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이란국부이자 상병신 호메이니 by babeltravel

루홀라 호메이니(روح‌الله خمینی, 영어: Ruhollah Khomeini, 1902년 9월 24일~1989년 6월 3일)는 이란의 초대 최고지도자다. 현대 이란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할 수 있다. 본명은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Ruhollah Musavi Khomeini)다. 아야톨라는 이름이 아니라 이슬람교 시아파 성직자들의 지위로 '신의 징표'라는 뜻이다. 그런데 정작 호메이니의 직위는 아야톨라보다 높은 아야톨라올오즈마(Ayatollah ol-ozma, 대 아야톨라)의 직위에 있었다.

생애

호메이니의 조상에 관해서

본디 호메이니 가문의 조상들은 이란 북동부의 니샤푸르에서 살고 있었다가 18세기 말에 인도 북부의 시아파 중심지인 러크나우 지역의 킨투르로 이주했다. 호메이니의 조부 세예드 아흐마드 무사비 힌디가 그곳에서 출생했다. '힌디'가 인도 출신이란 의미였고 호메이니 가문의 사람들은 이 이름을 줄곧 물려받았는데 훗날 팔라비 왕조는 호메이니를 공격하기 위해 이것을 꼬투리잡아 그가 이란인이 아니라 인도인이라고 비방하기도 했다. 아흐마드 무사비 힌디는 오스만 제국령 이라크의 나자프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가 알게 된 지인 유세프 한 카마레히의 초청으로 1834년 이란을 방문했고 호메인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아흐마드 무사비 힌디는 유세프 한 카마레히의 여동생인 사키네를 세 번째 아내로 맞아들여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세예드 모스타파 힌디가 호메이니의 부친이 된다. 이들 가문 사람들은 시아파 성직자들의 교육을 받으며 시아파 법학과 교리를 공부하였다. 이들은 카자르 왕조의 나세르 알 딘 샤가 영국담배 전매권을 넘긴 일에 반발하여 금연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출생

호메이니는 틀:날짜/출력 테헤란 남서쪽의 호메인 마을에서 세예드 모스타파 힌디의 세 번째 아들로 출생했고 그의 이름도 그 마을에서 비롯됐다. 그의 이름인 루홀라는 신의 영혼이란 뜻을 가졌다. 그날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이자 1대 이맘인 알리의 부인인 파티마의 생일이었는데 이는 시아파의 큰 명절이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호메이니가 태어난지 불과 6개월 만인 1903년 3월에 이라크를 방문했다가 괴한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지역 지주인 바흐람, 미르자 쿨리 술탄, 자파르 쿨리의 소행이었다. 세예드 모스타파 힌디가 지주들의 농민 착취를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이 중에 바흐람은 체포되어 단죄되었으나 미르자 쿨리 술탄과 자파르 쿨리는 건재하여 농민들을 착취했고 호메이니 가족은 테헤란의 고위 성직자인 세예드 아볼카셈에게 탄원하여 이들을 처벌받게 했다. 하지만 미르자 쿨리 술탄이 옥사한 반면에 자파르 쿨리는 이번에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결국 1905년 4월 호메이니의 맏형 모르테자와 둘째형 누레딘이 테헤란에 가서 카자르 왕조의 수상 아인 알 도울레를 직접 접견하여 정의를 요구했고 이에 수상이 받아들임으로 틀:날짜/출력 자파르 쿨리도 처형됐다.

호메이니가 자랐던 20세기 초의 이란은 입헌 혁명과 영국,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이란 세계사적인 거대한 흐름에 휘말려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는데 치안이 불안정해 각지에서 강도와 도적이 출몰하여 약탈과 살인 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어린 호메이니도 직접 총을 들고 집을 지켜야 했다. 호메이니는 어린 시절 매우 활기찼고 언제나 지도자가 되려고 했다. 한편 호메이니의 어머니 하자르와 숙모 사헤베는 대단한 교육열을 가진 여성들이었고 7살의 호메이니를 '마크탑하네'에 보내 초기 교육을 받게 했는데 이는 나이 많은 성직자들이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쿠란을 교과서 삼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우리나라의 서당과 같은 곳이다. 호메이니는 쿠란 암송에 재능을 보여 하페즈란 칭호를 받았다. 이 시기 호메이니는 이란의 시와 문학에 심취하여 이후 저술 활동을 하면서도 늘 유명 시구를 인용하곤 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시를 좋아하는 것은 이란의 국민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직자가 되다

1918년 호메이니가 16세가 되었을 때 콜레라에 걸려 어머니와 숙모가 사망했다. 이 일을 계기로 호메이니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1919년에 아라크로 가서 아야톨라 압둘카림 하에리가 운영하는 미르자 유수프 한 신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 하에리가 콤 성직자들의 초청을 받아 콤 지역으로 이주하자 호메이니도 스승을 따라 콤으로 이주했다. 테헤란 남서쪼게서 156킬로미터 떨어진 콤은 당시에 이름없는 하나의 종교도시에 불과했지만 하에리가 이주하고 이곳에서 수학한 호메이니가 거물이 되면서 이란의 시아파 성지이자 가장 중요한 종교도시가 된다. 호메이니는 1922년 예언자 가문 출신임을 상징하는 검은색 터번을 착용하고 성직자가 되었다. 이 시기 호메이니는 철학과 수피즘에 매료되었다. 미르자 무함마드 알리 샤하바디 교수에게서 호메이니는 7년간 수피즘을 수학하게 되었는데 샤하바디는 성직자의 정치 참여를 지지하는 사람이었고 새로 수립된 팔라비 왕조의 레자 샤의 정책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런 스승의 영향을 받아 호메이니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결혼

콤 신학교에서도 호메이니는 시를 매우 탐닉했다. 이슬람 신학교에선 음악과 회화가 금지되어 있어 학생들의 예술 탐구와 창작욕구가 시와 서예로 뻗어나갔는데 원래도 시를 좋아했던 호메이니도 시를 탐구했다. 이 덕분에 호메이니는 테레한 북쪽의 라바산 출신의 무함마드 사데크 라바사니와 친해졌는데 그와 같이 여행을 다니다가 테헤란의 성직자인 아야톨라 미르자 무함마드 사카피의 눈에 들었다. 사카피는 시를 좋아하는 지적인 청년인 호메이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라바사니에게 소개를 받아 호메이니와 친분을 쌓았다. 라바사니는 호메이니에게 슬슬 결혼을 하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고 호메이니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다고 하자 라바사니는 사카피에게 두 딸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이에 1929년, 27세의 호메이니는 사카피의 딸인 15세의 코드세 이란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가차없이 차였다. 그런데 그날 밤 코드세 이란은 꿈 속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에게 호메이니와 결혼하라는 계시를 받았다면서 마음을 바꿔 호메이니와 결혼했다. 이후 호메이니는 다른 아내를 더 들이지 않았고 그녀와 백년해로했다. 그녀는 결혼 이후 80년을 더 살면서 '이슬람 혁명의 어머니'라 불렸지만 조용한 삶을 살다가 2009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레자 샤

