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Zkelskf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4월 24일 (금) 22:42 판


사진(寫眞, Photography)은 대상의 표면에서 반사된 빛을 감광면에 감광시켜 얻어낸 상을 말한다. 이러한 상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촬영이라 하는데, 사진 촬영은 보통 사진기를 이용해 이뤄진다. 사진기는 렌즈와 같은 광학 장치를 이용해 사진 필름, 또는 감광 센서에 상을 맺히게 한다. 필름과 같은, 화학적 감광제를 사용하는 감광면에 얻어낸 상을 고정하는 작업을 현상, 현상한 이미지(특히 네거티브 이미지)를 특정한 용지 따위에 포지티브 이미지로 출력하는 것을 인화라고 한다.[1]

역사

사진의 역사는 촬상면 기술의 발전 역사와 거의 동일하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같은 구조의 원시적 카메라는 기원전부터 존재하였으나, 실제 사진에 해당하는 상을 고정시키는 기술은 은 화합물과 같은 감광제를 다루는 법이 알려진 이후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카메라 옵스큐라

빛을 다루는 광학 기술과 감광 유제를 만들기 위한 화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먼 과거에도 핀 홀을 통과한 광선이 상을 맺게 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카메라의 선조격인, 바늘구멍 사진기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어두운 방' 이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기원전 4세기 묵자의 기록과 10세기 아라비아의 학자 이븐 알하이삼(또는 라틴어로 알히젠Alhazen)의 기록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미술사적으로, 카메라 옵스큐라는 르네상스 시기의 원근법과 회화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어두운 방'이 만들어내는 상은 매우 사실적이었지만 이 상을 고정할 방법은 17세기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17세기 초 은 화합물이 빛에 닿으면 검게 변하는 사실이 발견되었지만 은 화합물이 완전히 검게 변하는 것을 막을 방법을 찾아내진 못했다.

헬리오그래프

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
그라의 집 창 밖 풍경, 1826

19세기, 프랑스의 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얻는 상을 석판 인쇄에 활용하기 위해 빛에 노출되면 경화되는 유대 비투맨을 감광제로 사용한 실험을 하였다. 1826년, 8시간의 노출 끝에 인류 최초의 사진이 탄생하였다. 니엡스는 이를 그리스어로 태양을 의미하는 Helios와 그림을 의미하는 Graphos를 더해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라고 명명하였다.

다게레오타이프

프랑스의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 역시 카메라 옵스큐라의 상을 고정시키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니엡스의 연구결과를 전해들은 다게르는 니앱스와 연구결과를 교환하였고 니엡스의 방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상을 고정시키는 기술을 완성하여 1839년 1월 7일 발표한다. 다게르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다게레오타이프'라고 명명한 이 사진술은 동판 표면의 요오드화은이 감광되면 아말감이 형성되는 원리를 이용하였는데, 헬리오그래프와 비교했을 때 획기적으로 짧아진 노출 시간과 훌륭한 묘사력에도 불구하고 동판 위에 고정되는 이미지의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치명적인 문제로 인해 이후 등장하는 네거티브-포지티브 방식으로 대체된다.

칼로타이프

다게르의 사진술이 공개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윌리엄 헨리 탈보트(William Henry Talbot) 또한 종이를 지지체로 사용하는 새로운 사진술을 발표한다. 아름답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Kalos와 인상이라는 의미의 Typos를 더해 칼로타이프(Calotype)라고 명명된 이 방식은 다게레오타이프와 비교하였을 때 선명도는 낮았지만, 복제성이라는 아주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칼로타이프 방식으로 촬영한 뒤 감광된 용지를 현상하면 밝기가 반전된 네거티브 이미지(음화, 陰畵)를 얻을 수 있다. 이 네거티브 이미지를 다른 감광용지에 겹쳐 감광시키면 다시 원래 밝기와 같은 포지티브 이미지(양화, 陽畵)를 얻게 되는데, 이러한 네거티브-포지티브 방식으로 이미지를 무한히 복제할 수 있었다.

콜로디온 습판 방식

로저 펜튼(Roger Fenton)
사진 마차, 1855
크림전쟁에 종군기자로 참가한 로저 펜튼의 사진 마차, 당시 사진가가 사진을 찍기 위해 들고다녀야 하는 장비는 약 50kg에 이르렀다.

