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秋篠宮文仁
인물 정보
다른이름 아야노미야 후미히토(결혼 전)
출생 1965년 11월 30일 (58세)
도쿄도 치요다구 궁내청병원
국적 일본
학력 가쿠슈인 유치원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중등과
가쿠슈인 고등과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
직업 왕족(왕자)
종교 신토
신체 178cm
배우자 키코 비
가족 할아버지 쇼와(히로히토) 일왕, 할머니 고준왕후(나가코)
아버지 아키히토 상왕, 어머니 미치코 상왕비
작은아버지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왕자, 작은어머니 하나코 비
고모 히가시쿠니 시게코,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다카츠카사 가즈코, 이케다 아츠코, 시마즈 다카코
나루히토 일왕, 형수 마사코 왕비
여동생 구로다 사야코
자녀: 장녀 코무로 마코, 차녀 카코 공주, 장남 히사히토 왕자
조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활동기간 1990년 결혼으로 분가, 아키시노노미야 가문 창설

일본의 왕족(왕자). 나루히토 일왕의 남동생으로 현재 계승서열 1위인 왕세제이다. 오시루시는 솔송나무.

출생[편집 | 원본 편집]

1965년 11월 30일, 일본 도쿄 궁내청병원에서 아키히토 당시 왕세자와 미치코 왕세자비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칭호는 ‘아야노미야(禮宮)’, 이름은 ‘후미히토(文仁)’로 지어졌다.

성장[편집 | 원본 편집]

‘최초의 평민 출신 비(妃)’로 화제를 모았던 어머니 미치코 왕세자비는 왕실의 오랜 관습을 깨뜨리고 파격적인 면모를 많이 보였고, 그것은 출산육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전까지 일본 왕실의 왕자와 공주는 부모와 분리된 거처에서 유모와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는 것이 전통이었다. 하지만 후미히토 왕자는 5살 위의 형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왕자, 4살 아래의 여동생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와 함께 부모의 곁에서 자라났다. 미치코 왕세자비는 아이들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였고,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영어 원서로 읽으며 공부하여 만든 ‘나루 짱 겐뽀(ナルちゃん憲法)’[1]라는 육아 지침대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왕세자 부부는 3남매를 직접 돌보며 놀아주었고, 아이들을 시종에게 맡기고 공무에 참가할 때도 ‘나루 짱 겐뽀’에 따라 돌봐달라고 주문했다. 또한 미치코 왕세자비는 가족들을 위해 손수 요리를 했고, 아이들의 도시락도 직접 만들곤 했다.

이렇듯 후미히토 왕자와 형제들은, 패전 이전의 왕족들과 달리 평범한 가정의 분위기를 많이 누리며 성장했다. 그래도 형 나루히토 왕자는 맏이(장남)이며 장차 일왕이 될 후계자였기에 엄격하게 자란 반면, 차남인 후미히토 왕자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자라났다. 또한 짓궂은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여 학교생활을 괴로워했던 여동생 사야코 공주와 반대로, 후미히토 왕자는 어린 시절 급우들에게 심한 장난을 쳐서, 어머니 미치코 왕세자비가 학부모들에게 전화하여 사과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키히토 왕세자의 둘째 숙모 세츠코 비와 셋째 숙모 키쿠코 비는 자녀를 낳지 못해, 대신 조카 아키히토 왕세자의 자녀들을 손자처럼 귀여워했다. 키쿠코 비는 방계 왕족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가문의 외손녀로, 외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독특한 서예 기법인 ‘아리스가와류 서도(有栖川流書道)’를 어머니 미에코(實枝子)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키쿠코 비는 이것을 후미히토 왕자에게 전수했다. 어린 후미히토 왕자는 서예교본에 없는 글자를 질문하는 등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서예 교습을 통하여 종조모인 키쿠코 비와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학업[편집 | 원본 편집]

왕족과 귀족을 위한 전용 관립학교였던 가쿠슈인은, 패전 이후 평민들도 다닐 수 있는 사립학교로 전환되었다.[2] ‘왕족이 다니는 학교는 가쿠슈인’이라는 법도 패전 이후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왕족들은 가쿠슈인에 다니는 것이 암묵적인 관습이었으며, 미치코 왕세자비도 이것까지는 바꾸지 못했다.[3]