한편 틀:날짜/출력 카자르 왕조의 군사령관 레자 칸은 자신을 임명한 젊은 왕인 아흐마드 샤를 축출하고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렸다. 그는 처음에 아타튀르크를 모델로 삼아 공화국을 수립하려 했지만 영국과 이슬람 성직자들의 반대로 왕정을 건설했다. 틀:날짜/출력 레자 칸은 샤로 즉위하여 레자 샤가 되었고 팔라비 왕조를 선포했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성직자 탄압을 실시했다. 대표적인 것이 틀:날짜/출력 레자 샤의 아내가 파티마 사원에 이슬람 복장을 하지 않고 참석한 것을 보고 분노한 아야톨라 바프키가 레자 샤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자 즉각 군대를 보낸 사건이다. 레자 샤의 군대는 이슬람 사원을 군홧발로 짓밟고 들어와 아야톨라 바프키를 체포했는데 이슬람 사원에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행위다. 거기에 성직자를 잡아갔으니 무슬림의 입장에선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하에리는 바프키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이 일을 문제삼지 않았다.

레자 샤의 탈종교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레자 샤는 1934년 테헤란 대학교를 설립했고 근대적 기초교육제도를 도입함으로 그간 유아 교육을 담당해왔던 성직자들을 배제시켰다. 그리고 사법권도 성직자들에게서 빼앗아 서구식 법정을 만드는 개혁을 실시했다. 문제는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당한 성직자들이 분노했단 것이다. 거기에 1936년 여성들에게 베일 착용을 금지하고 서구식 복장을 할 것이 강요되자 결국 성직자들은 폭발했다. 하지만 레자 샤는 이를 여성 해방이라고 맞섰다. 성직자이자 국회의원인 아야톨라 모다레스는 이에 반발하다 암살되었다. 레자 샤는 의회를 무력화하고 언론을 탄압하며 모든 반발을 잠재웠다. 레자 샤의 가장 큰 반대파는 성직자들이었으나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정치 개입을 반대하는 입장이라서 레자 샤는 사실상 독주를 할 수 있었다.

한편 레자 샤는 친독 성향의 사람이었고 독일과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 2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후 연합국은 이 사실에 못마땅해했다. 결국 1941년 8월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침공했다. 그해 9월 6일 레자 샤는 왕위를 아들인 무함마드 레자에게 물려주고 망명을 떠났다가 틀:날짜/출력에 사망했다.

투쟁의 시작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호메이니는 레자 샤에게 비판적이었으나 이 문제를 판단할 자격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태도를 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1935년 6월 마샤드의 아야톨라 후세인 코미가 레자 샤에게 정책을 바꿀 것을 요청하기 위해 테헤란을 방문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근왕주의자였고 레자 샤가 정책을 바꾸기만 하면 왕의 친위세력이 될 사람이었지만 레자 샤는 그의 방문을 거절하고 레이의 샤 압돌라짐 사원으로 보냈다가 이라크로 추방했다. 이에 분노한 마샤드 사람들이 항의 시위를 했으나 레자 샤는 이를 강경하게 진압했다. 한편 이란 철학자 물라 사드라의 철학을 공부하고 절대적인 인간이 정의를 실현하는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믿게 된 호메이니는 본격적으로 팔라비 왕조에 맞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1942년 호메이니는 비밀의 폭로란 정치서를 출판했다. 이는 알리 아크바르 하카미자데가 와하비즘을 토대로 시아파를 비판한 1천년의 비밀이란 팜플랫을 내놓은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호메이니는 하카미자데를 사우디아라비아 추종자이며 시아파의 반역자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하카미자데 비판에 그치지 않고 레자 샤의 반 이슬람 정책 비판으로 확대시켰다. 그는 압제자에 대한 저항은 무슬림의 첫 번째 의무라면서 왕정을 타도하고 이슬람법에 정통한 이슬람법학자가 다스리는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무슬림들이 봉기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파격적인 주장에 호메이니는 차츰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수백명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콤의 일반 시민들도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찾아왔고 테헤란, 이스파한 등의 다른 도시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왔다. 호메이니는 여기서 후세인 알리 몬타제리, 모르타자 모타하리, 무함마드 자바드 바호나르, 알리 하메네이, 알리 아크바르 하쉐미 라프산자니같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데 이들은 이후 이슬람 혁명과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핵심이 되게 된다.

친미 쿠데타와 모사데크의 축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이란에선 노동운동과 대중운동이 확대되고 있었다. 틀:날짜/출력 이란 공산당인 투데 당이 공심 출범했는데 이들은 1944년 8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수준으로 성장했으나 1949년 국왕 저격 사건을 일으키는 바람에 해산당했다. 1946년에는 나밥 사파비가 이슬람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이슬람전사 당을 결성했고 1949년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모인 국민전선이 결성됐다. 국민전선의 지도자는 무함마드 모사데크로 그는 빈곤 추방, 석유 국유화를 주장하고 있었다. 큰 인기를 얻은 국민전선은 1951년 선거에서 승리하였고 4월 30일에 모사데크가 수상이 되었다. 5월 1일 의회는 석유 국유화 법안을 승인했는데 영국이 이에 반발했다. 영국은 이란 침공을 위해 키프로스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페르시아만에 해병대를 급파했다. 이 위기는 미국과 유엔 안보리의 중재로 불식되었지만 1952년에 모사데크의 임기가 연장되자 영국은 미국과 합세하여 이란 석유 수출을 봉쇄했다.

해외에 경제 제재로 이란은 큰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는데 사파비를 중심으로 이슬람법 수용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적 공세가 시작되었다. 모사데크는 투데당과 연합하여 위기를 분쇄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사파비를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모사데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틀:날짜/출력 무함마드 레자 샤가 모사데크를 해임했지만 반발한 시민들이 봉기하면서 샤는 로마로 망명했다. 이때 이란 왕정이 무너지리라 세계는 관측했다. 그러나 이번엔 미국이 나섰다. 이란에서 소련의 영향권이 확산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미국영국과 합세하여 아작스 작전을 실시, 군부쿠데타를 사주하여 모사데크 정부를 무너뜨리고 팔라비 왕정을 복고했다. 돌아온 무함마드 레자 샤는 국민전선과 투데당을 탄압했고 팔라비 왕조는 친미 국가로 변모했다. 틀:날짜/출력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터키를 묶어 바그다드 조약기구를 결성했다.

백색혁명

쿠데타로 복권된 무함마드 레자 샤는 주요 정당들을 해산하고 언론 통제를 실시하며 자신의 철권통치를 강화했다. 그 일환으로 설립된 것이 바로 악명높은 '사바크'였다. 팔라비는 민주주의가 실패한 것이라며 이란에 민주주의를 도입할 이유가 없다고 외쳤다. 당시 시아파 최교종교지도자인 아야톨라 세예드 후세인 보루제르디는 1936년 이래로 시아파의 최교 종교지도자였다. 그는 전임자인 하에리와 마찬가지로 정치 불개입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무함마드 레자 샤가 세속화와 독재를 강화하자 원칙을 바꾸어 샤의 정책에 강하게 저항했다. 이에 샤는 노골적으로 종교계를 냉대했다. 이란의 샤는 전통적으로 최고종교지도자의 집을 방문하는데 샤는 보루제르디를 사원으로 불러내어 1시간 동안 기다리게 한 다음에 간단한 인삿말만 던지고 혼자서 사원으로 들어감으로 모욕했다. 이에 종교계는 크게 반발했다.

