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석가모니(釋迦牟尼, 기원전 560년경~기원전 483년 또는 기원전 400년)는 불교의 창시자이다. 석가모니는 '석가족(샤카 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부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고, 본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탄생[편집 | 원본 편집]

석가모니가 약 2500여년 전 인도 북부에서 살았다는 사실에는 학자들이 동의하지만, 정확히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대체로 그가 태어난 것은 기원전 560년 전후라는 데에 세계 학자들의 의견이 유력하게 모인다. 한편 1956년에 개최된 제1차 세계불교도 대회에서는 기원전 624년에 태어나 기원전 544년에 죽었다는 설을 공식으로 채택했고 한국의 불기도 이를 따르고 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 이전에 이미 과거칠불이라는 이름으로 부처들이 더 존재했고, 석가모니 이후 미륵이라는 이름의 부처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는 5백 가지가 넘는데, 이러한 본생담에는 석가모니가 윤회를 통해 여러 차례 인간이나 동물의 삶을 겪으며 윤회를 끝내고 완전한 열반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도덕적 완성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석가모니라는 부처라는 하나의 존재로써 이 세상에 내려오게 될 것이 과거로부터 미리 예견된 것이었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북인도의 갠지스 강 상류에 있는 농업국이었던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숫도다나(정반왕)는 석가족(샤카 족)의 지도자(라자)였고, 어머니의 이름은 마하마야였다. 마야 부인은 석가모니의 태몽으로 흰 코끼리 한 마리가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고, 이후 회임해서 아이가 태어날 때 즈음 당시의 관습대로 친정에서 출산하기 위해 가던 중에 룸비니 동산에서 쉬게 되었고 이 동산에서 고통도 없이 싯다르타를 낳았다. 마야부인은 아이를 낳고 1주일만에 세상을 떠났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맡아 키웠다.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전통에 따라 카필라바스투의 궁정으로 불려간 점성술사는 그가 미래에 전륜성왕이 되거나 붓다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가 붓다가 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이 고통이라는 깨달음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히말라야 산꼭대기에서 수행하고 있던 아시타 선인이 그가 태어난 것을 알고 산을 내려와 카필라바스투로 와서 숫도다나 왕을 만났고, 그는 갓 태어난 싯다르타를 안고 아이의 용모를 찬탄하다 그만 눈물을 흘렸는데, 숫도다나 왕이 그 이유를 묻자 "이분은 훗날 반드시 붓다가 되어 중생을 제도하실 것인데, 제가 너무 나이 들어서 살 날이 남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이분이 행하실 위대한 설법을 들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버지 숫도다나 왕은 아들이 삶이 고통스럽다고 느끼지 않도록 궁전 안에 온갖 종류의 좋은 옷과 음식, 즐거운 놀이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궁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농경제에 참가하여 농부가 쟁기로 땅을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쟁기에 갈려 엎어진 흙 속의 벌레를 새가 날아와 먹어버리는 장면을 보고 싯다르타는 자신의 삶을 위해 누군가를 해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나이 열두 살 때의 일인데, 숫도다나 왕은 다시금 아들의 출가를 막기 위해 야쇼다라와 혼인시켰고, 싯다르타는 야쇼다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라훌라[1]를 낳았다.

사문유관[편집 | 원본 편집]

어느 날 싯다르타는 마부와 함께 말을 타고 성문 밖으로 나간 싯다르타는 카필라바스투의 네 개 성문에서 차례대로 늙은이, 병자, 장례 행렬 그리고 출가 수행자를 보았다. 사문유관이라고 하는 이 설화는 어떤 기록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꿈에서 본 것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싯다르타는 이때 처음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체감했고, 이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싯다르타는 자신의 호화로운 일상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성문을 넘어 출가하다[편집 | 원본 편집]

어느 날 밤 싯다르타는 잠든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집을 나섰다. 마부 찬다카와 함께 말 칸타카를 타고 궁전을 빠져 나와 먼 강에 이르러 차고 있던 패물을 모두 마부 찬다카에게 주어 돌려보내고, 길고 검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입고 있던 좋은 옷을 벗고는 허름한 수행자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싯다르타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었다.

그 뒤 싯다르타는 바이샬리로 가서 그곳에서 박가바, 알라라 칼라마, 웃다카 라마풋타 같은 당시의 유명한 스승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고행에 몰두했는데, 이곳에서 싯다르타는 애초에 그의 수행 목적은 진실한 삶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고통스러운 세속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고행을 시작하다[편집 | 원본 편집]

싯다르타는 다시 이들 스승을 떠나 고행림으로 들어가서 하루에 쌀 한 톨씩만 먹으면서 철저한 고행을 계속했다. 그의 몸은 갈비뼈가 튀어나오고 등뼈와 배가 서로 맞닿을 정도로 야위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궁전의 호화로운 생활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고행도 몸만 상하게 할 뿐 수행을 위한 올바른 방법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수자타라는 소녀가 공양 올린 약간의 우유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같이 수행하던 다른 고행자들은 "싯다르타 저놈이 타락해서 고행을 포기했다"며 비난하고 그를 떠나버렸다.

