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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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貞道. 자는 호건(浩乾), 호는 해석(海石), 문세(文世). 대한민국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대한민국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의 아버지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1년[1] 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2]에서 아버지 손몽룡(孫夢龍)과 어머니 오신도(吳信道)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손몽룡은 유학자였고 부농으로서 강서군 일대에서는 명망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오신도는 훗날 아들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후 평양 일대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1919년 대한애국부인회 총재에 취임해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일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6살에 사숙(私塾)에 입학해 한학을 배웠고 13살 때 두 살 위인 박신일과 결혼했다. 1902년 겨울, 손정도는 23세의 나이에 관리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르러 고향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던 중 조씨 성을 가진 목사 댁에서 하룻밤을 묶게 되었다. 그는 그날 밤 조목사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문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관직에 오르는 걸 그만두고 상투를 자른 뒤 집으로 돌아와 몽둥이를 들고 집에 있던 사당을 때려부셨다. 이에 격분한 집안 어른들은 그를 죽이려 들었다. 손정도가 훗날 목사가 된 후에 기록한 '신앙메모'에 따르면, 그날 밤 잠을 자던 중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목소리를 들었고 곧장 속옷바람으로 집을 나와 눈덮힌 산에서 밤새 기도를 하다가 실신, 인근 주민들에 의해 구출되었다고 한다.

집에서 쫓겨난 뒤 전날 만났던 조목사를 찾아갔고, 조목사는 그를 평양 주재 감리교 선교사였던 문요한(文約翰, John. Z. Moore)에게 보냈다. 문목사는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삼고 목사관에서 일하게 하는 한편 숭실중학교에 다니도록 주선해 주었다. 손정도는 1904년 숭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1908년에 졸업했고 다시 숭실 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서울로 가서 목회자가 되기 위해 협성신학교 (現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또한 협성신학교를 다니면서 상동교회를 자주 출입해 전덕기 목사 뿐만 아니라 이승만, 이동녕, 이시영, 장지영, 노백린, 조성환, 이갑, 최남선, 이필주 등과 어울리며 그들로부터 민족 의식을 익혔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목회 활동을 개시했다.

1909년, 손정도는 잡지 <대도>에 "한국 교회 세력을 낙론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하루는 삼십리되는 촌에 전도하러 가는 길에 마음에 우연히 일어나는 생각은 바울께서 삼층천에 올라가셨는데 그 뜻이 무슨 뜻인지 삼십리 행로에 잊지 못하고 생각하였더니 그날밤에 하나님이 감동하사 분명히 말씀을 가르치셨다.


"예수 믿는 자의 기도도 그와 같이 백성들이 서는 곳에서 기도하는 자도 있고 제사장들이 서는 곳에서 기도하는 자도 있고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지성소에서 기도하는 자도 있으니 백성이 서는 곳과 제사장이 서는 곳에 서서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자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해야만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바울의 기도하는 열심력이 지성소에 달하였으니 이와 같이 이상한 가운데 들어갔느니라"하시기에 본인의 마음을 미루어 살펴본 즉 그 전 7년 동안 기도하는 힘이 성전 지성소 밖에 두 층에 오르락 내리락하며 기도하였으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겠지하는 믿음으로만 기도하였더니 이 때에는 마음 힘이 비로소 지성소에 들어간 때라 그 뜻 깨닫기가 용이하게 되었으니 믿는 자의 기도가 삼층천에 들어가지 못하면 기도의 능력이 적고 하나님의 은밀한 교통을 받기 어려운 줄 알았도다. (중략)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반석 위에 세우신 교회이니 누구던지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아 자기를 하나님 나라 일로 종사하는 이는 기쁨으로 감사하리로다. (중략) 금일 한국 청년 전도사들이 마음에 용력있게 일어난 생각은 뉘가 하나님의 권능을 대적하리오. 로마국 황제 네로가 교회를 백방으로 핍박하였으나 교회에 해받은 흔적도 없느니라. 근일 한국에 이웃나라도 대한 교회에 대하여 아무리 헌병, 순검 병정으로 전도사를 잡아 무죄한 자를 죄 있겠다고 옥에 가두며 무죄한 교우를 의병이라 목을 매어 총으로 쏘며 예배날 총을 겨루어 예배하는 자를 흩지만, 저들인들 헤롯과 네로 왕에 더 악할 수가 있겠느뇨?