틀:날짜/출력 보루제르디가 사망했는데 이때 이미 호메이니는 차기 '마르자에 타클리드'로 거론되었지만 너무 젊은 관계로 최고종교지도자가 되진 못했다. 1963년 레자 샤는 이란 근대화를 위해 백색혁명이란 것을 단행했다. 이는 토지개혁, 삼림, 목초지의 국유화, 선거법 개혁을 비롯한 19개 항목으로 구성된 조치로 핵심은 토지개혁이었다. 레자 샤는 성직자들이 가진 토지들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개혁을 실시했고 이에 성직자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샤는 성직자들을 흑색 반동분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샤는 성직자들을 사회적, 정치적 기생충이라 비방하며 이들이 빨갱이보다도 해악이 크다고 비웃었다. 성직자들은 분개했지만 토지를 받은 농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샤의 발과 손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샤의 공포 정치 때문에 샤는 광범위한 반대파를 얻었다. 공산당, 사회주의자, 좌파, 보수주의자들을 망라한 사람들이 샤의 정책에 반대했다. 그리고 샤의 경제발전 덕분에 이란의 국력이 향상된 것도 사실이었지만 빈부격차로 인해 부가 일부 계층에 편중되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가중되어갔다. 그 와중에 샤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빈곤한 국민들의 눈총을 받았다. 전임 지도자인 보루제르디는 샤를 협력 대상으로 보았지만 호메이니는 샤를 타도 대상으로 보았다. 그는 자신의 혈관에 피가 흐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레자 칸의 아들이 이란을 파괴하는 일을 막고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호메이니는 일단 토지 개혁엔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타겟으로 삼은 것은 틀:날짜/출력 지방의회와 주의회에 선임된 사람들이 쿠렌에 자신의 직책을 맹세하도록 한 기존 조항을 삭제한 것이었다. 호메이니는 이것이 바하이교를 키우기 위한 음모라고 보았다. 호메이니는 아야톨라 샤리아트마다리와 아야톨라 골파예가니와 회동하여 콤 신학교의 성직자들이 단일 전선을 수립해 샤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단일화에 실패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샤와 수상에게 새 법안에 반대하는 전보를 보냈고 결국 이 법안은 철회되었다. 이후 호메이니는 상인들의 모임인 이슬람 사회의 연합을 설립하여 기존 성직자들의 정치입장을 비판하고 공개적 투쟁을 천명했다.

지하드

틀:날짜/출력 백색혁명의 가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열렸다. 테헤란 시내의 성직자들은 국민투표가 반이슬람적인 행위라며 국민투표 보이콧을 선언했고 국민투표를 통해 자행되는 범죄의 실체를 알면 다들 미칠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샤가 또 다른 카르발라를 원하고 있다고 했다. 곳곳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했다. 테헤란의 유혈 사태 소식을 들은 콤은 긴장했다. 상인과 신학생들이 종교지도자들의 집에 운집했다. 샤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직접 콤을 방문했다. 호메이니는 항의의 표시로 모든 상인들에게 철시할 것을 요구했다.1월 24일 상점과 신학교가 모두 문을 닫았다. 샤는 소작농들에게 토지증서를 나누어주며 성직자들이 어리석고 보수적인 패거리이며 그들의 뇌가 지난 1천년간 진보한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 연설에 호메이니는 격노했지만 1월 26일의 국민투표에서 백색혁명은 통과되었다. 호메이니는 샤가 도덕적으로 부패했으며 미국와 이스라엘에 복종한다면서 이슬람을 신봉하는 새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호메이니의 명성은 매우 높아졌다.

틀:날짜/출력의 이란의 새해인 노루즈에 호메이니는 성직자는 올해를 축복하지 않는다며 상복을 입을 것을 호소했다. 3월 22일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의 순교 기념일이었는데 페이지예 신학교에서 아야톨라 골파예가니의 추도식이 열리려 했다. 그런데 괴한들이 난입하여 총을 쏘며 불을 질렀고 3명의 성직자들이 추락사했다. 부상자의 숫자는 엄청났다. 왕실 호위대 1개 사단이 출동하여 거리를 차단했다.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한 호메이니는 직접 페이지예 신학교로 달려갔다. 군중들이 통곡하며 "그곳에서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우린 당신을 보내지 않기로 신에게 맹세했습니다."라고 호메이니를 막아섰지만 호메이니는 공포와 두려움을 떨치고 비극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고 외쳤다. 호메이니는 '페이지예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성명서를 작성하여 배포했고 왕정 타도를 외쳤다.

한편 이 사태를 지켜보던 이라크 나자프의 아야톨라 하킴이 호메이니, 샤리아트마다리, 골파예가니에게 나자프로 이주할 것을 권고했다. 호메이니는 고민 끝에 정중히 거절했다. 만약 그들이 나자프로 이주한다면 콤이 모독과 무신의 나락에 떨어질 것이란 것이 이유였다. 호메이니는 신이 피난처라고 하였다. 6월 3일 3대 이맘 후세인이 카르발라에서 순교한 아슈라가 왔다. 호메이니의 연설을 막기 위해 호메이니의 집을 경찰과 군인들이 포위했다. 연설을 하기 위해 호메이니가 집앞에 나서자 군인들이 막았다. 군인들은 신의 사람인 당신이 무고한 피를 보길 원하지 않는다며 호메이니를 돌려보내려 했지만 호메이니는 만약 자신이 가지 않으면 호메이니가 아니라고 잘라 말하며 페이지예 신학교에 당도했다.호메이니는무함마드의 종교가 자신의 피로 회복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목숨을 칼로 거둬도 상관없다고 하고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했다. 그는 샤를 비참한 사람이라 부르며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고 달러의 노예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성직자들의 충고를 따를 것을 권고했다. 만약 샤가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가 떠나는 날 이란이 감사의 기도를 드릴 것이라고 호메이니는 경고했다. 호메이니의 연설에 흥분한 시민들이 길거리로 뛰쳐나가 샤를 규탄했다. 테헤란에서도 샤를 규탄하고 호메이니를 숭배하는 거대한 시위 군중이 운집했다. 결국 샤는 호메이니를 이란 안에 둬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날 오후 6시부터 군대가 출동해서 122명의 시위 군중을 체포했다. 6월 5일 새벽 3시에 특공대가 호메이니의 집을 포위했다. 특공대는 호메이니를 찾기 위해 호메이니 집 안에 가득 차 있던 손님들을 닥치는 대로 때렸다. 이에 호메이니가 나타나서 자신을 부르면 될 것을 어째서 무고한 사람들을 폭행하느냐고 특공대를 꾸짖었다. 특공대는 호메이니를 즉시 체포하여 차에 태웠다. 호메이니의 장남 모스타파가 차 앞에 뛰어들어 막자 특공대들이 그에게 총을 겨누었다. 호메이니는 아들을 꾸짖어 집에 돌려보냈다. 모스타파는 그들이 호메이니를 잡아갔다고 울부짖었고 이에 온 이란이 폭발했다.

