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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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翼熙. 자는 여구(如耉), 호는 해공(海公).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인.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유수부 초월면 서하리(현재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길)에서 구한말 판서를 지낸 신단(申檀)과 그의 넷째 부인인 동래 정씨 정경랑(鄭敬娘) 사이의 여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풍양 조씨, 전주 이씨 적모가 있었고, 동복 형제는 2명이 있었다.

5살 때부터 백형(伯兄) 신규희(申揆熙)에게 한학을 수학했다. 그의 집안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 정신을 강조하는 양명학을 추구하는 강화학파였다. 고조부인 완구(宛丘) 신대우(申大羽. 1735~1809)는 대표적인 조선의 양명학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의 손녀사위로, 강화 하곡리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정제두의 양명학을 익혔다. 신대우의 막내 아들이자 신익희의 증조부인 실재(實齋) 신현(申絢. 1764~1827)은 광주유수부 초월면 서하리로 이주하여 신시 문중을 열었고, 양명학을 가학으로 전수했다.

1908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유학을 떠났고, 세이소쿠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1912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버는 한편 송진우, 문일평, 안재홍과 의기투합하여 유학생의 통일조직으로 '조선유학생학우회'를 결성하고 총무, 평의회 의장,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의 편집 겸 발행인 등을 맡아 유학생 및 국내 청년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려 노력했다.

1913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귀국한 신익희는 두형 신규희(申揆熙)·신필희(申弼熙) 등과 함께 생가에 광동학당(廣東講塾)을 설립하여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인근 동리에서 80여 명의 학동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때 관립학교의 교과서를 사용하면서도 조선 총독부가 금서로 정한 <유년필독(幼年必讀)>을 별도로 가르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1917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 중동학교에서 잠시 교사를 맡았으며, 1918년 보성법률상업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의 교수로 부임해 비교헌법, 국제공법, 재정학 등을 가르쳤다. 1918년 6월 국내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알려지자, 신익희는 최린, 임규, 송진우, 최남선, 정노식(鄭魯湜) 등과 함께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하고 그해 11월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연락하고 상의하는 임무를 맡아 해외로 떠났다.

그는 우선 만주, 연해주의 독립군 지도자들을 만난 뒤 1919년 1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조선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별다른 소식이 없자 2월 중순 상하이를 떠나 천진, 베이징, 만주를 거쳐 귀국했다. 국내에 들어온 뒤 평양을 지나면서 3.1 운동 소식을 접한 그는 곧 서울에서의 대규모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그는 제자 강기덕,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하여 3월 5일 남대문역 앞 만세시위 계획을 지원했다.

이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3월 14일 농사꾼 차림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중국으로 망명했다. 3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현순 등과 만나서 국내 인사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전한 뒤 국외 모든 인사들을 망라하여 정부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몇 차례 기호출신 중심의 인사들이 신익희의 주선으로 모임을 가졌고, 4월 10일 밤 10시 프랑스조계 김신부로 60번지에서 신익희를 비롯한 29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 조직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각지에서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4월 11일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이때 신익희는 경기도 선출의원으로서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여 이시영, 이광수, 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헌장 기초 심사위원을 맡았다. 또한 손정도, 조소앙, 이광수와 함께 임시의정원법도 기초했다.

이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된 뒤, 신익희는 초대 내무차장을 맡았으며 차장제 폐지 이후에는 윤현진, 김구 등과 함께 내무부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때 내무총장 안창호를 도와 국내 통치를 위한 행정조직망으로 연통제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본명은 염응택)이 남경중앙군관학교에서 교관들을 폭행하려는 폭동에 가담했다가 쫓기자 그를 숨겨주었던 것이 백의사와의 인연이 되었다.

