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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역사 ===


설날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은 삼국시대 때부터 존재한다. [[삼국사기]]의 「제사」편에서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다거나 시조 동명웡 사당에 배알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제사를 설날의 풍습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신라에서도 정월 2일과 정월 5일에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는 비처왕 시절 설날을 쇠었다는 것이 나와있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이미 설과 [[단오]], [[추석]] 등이 명절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으며 구한말까지 설날은 음력 1월 1일으로 유지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이 이뤄지면서 태양력이 도입되고 이후 양력 1월 1일이 설날이 되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음력으로 풍습을 지내온 우리나라 사람들은 양력설에 거부감을 느끼고 음력설을 지키려 했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조선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양력설을 강요하고 음력설날에는 흰 옷을 입거나 떡을 돌리는 등의 설 풍습을 금지하였다. 이에 큰 반발을 느낀 서민들은 양력설을 '왜놈 설'이라 부르기도 하면서 음력설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양력설을 쇤다는 것은 거의 매국행위와 가깝게 취급했던 듯.
설날은 추석과 더불어 한국의 명절 중의 하나로 음력 1월 1일이다. 설이라고도 한다. 설날은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아침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설날은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는 음력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9년]] 대통령령으로 양력설만 공휴일로 인정하는가 하면 박정희 정부 때에는 음력설날을 공휴일로도 지정하지 않고 학교도 쉬지 못하도록 했다. [[전두환]]이 집권하던 [[1985년]]에서야 음력설은 다시 공휴일로 돌아오게 되었고, [[1989년]]에는 전후 1일까지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또 설날을 ‘삼가다’ 또는 ‘조심하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과 질서가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다.
한편 설날을 원일(元日), 원단(元旦), 정조(正朝), 세수(歲首), 세초(歲初), 세세(歲時), 연두(年頭), 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린다.
설날의 유래를 찾아보면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없지만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 보면 ‘삼국사기’에서 261년 백제에서 설맞이 행사를 했고, 651년 신라에서 정월 초하룻날 왕이 신하들 이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 고이왕, 책계왕 등이 정월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고, 고려 시대에는 설날이 정월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 등과 함께 9대 명절의 하나였고, 조선 시대에는 한식·단오·추석과 함께 설날이 4대 명절 중 하나로 여겨졌다고 하니 그 역사가 길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설날에는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친척이나 이웃 어른들에 세배를 하는 것이 고유의 한국 풍습이다.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고 하여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의 15일 동안을 정초라 하며, 이 기간 동안 행하여지는 여러 풍습이 전해진다.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한 후에는 윷놀이·널뛰기·연날리기 등 여러 민속놀이를 하며 이 날을 즐겼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1년 동안 빗질하며 빠진 머리카락을 ‘빗상자’ 안에 모아 두었다가 설날 해질 무렵에 태우며 나쁜 병을 물리치길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역사 기록에 한국 설날로 정확히 언급한 기록은 다음과 같은데 서기 488년 신라 비처왕 시절 설날을 쇠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으며, 이후 고려와 조선까지 이어졌다. 을미개혁으로 양력이 도입되면서 1896년부터 공식적인 새해 첫날의 기능은 양력설에 내주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 문화 말살 정책을 편 일제(日帝)는 조선의 음력설을 없애기 위해 조선인들이 음력설에 세배를 다니거나 설빔을 차려입은 경우에는 먹물을 뿌려 옷을 얼룩지게 하고 떡 방앗간을 돌리지 못하게 경찰을 동원해 감시하는 등 온갖 탄압과 박해를 가하였으나, 음력설을 쇠는 풍습을 없애지는 못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40여 년간 음력설은 명절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양력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를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특히,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는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이유로 사기업체의 휴무에 불이익을 주면서까지 음력설을 없애려 하였고, 양력설에 차례를 지낼 것을 권장하여 서울 등 대도시의 일부 가정에서는 양력설을 쇠는 풍토가 생겨났다.
그러나 대부분 가정에서는 여전히 음력설에 차례를 지내는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에 음력설도 공휴일로 지정하여 이러한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정부는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음력 1월 1일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영어로는 'Lunar New Year's Day', 'Chinese New Year's Day', 'Korean New Year's Day'로 번역한다. 다만 'Korean New Year's Day'는 진짜 거의 안 쓰이거나 매우 드물게 사용되고, 'Lunar New Year's Day'는 사전적 단어로써 (lunar는 달의,태음의, 달의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의미로 서양인도 음의 뿌리를 시초로 시간의 개념을 인식했다는 것을 어원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양인들이 공식적인 석상에서 사용하며, 'Chinese New Year's Day'는 서양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도 춘절과 뗏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같은 날에 음력설을 쇠고 있다. 일본에서도 쇼가쓰란 이름으로 같은 날에 설을 쇠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탈아입구의 일환으로 음력을 완전히 금지하고 양력 1월 1일로 바꾸었다.
과 새해 아침에 축하를 하고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 관련 창작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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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22일 (토) 20:14 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개요

파일:설날모습.jpg
설날에 한복을 입고 윷놀이를 하는 모습.현실은 그딴 거 없다

새로운 해의 첫 날을 기리는 명절이다. 추석이랑 엄청 헷갈린다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명절로 여기는 날이다. 묵은 해를 떨쳐버리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아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며 음식을 해 먹거나 고유한 풍습으로 서로의 건강과 운을 빌어주는 날이다.

