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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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圭植. 본관은 고령 신씨, 이명은 신성(申誠)·신목성(申木聖), 자는 공집(公執), 호는 예관(睨觀)·여서(余胥)·일민(一民)·청구(靑丘)·한인(恨人).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9년 2월 3일(음력 1월 13일) 충청도 문의현 동면(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아버지 신용우(申龍雨)와 어머니 전주 최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남인 계열로 오랜 세월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의 인재 등용 정책에 따라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부친은 춘궁기에 원근의 빈민에게 곡식을 나눠주며 명망을 쌓은 토호로, 의금부 부사, 중추원 의관을 역임헀다. 신규식은 3살 때에 이미 글을 개우쳐 신동으로 불렸으며, 사서삼경을 일찍이 독파하여 한성부에도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특히 학회지에 그의 시가 게재될 정도로 시 문학과 유학에 대한 소양이 풍부했다고 한다.

오세창의 <대양에 핀 한국의 혼>에 따르면, 신규식은 15세 때인 1894년 충청도 보은에서 전개된 동학 농민 혁명을 목격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격문을 지어 주민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고 한다. 뒤이어 동년배 유생들로 구성된 <동녕군(同年軍)>을 조직하고 군대식으로 훈련을 하였으며,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동녕군을 인솔하여 일본군과 싸우러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친일파의 밀고로 이들에 대한 해산령이 내려져 체포되었으나 일제의 침략성을 규탄하는 등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공식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았다.

1896년 초여름 상경하여 관립 한양공업전습소에 진학했다. 그러나 독립협회에 가담했다가 학생신분으로 참가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1897년 5월에 설립된 관립 한성한어학교에 입학하여 한국사, 중국어 등을 익히며 3년간 수학하였고, 1900년 9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2년 2기생으로 졸업한 후 참위로 임관, 제1연대 1대대에서 복무했다. 한편 계몽운동에도 참가하여 1901년 겨을 자신의 고향마을인 충북 문의군 동면 계산리 지마루에 신씨 종가의 10칸을 빌어 덕남사숙(德南私塾)을 설치했고, 1903년 교사로 신축 이전하면서 문의군 동면 앞 글자를 따 문동학교로 개명했다. 그는 개교사를 통해 무를 경시하고 국민교육과 역사의식의 부재로 인해 국운이 쇠약해졌다며,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이후 청주에서 유능한 교사들을 초빙하여 산술, 측량, 국사 등 10여 과목을 가르쳤으며, 지육, 덕육, 체육의 3대 교육 덕목과 부국강병 정신을 선양하는 내용의 학도가를 직접 작사 및 자곡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아 대한민국 부강기업은 국민을 교육함 존재함일세.


우리는 덕을 닥고 길을 바로해 문명의 선도자가 되어봅시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나라의 기초는 우리 학도님, 충군신 애국성을 잊지 마시오.

활발히 경주하여 전진함에 허다 사업 감당하려면

신체의 건장함이 청백이로다.

천지도 명랑하고 평원광야에 태극기 높이달고 운동하여 보자.

- 신규식이 작사한 학도가.

1905년 2월 향리 인근인 청주군 동면 산동리에 청동학교를 설립했으며, 이어 1906년 4월 2일 중동학교를 설립했는데, 처음에는 그의 모교인 한성한어학교에서 야학으로 출발했다가 1903년 3월 3대 교장으로 부임한 후 동년 5월 10일 정식인가를 받았다. 이후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외국어학교 후배 조동식(趙東植)에게 교장을 맡겼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는 육군 부위(副尉)로서 귀향 중이었다. 청주지방 진위대와 연계하여 의병 봉기를 추진했으나, 진위대가 의병 진압에 동원되자 상경하여 나철, 오기호 등과 함께 을사오적 암살 계획을 시도했다.

그러나 계획이 발각되면서 나철이 자수하자, 그는 음독 자결하기로 마음 먹고 사흘간 단식한 뒤 창덕궁 앞 신골(오늘날 종로구 운니동) 자택에서 독극물을 복용했으나 가족에게 발견되어 생명을 구했다. 그 여파로 오른쪽 눈 시신경이 망가져 시력을 상실했다. 또한 오른쪽 눈의 초점이 한쪽으로 쏠려서 마치 '흘겨보는 상' 같아서 누군가 놀리자, 흘겨볼 예(睨), 볼 관(觀)이라 하여 예관(睨觀)을 호로 삼았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강제해산되고 시위대 제1연대 제1대장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자, 신규식은 제1대대를 인솔하여 대한문까지 진출해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로 패하고 6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자, 자책감과 비분에 자결을 시도했으나 동료들의 만류로 실패하고 졸도하였다. 이후 8월 10일에는 충청도 일대의 의병 활동을 지원하던 부친 신용우가 일본군에게 해를 입었다.

