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서울
서울특별시 인왕산 야경.jpg
서울특별시 도심 야경
Flag of Seoul.svg
깃발
Seal of Seoul, South Korea.svg
휘장
South Korea-Seoul.svg
표어
I · SEOUL · U
너와 나의 서울
지역 정보
종류 특별시
시장 오세훈 (국민의힘)
행정구역 25 자치구
인구 9,509,458 명 (2021년 기준)
인구밀도 16,100 명/km2
면적 605.25 km2
기타 정보
시간대 한국 표준시 (UTC+09:00)
마스코트 해치
상징 은행나무 (나무)
개나리 (꽃)
까치 (새)
서울특별시 구글 지도
  • 영어: Seoul Special City, Seoul Metropolitan City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세계에서도 손 꼽히는 대도시 서울. 높은 인구 밀도, 교통체증, 폭증한 집값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시장은 오세훈. 통계에 따르면, 2016년 6월 기준 서울시 인구는 10,297,138명[1]이다.

오늘날과 같은 서울의 모습이 형성된 것은 1970년대로, 구자춘 당시 시장의 '3핵도시' 구상에 따라 구도심인 종로, 공업지구인 영등포, 그리고 새롭게 개발되기 시작하던 영동(강남)이라는 세 개의 축을 가진 도시로 개발되었다. 이 3핵도시 계획을 뒷받침한 것이 서울 지하철 2호선이다.

부천시, 하남시, 김포시, 광명시, 고양시, 안양시 등 인근 경기도의 위성도시들과 함께 수도권을 이룬다.

소속 자치구[편집 | 원본 편집]

Seoul-map.png

공식적인 분류는 아니며, 애매한 지역도 있으나, 대체로 서울 시내의 지역 구분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진다.

  • 한강 이북 - 전체를 묶어 강북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 한강 이남 - 전체를 묶어 강남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 서남 - 강서구, 구로구, 금천구, 양천구, 영등포구
    • 남부 - 관악구, 동작구, (금천구)
      • 학생, 서민층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로, 한때는 인근 공업단지(구로, 금천)의 노동자 비중이 상당했다.
    • 강남 -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 서울의 부도심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80년대 이후 개발 지역이 많아 구획이 깔끔하고, 대체로 부촌의 이미지가 있다.
    • 강동 - 강동구, (송파구)
      • 애매한 분류지만, 송파구와 강동구를 보통 묶어 부른다. 강북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주거지역.

인구[편집 | 원본 편집]

서울의 인구는 범위 확대와 전국적인 인구 상승(베이비붐)을 바탕으로 급격히 증가해왔다. 1955년 당시 서울 영역의 인구는 불과 1,568,746명 (현재의 대전, 광주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면적이 사대문 안쪽과 동대문, 성동, 성북, 서대문, 마포, 용산, 영등포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현재 시역에서도 250만 내외로 그렇게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역의 확대와 베이비 붐으로 인해 현재의 구획 기준으로 70년대 초반에 540만 내외를 기록하던 인구는 1975년 690만, 1980년 840만을 넘어, 1985년에 이미 960만으로 1,000만 명에 육박하기에 이른다. 1990년에는 1,060만 명을 기록했으며, 이 시기에도 서울의 주택 공급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후 서울 집중 규제, 높은 땅값과 도시권 확장 현상이 일어나며 인근 경기도 위성 도시들로 인구 분산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인구가 점차 다시 빠지기 시작해 2000년대 들어서는 1,000만 밑으로 떨어졌다. 다만, 도쿄 등과 같이 젊은 층의 자동차 소유율이 낮아짐에 따라 대중교통망 등을 이유로 도시 인구가 다시 역전 증가하는 도심 회귀 현상도 일부 관측되기 시작하는 추세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영역의 인구 (명)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1975년 1980년 1985년 1990년 1995년 2000년 2005년 2010년
6,889,440 8,364,379 9,639,110 10,612,577 10,231,217 9,895,217 9,820,171 9,794,304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삼국시대 이전[편집 | 원본 편집]

면목동, 가락동 등에 구석기 시대 유적이 있었으며, 일반인에게는 신석기 시대 유적인 암사동 유적이 유명하다.