한국의 설날

추석과 함께 친척들이 합법적으로 돈을 뺏어가거나 뺏기는 대한민국의 2대 명절. 정월 초하루나 구정(舊正)이라고도 하며, 음력 1월 1일, 즉 새해 첫 날이다. 양력으로는 1월 말~2월 중순에 지내게 된다. 친척들이 모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친척이나 이웃어른들에 세배를 하기도 한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의미에서 떡국을 끓여 먹으며, 윷놀이, 화투, 연날리기 등 기타 겨울에 할 수 있는 전통놀이를 즐기는 풍습이 있다. 흔히 설날의 전날과 다음 날을 묶어서 3일 연휴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6년부터는 대체휴일제가 적용되었다.

이름의 어원

'설날'이란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주장이 있다.

  • '낯설다'의 어근인 설-을 활용한 것이라는 주장.
    • 묵은 해에서 새로운 해로 넘어가는 날이므로 새해에 대한 낯섦과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 시작된다는 의미인 '서다'[1]에서 '선날'이 파생되고 '설날'로 변화했다는 주장.
    • '서다'는 '개시하다'라는 뜻이므로 '선날'은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으로 해석한다. 이후 연음화 현상에 의해 설날로 바뀌었다는 것.
  • 옛말 '섧다'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주장.
    • '섧다'는 '삼가다,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뜻의 옛말이다.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해로 바뀔 때 시간 질서가 바뀌는 것이므로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의 경우 설날을 표기하는 여러 한자어 중, '신일(愼日)'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이외에도 한자어로 원일(元日)[2], 원단(元旦)[3], 정조(正朝)[4], 세수(歲首)[5], 세시(歲時)[6]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양력 1월 1일인 '신정'[7]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구정(舊正)'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국립국어원에서는 설날 쪽을 추천하고 있다.

풍습

한 해의 운수가 그 해의 첫 날인 설날과 관련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기에 한 해의 운수를 점치고 태평과 풍년을 기원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유래하여 건강 및 장수를 의미하는 음식을 먹거나 서로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풍습이 주를 이룬다. 요즘은 핵가족 위주로 간소화되면서 없어진 풍습이 많지만 그래도 최대 명절이다 보니 단오칠월칠석에 비해서는 많이 남아있는 편.

설빔

새해를 맞아 아침 일찍 일어나 남녀노소 모두 새로운 옷을 해 입는데 이 옷을 '설빔(歲粧)'이라 한다. 전통적으로 평상복과 달리 섣달 그믐 이전에 화려하거나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 등을 마련하여 대체로 대보름까지 입고 지낸다. 요즘은 한복도 거의 안 입는 추세라,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 혹은 꼬꼬마들이 기념으로 사 입는 것 이외에는 보기 힘들어졌다. 이 문서 제일 위에 있는 사진도 설정샷

차례세배, 덕담

파일:차례상.jpg
여러 음식이 올라간 차례상.

유교적 전통에 따라, 새해 아침에는 가장 먼저 조상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제사를 올린다. 집안의 모든 식구가 참여하기 때문에 먼 곳에 사는 친척들도 설날 아침에는 한 데 모여야 하기 때문에 설날 전후로 이른바 민족 대이동이 발생한다. 설날 차례상에는 일반 제삿상과 다르게 대신 떡국이 올라가기도 한다.

차례가 끝나면 항렬 순서대로 세배를 올린다. 서로 흰 봉투가 오가거나 건강이나 행복을 빌어주는 덕담이라는 이름의 죽창이 오고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는 집안 어른들 뿐만 아니라 동네를 돌며 이웃어른이나 친인척들도 찾아뵈고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예의였으나, 1990년대 말~2000년대초 이후에는 친척들에게 간단하게 인사하고 성묘를 가거나 핵가족화,개인주의의 발달로 개인적으로 명절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음식

차례상의 음식들로 음복을 하는 것 외에도 세배하러 온 손님께는 떡국과 여러 가지 음식을 내어드린다.

