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파누봉

Mistamacsta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9월 14일 (목) 02:57 판 (→‎생애)

틀:라오스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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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파누웡 왕자 (ສຸພານຸວົງ, 1909년 7월 13일 ~ 1995년 1월 9일)는 라오스의 왕족이자 초대 주석이며, 라오 인민혁명당의 초대 서기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보운콩 왕자의 사생아로 태어나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반프랑스 독립운동을 펼치고, 라오스 내전에서 라오스 왕국에게 승리하여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을 건국하고, 라오인민혁명당 초대 서기장 겸 초대 라오스 주석에 취임하여 라오 인민혁명당 일당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왕족 출신의 공산권 지도자라는 점 때문에 "붉은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생애

1909년 7월 13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라오스 루앙 프라방 왕국에서 보운콩 왕자와 평민 여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복 형인 펫싸랏 왕자와 수완나 푸마 왕자는 왕가 여자들로부터 태어났지만, 쑤파누웡 혼자 평민 여자가 낳은 유일한 사생아였다.

1931년 프랑스에 유학, 토목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공공사업국에 근무하여 토목기사로 일하며 1938년에 베트남의 교량과 도로를 건설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다가 공산주의 사상에 매료되어 호찌민이 설립한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해 1937년에 하노이에서의 민족 해방 운동 지도를 계기로 인도차이나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45년에는 라오스 왕국으로 돌아와서 이복 형들과 독립 운동을 전개하여 4월 8일에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인도차이나에 주둔하며 프랑스와 이권다툼을 벌이던 일본군이 그해 8월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며 덩달아 패망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라오스 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반불 독립파와 친불 복귀파로 갈라지게 된다. 독립파인 쑤파누웡의 이복 형 펫싸랏 왕자는 10월에 자유라오당을 설립했으나, 그 틈에 프랑스가 다시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여 1946년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도중 비엔티안 임시 정부에서 국방부장을 역임, 타이 방콕 망명 정부에서 외무부장으로 일하고 호찌민의 월맹에 합류하여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재식민지화에 반대한다.

1949년, 결국 프랑스는 베트남에게 전세가 역전당하면서 라오스 왕국을 독립시키기로 한다. 그 덕에 쑤파누웡도 이복 형들과 라오스 왕국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군권, 외교권, 재정권은 여전히 프랑스가 가지고 있었고, 사실상 형식적인 독립이나 다름없었다. 귀국 후 라오스 왕국의 이름뿐인 독립에 반대하다가 경찰들의 추격을 받고 1950년에 베트남으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호찌민과의 친분을 쌓고 그의 지원아래 8월에 빠텟 라오당을 창설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프랑스의 패배를 계기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고, 7월에 제네바 협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라오스 왕국은 다시 독립을 이룬다. 그 덕에 1958년, 쑤파누웡의 빠텟 라오당은 선거에 진출하고, 쑤파누웡 본인도 경제장관에 취임하나, 라오스 왕정의 탄압을 받는다. 그리고 1962년 제네바 협정에서 쑤파누웡의 빠텟 라오당과 그의 이복형 쑤완나 푸마 수상이 이끄는 우익 정부의 대립이 심화되고, 1953년 11월 9일부터 라오스 내전이 발발한다.

쑤완나 푸마는 미국과 남베트남과 손을 잡고 소수민족 용병까지 동원하며 빠텟 라오당이 주둔하고 있던 산악 지대를 공략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라오스로 미군을 보내 쑤완나 푸마 수상이 이끄는 라오스 왕국 정부군을 지원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빠텟 라오당의 게릴라 부대와 베트콩의 밥줄인 호찌민 루트에 대량 공중 폭격을 명령했고, 1973년까지 호찌민 루트에 50만회의 공중 폭격이 가해져 최소 5만명이 사망했다. 미군이 퍼부은 폭탄들은 현재까지도 라오스 고산지대에 불발탄으로 남아 라오스 현지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그러나 전세는 빠텟 라오당에게 기울어졌다. 빠텟 라오당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는 루트를 바꿔가면서 베트콩과 서로 교류했고, 산지와 정글을 이용하며 미군을 농락해갔다. 그들은 산악지대에서 내려와 점점 라오스 영토를 장악해가며 라오스 왕정을 압박해왔다. 결국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해 1973년 1월 파리 평화협정에 서명하면서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했다. 1975년에는 남베트남 마저 응우옌반티에우 총통이 물러나며 패망하면서 더 이상 라오스 왕정을 도와줄 나라들은 사실상 없어졌다. 결국 라오스 왕국은 폐지되고 빠텟 라오당은 12월 1일에 라오스 내전에서 승리하여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을 건국했고, 쑤파누웡은 초대 라오스 주석으로 취임했다.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빠텟 라오당은 라오 인민혁명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일당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쑤파누웡은 주석직에 오른 뒤, 라오스 왕국 우익 정부군 장교들과 몽족을 비롯한 우익 정부군에 가담한 소수민족들을 숙청했고, 라오스 인민들에게 철저히 공산주의를 주입시켰다. 국가의 모든재산과 기업은 국영화되었고, 반역자의 재산들은 몰수되었다.

이후 1991년 8월 15일까지 주석직으로 활동하다가 퇴임하고 중앙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 1월 9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