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리 쇼크

아타리 2600
당시 가장 대중적이던 가정용 게임기다.

아타리 쇼크(Atari Shock)는 1983년부터 1985년에 걸쳐 점점 낮아지는 게임 퀄리티에 대중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북미 게임 시장에 몰락을 가져온 사건의 통칭이다. 게임 시장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과 비교될 정도로 북미 게임 산업이 극도로 침체기에 접어들게 한 사건이다.

한마디로 시장 전체의 질적 하락이, 시장 전체의 몰락을 부른 사례다.

명칭[편집 | 원본 편집]

'아타리 쇼크'라는 용어는 1971년 8월 15일에 발생해 전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경제 사건 닉슨 쇼크에 빗댄 것이다. 다만 아타리 쇼크라는 명칭은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오히려 악의가 서려 있는데, 당시 북미 시장에 진출하려던 닌텐도의 입김에 일본의 게임 잡지에서 '아타리 쇼크'라는 표현을 다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1983년 북아메리카 비디오 게임 위기(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에서 아타리의 책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아타리의 게임기용 소프트웨어만 유별나게 저품질이었던 게 아니라 다른 게임기용 소프트웨어도 하나 같이 저품질이었다. 즉, 아타리 쇼크라는 용어 선정과 유행에는 다분히 프레임을 씌우려는 일본 게임계 측의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덧붙여서 대한민국의 게임 잡지 또한 일본의 게임 잡지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아타리 쇼크라는 용어는 한국에도 정착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당시 아타리의 게임기로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누구든 비디오 게임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었다.[1] 소재나 퀄리티가 어떻든 게임의 질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아무 게임이나 팔았던 것이다. 그래서 질 낮은 게임들이 시장에 범람하자 소비자들은 게임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설상가상으로 《커스터의 복수》라는 포르노 게임이 출시되자[2] 당시 학부모들로부터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은 사건이 터졌다.

덧붙여, 이때 당시만 해도 2010년대처럼 플레이스테이션, 엑스박스, 닌텐도 스위치 이런 식으로 3강 체제로 나뉘지 않고, 여기저기서 개나 소나 게임기를 출시해서 선택지가 과도하게 많았었다. 코모도어 64, 아미가, 아타리 5200, 애플 2, ZX 스펙트럼 등등 게임을 할 수 있는 게임기 및 PC가 무지막지하게 범람하던 시기였다.[3] 게임기가 많은 만큼 게임도 쓸데없이 너무 많고 너무 쉽게 만들어져 소비자들의 선택지가 너무 넓었다. 선택장애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결국 서드 파티 회사들도 줄줄이 파산, 공급만 너무 많다보니 회사가 망해서 반품이 안 되고, 정가가 붕괴해서 게임들이 헐값에 팔리기도 했다.

거기다 한 번은 아케이드 게임으로 출시했던 《팩맨》을 아타리 2600로 이식해서 출시했었다. 여기서 아타리 26000는 《팩맨》의 게임 카트리지를 무려 1200만 개나 주문하는 미친 짓을 시도한다. 물론 아타리 26000의 성능이 따라와주지 않아 《팩맨》이 제대로 이식될 리가 없었는데다, 인기 있는 게임 브랜드를 우겨넣어도 판매량이 700만 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머지 500만 개는 악성 재고가 되고….

E.T. 사건[편집 | 원본 편집]

1982년 말, 아타리는 당시 성공적이었던 영화 《E.T.》의 라이선스를 이용해 게임을 만들어 크리스마스에 정식 출시하기로 한다. 《E.T.》의 흥행은 전설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게임도 잘 팔릴 거라는 기대하에 게임 제작에 들어갔으나, 제작 기간이 겨우 5주였다…. 아무리 당시 게임 개발자 중에 실력자를 데리고 왔어도 5주 안에 게임을 기획하고 프로그래밍까지 하기엔 한참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 출시했으나, 처음에는 잘 팔리는 듯하더니 미흡한 게임성으로 인해 다시 반품 러쉬를 맞았다. 심지어 영화 《E.T.》를 앞세워 어마어마한 홍보를 하다보니, 그 동안 쌓였던 소비자들의 불만이 여기서 폭발했고 반품뿐만 아니라 게임 불매 운동까지 벌어졌을 정도로 아타리한테 엄청난 임팩트를 가져온 것이다. 이로 인해 소비자들에게 게임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타리 2600판 게임 《E.T.》은 아타리 쇼크의 상징이 된다.