그런즉 우리 청년은 핍박을 받아 죽을 지라도 우리 생명을 구원하는 생명의 도는 없애지 못하리라하고 백절불굴하는 마음으로 일합시다. 이때가 누구 때인가? 우리의 때라. 우리가 만일 문명한 나라에 낫더라면 이같은 핍박과 고생을 한번도 당하여 보지 못할 터인데 이것이 우리의 영광일세.

이 글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찬송시로 끝맺었다.

예수씨 군병들아


깨어서 지키라.

벌떼같은 마귀는

우리의 원수일세.

십자가를 높이 들고

성신 검 잡아라.

우리 대장 명을 쫒아

마구 타파하세.

첫 목회지는 진남포교회였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규탄하며 이러한 어려운 때일수록 예수께 의지해야 한다고 설교했고, 진남포 교회는 그의 열성적인 목회 활동 덕분에 번창했다. 이후 1911년 정식으로 목사가 된 그는 만주에 있는 동포들을 위한 순회선교사로서 파견되었다. 손정도는 먼저 베이징에 들려서 반년 동안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조성환, 백영엽 등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했다. 이후 1912년 하얼빈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한 손정도는 동포 교민들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 이주민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심어줬고 독립운동에도 직접 가담했다.

만주 한인사회를 순회하며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에도 관여했다. 또한 그는 한국 감리회에 발송한 서신 <그리스도인의 자신력>에서 만주 지역은 추수 때를 기다리는 가을 들판처럼 선교하기에 좋은 일터라면서 국내에 있는 감리회 목사들을 더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를 지었다.

1절: 삼천리 강산 주의 동반도는 구원 얻은 동포 많아졌으니 그리스도 왕의 명령을 쫓아서 어서 추수하러 나아갑시다.


2절: 이 세상 제일 광대한 전답에 곡식 익어 황금빛과 같으니 농부들은 속히 농기를 메고 어서 추수하러 나아갑시다.

3절: 형제와 자매들 다 모여들어서 십자가를 달고 달음질 마당에 반도 안에 있는 주의 일꾼들은 어서 추수하러 나아갑시다.

후렴구: 나아갑시다. 나아갑시다. 어서 추수하러 나아갑시다.

그러던 1912년, 손정도는 일본 수상 가쯔라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조성환, 백영엽 등 30여 명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이때의 고문으로 얼굴에 흉터가 생겼으며 다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으며 심장질환도 얻었다. 일본 경찰은 모의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는 손정도에게서 아무 혐의를 캐지 못하고 풀어줬지만, 곧 황해도 금광을 습격하여 북간도의 한인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기를 대주려 했다는 '무관학교 설립기금 모금 사건' 혐의로 다시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재판에 회부했다. 손정도는 이 재판에서 거주 제한 1년 처분을 받고 전남 진도로 유배되었다.

진도에서 1년간 지내면서 섬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3년 감리교 제6회 연회일기에 따르면, 1913년 6월 7일 노블 감리사가 유배지에서 보낸 손정도의 편지를 회중에 낭독했다고 한다. 손원일의 회고록에 따르면, 손정도가 유배 기간이 끝나 본가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진도 주민들이 그를 붙들며 울었고, 그는 후에 아들에게 "그때 진도 주민들이 보여준 친절과 정성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1913년 11월 10일 서울에 도착한 손정도는 협성신학교 신학생들이 베푼 위로회에 참석해 로마서 8장 18절[3]을 낭독했다. 이후 1914년 동대문교회에 파송되었고, 1년 후인 1915년에는 감리교외 모교회인 정동교회에 파송되어 3년 동안 담임 목사로 일했다. 당시 정동 지역은 한일병합을 전후해 일본인들이 침투해 들어오면서 기존 주민들이 점차 성밖으로 밀려나게 되어 교회가 주민들의 주거지로부터 유리된 상황에 놓였다. 따라서 정동교회는 정동지역의 교인들이 소수였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과 청년들이 주로 많았다. 손정도는 이들 청년 학생들을 위해 10여 년 전에 해산된 엡윗 청년회를 다시 조직해 이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정동교회에 부임한 지 1년이 지난 1916년, 정동교회 입교인수는 746명, 학습인 275명, 원입인 930명, 주일학생 820명 등 총 2,772명이 정동교회에서 활동했다. 이는 단일 교회 중 가장 큰 숫자였으며, 사람이 워낙 많아서 설 자리가 없게 되자 교회 증축 공사를 해야 했다. 손정도는 그때까지 있던 남녀를 구분하는 휘장을 없애고 교회 안에 의자를 놓아 나이, 신분 불문하고 모두가 한 자리에 앉게 했다.