마왕의 꾐을 물리치다[편집 | 원본 편집]

고행을 그만두고 설산을 나와 싯다르타는 묘지에 흩어져 있던 망자의 수의 조각을 주워다 빨아서 입고, 강가에서 몸을 씻은 다음 부다가야 라는 마을 근교의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서 명상에 암겼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의 참모습을 깨닫기 전에는 그 나무 아래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 나무 아래서 싯다르타는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와 유혹들을 물리쳤다. 불경에서는 이때 마라 파피야스가 나타나서 꾀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나무 아래서 가부좌를 틀고 밤새도록 참선한 끝에, 석가모니는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고 부처가 되었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내용의 핵심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어떻게 계속 변화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석가모니는 변화에 의한 모든 고통의 근원은 존재의 참모습을 모르는 무지와 욕망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깨달음이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었다. 그는 왕자로서의 호화로운 생활도 극단적인 자기부정의 고행도 아닌 중도의 생활이를 정신의 자유를 얻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다른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깨달은 직후에는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았고 깨달음을 얻은 채로 그대로 열반에 들려고 생각했지만, 범천(브라흐마)이 석가모니 앞에 나타나 그가 얻은 깨달음을 세상으로 나아가 전파해 줄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이때 다시 마라 파피야스가 나타나서 범천의 말을 반박하며 방해했으나, 범천의 간곡한 설득 끝에 석가모니는 자신의 가르침을 세상으로 나아가 전파하기로 결심하였다.

가르침을 전하다[편집 | 원본 편집]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는 바라나시 근처의 녹야원(사르나트)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예전 자신이 고행을 하던 시절의 동료였던 다섯 수행자를 만났다. 그들은 석가모니가 고행을 포기하고 중도의 수행 방법을 택했을 때 비난했던 이들이었으나,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예를 갖추며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때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설법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초전법륜이라고 부르며, 그 설법의 내용이 불교의 기본 가르침인 사성제와 팔정도로써 불교의 모든 가르침의 기초가 되었다. 이때 녹야원에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받은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 석가모니의 첫 제자가 되었다. 이때 석가모니의 나이 35세였다.

석가모니는 이후 49년 동안 인도의 북동부 지방을 돌며 직업의 귀천, 사회 신분, 남녀 노소에 상관없이 그의 가르침을 듣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누구나 설법을 행했고,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과도 활발한 토론을 벌여서 일부는 석가모니에게 귀의하기도 했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가르침은 실천을 위한 것이며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듣는 이의 관심과 수준에 따라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가르쳤으며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는 합리적이고 분석적으로 대답했다. 또한 석가모니는 언제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고 삶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만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출가하지는 않았으나 집에서 직업을 가지고 석가모니를 따르는 재가신도들이 많이 늘어났고, 이들이 석가모니와 그의 교단(상가) 제자들에게 음식이나 옷, 수행처 등을 제공하였다.

화엄최초삼칠일(華嚴最初三七日)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법화열반공팔년(法華涅槃又八年)

중국 천태종에서는 자국에 전래 및 번역된 불교 경전들을 향해 교상판석을 행했다. 교상판석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 시기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오시설법'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을 다섯 시기로 나누고 다시 중생을 가르치는 형식에 따른 네 가지, 교리 내용의 깊이에 따른 네 가지로 분류를 한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분기별로 다섯 시기가 있었으며, 처음(1기) 석가모니 부처가 막 깨달음을 얻고 21일 동안 자신이 깨달은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토해낸 것이 화엄경이었는데, 이 화엄경의 가르침은 너무 수준이 높아서 중생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이에 석가모니 부처가 다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아함경을 12년 동안 설법을 했고, 다음으로(3기) 대승경전인 방등부 불경(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승 불경 전체)을 8년 동안 설법했고, 다음으로(4기) 6백권 짜리 반야경을 21년 동안 설법했는데, 반야를 일깨우려는 공 사상의 본의와는 달리 중생들이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생애 마지막(제5기)에 이르러 8년 동안에 걸쳐 법화경 그리고 열반에 들기 직전 하룻 동안 열반경을 8년 동안 설법했다는 것이다. 아함경의 경우 근본불교의 중심사상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의 내용으로 석가모니의 법문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일상생활의 실재적인 교훈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아함으로 불리는 문헌으로 한역대장경 안에 장아함(22권), 중아함(60권), 잡아함(50권), 증일아함(51권)이 있는데, 이들은 각기 팔리어 경장의 디가 니까야(장부), 맛지마 니까야(중부), 상윳따 니까야(상응부), 앙굿따라 니까야(증지부)에 대응되는 경전이다. 그리고 이들 팔리어 경장 가운데 가장 앞선 시기에 편찬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경전이 바로 숫타니파타이다.

열반에 들다[편집 | 원본 편집]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미 영원한 평화와 행복 즉 열반을 얻었다고 믿는다. 이미 열반에 든 상태였지만 그 상태에서 육신의 껍질까지 벗어버리면 완전한 열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석가모니는 80세 때에 쿠시나가라에서 대장장이 춘다의 공양을 받은 뒤 제자들에게 마지막 법문을 행하고 열반에 들었다.

열반하기 전에 석가모니는 자신도 사람이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때가 되면 사망하는 것이니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슬퍼하지 말고,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전에 제자들에게 설법한 최후의 법문이 열반경으로, 그 중심 사상은 불신상주[2], 열반상락아정(涅槃常樂我淨)[3],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4] 등이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에 제자들은 예를 갖추어 시체를 화장한 뒤 사리탑을 세워 그의 사리를 봉안했고, 이것은 불탑신앙으로 발전했다.

각주

  1. "장애"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들이 생겼으니 자신의 수행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그렇개 지었다고.
  2. 부처는 언제 어디에나 어떤 모습으로 늘 그곳에 존재한다.
  3. 열반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我)이고 깨끗하다.
  4.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불성 즉 성불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