결국 1983년 한 해에만 아타리는 5억 3천 6백만 달러의 손실을 떠안았고, 게임 산업 1인자이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대기업 아타리가 완전히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게임 매립[편집 | 원본 편집]

결국 악성 재고가 되어버린 《팩맨》, 《E.T.》의 행방에 대해 한 가지 루머가 돌았다. 원래 이 게임들은 텍사스주의 엘패소(El Paso)라는 곳의 공장에서 만들어졌는데, 게임들이 줄줄이 실패하자 팔 수 없었던 게임을 옆동네 뉴멕시코주 사막에 매립했다는 설이었다.[4]

이 설에 대해 아타리는 공식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2014년 아타리 쇼크 30주년을 맞아 《아타리: 게임 오버》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5]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사막을 탐사한 결과, 그 소문은 진짜로 판명됐다. 실제 게임 《E.T.》의 개발자도 "무슨 핵폐기물도 아니고 사막에 묻었나 했더니 진짜였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약 1,300개의 게임 카트리지가 발견되어 모두 경매에 붙여졌고, 최고가 1500달러에 거래되기도 했다.

영향[편집 | 원본 편집]

  • 이 사건을 소재로 다양한 영화, 뮤직비디오가 나오기도 했다.
    • AVGN 더 무비》가 게임 《E.T.》 및 아타리 쇼크를 소재로 하는 영화이다. 물론 51구역 외계인설을 짬뽕해 만든 액션 영화지만.
  • 당시 아타리에서 진행하던 대규모 행사인 《소드퀘스트》의 이벤트가 중단되는 계기가 됐다. 《소드퀘스트》로 제공하는 게임 속 미션을 해결하면 정식 대회에 출전해 실제 보물을 준다는 대회였다.
  • 하도 북미 시장에서 게임에 대한 인식이 나쁘다보니 닌텐도패밀리 컴퓨터(패미컴)가 북미에서 출시했을 때는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NES)이라는 명칭까지 내세우며 장난감 흉내를 내기도 했다. 게임기가 아닌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으로, 게임 덱이 아닌 컨트롤 덱으로, 거기다 주변기기인 R.O.B 더 로봇까지 끼워서 장난감처럼 판 것이다. 이름 가지고 말만 바꾼 거긴 하지만, 결국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통해 대히트를 치면서[6] 북미 게임 산업을 다시 끌어올린다. 물론 미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게 아닌, 일본의 게임기가 미국에서 히트친 거긴 하지만…….[7]

각주

  1. 물론 아타리는 서드 파티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2.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 포르노 게임이 출시되곤 했다. 불법은 아니지만 당시 구매하려면 점원한테 따로 말해야 할 정도였다.
  3. 심지어 VIC-20 같은 컴퓨터들은 게임기의 나쁜 이미지를 이용해, "왜 게임기를 사십니까? 차라리 컴퓨터를 사십시오"라는 광고를 하거나, "게임만 주구장창하는 것보다 코딩도 배울 수 있는 컴퓨터가 훨씬 더 유익하다"는 요지의 광고를 때리기도 했다.
  4. 그냥 묻은 걸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시멘트에 넣고 묻어버렸다고 하기도 한다.
  5.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
  6. 전세계 통틀어서 총 4000만 장이 팔렸다.
  7. 그래도 LJN 같은 곳에서 NES 게임들을 만들어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