이렇듯 정동교회에서 맹활약한 그는 1918년 연회에서 장로목사 인수를 받았지만 그해 말 돌연 정동교회를 사임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신병을 치료할 겸 몸을 쉬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19년 제12회 미감리회 연회록에는 "당국의 압력으로 휴직 및 제명당한 연회원 손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볼 때 그가 사임한 원인은 일제의 거센 압력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동교회를 사임한 뒤 가족들을 데리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평양의 보통강(普通江)가에 있는 자그마한 셋집으로 위장 이사를 했다. 그는 지난해 8월 20일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과 연계해 의친왕 이강과 이화학당 통교를 맡고 있던 하란사 여사를 파리로 밀항시켜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시키기 위한 계획에 가담했다. 그는 1919년 정월 대보름날 가족을 떠나 압록강 이북 안동을 거쳐 열차 편으로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의 망명 사실이 알려지자, 부인 박신일은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서 무수한 매질과 협박을 당했고, 이후 가족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에 시달렸다.

상하이에서 하란사와 의친왕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두 사람은 11월에 압록강을 건너 안동역 변소에 갔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하란사는 서울로 압송된 후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가 재차 망명을 시도해 베이징으로 갔다. 손정도는 그녀를 만나려 했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합달문내(哈達門內)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가영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던 중 하란사가 동포들이 마련한 환영만찬회에 참석했다가 누군가에게 독살당했고, 결국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3.1 운동이 발발하자, 손정도는 4월 9일에 이광수와 함께 신한청년당에서 임시의정원을 조직할 것을 발의했고, 4월 10일 제1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 참석해 의장에 이동녕을 추대하고 자신은 부의장을 맡았으며 서기에 이광수, 백남칠을 선출했다. 다음날인 4월 11일 제1차 회의에서,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대내외에 정식으로 선포하고 11개 지방 대표를 지방선거회의에서 선출하여 지방 대표를 의원으로 하는 정식 의정원이 창설되었는데, 의정원 의장에 손정도가 선출되었다.

4월 23일부터 20일간 민단 사무소에서 개최된 제4회 의정원회의에서는 의장 손정도의 사회하에 임시정부 장정을 결의하는 한편 구급의무금 모집, 인두세 징수 등을 가결하고 재무 심사위원으로 조성환, 김보연, 유치근 등 3인과 의원 자격심사위원으로 유치근, 이광수, 신석우 등 3인을 선출했다. 또한 7월 8일 민단 사무소에서 개최된 제5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의정원 법 제5장 28조에 의하여 분과위원회를 성립시켰으며, 2천만원 공채를 발행했고 이승만, 김규식, 서재필 등 3인을 국제연맹에 대한민국의 특파원으로 보낼 것을 가결했다.

제6회 임시 의정원 회의는 의장 손정도의 사회로 8월 19일부터 9월 17일까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8월 28일 정부 제안으로 임시헌법개정안과 임시정부 개조안을 상정해 실질적인 통합작업에 착수했다. 이 임시헌법 개정안의 특징은 대통령만 의정원에서 선출하고 각 국무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 주권의 행사를 대통령에게 전적으로 위임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행정 각 부의 6부를 한성 임시정부의 7부 1국으로 변경 실시하고 각원을 한석 임시정부 안대로 하기로 했으며, 집정관 총재의 명칭을 대통령으로 바꿨다. 이 헌법 개정안은 독회와 토론과정을 거쳐 9월 6일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9월 11일 공포되었으며,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렇듯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을 위해 노력하던 손정도는 1919년 9월 위장병이 악화되자 부의장인 정인과에게 의사 진행을 위임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자 임시정부 내부의 계파간 갈등이 불거졌고 결국 임시정부의 조직체계가 흔들렸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머무르며 외교활동을 수행할 뿐 상하이로 오지 않았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손정도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상하이로 와서 상황을 수습해 줄 것을 호소했고, 이승만은 그의 요청을 수락하고 상하이로 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하이로 온 뒤 이동휘와 격렬하게 대립했고, 이동휘의 뒤를 이은 이동녕 내각 및 김규식 내각으로부터 미 정부에게 한국을 위임통치해줄 것을 요청한 일에 대해 추궁받자 1921년 5월 20일 워싱턴에서 열리고 있는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손정도는 지리멸렬해져가고 있는 임시정부를 어떻게든 지탱하기 위해 국내 유지들로부터 모은 독립자금을 임시정부로 옮기는 일에 사력을 다하기로 하고 교통총장에 선임했다. 또한 1922년 2월 23일 대한적십자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의용단 설립에 관여했고 1922년 10월 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맥새이체라로(麥賽爾蒂羅路) 24호에서 열린 한국노병회 창립식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한편, 손정도는 상해지역의 교민자녀들을 위해 상해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1917년 미조계(美租界) 조풍재복리(兆豊載福里)에 방 1칸을 빌려 상해한인기독소학교(上海韓人基督小學校)를 설립했다. 또한 그는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만들고 이 회의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 줄 것을 청원하는 진정서를 발송했다.

