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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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진지(서귀진성)
서귀진지.jpg
건축물 정보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717-4번지
대지면적 7,835 m2
문화재 정보
종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5호
지정일 2000년 11월 1일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서귀진지(西歸鎭址)는 제주 3성 9진의 하나로 정의현 관할에 속한 진성이었던 서귀진이 있던 자리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까지 서귀방호소에는 성곽이 없다고 하여 성곽을 쌓을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최초 축성 연대는 세종대인 1439년으로 추정된다. 최초 축성 당시에 기록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성둘레 161척(약 48m), 높이 5척(약 1.5m)의 소형 성곽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 당시의 위치는 현재의 동홍동 부근인 홍로천(현 동홍천) 인근에 있었으나 선조 23년인 1590년 제주목사 이옥이 현 위치로 옮겨서 성둘레 251m, 높이 3.6m의 꽤 규모가 있는 진성으로 다시 축성한 것이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일제시대인 1920년대까지 성 내에 3동의 건물이 남아있어 일본군의 관청으로 사용하다 해방 이후 4.3 사건 당시 이 곳의 성돌을 허물어 마을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쌓는 축성용 성돌로 사용하였고 이후 도시 개발 과정에서 남아있던 성돌이 주거용 건물과 담벼락용 돌[1]로 무분별하게 훼손되어 현재는 성벽의 아랫부분만 우잣담[2]과 성굽담[3]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실정이었다.

이후 2000년에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부지 매입 등을 통해 201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단장되어 그 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1901년 서귀진이 폐지된 이후 관아 건물은 정의공립보통학교, 서귀공립소학교 등으로 개조되어 사용된 역사가 있다.
  • 처음 성 내 건물 3개는 1개만 기와지붕이고 2개는 띠로 지붕을 이은 것을 사용하였으나 1920년대 당시에는 3동 모두 기와지붕이었다고 전한다.
  • 성 내에는 집수정 터와 수로 흔적이 남아있다. 2010년 발굴 조사 당시 수로 일부를 복원하고 집수정은 상부에 흙을 다시 덮어 보존한 뒤 그 위에 다시 모형을 만들어 복원처리하였다.

각주

  1. 밧담, 밭을 둘러치는 담벼락을 의미
  2. 울타리가 되는 담벼락이라는 의미의 제주어
  3. 성의 기초가 되는 담벼락이라는 의미의 제주어-굽담은 기초가 되는 담벼락이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