후미히토 왕자도 가쿠슈인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초등과, 중등과(남중), 고등과(남고)를 거쳐 1984년 4월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어머니, 형, 여동생은 다들 얌전한 모범생이었고 성적도 우수했지만, 후미히토 왕자는 정반대로 말썽꾸러기였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왕족이니 어떻게든 가쿠슈인대학에는 보내야 하겠기에, 왕실과 가쿠슈인에서는 한바탕 고심했다. 결국 후미히토 왕자의 점수를 커트라인으로 정했고, 그래서 덕분에 1984년 가쿠슈인대학에는 신입생이 많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후미히토 왕자가 재학했던 1984~1988년의 4년간, 가쿠슈인대학의 학생들은 후미히토 왕자가 듣는 수업이 무엇인지 알아내어 수강신청을 하려고 애썼다. 왜냐면 (입학점수와 마찬가지로) 후미히토 왕자의 성적이 커트라인이 되어, 어지간해서는 점수를 잘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8년 3월 후미히토 왕자는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했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했다. 그는 할아버지 히로히토(쇼와) 일왕, 큰고모 히가시쿠니 시게코, 아버지 아키히토 왕세자, 여동생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와 마찬가지로 생물에 관심이 많았다. 메기, 망둥이, 등에 대해 연구했는데, 특히 메기를 많이 연구하여 그의 별명이 아예 ‘메기’로 굳어졌다. 훗날 결혼반지를 메기 모양으로 맞추기도 했다. (소재는 백금)

한편 후미히토 왕자는 가쿠슈인 시절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라는 친구와 친했는데, 요시키는 2005년 후미히토 왕자의 여동생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와 결혼한다.

연애와 결혼[편집 | 원본 편집]

1990년 6월,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의 결혼식

1985년 봄, 대학 2학년이 된 후미히토 왕자는 교내 서점 세이분도(成文堂)에서 어느 청순한 미모의 새내기 여학생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문학부 심리학과 1학년인 가와시마 키코로, 후미히토 왕자보다 1살 어린 1966년생이었다. 가와시마 가문은 평민이지만 대대로 학자ㆍ교수의사 등이 많은 학구적인 가문으로, 키코의 아버지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 역시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가쿠슈인대학 경제학부의 교수였다. 타츠히코는 미국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연구했고, 키코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 유년기의 오랜 시간을 해외에서 보내다가 귀국했다.[4]

서점 주인의 소개로 서로를 알게 된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는 테니스동아리[5]와 자연문화연구회 등의 모임에서 함께 활동하며 친분을 쌓았고, 차츰 남녀관계로 발전하여 캠퍼스커플이 되었다. 후미히토 왕자와 사귀면서 키코는 그의 가족들, 즉 왕족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사야코 공주와는 종종 함께 케이크쿠키를 만들며 어울렸으며, 이 자리에는 미치코 왕세자비도 합류하곤 하여, 세 여자는 자연히 친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몇 년간 교제해온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는 결혼하고 싶었으나, 후미히토 왕자보다 5살이나 많은 나루히토 왕자가 아직 미혼이라는 현실이 문제였다. 왕실의 법도와 위계질서, 그리고 연장자가 우선인 동양의 문화에 따라, 나루히토 왕자가 먼저 결혼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나루히토 왕자는 좀처럼 신붓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현대 여성들은 더 이상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일거수일투족을 주목받는 왕실에서의 생활을 동경하지 않았다. 두 왕자의 어머니 미치코 왕세자비가 1959년 시집온 이래로 줄곧 겪고 있었던 매운 시집살이 이야기도 워낙 유명했다. 특히 차남 이하 왕자비나 방계의 왕자비도 아닌, 장래 왕세자비와 왕비가 될 종부(宗婦) 자리는 더욱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후미히토 왕자는 견디지 못하고, 키코와 가쿠슈인대학 인근의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 있던 중에 청혼을 해버렸다. 키코가 가쿠슈인대학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89년의 일이었다. 차남이 장남보다 먼저 결혼하는데다가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상중(喪中)이었기에[6], 두 사람의 약혼 발표에는 좋지 않은 시선들도 있었다. 후미히토 왕자도 그것을 의식한 듯, 기자회견에서 “형에게는 아직도 아내가 없다.”고 말했다.