추방

호메이니가 체포된지 몇 시간 만에 콤의 길거리는 군중들로 가득 찼다. 테헤란에서 군대가 출동하여 시위 군중을 막아섰다. 군인들은 15분의 시간을 주며 최후통첩을 날렸지만 시위대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자 즉각발포하여 수십에서 수백명을 사살했다. 이슬람 사회의 연합은 즉각 호메이니의 체포 소식을 전국에 알렸다. 테헤란에서 5천명의 시위대가 호메이니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연호하며 관공서를 공격했다. 이에 경찰들이 시위대에 발포하면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오후엔 테헤란 전역이 호메이니 지지 시위대로 가득 찼고 시위는 마샤드, 이스파한, 쉬라즈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야간 통행 금지령을 선포하고 성직다 30명을 비롯한 320명을 체포했다. 틀:날짜/출력 샤는 호메이니를 열달 만에 풀어주었다. 콤 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고 페이지예 신학교는 3일간 축제를 열어 그의 귀환을 환영했다.

1964년 10월 무함마드 레자 샤는 미군에 대한 외교 면책특권과 군비 증강을 위한 2억 달러의 차관 신청을 법안에 통과시켰다. 호메이니는 이를 맹렬히 비판하고 샤를 미국의 대리인이며 팔라비 왕정을 미국에 종속되었다고 비판했다. 틀:날짜/출력 예언자 파티마 탄생일을 맞이해 수많은 사람들이 콤으로 성지순례를 왔고 호메이니의 집을 방문했다. 호메이니는 그들 앞에서 샤가 독립을 미국에 팔았다고 비판했다 호메이니는 법안에 찬성한 의원들을 반역자로 비난했고 그가 한 연설 중에 가장 강경한 비판 연설을 발표했다.

11월 4일 새벽 4시 특공대원들이 호메이니의 집을 급습해 그를 체포했다. 그는 테헤란 메흐라바드 공항으로 끌고 여권을 주고 터키로 쫓아냈다. 테헤란 방송국은 국민과 국가의 이익, 독립과 주권에 반하는 선동과 행동을 범한 죄로 호메이니가 추방되었다고 간단히 방송했다. 호메이니를 죽였다간 정권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놔둘 순 없으니 그냥 해외로 쫓아내어 대중의 기억에서 차차 지우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15년 간의 긴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터키 시절

호메이니는 군용기를 타고 앙카라에 내렸다. 평소에 호메이니는 터키의 세속화에 매우 적대적인 사람이었는데 정작 그가 터키에서 살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불바르 궁전 호텔 514호에 투숙했는데 앙카라의 날씨가 콤보다 좋다고 평가했다. 그는 아들에게 쿠란과 옷가지, 책을 달라고 편지를 썼다. 터키에 온지 세 번째 되던 날, 그의 감시원이 앙카라 시내를 나들이할 것을 제안했고 호메이니는 승낙했다. 그런데 터키는 세속화된 나라라 성직자의 복장인 망토와 터번의 착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호메이니는 반발했지만 벗기 싫으면 집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호메이니는 외출을 포기했다. 이후 그는 오스만 제국의 첫 수도인 부르사로 이주하여 알리 제티네르 터키 정보부 대령의 집에 같이 살았다. 제티네르 대령의 부인인 멜라하트는 그가 예의바르고 좋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호메이니는 하루 종일 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하루는 제테니르 대령이 부르사의 역사적인 모스크를 방문하자고 했다. 호메이니는 바지와 재킷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에 거절했지만 며칠 후에 아나톨리아에서 제일 오래된 사원인 울루 자미 사원을 방문했다. 알리의 아들인 탄주가 터번을 벗은 호메이니의 사진을 찍었는데 호메이니는 이 사실을 알고 격분했다. 알리는 즉각 이 사진을 지우겠다고 약속하며 호메이니를 달랬지만 팔라비 왕정은 용케 이 사진을 구해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호메이니를 비난했다.

틀:날짜/출력 그의 아들 모스타파가 아버지에게 합류했다. 호메이니는 이후 부르사에서 11개월간 정치적인 언급을 하지 않으며 거주했다. 하지만 이란에서 그의 추종자들이 찾아와 문안을 올렸고 지원금도 끊이지 않았다. 거기서 호메이니는 시아파 법학에 대한 개론서인 타흐리르 알 아실라를 서술했다.

이라크 시절

틀:날짜/출력 호메이니는 이라크 나자프로 이동됐고 거기서 13년을 살았다. 나자프는 카르발라와 함께 시아파 최대 성지 중 하나인데 호메이니는 나자프를 뱀의 소굴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샤가 호메이니를 자파르로 이동시킨 것은 첫째 호메이니가 시아파 신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부르사에 거주하는 것에 대해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있어서 달랠 필요가 있었고 둘째 나자프엔 모흐센 하킴, 아불 카심 호이같은 명망높은 시아파 신학자들이 있었는데 호메이니가 이들과 키배를 뜨면서 제풀에 나가 떨어지길 기대한 것이다. 샤가 자신을 조지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호메이니가 나자프에 살게 된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흐센 하킴과 만난 호메이니는 시아파가 투쟁과 실용 중에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 지에 대해 맹렬히 논쟁했다.

1970년부터 호메이니는 나자프 신학교에서 이슬람 정부에 대해 강읳ㅆ다. 이것이 이슬람 혁명이론으로 발전했고 이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통치이념이 된다. 호메이니는 자신의 연설을 이슬람 정부란 책으로 출판했다. 그는 입법권을 신에게 귀속시켜야 하고 정부는 이슬람법에 기반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전제주의를 타도하고 이슬람 정부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무슬림의 의무임이라는 것이 호메이니의 주장이었다. 그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정치개입을 정당화시키는 이슬람법학통치론을 주장했다. 군주제는 무조건적인 타도 대상이었다. 호메이니는 이 이론에 입각하여 자신이 집권한 이후 국가의 전권을 장악했다. 한편 많은 이란인들이 나자프로 성지 순례를 와서 호메이니를 만났는데 이들을 통해 호메이니의 주장들이 이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라크의 학자들과 논쟁한 결과 호메이니는 자신의 이론을 더욱 체계화하여 샤에게 더욱 논리적으로 투쟁할 수 있게 되었다. 샤로써는 최악의 자충수를 둔 것이다. 이후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반왕정투쟁은 전과 궤를 달리할 정도로 격렬해졌고 걷잡을 수 없게 성장하게 된다. 틀:날짜/출력엔 호메이니의 장남인 모스타파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은 이를 사바크의 독살이라 주장했다. 아야톨라 모르테자 모타하리는 모스타파를 순교자라 부르며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개최했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거대한 재앙 앞에 개인적 비극을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며 아들의 죽음을 왕정 타도에 활용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프랑스 시절