떡국
계란지단과 김가루가 올려진 떡국. 진한 국물로 봐서는 고기육수 같다. 맛있겠다

둥근 떡의 모양이 동전(엽전)과 비슷하다 해서 금전운을 기원하거나, 길다란 가래떡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므로 밝다고 깨끗하다는 의미와 태양처럼 둥근 흰색 가래떡을 썰어 만들었다는 해석도 있다. 물론 지방에 따라 들어가는 재료는 다를 수 있으며 개성의 경우 조랭이 떡국을 먹기도 한다고 한다. 이 외에도 굴떡국, 다슬기떡국 등 뭘 더 넣든지 간에 맛만 좋으면 그만인 모양(...) 원래 국물은 꿩고기로 육수를 내어서 만드는 것이었으나 꿩이 워낙 귀한지라 닭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꿩 대신 닭이라는 표현이 떡국의 국물에서 나온 것.

다들 알다시피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의미로, 설날 뿐만 아니라 양력 1월 1일에 해먹기도 한다. 물론 아무때나 해 먹을수도 있지만.

식혜에 묻혀 덜 유명하지만 수정과는 전통적으로 설날에 먹던 고급 음료였다.[8]

기타

이 외에도 약과곶감 등등이 있다.

놀이

온 가족이 모이는 즐거운 날이므로 연날리기, 윷놀이, 널뛰기 등과 기타 놀이들을 하는 풍습이 있지만 요즘 들어서는 거의 보기가 힘들다. 연날리기의 경우 그 해의 재앙이나 못된 액을 연에 모두 실어서 날려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데, 그냥 연싸움을 즐길수도 있다. 팽이치기제기차기, 눈썰매, 투호 등등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놀이는 많다. 그 중에서도 널뛰기는 '정초에 널을 뛰지 않으면 발에 가시가 박힌다' 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설날의 대표적인 놀이였던 모양. 윷놀이 또한 가장 보편적인 놀이로서 설날에 점을 치는 용도로도 쓰였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섣달 그믐날이나 새해 첫 날에 윷을 던져 나온 패로 좋고 나쁨을 점쳐보는 놀이가 있었으며, 이를 일컬어 나희(儺戱)라 하였다고 한다. 가능한 조합에 따라 모두 64개의 괘가 나오며, 각각의 경우에 따라 처신에 주의해야할 사항이나 그 해의 운수에 대한 풀이말이 정해져 있다.[9]

기타 풍습

요즘 들어서는 아래와 같은 풍습이 많이 사라지고, 찾아보기도 힘들다.

복조리

정월 초하루 아침에 파는 복조리를 집에 걸어놓으면 그 복조리 안에 복이 담긴다고 한다. 일찍사면 일찍일수록 복이 더 많이 들어온다 하여 이른 새벽부터 기다리기도 했으며, 그 해에 쓸 조리는 모두 그날 사기 때문에 여러개를 사갔다고 한다.

야광귀 쫓기
설날 밤에 야광이란 귀신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신어 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다. 신을 잃어버린 아이는 그해 운수가 불길하다고 하여 모두들 신을 감추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또한 체를 마루 벽이나 대문 위에 걸어 두면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느라고 아이들의 신을 신어 볼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날이 밝으면 도망쳐 버린다고 한다.[10]
설빔 : 설날 아침에 입는 새 옷


문안비 : 정초에 새해 문안을 대신 드리는 계집종


복조리 걸기 : 섣달 그믐날 한밤중부터 정월 초하룻날 아침 사이에 사서 걸어놓는 조리

·

청참 : 새해의 첫새벽에 치는 신수점

덕담 : 신년을 맞이하여 친지들에게 잘되기를 기원하는 말


설그림 : 정초에 집안과 밖에 붙인 그림

[섣달] 이 외에도 설날 전날인 그믐날에는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고 하여 밤을 새거나, 새해를 빚없이 시작하기 위해 1년동안 받아놓았던 금전적인 빚이나 채무 등도 모두 청산하려고 헀다.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집안 곳곳에 촛불을 켜놓기도 하고, 여자들은 1년동안 빗질할 때 빠진 머리를 모아 설날 저녁에 태웠다고 한다.

역사

설날은 추석과 더불어 한국의 명절 중의 하나로 음력 1월 1일이다. 설이라고도 한다. 설날은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아침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설날은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 되었다고 한다.

또 설날을 ‘삼가다’ 또는 ‘조심하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과 질서가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다.

한편 설날을 원일(元日), 원단(元旦), 정조(正朝), 세수(歲首), 세초(歲初), 세세(歲時), 연두(年頭), 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린다.