무사히 약혼 발표 기자회견과 정식 약혼식(노사이)을 마치고, 1990년 6월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는 왕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으로 분가(分家)한 후미히토 왕자에게는, 출생 이후로 사용해오던 ‘아야노미야’라는 어칭호 대신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라는 궁호가 새로이 주어졌다. 이로서 그는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가 되었고, 방계 왕족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의 가장(家長)이 되었다. 1989년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한 이후 처음으로 거행되는 국혼(國婚)에 일본인들은 무척 열광하며 환호했고, 왕실의 차세대인 젊은 왕자 부부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갓 결혼한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후미히토 왕자의 셋째 고모 다카츠카사 가즈코가 생전에 살던 저택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키코 비는 결혼 이후로도 공부를 계속하여 심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후미히토 왕자도 생물 연구를 계속했다.

자녀[편집 | 원본 편집]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키코 비는 임신을 했다. 부부의 첫 아이이자 아키히토 일왕 내외에게도 첫 손주여서[7], 그녀의 임신은 왕실과 일본 전체로부터 무척 호의어린 관심을 받았다. 마침내 1991년 10월 23일 궁내청병원에서 딸이 태어났고, 아버지가 된 후미히토 왕자는 첫딸의 이름을 직접 ‘마코(眞子)’라고 지었다. ‘천성을 잃지 않고,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眞이라는 한자를 썼다고 한다.

1994년 12월 29일에 태어난 차녀에게는 ‘몸과 마음이 아름다운 아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카코(佳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성별과 상관없이 첫 아이ㆍ첫 손주라서 환영받았던 마코 공주의 탄생과 달리, 카코 공주 때는 아쉬워하는 반응들도 있었다. 어머니 키코 비부터가 출산 직후 둘째도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출산을 도와준 궁내청병원 산부인과 의사에게 “어떻게 해야 아들을 낳을 수 있나요?”라고 묻기도 했다. 또한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 제수인 히사코 비는 “형님(왕세자) 내외가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작은며느리가 자꾸 임신하는 것은 왕실의 위계질서에 어긋난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히사코 비와 그녀의 남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는 나루히토 왕세자와 친했기에, 1년 전(1993년) 결혼한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를 생각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8]

출생 당시에는 이렇게 잡음도 좀 있었지만, 마코 공주와 함께 카코 공주도 각별한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났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종종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 왕비를 방문했으며, 일왕 내외는 손녀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했다. 나루히토 왕세자의 결혼과 자녀 출산이 늦어지는 동안에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의 탄생과 성장 과정은 일본의 각종 매체에 꾸준히 노출되었고, (마치 ‘육아 예능’의 주인공처럼)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득남과 야심[편집 | 원본 편집]

한편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는 결혼 8년 만인 2001년에야 간신히 아이를 낳았지만,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는 딸(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이었다. 직계뿐 아니라 방계에도 남자아이라고는 단 1명도 없었기 때문에, 일본 왕실과 정치계에서는 법을 바꾸어 여왕을 허용하는 방안도 검토했다. 키쿠코 비는 “여자의 왕위 계승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옛날 일본에는 여왕들이 많았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내어 ‘여왕 허용론’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보수파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이전 여왕들은 아버지로부터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왕녀이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왕녀와 일반인 남성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왕위에 오른 적은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리고 키쿠코 비는 2004년에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 왕비는 3번째 손녀 아이코 공주의 탄생을 기뻐했지만, 이내 마사코 왕세자비에게 “다시 임신해서 아들을 낳으라”고 종용했다. 2003년에 당시 궁내청 장관 유아사 토시오(湯淺利夫)는 공식 기자회견에서 “왕세자 부부가 어서 둘째를 낳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왕실의 번영을 위해 후미히토 왕자 부부가 셋째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두 공주와의 나이 차이[9]를 생각하면 빨리 셋째를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는 장관 개인의 의견이 아니고, 일왕 내외가 장관의 입을 빌려 자신들의 소망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마사코 왕세자비는 오랜 불임ㆍ유산ㆍ인공임신 시술 끝에 간신히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으며 심신의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고, 다시 아이를 가지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왕실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은 후미히토 왕자의 아내인 키코 비밖에 없었다. 그녀는 산부인과 치료를 받으며 임신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2006년 초반에 ‘셋째 임신’을 발표했으며, 동년 9월 6일 아이이쿠병원에서 히사히토 왕자를 낳았다. 왕실에 남자아이가 탄생한 것은 1965년 후미히토 왕자가 탄생한 이후로 무려 41년 만의 일이기에, 왕실뿐 아니라 일본 전체가 히사히토 왕자의 탄생을 성대하게 축하했다.