1907년 9월 3일 해직 통보를 받고 무관 생활을 끝낸 그는 윤치성, 조철회, 신창휴, 민대식 등 퇴직 장교 10여 명과 함께 금융사인 '황성광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한국의 공업육성 지원에 목적을 둔 것으로, 그가 상하이로 망명한 후에도 존속되다가 한일은행에 이어 조홍은행에 합병되었다. 1909년 1월 모교인 한성공업학교 재학생과 졸업생 중심으로 <공업연구회>를 조직하고 <공업계> 잡지를 발간하였는데, <공업계>는 당시 사상계에 널리 알려진 대표적 월간지로 한말의 실업 육성에 기여하엿으나, 보안법 위반 혐의로 발행이 금지되었다. 또한 각지에 강연활동을 다녔고,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 계몽단체에도 가담하여 활동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항일공작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사찰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통분하며 음독자살하려 했다. 이때 대종교 총사 나철이 찾아와서 그의 생명을 구하고, 순국만이 애국이 아니라고 충고했다. 이후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국민의 정신적 지표가 될만한 논거를 마련하고자 한국 역사를 통찰하고 한국의 고유한 정신, 곧 국혼 사상을 정립하고 국난극복의 지침서로 삼기 위해 <한국혼>을 집필했다. 한국혼은 경술국치를 당한 근본원인을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을 잃어버린 것, 선민의 공렬과 이기를 잊어버린 것, 국사를 망각한 것, 그리고 부끄러움을 몰라 국치마저 모른 것 등 4가지로 설명하면서, 이를 "사망(四忘)"이라 하였다. 그는 국민이 단결하여 이 네 가지를 잊지 말고 국제정세에 잘 대응해 나간다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불망(四不忘)"을 주장했다.

신규식은 교화(敎化)에 대해 시조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라 규정하고, 종법(宗法)을 한국이 대대로 지켜온 낭도사상을 계승하는 것이라 밝혔다. 그리고 선민의 공렬을 잊었다는 것은 "국가의 어려움과 전란이 있었을 때 이를 극복해준 여러 영웅과 인재들이 국난후 논공행상할 때 토사구팽 되었던 것"을 의미하며, 이기는 "선민들이 발명했던 전함 거북선, 정평구(鄭平九)의 비차(飛車) 등을 흙을 버리듯 하는 등 쉽게 잊어버리는 세태"를의미한다고 서술했다. 그의 글에 거명된 인재와 이기 대부분이 무관 출신과 국방의 이기들이었다는 것은 삼국에서 고려, 조선조까지 이어온 상무정신이 퇴조하고 문을 높이고 무를 경시한 세태를 비판했음을 암시한다. 특히 일본, 영국 등의 해군사와 명나라 제독 진린, 일본의 해군대좌 도고 헤이하치로 전기 등을 인용하여 이순신의 공업과 거북선의 위용 등을 서술하고, "한국은 이충무공을 모해하고 거북선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으나, 일본과 영국은 뻘 속에 버려진 거북선을 연구하여 해상의 패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국사를 잊었다는 것은 나라의 정신을 잊은 것이며, 역사가 없게 된 원인은 전란과 후세의 사가들의 사대사관으로 인해 사료가 없어지거나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는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당나라 이세적이 고구려의 사고를 불태워 버린 일, 연나라의 난리로 역사 기록이 사라진 일, 견훤의 난리로 신라의 경적이 소실된 일, 그리고 몽골이 고려사의 내용을 깎아버린 일을 거론했다. 또한 사대주의에 함몰한 사가들 때문에 국학이 쇠퇴하였고, 이로 인해 나라의 특성을 상실하고 국력도 쇠약하게 되었다면서, 이는 사대부의 "국학에 자주가 남은 걸 이설이라 하여 빼버리고, 적을 토벌하고 땅을 넓히는 걸 도리에 어긋난다하고, 다른 나라와 외교하는 데에 있어 스스로 낮추고 겸손하는 것을 도리에 옳다"고 한 3가지 병폐 때문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이러한 인식하에서 "남의 나라를 멸하고 남의 터전을 흔들며 남의 인재를 끊기도록 하고 남의 교화를 없애 버리며, 남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남의 조종을 짓밟아 버리려면, 먼저 그 역사를 없애야 한다"는 역설을 제기하면서, 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국내의 사료가 부족한 현실을 국복하고 일본사, 영국사, 금사, 요사, 당나라사 등 외국의 문헌들을 섭렵, 연구하여 참된 모습의 한국사를 정립하자는 것이다.