대한 예수교도 50만명을 대표한 우리는 만국 예수 교우들에게 삼가 글을 올리옵나이다. 슬프다! 우리 한국이 위급 존망의 때를 당하여 어육잔포의 화를 만나 이에 인도의 정의를 가지고 사해를 일가로 아는 여러분께 향하여 피를 뿌리며 눈물을 머금고 재성애로 하옵나니 (중략)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지 불과 30여 년만에 50만 명 교도가 구름같이 일어나며 3천여 처의 교당이 전국에 현만하야 동양을 예수교화하는데 한 큰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일본의 군국주의를 만나 병탄을 횡피한 후로 선교의 자유가 박탈되며 교육기관이 유단되어 일국의 생계가 엄밀하더니 (중략) 우리의 쌓이고 가득하였던 불평은 일시에 폭발하여 전국일치로 독립을 주장하며 자유를 회복코져 할새 (중략) 완명무도한 일인은 어린 아이와 약한 부녀까지 말할 수 없는 능욕과 악행을 했으며 회당과 학교를 불살라 화를 입은 곳이 1백여 처입니다.

전능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원하실 줄 믿는 고로 이같이 여러분께 간구하오니 여러분은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다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주시기를 바라오며 동시에 여러분의 심후한 도덕적 원조를 바라옵나이다.

또한 그는 김병조와 함께 '중국기독교에 고하는 글'을 발표했다.

우리 한국은 아세아의 동쪽 한 구석에 치우쳐 있어 구미로부터 복음이 전해진 것이 타국보다 비교적 늦은 30여년 전의 일이었다. (중략) 오랫동안 어둠 속을 헤메이던 인민들에게 진리의 빛을 보게 하니 구원 얻은 사람이 수백만이 되었따. 이제 하느님의 은총을 두루 입어 여러 나라에 자랑할 만하게 되었다. (중략) 저 섬나라의 왜소하고 추악한 오랑캐들은 우리의 준비없음을 엿보고 우리의 쇠약함을 이용하여 마침내 합병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합병선언 중에 있던 종교의 자유에 관한 조항은 다만 종이 위에 쓰인 한갓 공문에 불과하게 되고 10년이 지나는 동안 한국 기독교회를 질시함이 날로 심해지고 (중략) 금년 3월 1일 한국 서울로부터 시작된 독립선언 운동은 전국이 이에 호응하고 해외 동포에 이르기까지 함께 외치며 일어나니 그 중심 인물들은 바로 기독교, 유교, 불교, 천도교 등 각 단체의 수령들이었다. (중략) 저들 일인들은 이것을 교회 박멸 기회로 삼았고, 그 박해의 사실은 옛날 로마 시대의 네로 황제가 한 짓보다 더 심했다.

이 참절 비통한 참상을 만리 험한 길을 와서 상해에 머물면서 이러한 사실을 구미의 각 보도기관에 소개하고 이제 중국교회에 알리는 바이다. (중략) 오직 바라건대 이 고충을 살피어 함께 소리높여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이 빈사 상태에서 허덕이는 우리 민족을 구하고 자유와 행복을 얻어 누릴 수 있기를 기망하오며 피맺힌 축원이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외다.

그러나 1923년 2월에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를 아예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중심으로 통일된 독립운동을 이행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후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로 대체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개조해서 통일 독립운동 단체로 유지시키자는 개조파간의 극한 대립이 펼쳐졌다. 손정도는 중도파의 입장에 서서 양측의 대립을 어떻게든 무마시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국민대표회의는 개조파 전원이 탈퇴한 가운데 창조파만의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조선공화국을 수립했지만 재정문제로 인해 별다른 활동을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으로 바꾸어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각파의 대립에 시달리며 갈수록 역량이 약화되자, 손정도는 더이상 임시정부로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북만주 지역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설립하기 위해 길림으로 떠났다.