일본 왕실에 ‘왕세손’이라는 지위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귀한 남자아이인 히사히토 왕자는 암묵적으로 왕세손 대접을 받으며 각별히 환대받았다. 그러한 분위기에 맞추어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아직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세신궁, 역대 일왕들의 묘지, 심지어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현 평화기념공원의 전몰자 묘지까지 참배하는 등, 본격적으로 ‘이 아이가 장래의 후계자다’라고 보여주려는 듯이 행동했다.

히사히토 왕자뿐 아니라, 그를 낳은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도 왕세자 내외를 제치고 주목받기 시작했다. 형님 마사코 왕세자비와 달리 키코 비는 스스로 원하여 왕실에 시집왔고, 결혼 전부터 왕족들과 친했고, 결혼 후로도 싹싹하고 사근사근한 태도로 시부모의 비위를 잘 맞추었는데, 거기다가 ‘아들’까지 낳았으니 그야말로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왕실 며느리’로 칭송받게 된 것이다. 히사히토 왕자의 큰누나 마코 공주와 작은누나 카코 공주도 자라면서 점점 예뻐지는 외모로 인기가 높아졌고, 후미히토 왕자 내외는 딸들을 자주 공무에 데리고 다니며 대중적 인지도를 더욱 높였다. 후미히토 왕자 일가의 인기와 이미지는 높아졌고, 반대로 왕세자 일가에 대한 인상은 나빠졌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는 서서히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후미히토 왕자는 ‘국왕 정년제’를 제안했다. ‘고령의 노인이 국왕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힘드니까’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들었지만, 사실 자신이 왕위에 앉고 싶은 욕심을 드러낸 것이다. 야마오리 테츠오(山折哲雄)라는 원로 종교학자는 <신초(新潮)>라는 잡지에 “국가와 왕실을 위해 나루히토 왕세자는 퇴위하라”는 글을 게재했다. 공개적으로 왕실을 자유로이 비판하고 공격할 수 없는 일본의 분위기상, 결코 야마오리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배후세력이 존재함을 짐작할 수 있다. 우익 등은 “왕위를 이어받을 아들도 없고, 아프다며 요양만 하고 있는 마사코 왕세자비가 장래 왕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듯하니, 나루히토 왕세자는 남동생 후미히토 왕자에게 계승권을 넘겨라”라고 주장했다.

키코 비도 공무와 왕실 행사에서 손윗동서 마사코 왕세자비와 시조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겨냥하여 조롱하는 발언을 했다. 또한 아이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2~3학년 재학 중에 짓궂은 남자아이들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하여 한동안 등교하지 못하는 등 고초를 겪었는데, 이 학교폭력의 배후에 숙모인 키코 비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아이코 공주를 괴롭힌 남자아이들의 부모들이, 키코 비와 친한 사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후미히토 왕자 일가는 히사히토 왕자를 등에 업고 영원히 기세등등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논란[편집 | 원본 편집]

사실 후미히토 왕자는 본디 그리 평판이 좋은 인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은데도 ‘41년 만의 왕자’인 히사히토 왕자를 낳아 한동안 각광과 주목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전히 부정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어 다시 인심을 잃고 있다.

