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홍균 (18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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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균 (1881년).jpg

申洪均. 이명은 신홀(申屹, 申迄, 申吃), 신굴(申矻), 신포(申砲).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1년 음력 8월 20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동상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한의업을 가업으로 삼았으며, 그 역시 한의사로 성장했다. 1911년경 30세의 나이에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 봉천성 장백현 17도구 왕가동 삼포로 이주했다. 신현표의 <월남유서>에 따르면, 신홍균은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던 20여 두락의 토지를 전부 장손에게 맡기고 떠났다고 한다. 이후 왕가동에서 한의업으로 먹고 살던 1916년 여름 어느 날, 원종교 교주 김중건이 자신의 부하 6~7명을 데리고 왕가동에 찾아왔다. 당시 김중건은 '독시주의(獨是主義)'를 내세우며 인재 규합, 항일운동단체 조직, 투사 양성 등에 힘을 쏟고 있었다. 신홍균은 그에게 감화되어 이름을 신흘(申屹)로 개명하고 원종교 활동에 힘썼다. 각지에 설치된 원종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함경남도 삼수군 강진면 두지리의 일본 주재소에서는 원종교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헌병암살대를 파견해 와가동 일대를 습격하곤 했다. 1919년 가을 일본 헌병대가 왕가동을 습격했으나 신홍균을 잡지 못하자, 그 동생인 신동균을 무참히 살해하고 압록강에 수장시켰다. 신홍균은 이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이전까지는 한의사라는 직업적 특성을 활용해 독립군과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고, 교통국과 같은 비밀 거점으로 본인의 한약방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직접 총을 잡고 무장투쟁을 하는 독립군이 되었다.

1920년 5월 김중건이 안도현 향도자에서 200여 명의 청년을 모아 무장투쟁개열 독립군 대진단(大辰團)을 결성했을 때, 그 역시 참여하였다. 1920년 10월 일본군이 간도 참변을 단행하여 북간도 지역 63개 한인 마을의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2500여 호를 방화했다. 이때 원종 총사 집무실이 불타고 대진단 본부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지만, 장백현 16도구에 위치한 장백현 지단만은 온전해 흥업단, 광복단, 태극단 등 인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 부대와 연합하여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1921년 1월 15일 장백현 대진단 사무소에서 대진단 지단과 흥업단, 광복단, 태극단 독립군단체와 연합해 무력 투쟁 결의대회를 열었다. 아휴1월 16일과 17일 함경남도 삼수군 강진면 두지리의 일본 주재소를 2차례 습격하여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김중건이 대한국민단 간도지방 지단장으로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정체가 탄노나면서, 총본사가 있던 원화동이 일본군의 급습을 받았다. 이로 인해 김중건을 비롯한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김중건은 만몽조약에 따라 용정총영사관에서 3년간 중국재류금지 명령을 받고 고향인 연동으로 축출되었다. 신홍균은 가까스로 검거를 모면하고 한인 마을에서 계속해서 학교를 서립했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원종교와 대진단의 이름으로 세워진 학교는 14개였다. 이후 국내에 있던 김중건의 지시에 따라 1925년 봄 원화동의 총본사를 화봉현 개척리로 옮겼다. 당시 일본과 손을 잡은 봉천군벌의 독립군 탄압이 심했지만, 원종 포교와 학교 설립은 나름의 맥을 이어가 한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공산주의가 만주 일대에 퍼지면서 원종 단체의 존립이 위태로워졌다. 특히 1926년 1월 용정에서 조직된 동만청년동맹은 원종 학생들에게 접근해 모스크바 유학을 시켜준다며 공산주의로 포섭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해 5월 결성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도 한인학교 내의 교원을 통해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는 등 세력 확장을 꾀했다. 결국 1927년경 원종교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신도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공산주의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1927년 초 두도구일본영사분관 경찰에 의해 개척리의 원종 총본사가 압수수색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김중건을 비롯한 이춘욱・김전・김철림・김일숙・김준・김두윤 등 신도 6명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그해 5월 김중건은 총영사관 재판소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검사가 불복하여 공소하는 바람에 서대문경찰서에 다시 수용되었고 1927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서야 방면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원종교와 대진단은 한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지역 내 한인 사회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이들은 당시 토착 도적세력들로부터 지역 마을 사람들을 지켜냈다. 당시 도움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이들의 업적을 기록한 자료들이 발견됐을 만큼 신홍균이 받았던 신임은 매우 두터웠다. 김중건은 신홍균 등이 다져놓은 기반을 토대로 1929년 봄 흑룡강성 연안현 와룡항 영산촌 팔도하자에 새로운 원종촌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는 60~70세대 300여 명의 촌민을 이끌고 반농반병(半農半兵)의 형식으로 항일운동과 ‘농촌주의 구체안’인 공작분유제(共作分有制)를 병행하는 이상촌의 꿈을 실천하려 했다. 이때 신홍균(申屹)은 이운(李雲)・김대용(金大用)・장제민(張濟民)・ 조운산(趙雲山)・최일우(崔一宇)・염형석(廉亨錫)・이평림(李平林)・이춘욱(李春郁)・조영섭(趙永燮) 등과 함께 대진단원이자 원종 교단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김중건은 일본군과 전면적인 무력투쟁의 시기로 파악하고 준비에 탁수했다. 그는 어복촌에 대일전투 총지휘부격인 진우회(震友會)를 창립하고 진우회 산하에 조선혁명지도처를 창설하고 독립운동 단체의 총궐기를 주장했다. 이후 중국 길림구국군의 왕덕림(王德林) 부대와 항일공동전선을 펼치고자 했다. 김중건은 길림구국군 부사령관 공헌영과 연합에 합의한 뒤에, 동녕현의 길림구국군 총사령부에 김대용(金大用) 등 4명을 파견하여 연합전선을 펼치도록 했다. 이들은 소련에서 만주로 넘어 온 강국모(姜國模) 부대와 손을 잡고 공동전선을 구축하였다. 1933년 1월, 이를 통해 편성된 원종 교도의 부대는 최후의 거점인 동녕현으로 일본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이에 맞서 길림구국군과 함께 격렬히 싸웠다. 그러나 전선이 붕괴되어 길림구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 만소 국경 밀림지대로 총퇴각해버렸다. 원종 부대는 노흑산 방면으로 퇴각하고 일부는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1933년 3월 초, 한국독립군의 지청천으로부터 연합하자는 제의가 들어오자, 김중건은 이를 수락하기로 하고 평소 비축했던 물자와 장병 제1진 신홍균)・안태진(安泰振) 등 50여 명을 보냈다. 그러나 1933년 3월 20일 이광이 이끄는 공산군 부대가 어복촌에 들이닥쳐 김중건과 간부 5명을 체포한 뒤 3월 24일 친일파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총살형에 처했다. 김중건이 살해된 후 어복촌은 불타버렸고 주민들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지청천이 이끌고 있던 한국독립군이 김중건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돌아갈 길이 없게 된 신홍균은 한국독립군과 행보를 같이 하게 되었다.