반정부 투쟁이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지자 결국 샤는 호메이니를 먼 곳으로 내쫓기로 했다. 샤는 쿠웨이트를 망명지로 낙점했다. 하지만 쿠웨이트는 호메이니의 입국을 거부했다. 이에 호메이니는 프랑스를 경유하여 다른 이슬람 국가로 가기로 했다. 10월 12일 76세의 호메이니는 아들 아흐마드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파리에 도착했는데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서구 유럽의 땅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호메이니에 흥미를 가진 전 세계의 언론인들이 몰려와서 호메이니를 취재했다. 또한 하산 에브라힘 하비비, 아볼 하산 바니 사드르, 사데크 코틉자데, 야즈디를 비롯한 이슬람 혁명의 거물들도 잇따라 호메이니를 방문했다. 프랑스 정부는 호메이니를 잘 대해주었고 호메이니는 예상외로 자유로운 행보를 취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도 수많은 이란인들이 찾아와 샤의 의도와는 다르게 호메이니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틀:날짜/출력 400명의 기자들과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이 호메이니를 방문했다. 일부 추종자들이 그를 이맘이라고 불렀는데 이후 호메이니는 이맘 호메이니라 불리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호메이니는 이맘의 부재를 대비한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위치를 강조한 진보적 이슬람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호메이니는 여성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으나 이후 여성이 이란의 대통령이 된 적은 2015년 현재까지 없다. 한편 이란의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고 테헤란 시내에선 수백만명의 시위대가 군주제 종식과 호메이니의 귀환을 부르짖었다. 샤는 자유주의자들과 협상하여 정부를 살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미 팔라비 왕정의 한계에 치달았다는 것을 안 호메이니는 틀:날짜/출력 파리에서 이슬람 혁명 위원회를 창설했고 메흐디 바자르간을 첫 수상으로 임명했다. 틀:날짜/출력 무함마드 레자 샤는 휴양을 목적으로 이란을 떠났지만 전 세계가 그가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르단도 사우디아라비아도 그의 입국을 거절했고 췌장암으로 죽어가고 있던 그는 자신의 첫 아내의 고향인 이집트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모로코, 멕시코, 미국, 파나마를 전전했고 마지막에 이집트로 돌아와 그곳에서 죽었다. 2주에 호메이니는 이란으로 돌아왔다.

귀환

샤가 망명한 이후에도 샤가 임명한 마지막 수상인 국민전선의 바흐티야르 수상 체제는 유지되고 있었다. 바흐티야르 수상은 호메이니에게 점진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호메이니는 바흐티야르 내각이 불법적인 것으로 그와 회담할 이유가 없으며 그가 퇴진한 후에야 회담이 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1월 31일 호메이니는 파리를 떠나 2월 1일 아침 9시 30분에 테헤란 메흐바라드 공항에 도착했다. 호메이니는 귀국 소감에 대해 짧은 연설을 하고 혁명의 순교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베헤쉬테 자흐라로 이동했다. 호메이니는 예배를 올린 다음에 바흐티야르를 샤의 최후의 나약한 헐떡거림이라 부르며 새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군인들에게도 혁명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호메이니는 레파 이슬람 여자고등학교에 혁명 본부를 세우고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여명의 10일

이 시기 이란은 매우 불안했다. 샤의 지지세력들이 최후의 쿠데타를 감행할 것이란 소문도 있었고 바흐티야르 수상이 얌전히 하야할지도 미지수였다. 무자헤딘 할크와 페다야네 할크같은 게릴라 조직들도 곳곳에서 싸움을 벌였다. 마침내 파라하바드 기지의 불사조 연대 소속 파일럿 100명이 호메이니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누가 우세한지가 결정되었다. 샤의 최정예부대가 호메이니에게 충성하게 되면서 바흐티야르 정부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바흐티야르 수상은 2월 10일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전차 부대를 출동시켰다. 2월 11일 군 최고위원회가 중립을 선포하고 모든 병사들을 원대복귀시켰다. 바흐티야르 정부는 최후의 저항을 벌였지만 결국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2월 11일은 이슬람 혁명의 승리의 날로 국경이 되었다. 호메이니가 명실상부하게 이란의 주인이 되었다.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

호메이니는 측근들을 중심으로 이슬람 공화당을 창설했다. 호메이니는 정당은 필요하지만 단일정당만이 있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다양한 단체의 존재는 국가의 해악이라는 것이 호메이니의 주장이었다. 첫 총재는 아야톨라 모함마드 모세이니 베헤쉬티였다. 호메이니가 다음에 만든 것은 이슬람 혁명수비대였다. 그해 5월 호메이니는 4천명 규모의 혁명수비대를 만들어 혁명위원회를 사수했다. 현재는 12만 5천명에 달한다. 그리고 이슬람 혁명 위원회를 이란으로 옮겨왔고 혁명 재판소를 새로 만들었다. 혁명 재판소에 의해 반혁명분자로 판명된 사람들이 숙청당했다. 혁명 재판소장인 세예크 사데크 할할리에 의해 사바크 수장인 나시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공개처형당했다. 바자르간 수상은 인권과 법치를 위해 공개처형을 해선 안 된다고 혁명 재판소를 비난했지만 그는 혁명의 광기 앞에서 침묵해야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한편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의 건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과 좌파는 민주 공화국의 건설을 주장했다. 3월 1일 호메이니는 자유는 있으되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을 척결하지 못했다면서 정치, 경제, 군사, 문화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해야 하니 이슬람 공화국에 투표할 것을 주문했다. 3월 30일에서 3월 31일까지 이틀간 진행된 투표에서 97%가 이슬람 공화국의 건설에 찬성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은 신정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어떻게 이런 압도적인 표가 나올 수 있냐고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반발했지만 호메이니는 이런 반발을 모두 일축했다. 헤즈볼라라는 자위대가 구성되어 호메이니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언론사들을 닥치는대로 공격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종교 국가의 건설에는 찬성하지만 호메이니는 싫다는 포르간같은 세력도 있었다.

바자르간 수상은 300명 정도의 제헌 의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지만 호메이니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을 기반으로 한 통치를 위해 70명의 전문가회의를 통해 헌법을 제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란의 저명한 종교지도자인 아야톨라 세예드 모함마드 카젬 샤리아트마다리가 반대했다. 샤리아트마다리는 이슬람의 현대화를 지지하는 사람이었고 현대에 맞게 이슬람 교리도 변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예언자 시대의 것을 그대로 적용하려는 근본주의자였다. 그리고 샤리아트마다리는 서구식 민주 공화국을 지지하면서 모든 주권을 국민에게 돌리고 독재와 전제를 용납해선 안 된다고 보았으며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성직자는 국가의 교사, 변호사 이상의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샤리아트마다리는 호메이니가 만든 헌법을 보이콧할 것을 국민에게 촉구했다. 그는 호메이니의 헌법이 부여한 지도자의 절대적 권한은 국민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샤리아트마다리가 팔라비에 협조한 사람이라고 공격했다. 그리고 미국대사관 인질 사건이 반이슬람적인 행위라고 비난한 것도 약점이 되었고 그는 실각했다. 결국 98%의 지지율로 헌법이 통과되었다.