서자 혹은 양자라는 설[편집 | 원본 편집]

1959년 아키히토 당시 왕세자에게 시집온 쇼다 미치코는 이듬해인 1960년에 첫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왕자를 낳았고, 2~3년쯤 후에 다시 임신했으나 (왕실에서의 시집살이 스트레스로 인해) 유산했다. 이후 미치코 왕세자비는 1965년 둘째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왕자를, 1969년 셋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낳았다.

그러나 ‘미치코 왕세자비가 유산 이후 불임이 되었고, 따라서 둘째와 셋째는 아키히토 왕세자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서자들이다’라는 설이 있다. 후미히토 왕자의 생모로 거론되는 여자는 다카라즈카가극단의 배우인데, ‘후미히토 왕자와 제법 닮았다’는 주장과 ‘당시 그녀는 연극배우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 임신과 출산을 해낼 겨를이 없었다’는 반박이 있다. 더 심각한 설로는 ‘후미히토 왕자는 아예 아키히토 왕세자의 친아들이 아니라, 미치코 왕세자비의 친정인 쇼다 가문에서 데려온 양자이다’라는 이야기까지 있다.

호색한[편집 | 원본 편집]

후미히토 왕자는 여색을 많이 밝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내 키코 비와의 연애와 결혼 과정에 대해서도 지저분한 이야기가 많다. 공식적으로는 ‘두 사람은 대학에서 처음 만나 캠퍼스커플로 아름답고 건전하게 교제하다가 결혼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선 ‘후미히토 왕자가 키코 비를 처음 알게 된 시기는 대학생 시절이 아니라 고등학생 시절이다’라는 설이 있다. 가쿠슈인 고등과(남고) 3학년 시절 사진동아리에서 활동하던 후미히토 왕자는, 인근 여고 몇 군데에 “예쁜 여학생들의 사진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다른 학교들은 어이없어하며 거절했지만 가쿠슈인 여자고등과에서는 왕자의 요구에 응하여 여학생 몇 명의 사진을 건넸는데, 그 중에 ‘2학년 가와시마 키코’의 사진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가 가쿠슈인대학 시절 함께 활동하며 친해지고 애정을 키웠다는 테니스동아리와 자연문화연구회도, 사실은 후미히토 왕자가 자신의 엽색행각을 위해 일종의 ‘하렘’으로 활용한 모임이라고 한다. 후미히토 왕자는 캠퍼스에서 예쁜 여학생을 발견하면 (똘마니를 시켜) 동아리로 끌어들였고, 그렇게 모인 여학생들 중에서 끝까지 왕자의 곁에 남은 사람이 바로 가와시마 키코였다고. 본래 키코는 후미히토 왕자의 친구의 여자친구였지만 후미히토 왕자는 키코를 빼앗았고, 키코 또한 왕자를 선택했다.[10] 키코는 이전까지 쓰던 보통의 말씨를 왕실 특유의 말씨로 싹 바꾸고, (예비 시어머니) 미치코 왕비 및 (예비 시누이)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와도 친하게 지내는 등, 어린 나이부터 왕실로 시집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후미히토 왕자는 다른 여학생들에게 그랬듯이 키코 또한 잠시만 데리고 놀다가 정리할 생각이었고, 키코와의 사이에서 몇 차례 임신과 낙태까지 했음에도 그의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타츠히코 교수는 분노하여 왕실에 “내 딸을 책임지라”고 강하게 항의했고, 결국 후미히토 왕자와 왕실은 키코를 왕자비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 후로도 후미히토 왕자는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국내외 여기저기에 애인이 있다는 설과, 태국인 여성과의 염문설도 유명하다. 때문에 타츠히코 교수가 사돈인 일왕 내외에게 재차 항의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아내 키코 비와 어린 두 딸까지 데리고 태국 순방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11], 후미히토 왕자는 가족까지 동반한 해외방문에서도 태국인 애인과 밀회했으며, 키코 비는 남편의 파렴치한 행동을 알면서도 순방 내내 공식석상에서 미소를 짓고 있어야 했다. 또한 다카라즈카가극단 여배우와도 추문이 있었다. (2대에 걸쳐 다카라즈카 배우와 추문을 빚은 셈) 그럼에도 후미히토 왕자는 키코 비와 부부동반으로 다카라즈카 공연을 관람하여 빈축을 샀다.