이후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하여 통합운동을 전개할 때, 신익희는 법무차장으로서 통합 임시정부의 헌법 초안을 마련했다. 그가 주도한 헌법 초안은 임시의정원의 심의를 거쳐 9월 6일 통과되었고, 통합 임시정부 성립은 9월 11일에 공포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상하이로 오지 않으면서 파행이 거듭되자, 신익희는 1920년 3월 윤현진, 계봉우, 윤기섭 등 16명의 의원과 함께 '대통령내재촉구안(大統領來到促求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통과시킴으로서 이승만의 상하이 부임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1920년 12월 5일 상하이에 도착했지만, 이승만과 심한 갈등을 빛은 국무총리 이동휘가 1921년 1월 26일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의 여파로 사퇴하고, 안창호도 사퇴 의사를 표명하는 등 파행은 거듭되었다. 이에 이승만 또한 사직의 뜻을 밝히고 1921년 3월 상하이를 떠나 쑤저우, 항저우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신익희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장붕과 함께 이승만을 따라가 설득했고, 이승만은 상하이로 돌아와 사직을 번복하고 정부 조직을 재정비했다. 이때 신익희는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어 이승만을 보좌했으며, 1921년 4월 한중상호조합(韓中互助社)을 결성해 중국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5월 29일 상하이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신익희는 이 일로 이승만에게 크게 실망했다.

1921년 3월 11일, 윤기섭, 양기하, 손정도, 연병호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소집 건의안을 제출했고, 건의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운동을 일으켰다. 결국 1922년 6월 17일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통과시켰지만, 이승만이 헌법상의 근거가 없다며 사퇴를 거부했기 때문에 퇴진시키지 못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대내외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데 동의했다. 이에 따라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신익희는 모친과 부인이 자식들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망명해서 그들을 보살피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기 때문에,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해 6월 국민대표회의가 파행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시안으로 가서 산시성 독군(督軍) 후징이(胡景翼)를 찾아갔다. 후징이는 신익희가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 친교를 맺은 인물로, 신익희는 그 막하의 고문이 되었다.

신익희는 후징이의 지원을 받으며 한중 양국의 청년들을 모집해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그는 유격부대인 분용대(奮勇隊)를 편성하고, 북만주에서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성주식(成周寔)을 초빙해 분용대 연성대장의 직임을 수여하고 대원들을 훈련시키게 했다. 그는 장차 분용대를 이끌고 국내로 진공하여 일본군과 결전을 치르려 했다.

그러나 1924년 가을 후원자인 후징이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이에 그는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진행 중이던 장제스와 난창에서 만나 분용대의 병력과 훈련 상황을 설명하고, 한국-만주 국경에서의 일본군 토벌작전을 건의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북벌을 통한 국민혁명에 주력했지, 일본과 마찰을 빛고 싶지 않아서 그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신익희는 1927년부터 난징 국민당정부의 감사원장인 위유런의 배려로 심계원에 근무했다.

1932년 1월, 신익희는 윤기섭, 성주식, 김홍일 등과 함께 난징에서 한국혁명당을 창당하고 산하 단체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했다. 또한 '우리의 길'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한인 동포들에게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1932년 11월에는 한국독립당, 의열단, 한국광복동지회 대표들과 협의하여 민족협동전선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했다.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은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대일 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 직접 군사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설정하여 대일 항전의 구심체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신익희는 이 동맹에서 최동오, 김두봉, 김규식, 박건웅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동맹은 가맹단체간의 연락 협의기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했을 뿐, 통제 및 결속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33년 말 민족대당 형성을 위해 자신이 조직한 한국혁명당을 만주사변 후 만주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합쳐 신한독립당을 창당했다. 이후 1935년 7월 난징 금릉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에 따라 신한독립단,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등 5당을 통합시켜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신익희는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군사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민족혁명당 군사부에 편입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 졸업생들의 교양 훈련을 맡아 '국내외 정세'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신익희에게 가르침을 받은 청년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당군인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되었다가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 광복군에 편입된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에서 의열단 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그는 조소앙 등과 함께 탈당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신익희는 좌파 독립운동 정당 중심의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에 참여했다. 이후 중국 각지를 순방하면서 대일 항전을 독려하다가 1938년 9월 한커우에서 조직된 조선청년전위동맹에 가담했다. 전위동맹은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신익희, 최창식, 김학무 등 당원 11명과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의 한인 특별훈련반 졸업생 35명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무장투쟁 단체였다.

그는 전위동맹원들을 이끌고 1938년 10월 10일에 창설된 조선의용대에 참여했으며, 전위동맹 대표로서 1939년 8월 치장에서 열린 '7당 통일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주석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통합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도중에 단일당 방식을 주장하는 측과 연맹 방식을 주장하는 측이 대립했다. 신익희는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 김성숙과 함께 연맹 방식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성숙과 함께 7당통일회의를 탈퇴했다.