국가 형성기에는 마한의 최북단이었으며, 마한의 소국 중 백제국이 이 일대에서 발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편집 | 원본 편집]

백제의 초기 수도인 한성은 현재 송파구에 위치한 몽촌토성 혹은 풍납토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한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함락당하고 문주왕이 수도를 웅진으로 옮길 때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삼국시대 중기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강 하류 유역은 삼국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는데, 삼국의 중앙에 있어 지리적 이점을 가져갈 수 있었고, 넓은 평야지대여서 많은 농업 생산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경기만과 일대에 산재한 섬들의 연결을 통하여 중국과 해상교류를 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6세기 신라가 이 일대를 점령한 이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통일신라(남북국)시대[편집 | 원본 편집]

백제 한성이 위치했던 송파구일대가 9주 5소경 중 한산주(한주)의 치소(요즘으로 치면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북쪽의 송악을 중심으로 태봉이 건국하자 태봉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고, 이후 고려의 일부가 되었다.

고려시대[편집 | 원본 편집]

처음에는 양주로 불리다가 1067년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 1096년 숙종이 즉위하자 남경으로 천도를 시도하여 궁궐이 건설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숙종의 즉위 자체가 조카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것이나 다름없어 여론이 매우 좋지 않았고, 이에 따라 내부 여론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몽골 간섭기에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가 공민왕 때 다시 남경으로 재승격하였다. 우왕공민왕 시기 다시 천도 시도가 있었다.

조선시대[편집 | 원본 편집]

성계탕을 맛보고 충격을 받은 이성계가 거의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하였고, 이 때부터 서울의 600년 수도 역사가 시작된다. 현대 서울의 중심지인 광화문종로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서울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편집 | 원본 편집]

해방 이후 ~ 현재[편집 | 원본 편집]

외국어 표기에 관해[편집 | 원본 편집]

중국어 표기[편집 | 원본 편집]

서울의 중국어 표기는 首尔('서우얼'이라고 읽음)로, 서울특별시의 이름을 표기하기 위하여 2004년 서울특별시가 자체적으로 제정한 중국어 표기이다.[2]

중국인들이 쓰는 표기를 굳이 한국에서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이렇다. 서울은 광복 후 세워진 신도시를 제외하고[3] 역사가 있는 행정구역 중 유일한 순한국어 지명이었다.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수도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중국어 표기가 필요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이라는 우리말이 아니라 한성을 사용했기 때문에[4] 중국에서는 한성이 서울로 바뀐 뒤에도 오랫동안 서울을 한성이라고 불러왔다.

여기서 몇 가지 불편함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에서는 자교의 한자 표기가 없어서 중국에 서한을 보낼 때 어쩔 수 없이 한성대학교한양대학교라고 이름을 써야 했는데, 문제는 한성대랑 한양대 모두 서울에 실제로 있는 학교들이라서 편지가 잘못 도착하는 일이 실제로 왕왕 있었다고 한다. 서울이 일국의 수도로서 공식적인 중국어 표기가 없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불편함이었다. 이에 서울특별시가 2004년에 서울의 중국어 표기를 따로 만들어 발표하였다.

일본어 표기[편집 | 원본 편집]

일제시대 당시에는 케이죠(京城, 경성)이라 불렀고, 지금도 이 명칭은 당시의 서울을 가리킬 때 명확히 쓰이고 있다. 독립 이후의 서울은 일본어로 발음 그대로를 표기법상으로 옮겨 ソウル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게 영어 Soul(ソウル, 소울)과 같은 표기가 되기에 넷우익이 떡밥을 잘못 물어버려 무식함을 인증한 사례도 있었다. 해당기사(일본어), 관련 글들을 일부 번역한 블로그[5]

명물 및 명산품[편집 | 원본 편집]

서울은 수도의 특성상 툭하면 전쟁에 휘말리고, 1960년대 이후엔 현대화 명목으로 거의 대부분을 철저히 부수고 다시 세워버린 도시이기에, 명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렇다 할 농경지가 남아있지 않으니 당연히도 특산물은 없지만, 가공을 통해 만드는 명물/명산품이라고 할 만한 것은 있다.