미대사관 인질 사건

틀:날짜/출력 무함마드 레자 샤가 췌장암 치료를 위해 미국에 입국했고 이란에서 쫓겨난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샤를 맞이했다. 호메이니는 샤의 방미를 미국이 왕정복고를 꾀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호메이니는 미국을 거대한 사탄이라고 비난했다. 이란은 샤를 내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11월 1일 알제리 혁명 기념식에 참석한 바자르간 수상이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 국가안보보좌관과 만나 악수를 했다. 이슬람 공화당은 이 일을 빌미로 바자르간을 완전히 실각시켰고 이란의 자유주의 세력을 짓밟기 시작했다. 11월 4일엔 대학생들이 미국 대사관 벽을 넘어 대사관을 점령하고 90명을 인질로 잡았다.여자와 흑인은 곧바로 석방되었지만 나머지 52명은 444일간이나 억류했다. 이들은 석방 조건으로 샤를 요구했다. 11월 6일 바자르간 수상은 이 사건에 반발하여 사임했다. 이에 호메이니는 주저하지 않고 혁명위원회가 국가를 통치하게 했다. 호메이니는 대사관 인질 사건에 대해 공개적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고 이는 정치적으로 현명한 일이었다. 호메이니가 공개적으로 표명했던 유일한 것은 미국은 전 세계가 보고 있는 가운데 '나쁜 짓'을 할 수 없으리란 것이었다. 호메이니는 바니 사드르 외무장관에게 이 미국인 인질들은 이슬람 공화국이 뿌리 내려 국민을 통합하기 전까지 유용한 방패막이라고 했다.

한편 미국 대사관에선 50권 분량의 비밀 문서와 대사관을 출입한 이란인들의 명단이 나왔고 이란은 미국 대사관을 스파이 소굴이라 비난했다. 한편 소련을 막기 위한 중동 동맹의 한 축인 이란이 빠져나간 것은 미국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이란은 중동의 헌병이라 불릴 정도의 혈맹이었는데 반미를 외치는 이슬람 공화국의 등장은 미국의 이익에 지대한 손해를 주었다. 한편 미국은 틀:날짜/출력 독수리 발톱 작전을 발동하여 90명의 특공대원을 파견해 인질을 구출하려 했지만 헬기 2대가 고장났고 수송기와 헬리톱터가 추락하여 8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델타 포스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인질들은 틀:날짜/출력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식에 맞춰 석방되었다. 하지만 물밑 협상을 한 것은 카터 정부였다. 한편 미국 대사관이 점령되는 순간 탈출한 일부 대사관 직원들이 있었는데 미국 정부는 영화를 찍는 척하면서 이들을 모두 빼내왔다. 이를 다룬 영화가 벤 에플렉아르고다.

문화혁명

틀:날짜/출력 자유주의자 바니 사드르가 이란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후세인이 원래 대통령 자리에 낙점한 인물은 이슬람 사회의 연합의 수장인 잘랄레딘 파르시였는데 그가 아프가니스탄 출신이라서 자격이 없었다. 바니 사드르는 자유주의자답게 성직자 조직들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을 이룩하려 했지만 이슬람 강경파들이 반발했다. 3월5월에 걸쳐 치러진 총선에서 이슬람 공화당이 여당이 되었다. 이슬람 공화당은 이슬람 사회의 연합의 일원인 모함마드 알리 라자이를 수상으로 내세웠는데 바니 사다르는 라자이가 자질이 부족하다고 반대했다. 호메이니가 라자이를 공개 지지하고 나서야 라자이가 수상이 되었다. 한편 호메이니는 자유주의자들과 좌파들을 척결하기 위해 칼을 뽑아들었다. 바로 문화혁명이었다. 일찍이 붉은 중국의 황상 모택동이 반대파들을 회치기 위해 문화대혁명이란 것을 내세운 적이 있었는데 호메이니가 그 후배인 셈이었다. 4월 18일 호메이니는 대학교가 서구의 잘못된 사상에 오염된 제국주의자와 반동들 소굴이라 비난했다. 헤즈볼라들이 좌파 학생 세력들을 닥치는 대로 드잡이했다. 즉각 쉬라즈 대학, 아흐바즈 대학, 라쉬트 대학이 공격당했다. 6월 12일 대학의 이슬람화를 명목으로 문화혁명 본부가 설치되었고 2년 간 모든 이란의 대학의 폐쇄되었다. 이렇게 강단의 좌파 성향 교수들은 남김없이 숙청당했다. 호메이니는 이 것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84년 12월 문화혁명 본부를 최고문화혁명위원회로 격상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후세인은 아바단, 수산게르드, 호람샤흐르, 후제스탄을 비롯한 이란 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삽시간에 점령하고 일방적인 휴전을 선포했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침공에 앉아서 당할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이 벌어져 양국은 백만에 달하는 인명피해와 수천억 달러의 저비를 소모하게 된다.

바니 사드르의 몰락

한편 바니 사드르 대통령과 이슬람 공화당의 불화는 자꾸 심해지고 있었다. 자유주의자인 바니 사드르는 신정화되는 이란의 상황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었고 여기에 무자헤딘 헐크를 비롯한 이슬람 사회주의 게릴라 세력들도 개입했다. 사회발전론, 역사결정론, 계급투쟁이 이슬람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 무자헤딘 헐크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고와 이슬람의 종교적 가치를 결합한 이란 건설을 꿈꾸었다. 이들은 팔라비 왕정 타도에 투신했고 팔라비 왕정 붕괴 이후엔 호메이니를 타도했다. 이들의 지도자는 마수드 라자비로 이슬람 공화당의 전제정치 반대, 반제국주의 단결, 토지 분배, 실업 해소를 공약으로 내걸며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공화국 헌법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후보자 자리를 박탈당했다. 호메이니는 이들을 절충주의자로 비난하며 1981년부터 탄압했다. 바니 사드르는 이슬람 공화당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비난했다. 미대사관 인질 사건에 대해 바니 사드르와 무자헤딘 헐크는 현 정권이 국제관례를 무시하는 중세적인 인물이란 증거가 드러났다고 비난했다.