회의 결렬 후, 신익희는 조선의용대에 참여한 전위동맹원들이 모여있는 낙양으로 가서 그들을 지도했다. 그러다가 1941년 3월에서 5월에 걸쳐 전위동맹원들이 속한 조선의용대 제2지대가 낙양에서 황하를 건너 화북 중국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는 동참하지 않고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향했다.

그가 동료들과 함게 화북으로 가지 않고 충칭으로 간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한시준 교수의 저서 <독립운동 정당과 해공 신익희>에 따르면, 신익희는 화북 진출에 반대하던 사위 김재호가 전위동맹원들에게 감금되어 린치를 당했기 때문에 그들과 동행하길 거부했다고 한다. 신익희의 딸인 신정환의 회고 '해공 그리고 아버지'에 따르면, 신익희는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전위동맹원들이 연안 행을 결정해버린 것과, 사위 김재호가 연안행을 반대했다가 집단 폭행을 당한 것에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를 품고 전위동맹과 결별했다고 한다.

충칭에 도착한 신익희는 1941년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하고 상무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1942년 8월 4일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장 조소앙의 권유를 받아들여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20년 만에 임시정부에 돌아왔다. 또한 1943년 3월 4일 외무부 차장을 겸임했으며, 4월 10일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4월 20일 제36차 임시의정원 임시회의에서 임시약헌을 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통과되었다. 주석에는 김구, 부주석에는 김규식이 선출되었고, 국무위원으로는 이시영을 비롯한 14명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행정 각 부의 부장으로는 외무부장 조소앙, 군무부장 김원봉, 재무부장 조완구, 법무부장 최동오, 선전부장 엄항섭, 문화부장 최석순, 그리고 내무부장으로 신익희가 임명되었다. 신익희는 내무부장으로서 충칭에 거주하는 임정 요인의 가족을 비롯한 600여 명의 한인 동포들을 보호,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8.15 광복 후, 신익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환국을 서둘렀다. 하지만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환국하는 방법이나 교통편을 마련해야 했고,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교섭해야 했다.

귀국 노선은 충칭에서 상하이로, 상하이에서 국내로 이동하기로 결정되었다. 교통편은 충칭에서 상하이까지는 중국측이, 상하이에서 국내로는 미국 측이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국민당의 주선으로 신익희을 비롯한 임정 요인 29명이 1945년 11월 5일 비행기 편으로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임정 요인들의 귀국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임정 요인들의 자격이 문제가 되었다. 임정 요인들은 정부자격을 요구하였지만, 미국측은 개인자격으로 귀국만을 고집하였다. 결국 임정 요인들은 미국측의 요구대로 11월 19일 중국전구 미군사령관인 위드마이어 장군에게 ‘개인자격의 귀국’이라는 서약서를 제출하고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측에서 제공하는 비행기의 탑승인원이 15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임정요인들은 1, 2진으로 나누어 들어가기로 했지만, 이제는 귀국의 선후 문제로 논란이 발생했다. 이때 조소앙은 실무진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했고, 신익희도 적극 찬동하였다. 실무진이 먼저 들어가 국내의 정세를 파악하여 귀국 기반을 마련한 뒤, 주석을 비롯한 정부와 임시의정원 대표들을 위엄 있게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소앙과 신익희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

결국 임정요인들은 주석과 부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제1진이 먼저 귀국하고, 나머지 의정원 의장과 행정 각 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제2진이 뒤에 귀국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제1진은 11월 23일 귀국하였고, 제2진은 12월 1일 귀국하였다. 신익희는 제2진으로 12월 1일 귀국하였는데, 폭설로 김포비행장에 착륙하지 못하고 옥구비행장을 거쳐 상경하였기 때문에 12월 2일에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환국 직후, 임정은 정통성을 지닌 정부로서의 권위와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신익희는 12월 2일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임정의 하부조직으로 정치공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때 임시정부 특파사무국 요원들이 신익희를 찾아갔다. 특파사무국은 해방 직전 임시정부의 국내공작원으로 파견된 백창섭(白昌燮)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 하순 조중서(曺仲瑞), 김제선(金濟璿), 심창섭(沈昌燮) 등이 임정의 환국에 대비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하지만 이들은 11월 23일 환국한 김구 주석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해 해체 위기에 몰려 있었다.