설날의 유래를 찾아보면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없지만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 보면 ‘삼국사기’에서 261년 백제에서 설맞이 행사를 했고, 651년 신라에서 정월 초하룻날 왕이 신하들 이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 고이왕, 책계왕 등이 정월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고, 고려 시대에는 설날이 정월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 등과 함께 9대 명절의 하나였고, 조선 시대에는 한식·단오·추석과 함께 설날이 4대 명절 중 하나로 여겨졌다고 하니 그 역사가 길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설날에는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친척이나 이웃 어른들에 세배를 하는 것이 고유의 한국 풍습이다.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고 하여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의 15일 동안을 정초라 하며, 이 기간 동안 행하여지는 여러 풍습이 전해진다.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한 후에는 윷놀이·널뛰기·연날리기 등 여러 민속놀이를 하며 이 날을 즐겼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1년 동안 빗질하며 빠진 머리카락을 ‘빗상자’ 안에 모아 두었다가 설날 해질 무렵에 태우며 나쁜 병을 물리치길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역사 기록에 한국 설날로 정확히 언급한 기록은 다음과 같은데 서기 488년 신라 비처왕 시절 설날을 쇠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으며, 이후 고려와 조선까지 이어졌다. 을미개혁으로 양력이 도입되면서 1896년부터 공식적인 새해 첫날의 기능은 양력설에 내주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 문화 말살 정책을 편 일제(日帝)는 조선의 음력설을 없애기 위해 조선인들이 음력설에 세배를 다니거나 설빔을 차려입은 경우에는 먹물을 뿌려 옷을 얼룩지게 하고 떡 방앗간을 돌리지 못하게 경찰을 동원해 감시하는 등 온갖 탄압과 박해를 가하였으나, 음력설을 쇠는 풍습을 없애지는 못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40여 년간 음력설은 명절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양력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를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특히,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는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이유로 사기업체의 휴무에 불이익을 주면서까지 음력설을 없애려 하였고, 양력설에 차례를 지낼 것을 권장하여 서울 등 대도시의 일부 가정에서는 양력설을 쇠는 풍토가 생겨났다.

그러나 대부분 가정에서는 여전히 음력설에 차례를 지내는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에 음력설도 공휴일로 지정하여 이러한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정부는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음력 1월 1일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영어로는 'Lunar New Year's Day', 'Chinese New Year's Day', 'Korean New Year's Day'로 번역한다. 다만 'Korean New Year's Day'는 진짜 거의 안 쓰이거나 매우 드물게 사용되고, 'Lunar New Year's Day'는 사전적 단어로써 (lunar는 달의,태음의, 달의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의미로 서양인도 음의 뿌리를 시초로 시간의 개념을 인식했다는 것을 어원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양인들이 공식적인 석상에서 사용하며, 'Chinese New Year's Day'는 서양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도 춘절과 뗏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같은 날에 음력설을 쇠고 있다. 일본에서도 쇼가쓰란 이름으로 같은 날에 설을 쇠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탈아입구의 일환으로 음력을 완전히 금지하고 양력 1월 1일로 바꾸었다. 과 새해 아침에 축하를 하고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관련 창작물

다들 잘아는 "까치 까치 설날은~"으로 시작하는, 설날이 제목인 동요가 있다. 무려 1924년에 작곡된 노래다(...)

연도별 설날

북한의 설날

북한의 설날은 1953년 휴전 이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설날을 사회주의 생활양식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지 않다가, 1989년에 설날을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오래전부터 음력설보다 양력설을 지금까지 더 중시하고 있으며, 음력설 연휴에서 북한의 경우 음력 1월 1일에서 3일까지 쉽니다.

새해 맞이는 꽃다발을 마련하여 새벽부터 김일성 동상을 찾아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동상 참배를 마친 주민들은 집에 와서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김일성ㆍ김정일 초상화 앞에 앉아서 충성을 다짐하면서 큰절을 하고 설 음식을 먹는다고합니다. 북한에선 설 음식으로 주로 떡국, 만두국, 설기떡, 찰떡, 절편, 사탕, 과자, 수정과, 식혜, 고깃국, 강정 등이 인기 있는 음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공통점

1 가족 친척들이 모여서 설날 민속음식 해먹으면서 제상 차려서 조상들께 절을 한다

2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세배돈을 준다

3 부모님들이 음식을 바리바리 싸준다

4 자식들도 음식을 해서 가져간다

5 한복을 입는다

다른점

1 남한 떡국을 먹는다 북한 떡국을 안먹는다 (북한은 떡국을 안먹습니다)

2 남한 그냥 집에서 논다 북한 한복입고 꽃다발 들고 김씨 가족의 동상을 찿아가서 인사한다 (직장 상사 또는 선생님, 친구의 부모님을 찿아뵙고 인사드린다)

2017.01.12. 17:42

외국의 설날

해외에서도 새해를 맞는 설날을 명절로 삼고 있다. 일본과 일부 서양권 국가들에서는 양력 1월 1일을 기념하며, 중국, 타이완싱가포르이슬람권에서는 각 나라의 음력[11]을 기준으로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중국의 설날

춘절(春節)은 4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새해맞이 명절이자 봄맞이 축제로 중국을 비롯한 중국 문화권의 가장 성대한 명절이다. 오랜 옛날 한 해의 농사를 갈무리하며 하늘과 조상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새해의 풍작과 행복을 기원하던 행사에서 유래했다. 음력으로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 춘절 당일이며, 중국 풍속으로는 음력 12월 23일부터 다음 해 음력 1월 15일 원소절(元宵節)까지 명절 분위기가 이어진다. 약 3주의 기간 가운데 섣달 그믐날과 정월 초하루가 춘절의 정점에 해당한다.