1924년 길림으로 향한 손정도는 길림교회에서 목사로 일하면서 교회 안에 유치원과 공민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2세들의 교육, 특히 민족교육에 전력을 기울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또한 그는 신도들이 애국심과 신앙심으로 뭉치도록 전력을 쏟았고 동포들이 억울한 사정이 있을 때는 대신 관청에 출입하며 의지할 곳 없는 동포들의 변호사 역할도 했다. 그 결과 길림교회는 길림 일대 한인 동포들의 구심점으로 변모했다. 또한 그는 가난한 교인들을 위해 식사를 제공했다. 손원일의 회고록에 따르면, 손정도는 부엌에 큰 가마솥을 장만하고 독립군 병사들이 '연락쪽지' 한장을 내밀면 즉시 식사를 무료로 제공했다고 한다. 아내 박신일 역시 정미소에 나가 날품팔이를 하면서도 남편을 성심껏 보필했다.

손정도는 독립운동 근거지를 세우기 위해 고향의 재산을 팔아 액목현 지역에서의 토지구입과 농민호조사의 설립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생산 증가를 도모하기 위해 근대 과학적 영농 방법과 기계, 수력전기 개발에 힘썼고 교육의 발전을 도모했으며 위생생활을 유도하여 보건에 대해 계몽했다. 이처럼 그의 억척스런 노력에 의해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는 길림 일대 동포들이 모여 살 만한 터전을 마련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또한 정의부가 계획한 농업공사 설립에 협력했고, 고려혁명당이 추진한 유일당운동에도 적극 협조했다.

1926년, 손정도는 만주에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참의부, 신민무, 정의부를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3부 통합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마침 안창호가 길림에 찾아온 것을 기회 삼아 3부 통합을 위한 회합을 주선했고, 김동삼, 이탁, 현정경, 현익철, 오동진, 김좌진, 이웅, 김유성, 김복대, 김지간 등을 초빙했다. 그러나 각 단체 안에 있는 파벌 간의 이해관계로 인해 완전한 통합에는 실패하고 부분적인 통합체인 국민부가 1928년 11월 15일에 조직되었으며, 국민부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들은 혁신의회를 조직했다.

1927년 2월 14일, 안창호가 길림성 외곽의 대동공사에서 연설하던 중 중국 경찰들에개 체포되었다. 이에 손정도는 '한국 노병회'와 함께 안창호 석방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는 봉천에 있던 백영엽과 연락해 길림성장 장작상과 교섭하고 한국 노병회가 특파한 이유필을 대동해 베이징으로 가서 장쉐량을 만나 안창호를 석방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중국 당국과의 교섭을 위해 필요한 소요자금을 모집해 평양의 홍사단 간부들로부터 700원을 전달받고 이 자금을 활용하여 안창호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안창호는 구금 21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9년, 손정도는 황고둔 사건 이후 일제의 만주 침략 야욕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3부 통합 운동이 실패해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역량이 갈수록 악화되자 길림을 떠나 베이징으로 가서 독립 투쟁을 지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손정도는 우선 가족들을 봉천으로 보냈고, 자신은 베이징에 들려서 그곳에서 앞으로 전개할 독립투쟁의 활로를 모색했다. 그런데 길림에서 또다시 조선인 배척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손정도는 급히 길림으로 돌아가서 장학량과 길림성장 장작상 등을 직접 만나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무리했던 그는 몸이 허약해졌고, 결국 일본의 만철이 운영하던 동양병원에 입원했으나 다음날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로 퇴원했다. 병원을 나온 그는 액목현의 한 동포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다가 지병인 위궤양이 악화되는 바람에 다시 동양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이미 병이 깊어진 그는 홀로 병실에서 숨을 거두였다. 이때가 1931년 2월 19일로, 향년 50세였다.

손정도의 부음 소식은 1931년 2월 21일 동아일보에 보도되어 전 국민에게 알려졌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기독교인들은 애도했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10개월이 지나도록 장례비가 없어 길림 동문 밖 봉천인(奉天人)의 의지(義地 : 임시 장지) 1등 제8호 정구실(停軀室)에 임시 사빈(沙殯)으로 봉안되어 있다가, 이 해 6월 첫 회 연회석상에서 이러한 사실이 호소되어 장례비를 거두게 되어 9월이 되어서야 길림성 북문 밖 북산(北山)에 있는 중국인 토지 100여 평을 830원에 구입하여 유택지로 삼아 시신을 안장할 수 있었다.