한편 국학에 대해서는 국어, 한국사, 종교 등에 관한 언급이 있었는데, 주시경은 국어를 연구했고, 김광(金洸)은 대동사강(大東史綱)을 기초하여 한국사를 정립했으며, 최남선은 광문회(光文會)를 만들어 민족의 고전을 연구하였고, 나철은 대종교의 교리를 밝히어 민족종교를 정립하였다는 것이다. 신규식은 국사, 국문, 국어를 갑오개혁 이후에는 겨우 조선사, 조선문, 조선어라고만 부르도록 허용된 위기국면에서 한국학, 한국사, 민족종교 등을 국민 모두가 서로 호응하고 이어간다면 국혼은 흩어지지 않을 것이며, 국권회복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삼국이래 한국에게 학문, 천문, 공업, 종교 등 문명을 전수받았던 일본이 한민족을 스승으로 예우하였는데, 10여 년 개화가 앞섰다하여 국권을 유린하고 한민족을 노예로 취급한다며, 민족적 울분과 독립투쟁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하에 이민족의 침략에 대응한 순국선열들의 기백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김옥균이 단행했던 갑신정변을 정치적 혁명으로, 흥선대원군이 프랑스군과 미국군을 격퇴한 것을 국방의 기백으로 평가했다.

한편, 신규식은 발칸반도의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무력수단으로서 국제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서로 경쟁하는 세계로 보았다. 이와 관련해 제국주의의 팽창과 모순으로 등장한 이상주의와 민족자본 형성이 없이 부의 분배를 논하는 사회주의는 당면한 한국의 독립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폴란드의 망국의 참상을 서술하면서,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정치학의 주류인 현실주의로 우리 민족도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해 5천년 전의 개국기원, 삼위태백에서의 건국설을 제시하여 사대사관을 부정하고,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는 문화의 독창성을 강조하였다. 이같은 역사론은 한국의 주체적이고 유구한 역사성과 문화의 독창성을 밝혀 일제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내외적으로 홍보하는 논거가 되었다.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한 신규식은 상하이의 유력지 <민립보(民立報)>의 기자 서혈아(徐血兒)와 교류하였고, 중국국민당 핵심 인사 황싱, 동맹회의 실질적인 지도자 쑹자오런, 그리고 상해도독 천치메이와 친분을 맺었다. 그는 1911년 10월 10일 발발한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 신규식의 비서였던 민필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때 마침 커다란 혁명의 암운(暗雲)이 아시아 대양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으니, 중국도 이미 폭풍우를 앞두고 대혁명의 화산이 때와 더불어 중국 각처에 폭발할 수 있게끔 되었다. (신규식) 선생께서는 이러한 현실이야말로 한국의 앞날에 새로운 전환을 줄 것으로 아시고 비밀리에 중국으로 가셨다.

- 민필호, <신규식선생 전기>, '석린 밀필호전', 1995.

신규식의 신해혁명에 대한 기대는 그의 여러 시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시집 <아목루(兒目泪)>의 수록된 한 시에서는, 신해혁명의 불길을 아시아의 밤을 밝혀주는 희망의 등대로 묘사하였다.

다행히 서혈아를 만나


기꺼이 사귀려 하건만

붓끝이 천근같이 무겁고

눈썹에 시를 서리네.

해동(조선반도)에 일월이 없고

호상(상해)에 춘추 있으니

그대도 신선땅 기억한다면

먹은 마음 함께 다지세.

- 민립보사원 서혈아에게.

또한 황싱이 혁명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어 우한으로 떠나자, 신규식은 황싱을 중국 혁명의 보검으로 비유하여 칭송했다.

극악무도한 원쑤 먼저 자르고


배은망덕한 이웃 버금에 베였네.

나머지 서슬로 요괴무리 없앴거니

태평양에 던저 피먼저 씻었노라.

- 보검, 황극강에게.

그리고 아래의 두 시에서 쑨원을 일월(日月)로 비유하고, 수천만의 국민이 한 목소리로 환호하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쑨원과 혁명 사업에 대해 칭송하였다.

공화 새 일월에


천지가 개벽했네.

사해의 만백성 행복을 누리며

천대만대 모셔가세 중산선생을.

- 손중산 대통령을 축하하며.

험악한 세상에 거룩하신 분 태어났네


강남땅 험난한 길 누비시여

바라고 바라던 무창봉기 일으키던 날

천군만마 한결같이 호응하여 나섰네.

- 손중산에게 드림.