12월 마지막 주가 되면 온 중국 대륙이 명절 분위기로 들뜬다. 거리에는 홍등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집집마다 대문에는 길한 대구를 써 넣은 붉은 춘련(春聯)을, 집 안에는 상서로운 소재를 그린 연화(年畵)를 장식한다. 한편 중국 전역에서 다채로운 지방극과 신령스런 동물의 탈을 쓰고 벌이는 용춤과 사자춤 공연, 등불 놀이 등 성대한 행사가 펼쳐진다. 대형 공원에서는 각종 공연과 전통놀이, 장터가 어우러지는 행사인 묘회(廟會)가 열린다.

중국 문화권의 최대 축제, 춘절 중국 문화권의 최대 축제, 춘절 춘절(春節)은 가족, 친지들이 한데 모여 새해를 맞이하는 중국 문화권의 최대 명절이자 봄맞이 축제다. 거리 곳곳에 복되고 길한 붉은색 등불이 걸린다.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에는 가족과 친지가 한자리에 모여 만두를 빚고 딤섬, 생선과 두부 요리, 술 등 명절 음식을 함께 만들어 나눠 먹는다. 자정이 되면 전국에서 액운을 쫓는 의미가 깃든 대규모 폭죽 놀이가 벌어져 명절 분위기가 절정에 이른다. 춘절 당일에는 평소에 만나지 못했던 친척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은 웃어른께 세배를 드린 뒤 빨간색 봉투에 담긴 세뱃돈을 받는다. 중국의 국가 지정 공휴일은 3일이며 지방에 따라 열흘에서 2주, 길게는 한 달까지 쉬기도 한다.

액운을 쫓는 불꽃놀이 액운을 쫓는 불꽃놀이 중국을 비롯한 중국 문화권에서는 축제나 명절에 액운을 쫓는다는 폭죽을 터뜨린다. 위 사진은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Marina Bay)의 새해맞이 카운트 다운 현장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춘절의 종교적 의미와 농제(農祭)는 자취를 감추고 명칭과 날짜, 구체적인 모습 또한 변해왔지만 거대한 땅에 흩어져 살아가는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2. 축제 유래와 역사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신정처럼 양력 1월 1일을 공휴일로 정해 기념한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지내는 설은 음력 1월 1일의 춘절이다.

춘절의 시초는 4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원으로 여러 가지 설이 전해오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서기전 2000년 무렵 순임금이 요임금의 뒤를 이어 천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낸 날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아 기념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명이다. 이는 농경 사회였던 고대 중국에서 한 해의 결실을 거두어들인 뒤 새해의 풍작을 기원하며 올린 제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설을 춘절이라 이르지 않았을뿐더러 날짜도 고정돼 있지 않았다. 기원전 2100년경부터 목성에서 나온 글자인 ‘세’(歲)로 설을 가리켰다고 한다. 실제로 목성은 세성(歲星)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문자학의 고전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목성의 공전 주기인 12년을 바탕으로 12지를 만들었기에 띠가 바뀌는 것을 곧 해가 바뀌는 것으로 보게 됐다고 설명한다. 목성을 뜻하던 문자에 한 해를 가름하는 의미가 더해진 것이다. 서기전 1000년 무렵에는 ‘연’(年)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본래 연(年)은 지금과 다른 의미였다고 한다. 연(年)의 갑골문은 사람 인(人)이 벼 화(禾)를 짊어지고 있는 모습으로, 수확, 나아가 오곡이 풍성하다는 뜻이었다. 1년에 한 번 곡식을 수확하고 이것이 한 해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연’이 곧 한 해를 뜻하게 됐다. 당시 풍작은 유년(有年), 대풍작은 대유년(大有年)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새해를 맞이하며 기원의 제를 올리는 오랜 전통은 다양한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한(前漢, 서기전 202년~서기후 220년)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 최초의 자서(字書) 『이아』(爾雅)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하(夏)나라 때는 세(歲)라 하고, 상(商)나라 때는 사(祀)라 하고, 주(周)나라 때는 연(年)이라 하고, 요순 때는 재(載)라 했다.” 비록 시대에 따라 칭하는 이름이 달랐고, 왕조마다 서로 다른 역법을 사용해 1년의 시작일에 차이가 있었으나 예부터 비슷한 시기에 설을 지내온 것으로 추정된다.

전한의 제7대 황제인 한무제(漢武帝, 재위 기간 서기전 141년~서기전 87년)는 사마천과 함께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음력의 바탕이 된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했다. 한무제는 24절기 가운데 입춘(立春)을 춘절로 정했으며 원월(元月)을 새해 첫 달로, 원월의 첫날을 원단(元旦)이라고 불렀다. 즉 새해 첫날인 음력 1월 1일의 명칭이 춘절이 아닌 원단이었던 것이다. 이 이름은 청대까지 계속 사용됐다.