1981년 바니 사드르는 무자헤딘 헐크와 연대하여 '바자르 상인과 결탁한 성직자 독재'를 규탄하는 장외투쟁을 전개했다. 3월 5일 바니 사드르가 모사데크 추모식에서 연설을 하는데 어김없이 헤즈볼라가 테러를 감행했다. 4월 27일 무자헤딘 헐크의 가두시위에서도 헤즈볼라들이 나타나 양측이 충돌했다. 정부가 무자헤딘 헐크의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자 무자헤딘 헐크는 바니 사드르에게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해줄 것을 촉구했다. 6월 8일 바니 사드르는 쉬라즈 공군 기지에서 군부에게 독재에 대항하여 저항할 것을 호소했다. 호메이니는 6월 10일, 즉각적으로 바니 사드르의 군 통수권을 박탈했다. 바니 사드르는 군부가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 믿었고 무자헤딘 헐크도 바니 사드르를 지지했다. 6월 13일부터 30여개 도시에서 100만명이 호메이니 독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6월 20일에 무자헤딘 헐크는 다시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다. 이에 헤즈볼라가 시위대를 공격했고 이슬람 공화당은 시위대를 신의 적이라 규정하여 잔혹하게 진압하여 수십명이 사망했다. 6월 21일 의회는 바니 사드르를 헌법 위반 혐의로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했다. 바니 사드르는 잠적하여 호메이니에 맞서 봉기할 것을 촉구했다. 6월 28일 테헤란 남동부의 이슬람 공화당사가 폭발하여 70여명이 죽었는데 당 총재인 베헤쉬티도 죽었다. 이는 무자헤딘 헐크의 소행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영 좋지 않게 돌아갔고 바니 사드르는 틀:날짜/출력 여장하고 라자비와 함께 파리로 망명했다. 그들은 파리에서 이란국민저항위원회를 조직하여 호메이니 독재에 항거했다. 이란국민저항위원회는 공화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바니 사드르를, 의장에 라자비를 임명했다. 이들은 1983년 쿠르드 민주당, 민족민주전선과 단일화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지금까지도 위협적인 이란의 반정부세력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창설자인 바니 사드르는 1984년 라자비가 이라크와 협조하자 탈퇴했다.

신정의 강화

바니 사드르의 뒤를 이어 틀:날짜/출력 이슬람 사회의 연합 출신인 알리 라자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자신을 대통령 보단 교사라고 주변에 소개하는 등 겸손한 성품으로 존경을 받았지만 틀:날짜/출력 바호나르 수상과 함께 폭발물 테러로 폭사당했다. 여당 총재와 대통령까지 암살로 죽어나갈 정도로 이란의 혼란은 대단했는데 이에 호메이니는 이란이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국가임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10월 2일 신임 대통령에 알리 호세이니 하메네이가 당선되었다. 첫 성직자 대통령이었다. 원래 호메이니는 국가 원수에 성직자를 앉히는 것에는 반대였지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성직자에게 더 많은 권력을 몰아주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후 2005년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까지 24년간 이란에는 성직자 대통령들이 군림했다.

이란-콘트라 사건

1985년 6월 라프산자니가 중국과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방문에서 그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만나 레바논 헤즈볼라에 억류된 미국인 인질 석방을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런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미국과 이란 사이에서 새로운 움직임의 물꼬가 트였다. 그간 미국과 이란의 무역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급전이 필요했던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여 그 대금으로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중계자 역할까지 맡았다. 이에 1985년 9월1986년 2월에 걸쳐 미국은 이란에 무기를 판매했다. 1986년 5월 로버트 맥팔레인 국가안보보좌관이 테헤란을 방문했다. 이에 강경파들이 반발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 단락에서 언급할 호세인 몬타제리의 사위인 메흐디 하쉐미였다. 하쉐미는 혁명수비대의 대표로 서방 세계와의 관계 진전에 반발했다. 하쉐미와 그의 측근 40명은 틀:날짜/출력 반역죄, 파괴행위, 정치적 살해 행위 혐의로 기소되었고 틀:날짜/출력에 처형당했다. 하지만 이들이 진짜 죽은 이유는 이들이 미국과의 무기 거래를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후계 문제

원래 호메이니의 후계자로는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가 1985년 11월 전문가회의에서 선출된 상태였다. 몬타제리는 1922년 이스파한에서 태어난 성직자로 호메이니 추방 이후 팔라비 타도에 앞장섰고 전문가회의 의장을 지내고 호메이니와 나란히 사진이 걸릴 정도로 자타공인의 2인자였으며 호메이니가 삶의 열매라 부를 정도의 최측근이었다. 그런데 그는 외부 문제에 대해서는 반미, 반제국주의, 혁명 수출을 주장하는 강경파였지만 자국 내부의 반대파들 처분을 비롯한 내부적 안건에 대해서는 유화적이었다. 이에 이슬람 강경파들은 그의 태도에 대해 반발했다. 1987년 11월 몬타제리는 호메이니의 정당 해산에 반대하면서 다당제를 주장했다. 호메이니는 그의 주장에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때 몬타제리 입장에서 영 좋지 못한 일이 발생하니 무자헤딘 헐크가 이라크 군대와 합세해 진군한 것이다. 이들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야당을 남겨좋자는 몬타제리의 주장의 입지는 협소해졌다. 호메이니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비판한 몬타제리에게 순교자들의 친척과 헌신자들에게 공개적 사과를 할 것을 요구하며 이슬람 혁명 이후 망명한 이란인들의 귀환을 허락했다. 1988년 이란 정부는 체포한 무자헤딘 조직원과 정치범들을 대량 처형했다. 몬타제리는 이를 비판하며 호메이니에게 우리가 약속한 것과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것에 큰 거리가 있다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들이 만든 슬로건을 부정하고 원칙을 잊도록 강요당하는 시점에 이르렀다며 비판했다. 그는 혁명 10주년 기념식에서 지금껏 한 일이 크나큰 실수였다고 비판하며 언론, 정당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호메이니는 몬타제리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틀:날짜/출력 하메네이를 후계자로 바꾸었다. 이후 몬타제리는 연금 상태에 놓여 있다가 1997년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 당선 이후에야 다시 정치적 행보를 밟고 있다.

악마의 시 사건

틀:날짜/출력 인도계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소설인 악마의 시를 발표했다. 이슬람 세계는 이 소설이 이슬람을 모독했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분노한 무슬림들은 엉뚱한 미국 대사관을 습격하면서(?!) 분풀이를 했다. 파키스탄과 인도의 카슈미르에선 폭동이 일어났다. 호메이니는 처음엔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으나 1988년 8월 악마의 시를 읽고는 격노했지만 미치광이들을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의 분노가 들끓는 것을 본 그는 이슬람 세계 통합에 루시디의 죽음이 유용할 것이라 판단했고 틀:날짜/출력 호메이니는 파트와를 선포했다.

"전지전능한 신의 이름으로, 우리는 신 안에 있으며 신께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이슬람, 예언자, 그리고 쿠란에 반대하는 악마의 시 작가와 출판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나는 모든 열정적인 무슬림들에게 그들을 신속하게 찾아서 집행할 것을 요구한다. 어느 누구도 이슬람의 존엄성을 모욕할 수 없다. 신의 의지에 따라서 이 길에서 죽는 자는 순교자로 간주될 것이다. 루홀라 호메이니."

