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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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炳武. 호는 해암(海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2년 6월 8일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 신의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0년 상하이 유학을 떠나 푸탄대학(復旦大學)에 재학했다. 그러던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그는 천도교 청우당원(靑友黨員)으로서 푸탄대학 학생의용군에 가담해 중국 19로군에 편입되어 일본군에 맞섰다. 또한 상하이 한인학우회에 가입해 재무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1937년부터는 난징에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의 청년단에 가입하여 역보(力報), 항전일보(抗戰日報), 건군반월보(建軍半月報) 등의 잡지에 독립군의 활동이나 독립운동을 홍보하고 일본을 비판하는 등의 원고를 기고했으며, 1940년 9월에는 <일본제국주의 철제 하의 조선>이라는 제목의 책자를 발간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폭정을 폭로했다. 같은 해 9월에는 광서성에 있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6분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쳤고, 다시 중국 제3전구에 가입해 대적선전활동을 담당했다.

1944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비서에 임명된 안병무는 그해 6월에는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 및 편집위원을 겸하여 충칭에서 8.15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했다. 광복 후 국제연합 한국재건단에 가담했고, 1955년 경제사절단 기술보좌역, 1957년 국립체신학교 부교장을 역임했다. 또한 흥국 중고등학교 교장 등 10여 개의 교장들을 역임했고 천도교 종법사로서 포교 활동도 벌였으며, 1977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문화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86년 5월 31일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 자택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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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