음력 1월 1일이 춘절로 고정된 것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다. 중화민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정부는 기존의 음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력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설도 양력 1월 1일로 정해졌다. 이때부터 원단은 음력이 아닌 양력 1월 1일을 의미하게 됐고, 전통적으로 설 명절을 치르던 음력 1월 1일은 ‘봄 축제’라는 뜻의 춘절(春節)로 바뀌었다. 한때는 음력 설을 치르는 것을 금하기도 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춘절에 설 명절을 지냈으며, 1934년에는 음력 폐지 조치가 철회됐다.

이어지는 문화대혁명 시기(1966년~1977년)에는 춘절 휴가를 억제하고 춘절의 주요 행사인 전통 무용 공연, 폭죽 놀이 등을 모두 봉건 풍습이라며 금지했다가 1980년에 들어서 휴가가 되살아났고 점차 현재와 같은 성대한 춘절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오늘날 춘절은 과거의 종교적 의미나 제사 의식은 거의 사라진 채 가족, 친지가 한데 모여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한 해의 가장 중요한 명절이자 축제가 됐다.

3. 축제 주요 행사 중국 사람들은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을 아울러 설 명절을 지낸다는 의미로 과년(過年)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연중 가장 큰 명절이자 행사이니만큼 준비 기간도 길어, 음력 12월에 들어서면 이미 각 가정에서 부산스럽게 춘절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1) 새해맞이 준비 전통적으로 춘절 기간은 음력 12월 23일에 시작해 새해의 음력 1월 15일 원소절까지 거의 한 달간 지속된다. 춘절을 전후한 시기에는 특정한 날마다 지키는 독특한 풍습이 있다. 예를 들어 음력 12월 8일에는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며 8가지 곡식으로 만든 납팔죽(臘八粥)을 끓여 먹는다. 그리고 춘절 기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음력 12월 23일은 부뚜막을 지키는 조왕신(索王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이날 사람들은 부엌에 조왕신의 신상을 놓고 엿을 바치는데, 단 것을 먹은 조왕신이 하늘의 상제에게 좋은 이야기를 전해줘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오늘날 춘절에 관련된 행사가 많이 줄고 있다고는 해도 중국 곳곳에서 여전히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새해맞이 준비 가운데 집 청소 또한 큰 의미를 지닌다. 고대에는 춘절을 맞아 하는 대청소를 소년(掃年)이라 불렀는데 이는 ‘새해 청소’라는 의미로 질병을 내쫓는 일종의 민간 신앙 의식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춘절에 하는 청소는 지난 해의 불운을 쓸어내고 행운이 들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의식이다. 청소를 끝내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청소함에 넣어두는데, 이는 새로이 도착하는 행운이 쓸려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청소를 끝낸 뒤에 본격적으로 음식과 창문에 붙일 창화, 향, 초, 지전, 폭죽 등 다양한 설맞이 용품을 마련한다.

2) 춘련(春聯) · 연화(年畵) · 전지(剪紙) 중국에는 해마다 설에 새 춘련을 맞춰 문에 붙이는 풍습이 있다. 춘련은 행운을 의미하는 붉은색 종이에 복과 운을 뜻하는 말을 적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붉은색 마름모꼴 종이에 복(福) 또는 희(囍)를 써 거꾸로 붙이는데, 중국어로 ‘거꾸로’를 뜻하는 도(倒)와 ‘도착하다’라는 뜻의 도(到)가 발음이 같기 때문에 ‘거꾸로 된 복’(倒福)은 ‘복이 왔다’(到福)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한다.

한 해의 행복을 기원하며 문이나 실내에 붙이는 연화(年畵)도 새것으로 교체한다. 연화는 보통 2장이나 4장이 한 벌이며 그 소재가 다양하다. 주요 소재인 문신(門神)의 유래는 옛이야기에서 기인한 것으로, 『산해경(山海經)』에는 문에 신도(神荼)와 울루(鬱壘) 그리고 호랑이를 그려두면 두 신이 귀신을 잡아 호랑이에게 먹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밖에 무장(武將)을 두 명 그려 나란히 붙이기도 하며, 물고기를 안고 있는 통통한 어린아이, 역사 속 인물이나 산수화,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花鳥畵) 등이 주요 소재다.

새해의 행복을 기원하는 연화 새해의 행복을 기원하는 연화 춘절에는 새해의 행복을 기원하는 염원을 담은 그림 연화(年畵)를 대문이나 실내에 장식한다. 주요 소재는 귀신을 막아준다는 문신(門神), 기린(麒麟) 등의 상서로운 동물, 어린아이, 꽃과 새 등이다. 전지(剪紙)는 주로 춘절에 만드는 전통 종이 공예품으로, 붉은 색지를 여러 가지 상서로운 모양으로 오려 창이나 문짝에 붙이는 것이다.

