마케도니아 제국의 질서는 무너졌고,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안티고노스 등 이른바 '디아도코이(Diadochi. 계승자들)'간의 분란이 심해졌다. 그 과정에서 아리다이오스와 알렉산드로스 4세는 비참하게 죽었고,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록산나도 정치 음모에 끼여들었다 역시 비참하게 죽었다. 디아도코이 전쟁은 최후의 승자인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가 제국을 3개로 분할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유골이 담긴 석관은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 보관된 뒤 오랜 세월 그곳에서 수많은 명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 로마 권력자들이 잇달아 무덤을 방문하여 대왕의 넋을 기렸다. 기독교 명사들도 무덤에 들려 기록을 남겼으며, 중세, 근세의 여러 인물들도 무덤을 언급했다. 그러나 해수면이 상승하여 알렉산드리아가 물에 잠기면서, 무덤 역시 소실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