신홍균은 한국독립군의 일원으로서 사도하자, 동경성, 대전자령 전투에 참전했다. 이중에서 대전자령 전투에서 탁월한 공적을 세웠다. 당시 독립군은 일본군의 통과 예상지점인 대전자 서쪽 양편 계곡에 매복하였으나, 100km의 고된 행군을 거쳐 매복, 대기하고 있어서 지쳐 있었고, 비가 내려서 일본군의 출정이 지연되는 바람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독립군은 폭우와 굶주림을 견뎌내며 일본군이 통과하기를 끈질기게 기다렸으나, 참호 속에 빗물이 병사들의 허리춤까지 차올랐다. 준미한 건빵이 다 떨어져 가고 일본군은 나타나지 않자, 지청천과 조경한 등은 독립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참호를 돌며 격려했지만, 병사들은 좀처럼 의욕을 내지 못했다. 이때 군의관 신홍균이 숲속에 자생하는 검은 버섯을 대용식품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이것 좀 잡수시오. 가을 장마 끝에 숲속에 돋는 검정버섯인데 중국인들이 요리로 많이 애용하고 요가치풍(療飢治風: 굶주림과 기풍을 다스림)도 하지요. 이것 빗물에 씻어서 소금에 범벅했으니 잠시 요기는 되실 겁니다.

조경한은 즉시 각 부대에 명령하여 신홍균이 아려준 방법으로 요기하도록 했다고 한다. 조경한은 후에 이 일화를 매우 인상깊게 여기고 자신이 지은 산문 <대전자대첩>에서 신홍균의 활동을 담은 시를 기고했다.

大甸子大捷(대전자대첩)


據說汪淸大甸子 왕청현 대전자 깊은 골짜기에

飯塚狼群來徜徉 반총(일본군 부대명)의 이리떼(일본군) 지난다기에

酉年六月東京城 계유년(1933년) 6월 동경성에서 정병을 이끌고

預備往攻選銳剛 불원천리 달려갔네

峻嶺險林幾百里 높은 고개, 험한 숲 넘고 헤쳐 수 백리

征人勞苦斷肝腸 단장의 그 고초를 어찌 다 말을 하리요.

(중략)

赤鳥黃兎近三匝 해와 달 뜨고 지기 세 차례이건만

苦待天狼奚到遲 기다리는 이리떼는 아직도 보이지 않네

餱糧罄竭飢侵肚 바닥난 군량은 굶주림을 더하고,

䨟沛連綿冷逼肌 장맛비 차가움 뼈 속에 스며든다.

黑蓸採取和鹽食 검정버섯 따다가 소금 절여 먹어보니

非獨治風且療饑 요기도 되려니와 치풍도 된다누나

可愛奇方何處出 어여쁘다. 이 기방 누구에서 나왔느냐.