특파사무국 요원들은 신익희에게 자신들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신익희는 그들을 자신의 수하로 끌여들이기로 했다. 12월 6일, 임정 내무부 산하에 정치공작대가 조직되었고 특파사무국 요원들이 대거 가담했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시기 행정관료였던 사람들 중 건국 일선에서 행정을 담당할 이들을 선발하여 행정연구위원회를 만들어 시정(施政) 자료 수집과 연구를 담당하도록 했다.

정치공작대는 조직되자마자 각급 단위의 조직을 구성했다. 그는 정치공작대의 조직 방식을 과거 임시정부가 추진했으나 실패로 돌아간 '연통제' 방식으로 정했다. 즉,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서 임정 내무부 산하에 중앙본부, 도 조직, 군(부) 조직, 면 연락부, 리,동 연락반으로 하는 계선조직을 구축한 것이다. 12월 6일 중앙조직을 결성한 후 보름 만에 남북한 전역에 걸친 군단위 조직이 짜여 졌고, 이어 한 달여 정도에 면 단위 조직이 대체적으로 이루어졌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성회의 결정안이 공식발표되었다. 이 결정안에는 열강이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게다가 '임시적인 코리아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즉시 신탁통치에 대한 절대 거부 의사를 표명하고, 각 정당 대표와 종교, 언론 관계자를 모아 반탁운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선포했다. 이리하여 12월 28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어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12월 29일 모임에서 임정의 즉각적인 주권행사를 건의하였고, 김구는 내무부장 신익희에게 이를 따르게 했다. 이에 신익희는 12월 30일 내무부 예하의 행정연구위원회로 하여금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전국 군정청에 소속된 한인 직원을 임시정부 산하에 두는 내용을 담은 임정 포고문을 작성하고 12월 31일 자신의 명의로 <국자(國字)> 제1호와 제2호를 발표했다.

국자 제1호


1.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및 한인 직원을 전부 본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케 함.

2. 탁치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할 것.

3. 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함

4. 국민의 최저 생활에 필요한 식량·연료·수도·전기·교통·금융·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지함.

국자 제2호


此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 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미군정은 국자 제1호와 국자 제2호를 임시정부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쿠데타로 받아들였고, 임정 요인들을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북한의 소련군정은 1946년 4월 7일 '남조선 정세 보고서'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1]

망명정부는 인민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이 과거에 신탁통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것이 거부될 경우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현실화될 것이다. 그들은 혼란을 이용하여 좌익들에게 테러행위를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망명정부의 장관들인 엄항섭과 신익희가 이를 준비하고 있다. 엄항섭은 서울에서, 신익희는 지방에서 테러행위를 조직하고 있다. 신익희의 지도 하에 있는 “정치행동단”이 이러한 테러행위를 실행에 옮길 것이다.

이러한 임정과 미군정의 갈등은 1946년 1월 1일 김구와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이 만나면서 가까스로 수습되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미군정은 임정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받았다. 신익희 역시 미군정에 구금되어 심문받아야 했다. 미군정은 국제 1, 2호 발표 직후 정치공작대 본부인 낙산장을 수색하여 관련 서류를 모두 압수했고, 1946년 1월 3일 신익희를 CIC 본부로 연행하여 이틀 동안 심문했다. 그후 하지는 또다시 이런 짓을 저지른다면 그를 사살하겠다고 위협한 뒤 풀어줬다.

이 일이 있은 후, 신익희의 임시정부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신창현의 <해공 신익희>에 따르면, 누군가가 김구에게 "이제 천하는 신익희의 천하이지 백범 주석의 천하라는 말은 벌써 예전"이라며 이간질했다고 한다. 미군정 역시 김구를 비롯한 임정에 정치공작대의 해체를 요구했다. 이에 김구는 1946년 4월 28일~29일 정치공작대와 정치위원회의 임시대표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전국적인 국민운동이 필요하다는 결정에 따라 정치공작대와 정치위원회는 해체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합류하도록 하였다. 이후 신익희는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한편, 신익희는 좌파 세력이 반탁운동을 함께 하다가 찬탁으로 급선회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불신했다. 그는 백의사에 적극 참여해 좌익 세력에 대한 백색테러를 지휘했다. 심지어 김일성을 죽이기 위해 백의사를 북에 보내 1946년 3월 1일 평양의 3.1절 기념식에서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던지게 했다. 그러나 이 수류탄은 김일성 옆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주워서 던지려다가 노비첸코의 손에서 폭발했다. 그는 한쪽 손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이 실명되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해야 할지도 모르니 다들 각오하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정읍발언) 이 연설은 해방정국에 파란을 몰고 왔고, 이승만을 따르는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신익희는 이승만의 의견에 적극 동의했다. 그는 미국과 소련의 역학관계나 남북의 이념분쟁 등 객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임정의 자주독립 통일국가 건설노선은 이상이지 현실노선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 내부에서 신익희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졌다.