이후 쑹자오런, 다이지타오, 후한민 등이 동맹회 후신으로 만든 자유당에서 기관지로 <민권보> 발행을 추진하자, 신규식은 망명할 때 지참했던 돈 전액(1만 ~ 2만원)을 발행기금으로 출자하고, 항일투쟁의 당위성을 홍보하였으며, 조성환과 함께 자유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다 1913년 3월 쑹자오런이 위안스카이 측에 의해 피살되자, 쑨원은 그해 7월 제2차 혁명을 감행하였다. 신규식과 조성환은 이에 참여하여 공화혁명의 필요성을 홍보했다. 이로 인해 위안스카이 정부와 상하이 일본 영사경찰의 수배대상이 되었고, 상해도독 천치메이의 주선으로 프랑스 조계 어양리로 피신하여 2층집을 마련하였다. 이 집은 박은식 등 망명인사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상하이에서 전개된 구국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12년 음력 5월 20일, 신규식은 쑹자오런, 천치메이의 지원을 바탕삼아 신아동제사를 결성하고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여기에 참석한 이는 중국 동맹회 및 국민당 인사들. 그리고 문일평, 신건식, 박찬익, 조성환, 민제호, 민필호, 신석우, 안재홍, 정인보, 이광수, 윤보선, 김규식, 한흥교 등 한인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그는 이 단체에서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류하며 한국의 독립지원을 얻고자 하였다. 또한 '한국사 공동연구회'를 창설하여 한국의 고대사, 일제의 침략사에 관한 많은 사료를 정리하여 한중 공동의 항일투쟁 자료로 활용했다. 이 연구회는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로 발족된 임시역사편찬회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1914년에는 시문학 단체인 '남사(南社)'와 학생운동 겸 학술단체인 '원구중국학생회(遠球中國學生會)'에 각각 가입했다. 신규식은 남사에 가입한 후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남사총각(南社叢刻)> 총문회에는 그의 시문이 단 한 번도 실리지 않았다. 그는 이에 대해 남사총각 제17직 부록에 실린 '을묘 9월 9일 기사'에서 "본인은 한문에 능숙하지 못해 시문을 읊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다만 남사총각 부록에 신규식의 글과 시문이 몇 편 실렸는데, 특히 남사총각 제13집 부록에 실린 <흥동사제자서(與同社諸子書)>와 뒤에 붙인 시에 그의 중국과 동아시아 인식이 잘 드러난다.

흥동사제자서는 신규식이 1915년 2월 18일 남사에 보낸 편지인데, 한달 전인 1915년 1월 18일 일본이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 요구'를 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었다. 그는 이에 큰 관심을 보였고, 서문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에 대한 침략이 위기 일발의 시점에 왔음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불안한 심정을 토로했다.

오호라, 절대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영풍폭우(獰風暴雨: 사납게 부는 바람과 장대비)가 달려오니, 천지가 어두컴컴하고, 밀물이 하천을 무너뜨리니, 이 조류를 막을 방도가 없네! 큰 문제가 발생한 이래 소추(小醜)들이 명목장담(明目張膽)하여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외국신문도 다 이 문제를 보도하고 있네. 나도 역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열흘동안 동분서주해 왔다. 하지만 나는 감히 정권을 잡고 있는 자를 언급하지 못하고 재야에 있는 위인도 감히 입에 담지 못한다.

그러면서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처해 있음에도 이에 무감각한 군벌 당국과 사회 일반 상황에 대해 비판했다.

그동안에 중국의 평민단체들은 이 문제와 관련한 공개회의 한번 열지 않았고, 언론기관에서도 이를 경고하는 글 한 편도 싣지 않았다. 다들 평소처럼 먹고 놀며 아무 일도 없는 태평성세처럼 보이니 참으로 이상하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는 일본의 21개조 요구와 한국의 망국 경위를 비교하면서, 일본의 중국침략 야심을 고발했다.

우리나라에서 정사년에 소위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는데, 당시 일본인이 대한제국 황제 및 대신들한테 협약체결을 비밀로 하라고 협박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일을 알지 못했다. 협약이 공개적으로 발표되었을 때야 비로소 사실을 알게 된 한국 사람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을 내건 사람이 있어도 이미 때가 늦었다. 제2차 협약의 체결이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3차의 치욕을 당했다.(간사한 일본인의 책략을 이제 알겠는가?)

그는 남사 사원들에게 한국의 전철을 밟지 말고 떨쳐 일어나 싸우자고 호소했다.

오호, 슬프다! 아직도 중국인이 이에 대해 말을 못하고 있네! 친애하는 중화민국의 지사들이여! 우리나라의 전철을 밟고 싶은가? 떨쳐 일어나라! 중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고 중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 정세가 급하니 말을 신경 쓰고 골라 쓸 여유가 없네. 그래서 이렇게 함부로 글을 보내니 만약 적당하지 않은 말을 했더라도 나를 아시는 여러분들은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편지로는 내 급한 심정을 다 표할 수가 없으니 원단제감(元旦題感)라는 시 한수를 붙인다."라고 하며 다음의 시를 덧붙였다.

새바람 불어치니 물결도 사나운데


이 나라는 아직도 깊은 잠 못 깨우나

예로부터 연남엔 강개지사 많았지만

오늘은 상해가 제일 문명하구나.

슬프도다 국권잃고 전철을 밟은 것이

원수 당할 힘없다니 옛이름 아깝구나.

5년동안 통곡하여 눈물을 못 거두었는데

아득해라 어디에다 구원을 바랄손가.

