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아이들

121.162.145.196 (토론)님의 2020년 1월 23일 (목) 23:12 판 (→‎양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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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정보
다른이름 Taiji BoysᆞSeo Taiji & Boys
장르 힙합
소속사 요요기획 (정규 2집)
We 프로덕션 (정규 3집)
레이블 예당음향ᆞ반도음반
구성원
이주노양현석서태지

소개

1992년에 말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해서 대중음악계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대한민국의 레전드격 음악 그룹.

상세

〈난 알아요〉 데뷔 공연


데뷔곡인 〈난 알아요〉부터 대중들한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 시작했는데, 1992년에 토요일 황금시간대 TV 프로그램에 갑자기 출연해서 데뷔 무대를 선보였다. 당시로썬 굉장히 생소했던 힙합이라는 장르와 랩이 처음으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당시 같이 출연했던 음악 평론가들은 "리듬은 좋으나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는 평을 남겼지만, 거기에 개의치않고 10대 여학생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H.O.T.가 오빠부대를 만들어내기 전에는 이 그룹이 있었다. 당시 음악계는 트로트나 발라드가 양분하고 있었고 댄스곡을 해도 80년대 일본 노래에서 짙게 영향을 받은 곡이 주류였기 때문에, 서태지의 등장은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댄스가수는 있었지만 주류가 되진 못했었고 성인가요에 리듬을 빠르게 한것에 지나지 않았고 현진영이 와와와 함께 흑인음악의 장르를 들고 나왔지만 그렇게 인지도가 크진 않았다.

토요일에 등장해서 월요일날 학교를 가보니 다 서태지 얘기만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나오는 곡마다 신드롬 급 인기를 불러일으키며 엄청난 사랑을 받아왔다. 정규 1집 발매했을 때는 인기에 비해 수익배분이 너무 개차반이라, 멤버들이 박차고 나와서 2집부터 직접 기획사를 차려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름은 요요기획이었고 직접 차린 회사답게 수익을 아티스트 위주로 배분했다. 이후 회사 이름을 We 프로덕션으로 바꿨다가 해체 뒤에는 서태지컴퍼니가 되었다.

새로운 음반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노래 가사를 잘 들어보면 당시 사회의 모습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내용이 많았다. 당시 입시와 교육 시스템을 깐 〈교실 이데아〉, 마약 문제를 다룬 〈죽음의 늪〉, 가출한 비행청소년을 보고 집 가라고 하는 〈Come Back Home〉, 전반적인 사회부조리를 깐 〈시대유감〉 등의 노래가 있다.

그러던 1996년 1월 19일,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1월 31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그룹 해체 및 은퇴 선언을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훗날 이야기하길 원래 서태지와 아이들은 은퇴가 예정되어 있었으며, 원래는 3집을 마치고 은퇴하려고 했는데 결국 4집까지 성실히 마치고 나서 떠났던 것.[1] 은퇴를 한 건 새로운 음반을 만들기 위한 창작의 고통이 그 이유였고, 얼마나 사회적 파장이 컸으면 뉴스 보도에 "자신들의 침묵으로 빚어진 사회적 파장에 대해 책임있는 답변은 하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다.

멤버

이주노

팀에서는 제일 맏형이었고, 포지션은 래퍼와 안무를 맡아서 활동을 했었다. 데뷔하기 전에는 박철우,[2] 박남정과 함께 1세대 비보이로 활동하면서 백댄서를 전전했었다. 그래서 데뷔하고 나서도 낡은 프레스토 차량을 몰면서 활동했고, 생계 곤란으로 군 면제까지 받았을 정도로 어렵게 살아왔다.

해체하고 나선 잘 나가는 듯했으나... 2015년에는 사기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었었고, 2016년에는 클럽에서 여성 2명을 성추행해서, 2017년 5월 24일에 징역 2년, 그리고 신상정보공개명령을 구형받았다. 멤버들 중에선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해버린 인물.

양현석

무려 15살 때 나이트에서 만난 이주노한테 픽업되어서 백업 댄서로 활동해왔으며, 팀에선 래퍼와 안무를 도맡았었다. 서태지가 클럽에서 알바 뛸 때 양현석을 처음 만났는데, 그 때 서태지가 춤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다가 양현석이 돈을 달라해서 150만원을 줬다고 한다.[3] 근데 춤은 안 가르쳐줬는데 보름만에 군대영장이 나왔던 것... 먹튀 제대하고 나서 수첩을 보니 서태지 전번이 있길래 전화해봤는데, 개인 앨범을 준비하던 서태지가 데뷔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근데 음악을 들어보니 너무 좋아서 어떻게든 같이 하고 싶어서 팀을 꾸리게 된 거라고 한다.

해체한 뒤에는 모두가 알다시피 YG엔터테인먼트의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다. YG은 양현석의 별명 양군의 줄임말. 다만 소속 가수 팬들은 애정(?)을 담아 양싸, 양혐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2019년 버닝썬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이미지가 추락하고 만다.