또한 신익희는 정치공작대와 정치위원회를 해소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합류시키라는 김구의 지시를 묵살하고 정치공작대의 조직을 확대시켰다. 그러다 1946년 6월 이승만이 주도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가담해 전국대표대회에서 부의장에 선임되어 우파진영의 명실상부한 실력자로 부상했다.

이후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교 초대학장 및 이사장,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겸했다.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일종의 국회의원격) 대의원에 피선, 1947년 의장이 되었다. 1947년 7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여 김구, 조소앙과 완전히 결별하고 이승만이 주도하는 민족대표자회의에 참가했다.

1947년 후반 김구, 김규식, 조소앙이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했을 때, 신익희는 현실적이지 않다며 비판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구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 초대 부의장이 되었다가 의장 이승만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여 국회의장직이 공석이 되자 8월 4일에 열린 국회의장 보궐선거에서 새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신익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서는 이승만과 뜻을 함께 했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 그는 이승만과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에게 임정 출신 인물들을 중용할 것을 건의했다. 비록 그들이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해 선거를 거부했지만, 그래도 갓 탄생한 대한민국의 정통성 기반을 넓히기 위해서는 그들을 포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거부하고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을 위주로 정국을 이끌자, 그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탈당한 뒤 지청천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신익희와 이승만의 갈등은 두 사람의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반공을 통한 대한민국 체제 안정이 우선이며, 민주주의는 이를 위해서는 일정부분 제한해야 한다고 봤다. 반면, 신익희는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침투를 저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이념이니 제대로 실현해야 한다고 봤다. 그리하여 이승만과 결별한 그는 1949년 2월 10일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대한국민당을 김성수가 이끄는 한국민주당과 통합시켜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최고위원에 취임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6월 19일 실시된 국회의장 선거에서 친이승만 세력의 지지를 받은 오화영과 경합한 끝에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그 후 부의장 장택수, 조봉암과 함께 이승만을 불신임까지 밀고 나갔으나[2] 6.25 전쟁이 터지면서 무산되었다. 6.25 전쟁 발발 후 조봉암과 함께 이승만을 면담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거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빠져나와 열차편으로 남하해 부산으로 피신했다.

1952년 제2차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국회의 간접선거로는 당선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직선제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반발한 야당의원들은 내각책임재개헌을 통해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하려 했다. 이에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강제 강금시킨 뒤 직선제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를 발췌 개헌이라 한다.

이 당시 신익희는 야당인 민국당 의원으로서 직선제 개헌안에 부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4월 20일 이승만이 육군병원에 입원 중이던 장면을 국무총리에서 해임시키고 장택상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을 때 휴회 중인 국회를 소집하여 이를 인준, 승인했다. 또한 이승만이 발췌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을 때, 그는 국회의장으로서 이를 통과시켰다.

신창현의 <해공 신익희>에 따르면, 신익희는 국회의원 버스가 끌려가는 것을 본 후 자택으로 가서 칩거하면서 국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고 고재봉 비서실장을 보내 "이 난국을 수습할 분은 해공 의장밖에 없는데 병으로 누워 계시다니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빨리 쾌유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을 전하게 했다. 이에 신익희는 “우남이 국제적 여론에 눌려 더 이상 강공책은 쓸 수 없게 되자 나보고 수습해 달라는 일종의 암신호인 것이란다”고 판단하고 국회로 돌아와 국정을 수습했다고 한다.

한편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의 충동을 명령했을 때,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은 군의 통수권이 미군에 있다며 군의 부산 출동을 거부했다. 정창현의 <5.16 군사구데타의 배경과 성격>에 따르면, 이때 이용문, 박정희 등이 유엔군사령관 클라크와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지원을 받아 이승만을 제거하고 장면을 대통령으로 세우려는 쿠데타를 감행하려 했다고 한다. 이들이 신익희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하자, 신익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장은 분풀이도 되고 속 시원하겠지만, 그 군권 밑에 매달려 잇는 정부가 무슨 민주 정부가 되겠으며, 어떻게 정부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군부가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이라오. 그것은 군부가 자기들끼리 또 찢고 당기고 할테니 결국 군부 쿠데타는 악순환의 씨를 뿌려 준 결과가 된다는 말이라오.