이렇듯 신규식은 편지와 시를 통해 중국의 앞날에 대해 관심을 표현했다. 그는 일제의 침략에 직면하여 아무런 대응을 보이지 않는 매국정부와 사회일반의 무관심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비단 중국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존재, 나아가서 중국혁명의 승리는 한국의 독립, 나아가서 아세아의 평화와 안정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다고 여겼다. 그는 중국에 대한 이러한 인식 때문에 중국의 정치문인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였고, 남사 문인들은 그런 그에게 호감을 품어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중한혁명연대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한편, 신규식은 상하이를 거쳐 출국, 귀국하는 중국 학생들의 유학을 알선하고 취업을ㅇ 지도하는 환구중국학생회의 교육적 기능을 활용해, 한국학생들을 해외에 조직적으로 유학시켰으며, 미국의 한인들과 통신 연락을 하기도 하였다. 또,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조차지 확보를 추진하였다. 그는 운남군관학교에 이준의 장남 이용, 신석우의 처남 이범석 등 100여 명을 입교시켰고, 이를 통해 1개 사단 규모의 한국장교를 양성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상설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고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을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1915년 3월, 신규식은 연해주 광복군정부 지도자였던 이상설이 러시아에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자 상하이로 이동한 것을 계기로 베이징의 성낙형조성환, 박은식, 유동열, 유홍열, 이춘일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조직했다. 신한혁명당은 고종 황제를 국외로 탈출시켜 당수로 추대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밀약 19개조로 된 한중군사동맹을 맺고 독립전쟁을 수행하여 국토를 수복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본부는 중국의 북양정부와 연계가 용이한 베이징에 설치하고, 본부장에 이상설, 재정부에 이춘일, 외교부에 성낙형, 교통부에 유동열, 감독에 박은식을 책임자로 삼았다. 지부는 상하이(신규식), 장춘(이동휘, 연길(이동춘), 한커우, 봉천(정원택), 안동현, 미주지역(박용만), 국내에는 서울, 울산, 평양, 회령 등지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상설과 유동열 등은 베이징에 가서 이 계획을 전해 동의를 얻어내고 1915년 5월 말 베이징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외교부장 성낙형 등 간부들은 5월 초에 국내로 잠입하여 많은 동지들을 규합했다. 성낙형은 7월 26일 내관 염덕신을 통해 고종에게 신한혁명당의 밀서와 관계서류를 전하고 접견까지 허락받았으나, 접견 직전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신한혁명당을 이른바 '조선보안법사건'으로 다루었고, 신한혁명당의 계획은 실패하였다. 이후 신규식은 황제를 복위시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획을 완전히 포귀하고 공화정부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는 대동보국단을 조직하고, 그동안 비판을 자주 가해 불편한 관계였던 베이징 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대동보국단 단장엔 박은식을 추대하고, 베이징의 조성환, 길림의 박찬익과 연계하여 국내 평양의 한진교, 정주의 선우혁 등 청년층을 단원으로 보강하고 연해주까지 손을 뻗어 군자금 모집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하고 리위안훙이 새 총통이 되고 정치적 실권자인 돤치루이가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이 되자, 이들에게 장문의 외교문서를 보내 한국독립에 대한 협력관계 조성을 시도했다.

1917년 중국이 미국과 연합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자, 그해 7월 조성환,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14명과 함께 <민족대표자회의 소집과 정부수립 제의>를 내외에 선언했다. 이를 '대동단결선언서'라 하며, 취지서 12매와 이에 대한 답신서를 첨부하여 원동, 미주, 국내 등 각지의 독립운동단체와 유력인사들에게 발송했다. 선언문은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고 국가적 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1차 통일기관, 2차 공화정부 수립, 3차 국가건설"이라는 3단계의 입국론을 제시했다. 그리고 답신서를 첨부하여 언제, 어느 곳에서 민족대표회의를 개최할 것인가를 선택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집회 장소로 "해산위, 소왕령,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북경, 상해" 등지가 제시되었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포함된 14개조의 강화조건을 발표했다. 신규식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2통의 편지를 썼다. 하나는 길림의 박찬익에게 국제정서에 부응하여 만주에 독립운동자들을 모아달라고 당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쑨원 정부의 여지이에게 신문을 발간하고 싶으니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고 양국이 공동 대처할 호기가 지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만주 지역에 국제정세를 조속히 전파하고, 이에 대응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공론화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18년 11월 28일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당하고 대표 김규식을 프랑스로 파견해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기로 했다.