한편 장례식이 치뤄진 2월 22일 일본 경찰은 그의 죽음을 추도하는 많은 인파들이 모이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하여 그의 장례식도 성대히 치르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장례식은 그의 처 박신일(21일 도착)과 실제(實弟) 손경도(孫敬道) 및 당지의 이름 있는 조선인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히 치뤄졌다.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 손정도의 동생 손필도 씨가 손정도의 묘소를 밀산으로 이장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9월 11일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국립서울현충원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손정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일성과의 관계[편집 | 원본 편집]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손정도와 자신의 관계를 '손정도 목사와 나'라는 항목에서 상세하게 다뤘다. 김일성은 이 글을 통해 손정도를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으로 추앙하고 손정도 덕분에 새로운 진리에 눈을 뜨게 되어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더 큰 꿈을 안고 만주 동북지방으로 들어갔다고 회고했다.

나는 감옥 생활을 할 때 손정도 목사한테 많은 방조를 받았다. 손정도 목사는 내가 길림에서 혁명활동을 한 전기간 나를 친혈육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사람이었다. 그는 국내에 있을 때 우리 아버지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같은 학교(숭실중학) 출신이라는 관념도 작용하였지만 그보다는 사상과 리념의 공통성이 아버지와 손정도를 뜨거운 우정으로 결합시켰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생전에 손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중략)


내가 길림에 와서 옥문중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손정도와 같은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교직을 차지하고 있는 대동문 밖의 례배당은 우리의 전용 집회 장소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 례배당에 자주 찾아가 풍금도 타고 연예 선전대의 활동도 지도했다. 손정도 목사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건 다 해결해주고 우리의 혁명활동을 충심으로부터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

손정도 목사도 나를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었다. 내가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있을 때 장작상에게 뢰물을 먹이면서 나를 석방시키기 위한 청원운동을 이끌고 나간 주동인물도 바로 손목사였다. 손목사는 나를 친구의 자식 뿐 아니라 일가견을 가진 혁명가로 대접해주었다. 그는 독립운동자들 속에서 론의의 대상이 되어 해결을 보지 못하는 어려운 가정문제까지도 내 앞에 서슴없이 털어놓고 조언을 요구했다.

손정도의 딸 손인실은 1993년 10월 2일 <토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일성이 손정도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것에 대해 "김일성 자신이 만주에서 활동했다는 걸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일제 하 길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아버지를 내세운 것으로 추측된다."며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손정도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주장했으며, 김일성이 손정도와 친밀하게 지냈다는 것 역시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김일성이 자신과 오빠 손원태를 들먹이면서 친동생으로 보살펴줬다고 밝힌 것에 대해 "그런 기억이 전혀 없다. 단지 그때 어린 소녀, 소년들은 우르르 몰려 다니면서 전쟁놀이를 즐겼는데, 무리 중에서 가끔 얼굴을 대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김일성이 북한 주민들에게 자신을 과장, 선전하려고 아버지를 이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손인실의 오빠이자 손정도의 차남 손원태는 김일성과 같이 길림에 있는 육문중학에 다니면서 길림 소년회 회장을 맡았고, 길림교회에 출석했으며 학생회 회장과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한 것은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또한 손원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길림 소년회' 회장이었으며 동생인 손원태와 손인실이 그 모임에 참석하여 함께 어울렸다고 기록했다. 이로 볼 때 김일성과 손정도 가족과의 관계는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김일성의 회고에 따르면, 손정도는 감옥에서 나온 김일성에게 길림을 떠나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손정도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때 손정도는 자기 집에서 김일성을 보양시키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걸 매우 미안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훗날 김일성은 북한의 독재자로 군림한 뒤에도 손정도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았고, 현재 북한은 손정도를 김일성의 스승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각주

  1. 손정도의 출생년도는 1872년, 1880년, 1881년, 1882년 설 등이 제기되고 있는데, 아들 손원일은 회고록에서 아버지가 1881년생이라고 명시했다. 또한 <기독교 조선감리회 동부, 중부, 서부 제1회 연합회회의록>에 기재된 손정도 회원 명부엔 1881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는 1881년생을 채택했다.
  2. 현재 평안남도 증산군 낙생리에 편입된 곳이다.
  3.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