3) 음식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즐긴다. 중국의 춘절 요리는 지방마다 다르지만 만두(饅頭), 팥빵인 두포(豆泡), 떡의 일종인 연고(年桀), 끼니 사이에 먹는 간단한 식사인 딤섬(點心), 두부(豆腐), 찹쌀로 만든 간식 미화당(美花糖) 등이 공통적으로 장만하는 대표 음식이다.

남방에서는 한 끼 식사에 보통 십여 가지 요리가 오르고, 두부와 생선을 반드시 포함시킨다. 중국어에서 두부의 부(腐)와 물고기의 어(漁)가 재물이 넉넉함을 뜻하는 부유(富裕)와 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 연고(年桀)라는 떡을 상에 올리는데 연고의 발음이 연고(年高)와 같아 새해에 발전이 있으리라는 기원을 상징한다고 한다.

북방에서는 그믐날 저녁에 식구들이 함께 모여 빚은 교자(餃子)를 먹는다. 중국에서는 본래 소를 넣지 않고 찐 떡을 만두, 소를 넣어 쪄 먹는 것을 교자라 불렀다고 한다. 교자의 ‘교’(餃)는 교체를 나타내는 교(交)와 발음이 같아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4) 섣달 그믐날 밤 음력 12월 31일은 춘절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다. 제석(除夕) 또는 제야(除夜)라고도 불리는 이날 저녁에는 가정마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연야반(年夜飯)이라는 제야 음식을 먹는다. 또한 연야반을 먹고 나서 이튿날 새벽까지 밤을 새는 풍습이 있다. 한밤중에 내려온 신에게 세배를 드리기 전까지 잠을 자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연야반을 먹은 뒤 오랜만에 모인 식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거나 마작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밤을 새우는 것을 수세(守歲)라 한다. 그리고 12시 자정이 되면 중국 전 지역에서 폭죽(爆竹)이 터진다. 이 시각이 춘절의 절정에 해당한다.

밤을 지새우고 폭죽을 터뜨리는 풍습은 옛이야기에서 유래했다. 과거에 중국 사람들은 산속 귀신이 역병을 만들어낸다고 여겨 대나무를 불에 태워 껍질이 터지는 소리로 귀신을 쫓았다고 한다. 이후 폭죽이 만들어진 후에는 대나무를 폭죽으로 대체했다. 폭죽은 중국인에게 아주 익숙한 것으로, 세계 최초로 화약을 발명한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폭죽을 흔히 즐겼다고 한다. 사악한 것을 쫓아내는 민간 신앙에 폭죽이 더해져 폭죽놀이가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춘절의 풍습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춘절에도 내내 폭죽 소리가 끊이지 않으나, 환경 오염과 안전 문제로 인해 베이징을 비롯한 일부 대도시에서는 금지되기도 한다.

5) 세뱃돈과 새해 인사 중국에서는 세뱃돈을 빨간 꾸러미라는 의미의 홍포(紅包)라고 부른다. 춘절 당일 아침에 식사를 한 뒤 손아랫사람이 어른에게 절을 올리면 어른들이 덕담과 함께 홍포를 준다. 새해 인사로는 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의미의 춘절쾌락(春节快乐)이나, 부자 되라는 뜻의 금옥만당(金玉滿堂), 영춘접복(迎春接福), 만사여의(萬事如意)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6) 전통 놀이 춘절에는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나 친지들끼리 다양한 놀이를 즐긴다. 대표적인 전통 놀이로는 용춤, 사자춤 등이 있다. 용춤은 춘절 외에도 중국 문화권의 큰 축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용은 농경사회에서 중요시하는 날씨를 관장한다고 여겨져 널리 사랑받아왔다. 천으로 긴 용의 형상을 만들고 여러 사람이 조종한다. 맨 앞 사람이 용 머리를 들고 나아가면 뒤따르는 사람들이 박자를 맞춰 용이 움직이는 듯한 모양새를 만든다.


사자춤 행운을 불러들인다는 사자춤은 중국 각지는 물론 전 세계 중국 각지에서 공연되고 있다 사자춤은 사자의 형상과 동작을 모방해 만든 것이다. 이때 사자는 흔히 우리가 보는 사자와는 다른, 용과 마찬가지로 신성시되는 동물로 악운을 쫓고 행운을 불러온다고 여겨진다. 보통 마에 물을 들여 사자의 가죽을 만들고 그 속에 2인 혹은 3인이 들어가 춤을 춘다. 한 사람이 머리를 조종하고 다른 사람은 꼬리를 조종하며 무사 한 사람이 공을 들고 사자를 희롱한다.


. 7) 묘회(廟會) 대형 공원에서 열리는 묘회(廟會)도 빼놓을 수 없다. 본디 묘회는 절에서 신불에 제사를 지낼 때 임시 장터가 들어섰던 것을 일컬었으며 현대에 들어 각종 공연과 전통놀이, 장터가 어우러지는 행사로 변모했다.