김규식이 파리로 가기 전인 1919년 1월 25일, 신규식은 김규식과 함께 <윌슨 미국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를 작성하였다. 김규식은 파리로 간 뒤 이를 미국대표부에 직접 전달했다. 청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국가들이 결집해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수립하려고 협력하려고 하는 이때 한국인들은 각하께 우리 요구를 고려해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4천년 이상 존재해온 한국인들은 그리스-로마만큼이나 오래된 문명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기억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공포스런 역경의 바람이 우리 불행한 국가의 국민과 정부를 전복시키기 이전까지, 한국은 자유 독립국가로 간주되었습니다. 다른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들 국가들은 한국의 전권공사를 받아들이고 자국의 대표를 한국정부에 파견했습니다. 한국과 다른 국가들간에 체결된 수많은 정치 및 상업적 조약들은 한국이 대외적 주권을 완벽하게 행사했음을 명백히 증명합니다.

대한제국정부의 태만과 무능으로 일본이 한국에 쉽게 침투했습니다. 다양한 구실을 내세워 일본은 1895년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한국의 황후는 살해되었습니다. 1904~05년간 일본은 한국정부에게 자신의 대외적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박탈하는 조약을 강제했습니다. 일본의 침략은 증가해서 1907년 제국은 소멸했습니다.

일본은 명백히 한국에 일본을 이식했습니다. 일본은 연약한 국가에 미카도(Mikado:천황)의 정부를 설치했으며 우리 풍습과 관행을 일본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공포에 질린 한국인들은 자국에 대한 일본의 음모를 무력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가장 수줍어하는 사람들, 보통 가장 쉽게 확신시킬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일본에게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만 우리의 국가적 열망과 양립할 수 없는 문명화를 거부하는데 동의했습니다. 한국인들의 국가적 반대는 완전히 정당한 것이며 조만간 인정될 것이며 한국은 세계 지도상에서 명백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정하고 부당한 조치들과 연관되어 야기된 모든 시도는 우리의 피속에 날인되어 있습니다. 어떤 동정도 어떤 용서도 없습니다. 반란군은 아마도 그들 반란의 댓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피가 새로운 헌신을 창출할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문명화로 인해 멸망되길 원치 않습니다.

외국 열강들은 일본이 한국에서 어떻게 통치하는지 알지 못하는데, 가혹한 검열로 인해 모든 뉴스가 외부세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자애로운 보호 하에서 아마도 한국이 여전히 자유롭다고 믿으며, 우리나라가 현재 단지 일본의 식민지일 뿐이며 곧 일본의 한 지방 군현이 될 때 한국의 모든 재부를 독점하는 일본은 이것이 극동의 평화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열강들은 일본이 우리 정부를 몰락시킨 모든 조약들을 승인했기 때문에 불행한 한국인들을 위해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평화회의가 크고 작은 나라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분쟁의 원인을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인종을 모두 조화롭게 하며 자신들의 법률과 관습에 따라 각자 살도록 허용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민족은 대통령 각하께 나아가 그들의 불행한 운명을 고려해주길 요청드립니다.

부디 평화회의가 우리 대표를 만나 자유의지에 반해 일본의 속국이 된 한국 상황을 명확히 청취해 주길 바랍니다.

부디 한국에서 분쟁의 원인들이 사라지고 극동은 물론 모든 곳에서 영구적 평화가 확보되길 바랍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다시 한 번 자유롭고 독립된 민족으로 만들어 줄 국가 권리(Right of Nations)에 내재하는 정의를 확신합니다.

한국인들에게 이 자유를 회복케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동시에 미래의 분쟁 원인을 억제하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영구적 세계평화의 설립이라는 목적이 획득될 것입니다. 평화회의에 우리의 겸허한 요청을 제출함으로써, 귀하께 권리를 빼앗긴 불행한 국가의 영원한 감사를 표하며, 철쇄 하에서 인사를 올립니다.

서명

한국독립공화당(The Corean Independent Republican Party) 총재 및 사무총장.

신규식은 뒤이어 일본 도쿄에 장덕수, 이광수 등을 보내 한국인 유학생들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꾀하게 했다. 두 사람은 최팔용, 서춘, 송계백 등 유학생들과 연계하여 2.8 독립선언을 이끌어냈다. 한편 서울에서는 신규식의 동생 신건식이 잠입하여 천도교계 손병희와 기독교계 이상재 등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을 꾀했다. 그리고 서북 지역에서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선우혁이승훈, 양전백, 길선주 등 기독교 인사들에게 보내어 역시 독립운동을 꾀하게 하였다. 그 결과,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되어 기미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고, 이로 인해 3.1 운동이 촉발되었다.