- 신창현, <해공 신익희>, p.495~499.

이후 신익희는 대통령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승만이 재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출마를 포기했다. 이에 윤길중 의원이 찾아와서 출마를 권했지만, 그는 "지금과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신변을 보장받기란 어렵다"며 거부했다. 그러다 조봉암 민의원부의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그는 조봉암의 좌파적 성향을 경계하고 부통령 후보로 이시영을 추대하자는 공동성명을 김창숙, 장면 등 8명과 함께 발표했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 때 대한민국 정부의 축하 사절로 영국을 방문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열린 제3대 국회 여야간 정부의장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기붕이 재석 199표 중 124표를 얻어 국회의장에 당선되면서, 신익희는 의장직을 상실했다.

이후 그는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민국당 선전부장 함상훈이 1953년 여름 해외 순방 중이던 신익희가 인도 뉴델리에서 북한에 납북되었던 조소앙과 밀담하고 남북협상을 논의하고 중립국 실현 문제를 거론했다고 폭로했다.(뉴델리 밀회 조작사건) 민국당 상임집행부는 당을 파괴하려는 정치적 모략이라는 반박성명을 발표하고 함상훈을 제명 처분했다.

자유당에서는 대민국당 공세에 집중하고, 함상훈 성명내용은 제3세력의 책동을 의미하며, 이들의 배후에 국내세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야의 정쟁은 국회 정식안건으로 채택되어 약 1주일간이나 동사건이 정부에서 법무 내무 양장관이 출석한 가운데 여야 측의 격렬한 정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함상훈의 신익희민국당위원장 매장모략이라는데 대체로 모아져서 동 사건을 사직당국에 일임하기로 결의를 보았다.

신창현의 저서 <해공 신익희>에 따르면, 신익희는 1953년경 김성수와 만나서 민주국민당이 세간으로부터 '진부하고 고루한 봉건적인 지주계급 정당'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조봉암을 영입해 당의 면모를 쇄신시키고, 고향을 이북에 둔 장면을 불려들어 민국당이 남북이 함께 뭉친 정당임을 보여줘야 하며, 독립운동가 곽상훈과 여성계 대표 박순천을 맞아들여서 민국당이 명실상부한 대동단결의 정당임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함상훈이 반기를 들었고, 신익희가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참석차 해외로 여행갔을 때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신익희는 자신의 여행 일정을 상세히 밝히고, 정부 수립과정에서 벌인 반탁운동과 남북협상 반대와 단정노선의 지향, 그리고 그의 반공주의를 피력해 의혹을 불시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4년 11월 6일, 이정재는 신설동 경마장에서 김동진을 불러 이기붕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면 신익희, 조병옥 등을 제3세력으로 몰아 제거해야 한다며, 그러려면 동일한 시기에 제거 대상자 40여명을 없애야하는데, 하수자는 네가 수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동진은 즉시 경찰에 고발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유야무야 처리했지만, 이로 인해 신익희 등 주요 인사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954년, 자유당은 이승만의 다음 대선 출마를 위해 개헌을 단행하려 했다. 개헌이 1표 차로 무산되자, 그들은 '사사오입' 논리에 의거해 억지로 가결시켰다.(사사오입 개헌) 이에 자유당 내 소장파들이 대거 탈당하여 호헌동지회라는 범야권연대조직을 결성했다. 신익희는 이들과 협의해 통합 야당조직을 세우기로 하고, 1955년 민주당을 결성시켰다.

그는 민주당 최고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세워 이승만과 대결했다. 이때 민주당 내부에서 조봉암과 연대해야 한다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조봉암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세력은 민주대동파라고 불렸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은 자유민주파로 불렸다.

