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백화점 붕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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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이준 전 삼풍건설 산업 회장과, 당시 삼풍백화점의 사장이었던 그의 차남 이한상, 뇌물을 받고 건물의 설계변경을 승인한 이충우, 황철민 전 서초구청장 등 25인이 기소되었다.
삼풍백화점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이준 전 삼풍건설 산업 회장과, 당시 삼풍백화점의 사장이었던 그의 차남 이한상, 뇌물을 받고 건물의 설계변경을 승인한 이충우, 황철민 전 서초구청장 등 25인이 기소되었다.


참사 직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책임을 지우고자 이준 전 회장에 대하여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 적용이 검토되었으나<ref>재난사고에 대한 [[살인죄]] 적용은 20년쯤 뒤 [[세월호]]의 [[이준석]]이 첫 테이프를 끊게 된다.</ref> 결국 [[업무상 과실치사]], [[업무상 과실치상]], [[뇌물공여]], [[업무상 횡령]] 등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http://www.naeil.com/news_view/?id_art=148221]
참사 직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책임을 지우고자 이준 전 회장에 대하여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 적용이 검토되었으나<ref>재난사고에 대한 [[살인죄]] 적용은 20년쯤 뒤 [[세월호]]의 [[이준석 (1945년)|이준석]]이 첫 테이프를 끊게 된다.</ref> 결국 [[업무상 과실치사]], [[업무상 과실치상]], [[뇌물공여]], [[업무상 횡령]] 등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http://www.naeil.com/news_view/?id_art=148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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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3일 (화) 22:58 판

틀: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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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jpg
붕괴이후 구조현장
사건 정보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악의 참사[1]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 본점이 부실 공사로 인해 건물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대형 참사로 502명이 사망했고, 6명이 실종되었으며, 9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성장과 결과,돈의 논리를 중시한 사회의 폐해를 보여준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사리사욕 때문에 희생된 사고다.

삼풍백화점

삼풍백화점1987년 착공해 1989년 개장했다. 건설 당시 단일 매장 기준으로 전국 2위 규모의 초대형 백화점으로서 고급 명품과 수입품을 주로 진열해 강남 부유층을 끌어모았다. 매출액 기준 업계 1위 자리로 오르기도 했다.[1] 사고 당시 삼풍백화점은 롯데 백화점에 이어 전국 2위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었다.[2][3] 당시 강남지역에서 내노라하는 유명 백화점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을 규모로 압도하던 시기였다.

붕괴 원인

부실시공 및 불법증축

삼풍백화점 붕괴의 요인으로 1차적으로 '부실시공'이 지적된다. 애초에 삼풍아파트에 딸린 근린상가로서 '삼풍랜드'라는 이름의 대단지 종합 상가로 건설할 계획이었고 우성건설에서 최초로 발주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시공이 다 되어갈때쯤 경영진은 용도를 근린상가에서 백화점으로 변경하고 4층으로 설계된 건물을 5층으로 불법증축을 지시했다. 당연히 시공사인 우성건설측은 건물의 안정성을 우려하여 증축에 반대하였고, 보다못한 삼풍의 경영진은 시공사인 우성건설과 계약을 파기하고 자회사인 삼풍건설에 증축시공을 지시하였다. 이렇게 무리하게 증축된 5층에는 계획상 하중이 가벼운 구조물인 롤러스케이트장을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하여 식당가로 용도를 변경하였다. 사실 이런 증축은 관계기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구조변경이지만 삼풍측은 이런 절차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추진하였다. 식당가에는 여타 구조물과는 다르게 무거운 식기나 조리시설이 요구되며, 거기에 더해 온돌까지 겸비한 대형 한식당을 들이며 하중이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이 무게는 건물 3층 정도의 무게와 맞먹는 수준[2]이다. [4] 그 외에 무량판 공법(대들보 없이 기둥으로만 지붕판을 받치는 공법)이 사용된 것도 붕괴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다.[5] 그나마 기둥의 두께도 기준치보다 얇았다.