신규식은 1919년 1월 21일 길림의 정원택에게 편지를 보내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고,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여기에 호응해 상해와 미주의 교포들이 서로 연락해 각지에 대표를 파송해 독립운동을 일으키려 하는데, 길림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정원택은 즉시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여준을 찾아가 이 일을 의논했다. 여준은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했고, 1919년 2월 27일 자신의 집에서 조소앙, 김좌진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여준이 총재를 맡고, 군무에 김좌진, 정원택은 서무를 담당했다. 정원택과 조소앙은 3월 1일 오후 상하이로부터 한성에서 이미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는 전보를 입수했다. 이에 3월 2일 의논한 끝에, 조소앙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로 하였다. 이후 만주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서명하였고, 신규식도 자신의 도장을 보내 선언서에 찍게 하였다. 이리하여 대한독립선언서가 3월 11일 발표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이렇듯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는 신규식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1919년 4월 10일,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은 일본 외무차관에게 신규식을 3.1 운동 선도 관련자로 지목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이후 상하이 일본총영사는 신규식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신규식은 일제 밀정들의 추적을 피해 수많은 가명을 쓰며 숨어지내야 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되고 4월 30일 제1차 의정원 회의가 열렸을 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의정원에서 임시정부의 설립 의의와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국 임시정부의 조직은 무수 선열(先烈)의 선혈(鮮血)의 관개(灌漑)로 된 것이요 삼천만 자유를 애호하는 한민족의 옹호로 이룬 것이요. 전 세계 정의를 숭상하는 인사의 동정으로 해서 된 것이며, 천만 번 불굴 불소하는 혁명지사의 추진으로 된 것이다. 다만 왜구의 매와 개가 국내에 널려 있어 정령(政令)을 순조롭게 시행하고 국권을 펼 수 없으니 형세 부득이 국외에 안전한 곳을 택해 정부를 설치하여, 정권을 안정하고 정령을 관철하는 길을 구하게 된 것이다. (중략) 국외 및 동북 등지에서 항왜(抗倭) 무장운동을 격동하고 여러 가지 직접 행동을 지도하여 왜국의 암흑통치를 전복하고 태극기를 거듭 경성에 휘날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19년 5월 초 정원택을 서울의 정두화에게, 정환범을 예산의 정명선에게 밀파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게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내분이 갈수록 심화되자 7월 14일 부의장직과 의원직을 사퇴하고, 상하이 인근 항저우의 고려사로 갔다. 그해 9월 11일 대통령제가 출마하자 복귀하여 법무총장에 취임했다. 이후 이동휘가 총리 직을 사퇴하자 1921년 5월 16일 취임하였고, 5월 26일 외무총장을 겸임하였다. 그의 임시정부에서의 활약상은 독보적이었다. 동제사의 안동현 교통국을 임정의 산하로 편입시켜 국내와 연락하는 거점으로 삼았고, 발간이 중단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을 <독립신문>으로 개편하여 발행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를 별도로 발행하였다.

1920년 10월 10일, 신규식은 상하이에서 주간 <진단(震壇)>을 창간했다. 이 신문은 한문으로 되어 있었으며, 매주 일요일에 출간했다. 신규식은 진단 창간 목적에 대해 "한국독립운동세력의 홍보물이 급히 필요했고, 중국 혁명지사의 지지와 동무을 이끌어내는 데 유익하며, 일본의 악행을 폭로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진단> 주간은 사설, 한국 독립운동 근사, 한국군 정보, 한국 소식, 중국 소식, 세계 소식, 촌평, 한국 명인 전기, 사회 문제, 문예, 시평 등 다양한 내용과 장르로 구성되었다. 작자는 주로 한국인이지만 중국인들의 글도 가끔 실려 있었다. 당시 중국 언론도 진단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자주 소개했다. <민국일보>는 진단 22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광고했다.

(진단) 제22기는 1920년 4월 24일에 출판할 예정이며 내용이 풍부하고 상세하다. 세계, 중국, 한국에 관한 중요한 소식을 빠짐없이 게재하고 있으니 시국에 관심이 있는 자는 한 편씩 가질 만한 신문이다.

- <진단주보 제22기 출판>, '민국일보' 1921년 4월 28~30일.

진단은 중국 상해, 북경, 강소, 산서(山西), 중경(重慶) 등지에 판매처가 있었고, 중국신문이 적극 홍보하며, 러시아,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 등에도 통신사가 있었다. 신규식은 창간자로서 주편을 맡아 진단 관련 모든 일을 주관했다. 창간사도 쓰고 <한국혼>, <이순신전> 등의 산문과 정론을 발표했다. 또한 일본이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보낸 것에 대해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막을 생각도 않는 베이징 정부를 비난하였다. 1921년 6월 3일 제23호까지 출간하였으나, 자금난으로 폐업하였다.