신창현의 저서 <해공 신익희>에 따르면, 신익희는 반대파들의 의해 조봉암서상일의 참여가 막히게 되어 이들을 제외하고 민주당 결당 대회를 가진 것에 대해 매우 허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약간의 풍파가 있다고 해도 조봉암 계열과의 통합을 기필코 성사시켜야 한다고 봤다고 한다. 그 이유는 민주당이 민주세력의 집결체가 되어야 하며 통일을 위해서 조봉암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조봉암이 공산주의 계열이라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대해, 신익희는 공산당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공산당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인물이라야 상대방과 협상하는 대표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본다고 반박했다. 이후 신익희는 1954년 4월 25일 조봉암과 비밀 회동을 가졌다. 조봉암은 대통령후보로 신익희를 추대할 의향이 있지만, 부통령은 민주당에서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4월 27일, 정부통령 후보인 신익희, 장면, 조봉암, 박기출 4자회담이 있었다. 그러나 장면은 여기에 불참했다. 박태균의 <조봉암 연구>에 따르면, 조봉암은 이날 회담에서 진보당측이 부통령후보까지도 사퇴하는 대신 이전에 요구한 사항들을 받아들여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진보당의 기본정책, 즉 책임정치의 구현, 수탈없는 경제체제의 확립, 평화통일 추구 등 3개항을 민주당의 집권공약에 반영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신당운동 때 혁신계열을 배척한 과오를 사과하고,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모략하지 말 것, 민주당 승리 후에 자신을 기피하던 조병옥과 김준연을 정부 요직에 등용치 말 것 등의 보장을 요구했다.

이에 신익희는 조봉암과 은밀히 합의했는데, 그 내용은 진보당 창당의 기반을 넓히기 위해 진보당은 5월 초까지 지방유세를 계속하며, 그동안 막후교섭을 통해서 민주당은 진보당 측 조건을 수락하고, 진보당은 후보사퇴를 할 수 있는 당내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 그리고 5월 초 신익희와 조봉암이 회담을 갖고 공동성명을 통해 후보 단일화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위한 마지막 회담은 5월 6일 전주에서 갖기로 약속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조봉암의 회고록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나의 정치백서'에도 기재되어 있다.

정략적으로 이번 선거는 표의 다과를 막론하고 야당후보가 당선 못될 것은 확실히 보였기 때문에 선거운동은 선거운동대로 적극적으로 강행하고 마지막 투표일 며칠 앞두고 우리 당 후보의 입후보를 취소하고 야당연합적인 투표를 하게 해서 다수 국민의 소원에 응하는 것이 정치적인 의의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해공선생과는 그러한 조치에 대한 합의를 보아두었던 것입니다.

-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 나의 정치백서>, p.177, 1957.

두 사람이 정말로 선거 운동을 별도로 진행하다 투표일 며칠 전에 취소하고 통합 후보를 선출할 계획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민주당과 진보당은 서로 경쟁하며 치열한 유세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1956년 5월 3일, 신익희는 30만이 운집한 한강 백사장 연설을 단행했다. 연설 후, 조금만 더 유세를 하면 이승만을 이길 수 있다는 분위기가 민주당 내 조성되었다. 당시 신익희의 건강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신익희도 이러한 상황에 고무되어 측근의 만료에도 유세 일정을 줄이지 않았다.

1956년 5월 5일, 선거를 열흘 남기고 전주로 가기 위해 열차를 타서 한참 이동하던 중 호남선 구간인 함열역 부근에서 뇌일혈로 졸도했다. 측근들이 이리역에 급히 내려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당일 사망했다. 향년 61세.

사후[편집 | 원본 편집]

사후 청와대 앞 효자동 자택에 묻혔다. 진보당은 신익희 사망 후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에서 사퇴시키고 민주당의 장면에게 민주당과 진보당이 합동하여 선거를 치를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를 거부하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남은 두 사람의 대통령후보는 그 행장이나 노선으로 보아, 그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 우리는 부득이 정권교체를 단념하고 부통령선거에만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그러면서 지지자들에게 신익희에게 추모표를 던져달라고 호소해 조봉암에 대한 반대 입장을 명백히 표명했다. 이로인해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185만에 달하는 무효표가 발생했다. 이는 총 투표수의 20.5%로, 대부분 신익희의 추모표였다. 미 대사관은 본국 정부에 발송한 보고서에서, 제3대 대통령선거를 분석하면서 조봉암 득표의 대부분이 신익희에게 갈 표였다고 평가했다. 만약 단일화를 했다면, 조봉암의 210만표에 신익희 추모표까지 합쳐져서 부정선거의 의혹에도 불구하고 500만표를 받은 이승만을 위협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신익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각주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당시 대선은 국회 간선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