서태지

팀에서는 제일 막내...지만 팀의 중심을 맡고 있다. 데뷔하고 나서 모든 곡들을 서태지가 맡아 작사작곡을 하고 있으며, 랩도, 댄스도 본인이 직접하는 만능인. 원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퇴를 하고 헤비메탈을 쫓아 시나위라는 밴드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다가 밴드 자체가 해체되었다.[4] 그러다 혼자서 클럽에서 연주 알바하면서 모은 돈으로 MIDI 장비를 사모으면서 개인 앨범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바비 브라운과 메탈리카 등등의 해외 아티스트를 좋아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시나위 때는 다른 멤버들처럼 장발로 덥수룩하게 머리를 기르다가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하고 나선 단정하게 머리를 잘랐다. 이 때 외모가 너무 수려하고 예쁘게 생겨서 이 모습을 보고 반한 여성 팬들이 많았다. 화려한 슈퍼스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평소에는 엄마한테 옷 갖고 잔소리를 듣는 소탈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인간극장 같은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도 그냥 동네에서 마주칠 것 같은 옆집오빠 같은 이미지로 나오기도 했다.

음반

정규

히트곡

수상

  • 1992년 MBC 10대가수가요제 - 올해의 최고인기가요상

여담

  • 원래 가수가 데뷔하면 다음 앨범을 준비할 때까지 기간이 매우 짧고, 활동이 끝나도 방송국이 부르면 무조건 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근데 서태지와 아이들은 앨범 하나 발표하고 나서 활동을 마치면 방송 활동을 일절 안했다. 말그대로 진짜 공백기. 그리고 다음해가 되어야 새 음반이 나왔기 때문에 그 동안에는 은퇴설과 부정적인 기사들이 많이 양산되곤 했다. 특히 서태지를 겨냥한 설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마약설, 임신설,[8] 폭행설, 자살설, 사망설, 동성애자설 등이 나오곤 했다.
    • 이런 루머들 중 가장 파장이 컸던 게 〈교실 이데아〉 피가 모자라 사건.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돌려보면 "피가 모자라"라는 말이 나오고, 서태지가 사탄이다, 악마를 숭배한다는 설이 일파만파로 커졌던 사건이다. 리브레 위키에서도 이 문서가 생성되기 전에 이미 피가 모자라가 생성됐었다. 좀 슬프다
  • 서태지가 음악적으로만 새로웠던 게 아니라 패션 역시 당시 트렌드세터로 불릴만큼 유행을 많이 시켰다. 원래 힙합을 하던 그룹이었던 만큼 힙합스러운 패션을 많이 소화하고 다녔는데, 이게 당시 X세대에게 유행으로 번졌었다.
  • 양현석믹스나인에서 회고하길 "처음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이름 들었을 때, 이름 지은 사람 죽여버리고 싶었다"고 했었다. 나이 40 들어서도 아이들 소리를 들어서 그랬다고 한다. 더 이전인 K팝스타에서도 비슷한 이야길 하기도 했는데, 솔직히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서태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해당 방송이 나가고 나서 양현석이 굉장한 비판을 받았었다. 이게 현재까지도 이어져와서, 아이돌 그룹 중에서 소속사가 티가 날 정도로 한 멤버만 밀어주는 경우를 "○○와 아이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각주

  1. 은퇴 당시 만화가 박제동이 남긴 만평.
  2. 그 시절 사람들은 박철우는 누군진 몰라도 그룹명을 들으면 알 것이다. R.ef.
  3. 두 달치 레슨비가 150만원이었는데, 당시 대졸자의 초입 월급이 40만원이었던 시대였다...
  4. 하지만 이후로도 시나위를 향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시나위 노래의 가사를 자기 노래에 인용하기도 하고, 원 멤버인 김종서와 함께 합동 공연을 하기도 했다.
  5. 기존에는 힙합과 다른 장르를 섞어서 만든 음악을 주로 했다면, 컴백홈은 당시 미국에서 유행한 갱스터 랩 장르로 만든 힙합 곡이다. 이 때 스노보드를 대중화함과 동시에 스노보드 패션을 유행시켰다.
  6. 당시 사이프레스 힐의 〈Insane in the Brain〉이라는 노래를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었는데, 이에 대해 서태지가 직접 사이프레스 힐한테 노래를 들려주겠다며 강경 대응을 했다. 결국 사이프레스 힐 측은 표절이 아니라며 인정했고, 나중에 방탄소년단이 이 곡을 리메이크할 때 사이프레스 힐 멤버한테 "서태지 표절 시비 기억하냐"는 질문에 "기억하고 있고, 노래에 대해 알고 있었고, 우린 표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논란에 대해 냉정하게 받아들였다"라고 인터뷰했다.
  7. 당시 가사 지적을 받고 한국공연윤리위원회에서 검열 및 수정 요청을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서태지는 빡쳐서 가사 없이 MR만 실었다. 결국 서태지가 미국으로 떠난 뒤인 1996년 6월 7일에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폐지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대유감〉을 싱글로 7월 10일에 발매했었다.
  8. 서태지가 누굴 임신시킨 게 아니라 자기가 임신했다는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