일본의 설날

일본설날의 전통적인 장식물 및 행사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가도마쓰(門松) : 상록수인 소나무와 생명력이 강한 대나무로 만들어져 건강하게 오래 장수하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이 가도마쓰는 새해 아침에 집 대문 앞 또는 현관 입구에 놓여지는데, 최근에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가도마쓰의 장식도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또 호텔이나 백화점·회사 등의 현관에서는 커다란 가도마쓰를 세워 도시의 새해를 장식한다.

◆ 시메카자리(금줄장식) : 악귀를 쫓기 위해서 집 안 여기저기에 시메카자리를 치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주문의 의미를 지닌다. 요즘에는 새해 1월 15일경까지 이 시메카자리를 집의 문 앞뿐만 아니라 자동차나 오토바이에도 달고 다니면서 교통사고 예방을 기원하기도 한다. 근대화된 생활의 상징인 자동차와 가장 전통적인 시메카자리의 융합은 일본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의 조화를 나타내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 오토시다마(お年玉) : 오토시다마는 한국의 세뱃돈과 같은 것으로 일본에서는 신에게 바치고 남은 것을 나누어준 것이 그 시초이다. 요즘 아이들은 설날에 오토시다마를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오토시다마로 예금 계좌를 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어린이들이 자주 찾는 문구점에서는 오토시다마 주머니를 특별히 제작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 오세치 요리 : 옛날에는 어느 집이고 설을 위해 오세치 요리를 만들었지만, 최근에는 백화점 식료품 매장에서도 살 수 있다. 오세치 요리는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단맛을 많이 내서, 젊은이들에게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음식물에 대한 기호의 변화와 냉장고의 보급에 따라 오세치 요리는 점차 모습을 감추어가는 추세이다.

◆ 놀이(遊び) : 일본의 설날 놀이로 이제는 점차 사라져가는 남자아이들의 연날리기, 여자아이의 하네쓰키(배드민턴과 비슷한 일본의 전통놀이)가 있다. 가루타토리(트럼프와 비슷한 전통놀이)는 전통적인 놀이라서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 연하장(年賀狀) : 설날에는 연하장을 보내는데, 이것은 1906년 우정국 직원의 고안에 의해 '연하 특별우편'제도로 정착된 이후부터이다. 12월 20일경까지 연하장을 우체통에 넣어두면 우체국에서 수급 분류해두었다가 새해 아침 새벽에 일제히 각 가정으로 배달한다. 이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중 한때 중단되었지만 지금까지 이어져왔으며, 40억 장에 이르는 연하장이 정월 초 며칠 동안에 전국 각지에 배달된다.

판화와 삽화 등 재미있는 것도 많으며 요즘은 행운의 번호를 기록하여 추첨을 통해 당첨금을 지급하는 등 연하장은 설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연하장 사교'라는 말이 있듯이, 나이가 들어도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연하장을 주고받거나 평소 멀리 떨어져 소원해졌던 사람들도 연하장만은 주고받기 때문에 연하장은 인간관계를 묶어주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슬람권의 설날

한국의 설날 혹은 추석처럼 ‘이둘 아드하’는 이슬람 권의 최대 명절로 이슬람력 12월 10일에 열린다. 이 명절은 아랍어로 ‘이드’는 기념일, ‘아드하’는 희생을 뜻해 ‘희생제’라고도 불린다.

‘이둘 아드하’는 예언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의미로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려 했지만 하나님이 이를 면제해 주시고 양을 희생시킨데서 유래했다. 무슬림들은 이 기간 동안 하나님에 대해 순종하는 신앙심을 고취시킨다.

무슬림들은 모스크가 아니더라도 공공장소에 모여 집단 예배를 하고 아브라함이 남긴 전통에 따라 양과 염소 같은 가축을 희생물로 삼아 그 고기를 가난한 사람들, 이웃, 가족과 나눠 먹는다.

참고 문서

백:설날, 백:한국의 설날, 나무:설날, 위키백과:양력설

브리태니커 사전의 설날에 대한 설명

국립민속박물관의 설날에 대한 설명

설날의 풍속

설날의 풍속 2

각주

  1. 장이 서다와 같은 용법
  2. 元(첫째) 日(날)
  3. 元(첫째) 旦(아침)
  4. 正(정월) 朝(초하루)
  5. 歲(새해) 首(첫째, 머리)
  6. 歲(새) 時(시대)
  7. 신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의 화력(和曆)에 의한 것. 위키백과:양력설 참고
  8. 옛날에는 재료가 되는 계피와 후추, 설탕 등이 희귀했기 때문.
  9. 이 문단은 위키백과:윷놀이#윷점에서 분기해 온 문단입니다.
  10. 이 문단은 위키백과:한국의 설날#복의 기원과 액막이에서 분기해 온 문단입니다.
  11. 중화권은 우리나라와 같은 음력, 이슬람권은 이슬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