  • 설렁탕 : 한양으로 불리던 시절부터 이어져온 서울의 명물. 일제시대(1929년)에 발간된 '경성명물집'에도 '설넝湯'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된다.
  • 마포 돼지갈비 : 1960년대 상류층을 중심으로 갈비를 특식으로 즐기는 문화가 부활하였는데, 이에 맞서 서민들이 돼지고기로 갈비를 만들어 술안주로 즐겼다. 당시 마포나루 인근에 노동계층인 서민이 많이 살아서 돼지갈비가 빠르게 유행할 수 있었다.
  • 장충 족발 : 본래 족발은 평안도 지방에서 특히 즐겨먹던 음식이다. 하지만 한국 전쟁이 터져 내려온 서북부 지역의 피난민이 서울 장충동에 정착하면서 명물이 되었다.
  • 배 : 중랑구가 분구하기 이전 시기까지만 하여도 중랑구 묵동 일대는 배밭이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먹골배라고 부르는 배가 본래는 서울의 특산물이었으나 도시 개발로 현재는 인근 남양주시 근교지역이나 포천 일대까지 과수원이 옮겨졌다.
  • 갈비 : 수원갈비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편이지만 노원구 인근에서도 태릉갈비로 꽤 유명한 식당들이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성업중이었다. 위에서 언급된 먹골배를 이용한 갈비 양념을 만들었었다. 다만 현재 태릉입구역 인근에서 태릉갈비집은 거의 멸종상태이며 정말 태릉에 가까운 남양주시 별내동 인근으로 다수의 식당들이 이전한 상태.
  • 궁궐 (조선궁궐) : 다른 지역에 이러한 시설(사적지)이 사실상 남아있지 않은 탓에, 어쩌다 서울만의 명물이 되어버렸다.
  • 지하철 : 서울 지하철로도 불리는 수도권 전철[6]은 전 세계 순위 상위권에 들 정도의 명물이다.
  • 대학교 : 한국의 대학교는 '서울에 있는 곳'과 '서울이 아닌 곳'으로 분류할 정도로 인지도 격차가 심하며,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는 곳은 제외하고는 대개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 탓인지 서울의 대학교를 순례하듯 여행다니는 여행객도 있을 정도이고, 대학교 주변 상권 또한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발달해있다. 대표적인 곳이 홍대입구.
  • 한양도성
  • 한강 : 도시 정중앙을 한강과 같이 큰 강이 관통하는 경우는 드물다. 단지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 한강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교량들은 손꼽히는 명물 중 하나이다.(특히 야경)
  • 야경 : 비록 홍콩이나 상하이 등에 밀리는 감이 있지만, 한국의 야경도 제법 화려한 것으로 유명한 편이다. 그러나 그 요소는 불합리한 노동환경이 만든 것이니, 한국 사회의 씁쓸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 네온 십자가 : 한국에는 유독 기독교 신자 비율이 높아서 교회 또한 많고, 죄다 밤만 되면 붉은 네온사인을 뿜는 십자가가 지붕에 달려있다보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자칫 기묘오싹(?)한 야경을 보게 만드는 요소이다.
  • 예수천국 불신지옥 : 명동과 을지로 지역에서 자주 출몰(?)한다.

스포츠[편집 | 원본 편집]

스포츠 팀[편집 | 원본 편집]

역대 서울특별시장[편집 | 원본 편집]

출신 인물[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http://stat.seoul.go.kr/jsp3/index.jsp
  2. 서울특별시에 의하면, 순한국어 이름인 서울은 중앙정부의 마땅한 가이드라인이 없어서 자체적으로 중국어 표기를 제정했다고 한다.
  3. 신도시까지 포함한다면 세종시의 행정구역 중 순우리말로 된 행정구역 이름이 다소 있다.
  4. 한양은 도시 이름이 아니라 서울이 있는 지방의 이름에 가깝다.
  5. 요약하면 라멘은 소울푸드(ソウルフード)다, 라는 의미로 트위터를 올렸는데 그걸 서울푸드(ソウルフード)라고 이해한 것. 어지간한 관심과 사랑 없이는 생각도 못했다고 뿜은 일본인이 많았다.
  6. 엄밀하게는 다른 개념이지만, 통합요금제 덕택에 크게 구분짓지 않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