姓申名矻是軍醫 그는 바로 군의관 신굴(申矻, 신홍균의 가명)이다.

(하략)

- <군사> 창간호, 1980, 조경한, 「대전자대첩-항일무력투쟁의 한 단면사」

이후 일본군은 독립군이 기다린지 사흘 후에 대전자령을 통과하였고, 독립군은 이를 들이쳐서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과 노획품을 분배한 후 약 40일간 대전자에 주둔하면서 무장을 강화하고 훈련을 시행하는 등 부대를 재편성했다.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 사령관인 오의성 휘하의 시세영, 사충항 등의 부대, 중국공산당 계통의 훈춘, 왕청 유격대 한인부대와 연합해 1933년 9월 6일 중국-소련 국경지대의 동녕현성을 공격했다. 초기 한·중연합군은 적에게 큰 타격을 줬지만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여러 항일부대와 함께 대전자에 주둔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그 해 8월 초부터 길림구국군 사령관 오의성이 한국독립군에게 길림구국군에 합류할 것과 무기의 절반 이상을 넘기라는 요구를 몇 차례나 강요해온 것이다. 물론 지청천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참모장 주보중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한국독립군 병사들이 친일반공단체 민생단과 내통하고 있다며 음해를 서슴지 않았다. 오의성은 이를 빌미삼아 1933년 10월 13일 밤, 산하 부대를 동원해 330여명의 한국독립군을 강제 무장해제시키고 상당수의 장교와 사병들을 무고하게 구금했다. 지청천 역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신홍균은 다행히 구금되지 않아 남은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했다. 조경한은 선전대와 계몽강연을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시세영 등 길림구국군 간부들을 설득해 오의성을 찾아갔다. 조경한의 노력으로 한국독립군은 대다수 풀려났으나 지청천 만은 풀어주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려 했다. 지청천이 자신에게 보복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조경한과 다른 장교들은 지청천을 구출할 방책을 논의했다. 이때 신홍균이 불쑥 나서서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 사이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내 나이 50이 되도록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처자를 버리고 만주에 와서 돌아다니다가 김소래(김중건) 선생을 만나 지도를 받았는데 그분은 불행히 공산도배에게 학살됐다. 그분의 평일 유명에 의해 지청천 장군의 휘하에 들어와 장군을 유일한 지주로 앙모하고 섬겨 왔는데 또 장군을 잃게 됐으니 내 살아 무엇하랴? 이로써 목숨을 끊겠노라.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달걀만한 크기의 생 아편 덩어리[1]를 입에 넣더니 아작 아작 씹어 삼키고 곧 쓰러졌다. 주위 사람들은 급히 그를 구하려 들었고, 비눗물을 먹여 토하게 해서야 두 시간 만에 살아났다. 목숨을 건 그의 연설에 길림구국군 내부에서는 불명예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됐고 결국 지청천을 풀어주게 된다. 만약 신홍균이 아니었다면 지청천은 필시 사망했을 것이고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과 함께 한국 광복군을 설립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후 중국의용군과 결별한 한국독립군은 간부 회의를 열고 소규모 유격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한 뒤 둔전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1932년 3월 만주국이 성립한 후 일본군의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이라서 이 역시 여의치 않았다. 이때 중국 관내에 있던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 등은 1932년 4월 29일 매헌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의거(虹口公園事件) 이후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지원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인 청년들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시켰고, 지청천을 교관 겸 책임자로 지정했다. 이 소식은 이규보, 오광선 등을 통해 1933년 10월 초 한국독립군에 전달되었다. 이에 한국독립당 당수 홍진, 총사령 지청천, 조경한, 오광선, 고운기, 김창환 등 한국독립군 주요 간부들과 병사 가운데 선발된 군관학교 입학지원자 40여 명은 난징으로 향했다.

반면 신홍균은 최악(崔岳)・최만취(崔晩翠) 등과 함께 나머지 병사들을 인솔하여 영안・목릉・밀산 등지의 삼림지대로 이동하여 후일을 기약하였다. 이 사실은 충칭 신문기자 갈적봉이 1934년 5월에 작성한 '조선혁명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북의 한국독립군은 신흘, 최악, 최만취 등이 인솔해 영안, 목릉, 밀산 등의 산림지대로 이동해 항일 운동을 계속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2020년 8월 중국 목단강 인근에 봉문만 남아있던 그의 묘가 발견되었다.[2]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신홍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정상규, <신홍균 한의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의사학회지[1]
  • 독립군 군의관이 된 한의사, 신홍균 선생의 독립투쟁일지

각주

  1. 신홍균은 군의관으로서 아편을 독립군 부상자들 진통제로 사용했기에 아편을 항시 소지하고 있었다. 당시 한의사들은 양비귀를 앵속각이라고 해서 모르핀같은 진통제 처방으로 썼다.
  2. 대전자령전투 지청천 장군을 구해낸 그의 일갈 - 한문화타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