불법 개조

삼풍백화점 측은 물건을 더 많이 진열할 계획으로 일부 기둥을 제거하였고, 나머지 기둥도 굵기를 25%나 줄였다.[6] 또한 5층을 한식당으로 사용하면서 온돌까지 놓아 그 무게가 가중되었고, 옥상에 있던 15톤 가량의 에어컨 냉각탑 3대를 민원[3]을 수용하여 에어컨 설비를 반대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중기를 사용하면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롤러를 에어컨 냉각탑 하단에 설치하여 천천히 밀어서 이동시키는 방식을 사용하였다.[7] 하지만 워낙 부실시공으로 건물이 위태로운 상태에서 무게 15톤[4]이나 나가는 거대한 쇳덩이를 롤러를 통해 움직이다보니 그 진동이 건물을 떠받드는 기둥에 전달되었고, 설계보다 축소된 기둥들은 이런 진동을 제대로 견뎌내지 못하고 균열이 발생하며 옥상 상판에 펀칭현상이 발생하는 등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크레인 비용을 아끼려던 꼼수가 결국 백화점 건물을 붕괴시키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야기한 치명타[5]로 돌아왔다.

전조

[8] 더욱이 참사 당일 오전 9시 쯤 A동 5층 바닥이 갈라지면서 붕괴 조짐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영진 측은 영업을 계속하였다.[9]. 특히 옥상의 바로 아래 위치한 5층 식당가에서 붕괴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음식에 시멘트 가루나 콘크리트 조각이 섞여나온다거나 바닥이 심하게 기울어 테이블이 기울고, 내벽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였다. 5층에 입점한 식당의 주인들이 건물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백화점 경영진에게 보고하였고, 이한상 사장[6]은 직접 5층의 상태를 확인한 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5층의 출입을 차단한 후, 에어컨 가동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건축감리사인 우원건축에 연락하여 건물의 상태를 진단하였다. 오후 3시에 도착한 감리사 임형재 소장과 이학수 구조기술자는 백화점 상태를 진단한 후 오후 4시에 이준 회장이 참석한 임원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자리에서 임소장은 건물의 상태가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즉시 영업을 중단하고 고객을 대피시킨 후, 구조물 보강공사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도 당장 건물의 무너질 지 모르는 위기상황보다 백화점 영업을 중단하는 손해를 감수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고, 이학수 구조기술자는 당장의 위기는 잠시 진정된 상태이며 보강공사를 신공법으로 진행하면 된다는 절충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이준 회장을 비롯한 백화점 경영진은 당장의 커다란 위기는 없으니 영업을 계속하면서 공사를 진행하자는 최악의 결론을 내버리고 말았다.

붕괴

1층 중앙로비 가운데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몸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 생존자 정복실 씨의 증언

사고 당시 백화점 안에는 고객 1000여명과 직원 500여명이 있었다.[10] 붕괴 직전, 간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도 종업원과 고객을 대피시키지 않았으며, 그저 5층만 폐쇄하였다.[7] [11] 그리고 자신들은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경 삼풍백화점 A동 전체가 약 20초 만에 붕괴되었다.[12]

붕괴 직전 이상한 낌새를 불안히 여긴 일부 종업원들과 고객들이 황급히 백화점을 빠져나가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붕괴 당시 백화점안에 남아있던 1,000여명의 종업원과 고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갑작스런 건물붕괴와 함께 잔해 속에 깔리고 말았다. 당시 지하 아이스크림 매장에서 영업 중이던 이준 회장의 맏며느리인 추경영(당시 45세)씨에게 시아버지를 비롯한 백화점 고위 경영진들이 자신들은 빠져나가면서도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아 붕괴와 함께 매몰되었다가 14시간 만에 잔해 속에서 구조되기도 하였다.