원만하지 못한 부부관계[편집 | 원본 편집]

위의 ‘호색한’ 문단에 서술된 결혼 과정과 이후의 비화를 보면, 자연스레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가 결혼하여 첫째 마코 공주를 낳아 기르고 있던 시절, 왕실 가족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후미히토 왕자가 추태를 부렸다. 에 만취하여 시녀를 희롱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자, 형 나루히토 왕세자가 남동생을 나무랐다. 그러나 후미히토 왕자는 형의 말도 듣지 않고 오히려 화를 냈고, 형제간에 험악한 다툼이 일어났다.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가 달려와 큰오빠와 작은오빠를 겨우 진정시키는 와중에, 아내 키코 비는 남편의 포악한 행동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둘째 카코 공주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집 밖까지 들릴 정도로 부부가 큰 소리로 싸우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그래도 공식석상과 카메라 앞에서 키코 비는 남편 후미히토 왕자에게 일일이 겉옷을 입혀주고, 키도 훨씬 더 큰 남편을 위해 우산을 들어주는 등, 마치 하녀처럼 남편을 받들어 모셨다. 왕족의 체면과 왕실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남존여비) 분위기 때문에, 겉으로는 가정불화를 드러낼 수 없고 이혼도 꿈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쇼윈도 부부’ 생활은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집에서 키코 비는 완전히 돌변하여, 시종들에게 히스테릭하게 성질을 부리며 갑질을 일삼는다고 한다. 그리고 후미히토 왕자는 그런 아내를 말리거나 시종들을 다독이기는커녕, 아내의 갑질을 방관하거나 아예 자신도 갑질에 가세한다고.

셋째 히사히토 왕자를 낳은 후로도 부부의 금슬은 좋지 않으며, 어린 아들의 앞에서까지도 부부싸움을 일삼는다고 한다. 게다가 두 딸도 부모에게 불만이 많아, 집안 분위기는 한층 더 나빠졌다.

아버지로서[편집 | 원본 편집]

아키히토 일왕 내외 및 보수파들의 요구도 있었지만,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도 야심이 있어 늦둥이 셋째 히사히토 왕자를 낳았다. 그리고 히사히토 왕자는 자연적인 절반의 확률에 의해 태어난 남자아이가 아니라, 후미히토 왕자 내외가 인위적으로 성감별을 하여 낳은 남자아이이다.

이토록 귀한 아들이다 보니, 딸들과 다르게 대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2011년 10월 23일 성년(만 20세)을 맞이한 큰딸 마코 공주는, 기자회견에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아버지께서 예전에는 화를 자주 내셨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후미히토 왕자가 득남 이후로 다소 부드러워졌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러한 소문이 사실임을 마코 공주가 확인해준 셈이다. 2014년 12월 29일에 성년을 맞이한 카코 공주도, 자신의 단점에 대해 “아버지처럼 도화선이 짧아서,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기도 합니다.”라고 털어놓았다.

자녀들의 학교행사에서도 차별대우가 보였는데, 후미히토 왕자는 2004년 3월 큰딸 마코 공주가쿠슈인 초등과 졸업식에 참석한 이후로 딸들의 입학식 및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달인 2004년 4월 마코 공주의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입학식부터는 어머니 키코 비만 참석했고, 이후 두 공주의 입학식과 졸업식에는 키코 비만 참석했다. 그러나 아들 히사히토 왕자의 학교 행사에는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가 매번 함께 참석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딸들이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가 어렸을 때 했다가 부모로부터 꾸중을 들었던 행동들이 있는데, 히사히토 왕자는 똑같은 행동을 해도 누나들과 달리 꾸중을 듣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누나들은 불만이었고, 특히 작은누나 카코 공주가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큰누나 마코 공주가 전국적인 비난과 반대를 무릅쓰고 문제투성이 남자친구 코무로 케이(小室圭)[12]와 결혼하여 왕실을 이탈한 것도, (케이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답답한 집에서 탈출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한편 아들에 대한 애정 및 편애와는 별개로, 후미히토 왕자는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문제를 모두 아내 키코 비에게 떠넘겨두고 있다. 형 나루히토 왕세자가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에게 손수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놀아주며, 제대로 등교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적절히 달래고 꾸짖어 학교에 다시 보내는 등등 신경을 써준 것과는 대조적이다. 거의 혼자 3남매의 양육에 신경을 써야 했던 키코 비는 아이들을 극성스럽게 챙겼고, 그 와중에 부정입학 의혹 및 아들 히사히토 왕자의 학교에서의 갑질로도 악명을 얻었다.