1921년 7월 12일 영일동맹의 추가조약이 추진된다는 소식을 듣고 국무총리 명의로 영국 수상, 외교부, 상하의원에 항의 전문을 발송했다. 그 내용은 "영일동맹으로 인해 미국, 영국이 일본을 지지하게 되었고, 러일전쟁 후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유린하게 되어 한국이 직접적인 피해를 받았다. 과거 한국과 영국의 구 친교를 잊지 말아야 하며, 한국이 침해받게 되는 조항을 배제해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1921년 8월에 개최될 태평양회의에 대비하여 1921년 3월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국무회의를 열고 태평양회의에 참석할 대표로 이승만을 선발하고, '대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8월 13일에 조직하였다. 그리고 11월 11일 태평양회의에 전보로 <대 태평양회의 요구서>를 발송하였다.요구서는 2가지를 제시하는데, 하나는 "한국 국민은 이미 1919년 3월 상해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정부를 수립하였다는 것은 세계가 널리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대표단이 태평양회의에 참가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고, 한국의 완전한 독립승인을 요구하며, 일본은 병합 이후 한국인에 끼친 손해를 배상하고, 한국과 중국 및 시베리아에서 군대를 무조건 철군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1921년 11월 3일, 신규식은 정부 대표로 광둥정부의 총통 쑨원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냈다. 이때 그는 차관 5백만원과 조차지를 요구하였으며, 쑨원으로부터 북벌을 완성한 후 전력을 다한다는 약속을 받고. 국민정부의 북벌서사식(北伐誓師式)에 유일한 국빈으로서 참석했다. 또한 광둥성 정부 관계자 탕지야오는 신규식의 요청에 의해 미국의 워런 G. 하딩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을 협조해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한편 신규식은 크리스마스를 기해 광동 신신호텔에서 미국, 프랑스 영사 등 각국외교관 60여명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그러나 신규식의 이같은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태평양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보낸 요청서를 완전히 무시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태평양회의에 걸었던 기대가 무너지자, 임시정부의 무능을 질타하고 외교론 자체가 무용지물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여기에 이승만이 미국에 한국을 위임통치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신규식은 1922년 3월 20일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의 위임자치론은 민주주의를 칭탁한 것이며, 한국의 독립에 유해하고 전도를 단절시켜 영원히 강대국의 비호하에 놓이게 하므로 용납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외교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 중, 소 등과 협력하여 외교적 지원을 획득해야만 독립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관을 대량 양성하고 민병을 훈련시키고, 각지 군사기구간 긴밀한 협력을 하여 적절한 시기에 전쟁을 감행한다는 방략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에서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간의 대립이 갈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임시정부를 대체할 국민대표회의를 열자는 주장이 각지에서 제기되었다. 조완구, 윤기섭 등은 이에 맞서 "임정을 파괴하려는 흑색선전에 현혹되지 말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에 1922년 5월 광둥성 군벌 천중밍이 쿠데타를 일으켜 쑨원을 축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쑨원은 상하이로 피신하여 신규식의 신변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 당시 심장병과 신경쇠약으로 인해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았던 그는 천중밍의 쿠데타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신병을 이유로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처리되지 않았다. 민필호는 이 시기 신규식의 병상에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7월 초순경 어느 날인가, 선생께서는 또한 창 앞에 서 계셨다. 점점 움푹하게 들어간 눈으로 선생께서는 슬프게 창밖 하늘을 쳐다보셨다. 역시 점점 홀쭉해진 양쪽 볼에는 아픔을 지닌 주름살이 접혀 있었다. 그날은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날이었고, 바다 바람이 창밖에서 지긋이 불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갑자기 비통하게 높은 목소리를 내셨다. 이번에 하시는 말씀은 옆방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다시 봅시다, 벗들이여…나는 가겠소. 임시정부를 잘 간직하시고, 3천만 동포를 위해 힘을 다해 주시오. 나는 가겠소…. 나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그 후로 선생께서는 줄곧 침상에 계시며 음식을 끊으시고 다시는 말씀이 없으셨다. 25일이 지나도록 선생께서는 음식도 안 드시고 말씀도 안 하시고 눈을 감으신 채 줄곧 누워만 계셨다. 매일 약간씩 물을 마실 뿐, 동지들이 혹 음식을 권해도 굳게 거절하셨다.

- 민필호, <신규식선생 전기>, '석린 밀필호전', 1995.

신규식은 9월 1일부터 25일까지 불식(不食)ㆍ불언(不言)ㆍ불약(不藥)으로 일관하면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민족적인 대의에 따라 단합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렇듯 25일간 단식하면서 병세가 깊어져 몸이 야위어가자, 동지들은 더 참고 볼 수 없어 억지로 음식을 먹였다. 이에 신규식은 저항하지 못했지만, 감았던 눈을 갑자기 뜨고 노여움이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동지들의 간호에도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9월 25일 눈을 감았다. 민필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정부! 정부!"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상하이의 중국 시사주간지 <동명(東明)>은 다음과 같은 부음 기사를 실었다.

찬 밤에 달이 푸른 단풍나무를 비추는구나


사람의 일이 이에 이르니 하늘의 도를 어찌 논하겠는가

이제 절망이로다. 지성 일관으로 살아오신 분

상하이에서 영원히 돌아가신 예관 신선생.

신규식의 유해는 상하이 프랑스조계 홍교의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가, 1993년 8월 15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신규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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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