구조작업

계속해서 붕괴가 이어진 탓에 기계 장비의 도입은 제한적이었고, 구조요원들이 직접 나서야 했다. 구조작업을 위하여 소방관들 외에 공수부대까지 직접 투입되었다. 배우 김상경은 공수부대로 군복무를 하던 도중 삼풍백화점 구조 작업에 투입된 바 있다고 밝힌 적 있다. 그는 2013년 12월 방송된 MBC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구조요원들이 손으로 돌을 날렸다. 시끄러우니까 '전 구조요원 동작 그만'이라고 하면 조용해진다. '생존자 계십니까?' 하고 조용하면 다시 작업을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또한 멀쩡한 건물이 갑자기 무너져내린 초유의 사태에 당황한 관련기관들은 우왕좌왕하며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혹시 모를 생존자 구조를 위해 중장비 투입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뤄졌고, 대부분의 잔해를 구조대가 하나하나 손으로 치워가며 생존사 수색을 하였다. 하지만 당시 무더운 여름날씨에 간간히 장마로 비까지 내리며 구조작업은 난항을 겪었고, 건물잔해에 깔려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이 많았으며, 부분부분 절단된체 발견되는 시신들도 많았다. 또한 무더운 날씨로 인해 시신의 부패가 가속화되어 신원확인에 애를 먹기도 했다. 심지어 부분시체로 짜맞춘[8] 희생자의 DNA 대조결과 서로 다른 사람으로 밝혀져 유가족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소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실종신고된 여중생의 소지품이 걸린 석고 마네킹을 시신으로 착각해 수습한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또한 수거된 건물잔해를 난지도 매립지에 버렸는데 뒤늦게 버려진 잔해물들 사이에서 부분시신이 발견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수색작업이 길어지면서 점점 실종자들의 시신수습에 어려움을 겪던 정부에서 초능력이 있다는 이스라엘의 소년을 대려와 수색작업에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용하다는 무속인들이 동원되는등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구조작업이 벌어졌다.

열악한 상황속에서 건물 잔해에 매몰된 생존자들은 눈물겨운 사투를 벌였으며, 붕괴 후 11일만에 최명석이, 13일만에 유지환이, 17일만에 박승현이 발견되어 극적으로 구조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들이 오랜시간 생존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중에는 사고 초기에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소방대가 뿌린 소방수가 흘러들어와 이를 식수로 활용하며 버텨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사후 조치

책임자 처벌

사고의 책임을 져야할 삼풍건설그룹의 회장 이준이 수사과정에서 아무런 죄의식을 못느끼고 그저 백화점이 무너져서 우리 회사가 망하게 생겼다는 식의 원망을 하며 마지막 양심까지 팔아먹었다. 전형적인 황금만능주의이자 인간쓰레기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삼풍백화점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이준 전 삼풍건설 산업 회장과, 당시 삼풍백화점의 사장이었던 그의 차남 이한상, 뇌물을 받고 건물의 설계변경을 승인한 이충우, 황철민 전 서초구청장 등 25인이 기소되었다.

참사 직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책임을 지우고자 이준 전 회장에 대하여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 적용이 검토되었으나[9] 결국 업무상 과실치사, 업무상 과실치상, 뇌물공여, 업무상 횡령 등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13]

경찰 조사과정에서 망언을 내뱉는 이준 회장 (50초 부근) }

한편 이준 전 회장은 경찰 조사 중 "(백화점이) 무너진다는 것은 손님들에게 피해도 가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것"이라고 말해 공분을 샀다. [14] 전 국민을 분노하게 한 사건인 만큼 아무도 변호를 하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국선 변호인이 이준 전 회장의 변호를 맡았다. 1심은 네 가지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징역 10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항소심은 업무상 횡령 혐의를 무죄로 판단해 징역 7년 6개월로 감형했고, 대법원은 그대로 형을 확정했다. 이 판결은 기업의 최고 경영진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형사처벌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15] 이준 전 회장은 출소 수개월 후 당뇨 등 지병으로 사망하였다.[16]

당시 삼풍백화점 이한상 사장에게는 징역 7년형이 선고됐고, 이충우, 황철민 전 서초구청장은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하여 502명이 숨지고, 937명이 다친 참사의 책임자들이 받은 처벌로는 미미하다는 비난이 들끓었다.

삼풍건설그룹 해체

피해자에 대한 보상재원 마련을 위하여 국가는 이준 회장 일가의 재산 500여억원을 모두 압류했고 삼풍백화점의 자산을 매각하여 보상재원을 마련했다. 당연히 모든 것을 탈탈 털린 삼풍건설그룹은 지난 시절의 영광은 뒤로한 채 초라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워낙 인명피해가 큰 사고여서 삼풍건설그룹의 재산만으로는 보상금 충당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뇌물을 먹고 삼풍백화점 부지의 용도변경을 눈감아준 서울시 공무원의 책임도 있었기에 서울시도 보상에 책임을 져야했다.