후미히토 왕자는 자녀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 “나와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일찍 연애결혼을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큰딸 마코 공주는 26세가 되던 해인 2017년에 코무로 케이와의 약혼을 발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와 코무로 일가의 온갖 좋지 못한 행각들이 드러나 반대여론이 들끓었다. 세간에서는 마코 공주와 케이뿐 아니라, 사윗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결혼을 찬성한 후미히토 왕자 부부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후미히토 왕자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혼시키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결국 큰딸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마코 공주는 2021년 케이와 결혼하여 ‘평민 코무로 마코’가 되어 왕실을 떠났다. 반대여론을 의식하여 결혼식과 지참금도 없이 혼인신고만으로 부부가 되었고[13], 얼마 후 코무로 부부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지참금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는 공식 발표와 달리, 후미히토 왕자 부부 및 왕실에서 코무로 부부를 도와주고 있는 정황들이 보여서 다시금 비판을 받고 있다.

아버지의 양위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아키히토 일왕은 86세가 되던 해인 2019년에 이례적인 ‘생전퇴임’을 하고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본래 일왕은 종신직이었고, 일왕이 죽은 후에야 왕세자가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아키히토 일왕은 ‘고령에 의한 심신 건강 악화’와 ‘장례식과 즉위식을 연달아 진행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며 상왕으로 은퇴했다. 또한 그가 공식적으로 언급한 2가지 이유뿐 아니라, ‘야심 많은 말썽꾼인 차남 후미히토 왕자를 견제하고 장남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유력하게 제기되었다.

2019년 5월, 나루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했다. 현행 왕실전범대로라면 여자는 일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남동생 후미히토 왕자가 계승서열 1위, 후미히토 왕자의 아들 히사히토 왕자가 계승서열 2위에 올랐다.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후미히토 왕자는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서 후미히토 왕자 일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고, 나루히토 일왕의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에 대한 호감이 높아지고 있으며, ‘여왕’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응답이 많기 때문에, 먼 미래에는 왕위 계승의 법칙과 대상자가 바뀔지도 모른다.

각주

  1. 맏이인 나루히토 왕자의 이름을 따서 붙인 명칭이다.
  2. 다만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이기 때문에, 가쿠슈인에 다니는 평민 학생들은 말이 ‘평민’이지 대개 유복한 집안의 자녀들이다.
  3. 다만 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는 다른 유치원에 잠깐 다니다가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했다.
  4. 이런 사람을 일본에서는 ‘귀국자녀(歸國子女)’라고 부른다.
  5. 아키히토 왕세자와 쇼다 미치코도, 1957년 테니스시합에서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6. 그래서 당시 후미히토 왕자와 가와시마 키코는 검은색 상복을 입고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또한 여동생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의 성년(만 20세) 축하도 이듬해로 미루어졌다.
  7. 외할아버지 타츠히코와 외할머니 카즈요(和代)에게도 첫 손주이다.
  8. 특히 마사코 왕세자비는 결혼 직후부터 출산, 특히 아들 출산에 대한 기대(압박)를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9. 당시 후미히토 왕자의 큰딸 마코 공주는 초등학교 6학년, 작은딸 카코 공주는 3학년이었다.
  10. 약혼 발표 기자회견에서 “후미히토 왕자님이 첫사랑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자, 가와시마 키코는 후미히토 왕자의 눈치를 잠시 살피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네.”라고 대답했다.
  11.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큰딸 마코 공주와 3학년이던 작은딸 카코 공주에게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12. 국제기독교대학 동기이며 캠퍼스커플이다.
  13. 다른 공주들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며 거액의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