2월 15일은 애도의 국경일로 선포되었다. 오랜만에 시위대들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을 주요 타겟으로 삼아 시위를 벌이며 영국 대사관에 돌팔매를 했다. 2월 16일 하메네이 대통령은 루시디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악마의 시와의 관계를 부정한다면 용서해줄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에 루시디는 2월 18일 이란 외무성에 무슬림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끼쳐서 유감스러우며 수많은 신앙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번 경험으로 다른 감수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의 미흡한 의사 표명에 노한 호메이니는 어떤 사죄도 그의 사형을 철회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이란의 종교단체 15 호르다드 재단은 살만 루시디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1991년 7월 이탈리아어로 악마의 시를 번역한 에토레 카르리올로가 습격당했으며 일본어로 번역한 이가라시 히토가 살해당했다. 1993년 7월 터키로 번역한 아지즈 네신은 투숙한 호텔이 불살라지는 봉변을 당해 부상당했다. 틀:날짜/출력 하타미 대통령은 53차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루시디 사건은 끝났다고 발표했으며 9월 24일 카말 하라지 이란 외무자오간이 루시디 현상금에 대한 이란 정부의 지지를 철회함을 발표했다. 하지만 내린 당사자만이 철회할 수 있는 파트와 자체는 아직도 철회되지 않았으며 틀:날짜/출력 루시디가 기사 작위를 수여받자 이슬람 세계는 크게 분노했다.

사망

틀:날짜/출력 오후 1시, 호메이니가 죽어감에 따라 호메이니의 가족들이 임종을 지키기 위해 병원으로 모였다. 이미 6월 2일에 자신이 곧 신을 만날 것이니 이젠 자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 아흐마드와 딸 자흐라의 시중을 받아 최후의 기도를 올린 호메이니는 침상 위에 누웠고 오후 3시 경 의식을 잃고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호메이니의 위독 소식이 알려지자 온 이란이 술렁였다. 방송은 이맘을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했다. 호메이니가 죽어가는 옆방에서 라프산자니를 비롯한 20여명의 정치 지도자들이 호메이니 사후의 이란의 구도에 대해서 논의했다. 오후 10시 호메이니는 세 번째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10시 20분에 사망했다.

6월 3일 오전 5시 30분 라디오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쿠란을 암송하였다. 7시에 이르러 아나운서는 기나긴 포악의 밤이 끝났고 신의 높은 정신이 천국으로 갔다고 발표했다. 하메네이 대통령, 라프산자니 총사령관 대리, 아르다빌리 사법부 수장, 무사비 수상이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며 40일간의 애도기간과 호메이니의 사망일을 5대 국경일로 선포했다. 9시 알리 메쉬키니 의장이 호메이니의 유언장을 뜯었고 하메네이가 낭독했다. 호메이니의 유언장은 1982년에 작성되어 1987년에 수정된 것으로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6월 5일 호메이니의 시신이 테헤란 북부의 황야로 옮겨졌다. 엄청난 숫자의 조문객이 몰려든 탓에 8명이 죽고 400명이 다쳤다. 호메이니의 정책과 독재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이란 사람들에게 호메이니는 성인이었고 어쨌거나 존경을 받은 종교 지도자였다. 그의 죽음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견을 잠시 잊는 계기가 되었다. 무더운 날씨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혁명수비대원들이 호스로 물을 뿌려야 했다. 6월 6일 골파가니예의 주도로 추모식이 열렸고 영구식에선 흥분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호메이니를 싼 천을 찢었다. 호메이니는 베헤쉬테 자흐라에 묻혔다.

평가

상당히 갈리는 편이지만 최소 외교 부문에서는 역사적으로 막장이었다고 할만하다. 인권 부문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팔라비 왕정의 독재를 타도하고 권좌에 오른 그지만 그도 팔라비보다 더한 탄압을 했다. 페르세폴리스에선 팔라비가 수천명 단위의 사람들을 고문하고 투옥했다면 호메이니는 수십만 단위의 사람들을 고문하고 투옥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편협한 정세관과 종교 근본주의 때문에 문제는 많아도 미국을 등에 업고 중동의 맹주였던 이란의 위상은 호메이니 이후 예전만 같지 못하다. 이란-이라크 전쟁 와중의 너무 완고한 주전론은 결국 말년에 호메이니의 측근들까지 들고 일어나는 통에 호메이니의 입지를 크게 축소시켰다.

이집트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호메이니를 대놓고 정신병자같은 인간(lunatic)이라고 불렀다.

외교

혁명 초기를 말하자면 개막장 중의 개막장.

이란에 막대한 이익을 주고 있던 기존 동맹국인 미국을 편협한 정세관과 종교적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내쫓질 않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혁명국가로 인정하고 러브콜을 보낸 소련을 이교도 국가라고 역시 내쫓질 않나 혁명 수출론 운운하면서 주변 아랍국을 죄다 적으로 돌리고 팔라비 왕정 시절에 우호국으로 만든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도 이 시기에 이란과의 관계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동구도 서구도 싫다는 비동비서의 정책, 우리 아니면 다 적이라는 고압적 태도가 초래한 엄청난 외교적 고립이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의 전례없는 다굴로 돌아오자 이란은 뒤늦게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치른 대가는 꽤 뼈저렸다.

사상

여담

1979년 이탈리아의 거물 여기자인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일화가 유명한데 혁명 직후 호메이니가 기거하던 콤 시를 방문한 뉴요커 지의 기자인 오리아나 팔라치는 쿠르드 족 처우 문제, 전 정권 관료들에 대한 학살 문제에 대해 질의했다. 이어 호메이니 정권 하의 열악한 여성 인권 문제에 이르자 팔라치는 여성들에게 아바야를 강요하는 일에 대해 캐물었는데 호메이니는 "싫다면 착용하지 마시오. 차도르는 어디까지나 아름답고 정숙한 무슬림 처녀들을 위한 거니까요."라고 대답하여 팔라치를 비꼬았고 이에 격노한 팔라치가 호메이니의 면전에서 아바야를 벗어던져 찢은 다음에 짓밟고 어떠시냐고 빈정댔다. 이걸 보고 호메이니도 열받아 팔라치를 내쫓고 이틀만에 인터뷰를 허가했다. 호메이니의 아들 아흐메드는 팔라치에게 아버지가 굉장히 화났으나 차도르의 차자도 꺼내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팔라치는 바로 차도르 문제를 캐물었다. 처음엔 어이가 없어 멍때리던 호메이니는 씩 웃다가 폭소하고 말았다. 그걸 본 아흐메드는 내 평생 아버지가 웃는 걸 처음 봤다고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팔라치는 호메이니를 제2의 로베스피에르, 제2의 레닌으로 폄하했고 사람들이 그를 새 예언자, 아니 새로운 신으로 본다며 비웃었다,

참고문헌

  •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유달승, 한겨레출판, 2009년. 이 항목의 대부분의 출처가 이 책에서 나왔다.
  • <페르세폴리스> 1,2권, 마르잔 사트라피, 새만화책,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