피해자 처우

보상액의 규모를 놓고 서울시와 피해자 측의 입장차이가 컸다. 서울시는 이전에 발생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의 보상금인 사망자 1명당 1억7천만원을 제시하였으나, 유가족 측은 1인당 2억1천만원을 요구하여 협상이난항을 겪었다. 공식적인 보상금 외에 보험사에서 사망자의 손해사정금을 1인당 2억원 수준으로 책정하였으며, 부상자들에 대해서는 정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이 이뤄졌다.

피해자들에 대한 서울시의 공식 보상 과정은 2003년 9월까지 계속 진행되었다.[10]

그러나 사고로부터 20 여년이 지난 2016년 까지도 피해자에 대한 정신적인 치료 등 국가적인 대처가 미비한 상황이며,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공포와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사고 이후

1998년 삼풍백화점 터 인근 양재동 시민의 숲에 참사 위령탑이 세워졌고, 붕괴후 잔해가 치워진 삼풍백화점은 3년간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다. 이후 서울시는 1996년 11월에 삼풍백화점 부지에 대한 공개매각을 진행하였고, 대상그룹이 입찰에 참여하여 1999년 8월 낙찰가 2,052억원을 완납하여 소유권을 가져갔다. 이 자리에는 대림산업이 시공사로 선정되어 대규모 주상복합 아파트가 건설되었으며, 2004년 완공되어 아크로비스타 주상복합단지의 입주가 시작되었다.

여담

  • 한번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된 사고여서 희생자들의 원한과 관련된 괴담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는 삼풍백화점 터에 지어진 아크로비스타 지하 주차장에서 귀신의 울부짖음이 들린다는 괴담이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삼풍백화점 인근에서 삼풍백화점 로고가 그려진 쇼핑백을 들고가는 사람을 목격했다거나 삼풍백화점 쇼핑카트를 주워와서 쓰고있는데 카트 근처에서 졸게되면 가위를 눌렸다던가 하는 경험담도 있다. 아크로 비스타 지하에 가면 여전히 음산한 기운을 느낀다고 한다.

  •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이런 대형 참사가 반복되었다. 피해규모로 볼 때 이런저런 참사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문민정부 집권기 사고 중 가장 피해가 큰 사고로 기록되었다.
  • 장동민, 유세윤, 유상무가 팟캐스트에서 삼풍백화점 생존자를 비하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큰 논란이 발생한 사실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장동민 문서 참조.

관련 창작물

각주

  1. 그도 그럴 것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인적 재해로 기록되었다. http://m.asiatoday.co.kr/kn/view.php?r=articles/20150629001142103
  2. 단지 1개 층만 증축한 것이 아니고 무게까지 합하면 원설계의 4층에 추가적으로 4층의 무게를 지닌 구조물을 증축한 것과 마찬가지.
  3. 원래 위치는 삼풍백화점 동쪽 옥상으로 주변 삼풍아파트에 인접한 장소였고, 에어컨 가동시 발생하는 소음과 진동으로 민원이 상당했다고 한다. 때문에 경영진은 이들 냉각탑 설비를 백화점 서쪽 옥상으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4. 에어컨용 냉각수까지 채우면 무게는 100톤을 가볍게 넘나든다.
  5. 물론 크레인으로 들어서 옮겼다고 하더라도 이미 엄청난 무게의 에어컨과 가동시 발생하는 진동으로 건물 안정성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던 상황이다. 개장초기부터 에어컨 가동시 건물 전체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던 상황.
  6. 삼풍그룹 회장인 이준의 아들
  7. 4,5층 폐쇄라는 기사도 있다. 진위 여부 확인 바람.
  8. 당시 서울시의 대처가 도마에 올랐는데, 사고 초기에는 정확한 사상자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으며, 부분적으로 발견된 시신의 머리, 몸통, 팔, 다리를 조합하여 사망자 1명으로 계산하는 어처구니없는 집계를 하기도 했다.
  9. 재난사고에 대한 살인죄 적용은 20년쯤 뒤 세월호이준석이 첫 테이프를 끊게 된다.
  10. 삼풍 붕괴 8년만에 수습 종결

틀:대한민국의 붕괴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