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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커다란 오판이었다!''' === 제3제국과 독재자의 탄생 === 총리 취임 직후 일어난 [[제국의사당 방화]]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히틀러는 1933년 3월 총선거(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선거)에서 40%대 득표율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후 이를 바탕으로 다른 정당들을 모두 강제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 입법 권한을 독점하였다.<ref> 주요 정당들의 해산 경과를 요약하자면, [[독일 공산당]]은 제국의사당 방화사건으로 탄압받은 후 무너졌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조 조직이 나치의 탄압으로 와해, 어용단일노동단체에 흡수된 후 세를 잃고 지도부가 프라하로 망명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사회민주당과 연대한 [[독일 민주당]]도 동시에 해산되었고, 나치의 연정에 참여한 독일 국가인민당은 당수 후겐베르크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 나치에 흡수되었다. 카톨릭계 정당인 [[바이에른 인민당]]과 [[카톨릭 중앙당]]은 나치로부터 종교적 영역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해산했다. - 이안 커쇼, 히틀러 1, 1889~1936. 664p~669p</ref> 이후 [[장검의 밤]]으로 룀을 비롯한 돌격대와 슐라이허와 같은 정적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합친 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히틀러는 1933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동방문제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킨 후 1935년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를 선언하고 [[영국-독일 해군 조약]]으로 이를 공인받았다. 1936년엔 전격적으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감행하고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였다. 1938년 3월엔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간 국가를 통합(사실상 흡수)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협박, 주테텐란드를 빼앗았다.([[뮌헨 협정]]) 그리고 1939년 3월 뮌헨 협정을 파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멸망시키며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으로 편입시키고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들었으며 [[리투아니아]]로부터 메멜 지방을 할양받았다. 히틀러는 일련의 거듭된 침략 행위에도 서방국가([[영국]]과 [[프랑스]])가 침묵하고 개입하지 않는 것에 자신감을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폴란드에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갈라놓은 단치히 회랑의 양도를 요구했으나 폴란드는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이에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의 개입을 차단하였고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을거라 판단, 1939년 9월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 끝없는 침략전쟁과 비참한 종말 === {{인용문|1918년 11월은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ref>1918년 11월이란 독일이 1차대전에서 항복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다시는 패전, 항복하는 굴욕의 역사가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다.<del>결국 망상임이 드러난다.</del></ref>|[[1939년]] [[9월 1일]], 아돌프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중}} 폴란드 침공 직후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받아든 히틀러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입조차 열지 못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그만큼 영국, 프랑스의 개입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오판했던 것. 그런 오판 속에서도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이 공세에 나서지 않는 틈을 타 1달만에 전광석화처럼 폴란드를 정복하였다. 뒤이어 1940년 4월 [[덴마크]]를 협박, 군대 주둔권을 얻어낸 후 [[노르웨이]]까지 침공하였으며, 5월에는 황색 작전을 발동, [[베네룩스 3국]]에 의해 서부전선의 대국 [[프랑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뒤이은 영국 침공 계획이 [[영국 본토 항공전]]의 패배로 실패로 돌아갔고, 1941년 6월, 자신의 독단으로 [[소련]]을 기습 침공하여 [[독소전쟁]]을 일으켰다. 한때는 모스크바를 위협하였으나 끝내 함락에는 실패했고, 히틀러 본인의 아집으로 계속된 전략적 오판을 통한 패배를 자초하였다. 뒤이어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단행하자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등 전쟁의 규모를 계속해서 벌려 나갔다.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히틀러의 불안감과 신경쇠약, 편집증은 심해져만 갔으며 194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패망의 길을 걷게 되자 점점 비현실적인 신무기에 집착하고 과대망상에 빠졌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후퇴와 항복이란 단어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으며,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과 같은 지휘관들을 같은 이유로 기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암살미수 사건으로 더욱 심해졌다. 파리 주둔군 사령관 콜티츠에게 '''도시를 초토화시켜라!'''는 명령을 내리다 역설적으로 콜티츠의 항복을 불러일으켰고, 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라는 무리수로 패배를 앞당겼다. [[베를린 전투]]에서도 존재하지도 않는 슈타이너 집단군이 소련군을 물리쳐 줄 것이라 믿다가 [[그런 거 없다]]는 측근들의 말에 엄청나게 격분하며 절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최후의 순간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베를린의 지하벙커 늑대굴에 남았다. 그는 전쟁을 시작하며 다시는 독일 역사에 항복이라는 치욕스러운 단어가 나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그 말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충실히 따라준 [[에바 브라운]]과 간략하게 결혼식을 치른 후 유언장에 [[카를 되니츠]]를 대통령으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총리로 지명한 후 끝까지 싸우라는 지시를 내린 후 권총 자살했다. 그의 시신은 독일군이 즉시 화장하려 했으나 베를린 전투의 급박한 상황에 화장을 위한 충분한 연료가 없어 실패했고, 결국 늑대굴을 점령한 소련군이 그의 시신을 접수하여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으로 지명한 되니츠는 철저항전이라는 히틀러의 유언을 무시하고 항복하여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끝낸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