이전에 사용하던 지지체인 종이나 황동 판과 비교하였을 때, 유리는 균일한 표면과 내화학성이라는 중요한 두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전까지는 감광제를 유리에 고정시킬 방법이 없어 유리를 지지체로 사용할 수 없었지만, 1851년 영국의 프레데릭 스코트 아처(Frederic Scott Archer)의 연구로 콜로디온이 지지체로서 훌륭하다는 것이 발견된 이후부터 현대적 젤라틴 건판이 등장할 때까지 콜로디온 습판 방식은 사진가들에게 널리 애용되었다. 콜로디온은 젖어 있을 때에는 끈끈한 상태로 존재하지만 빠르게 건조되어 투명한 막을 형성하는 특징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촬영과 현상은 유리가 젖어있는 상황에서 완료되어야 했다. 이 때문에 사진가는 쵤영을 위해 카메라와 유리 판에 더해 감광용액과 현상용액과 같은 각종 화학 약품, 현상을 위한 암실을 통채로 들고 다녀야 하였고, 유제가 마르기 전에 쵤영을 마친 다음 즉시 암실에서 현상 과정을 하여야 했다. 이렇게 번거로운 방식임에도 복제가 편하고,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이미지 양쪽에 모두 대응 가능하며, 노출시간이 수 초까지 줄어든 장점을 가지는 콜로디온 습판 방식은 사진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현대적 필름의 등장

코닥 카메라
1888년 출시된 코닥 카메라는 '당신은 셔터만 누르고,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세요(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라는 광고로 사진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비록 콜로디온 습판 방식이 대중에게 사진을 접할 기회를 늘려준 것은 사실이지만, 콜로디온 습판 방식은 여전히 일반인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필요한 장비도 많으며 어렵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1880년대까지, 촬영은 소수의 전문가와 덕후열정적인 아마추어에게 한정되어 있는 행동이었다. 80년대 중반, 콜로디온을 대체할 새로운 지지체의 개발과 롤 필름의 등장으로 사진술은 또 한번 혁신을 일으킨다. 젤라틴을 기반으로 한 젤라틴 유제는 콜로디온과 달리 건조된 상태에서도 높은 감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사진사는 콜로디온 습판 방식에서와 같이 지지체가 마르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촬영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등장한 롤 필름은 유리 건판에 비해 매우 줄어든 무게와 부피로 사진사들의 짐을 가볍게 하였다. 롤 필름 최초의 상업적 대량생산은 조지 이스트만(George Eastman)에 의해 이루어졌다. 1885년, 롤 종이에 얇은 젤라틴 유제가 발려있는 이스트만 아메리카 필름을 발표한 이스트만은 1888년 현대식 카메라와 유사한 코닥 카메라를 발표하였다.[2] 이후 1889년, 한니발 굿윈(Hannibal Goodwin)이 기존의 종이 롤 필름보다 견고하고 유연한 플라스틱 재질의 롤 필름을 발명함으로서 현대적 필름이 등장하게 된다.

디지털 시대

사진의 여러 요소

노출

노출은 렌즈의 조리개와 셔터의 셔터 속도, 촬상면의 감도의 복합적인 요소에 의해 정해지며, 촬상면이 받아들인 빛의 양을 뜻한다. 촬상면에 빛이 감광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는[3] 촬영하다라는 말 대신 노출하다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노출은 사진의 밝기와 디테일의 품질과 직결되므로 정확하고 의도된 노출은 사진의 핵심이며, 적절한 노출을 위해 사진사는 흔히 노출계를 사용한다. 노출계는 이러한 노출의 양을 수치적으로 정량화 하여 EV값으로 표현하는 기능을 한다. 현대에 발표된 대부분의 카메라는 노출계를 내장하고 있으며, 노출계가 없거나 특정한 노출 방법을 필요로 하는 사진사들은 외장 노출계를 사용할 수 있다.

노출의 3요소

초점

심도

현상과 인화

관련 항목


  1. 필름 인화의 경우 인화지도 감광지이기 때문에 현상 과정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2. http://www.kodak.com/ek/US/en/Our_Company/History_of_Kodak/Milestones_-_chronology/1878-1929.htm
  3. 특히 특정한 조리개와 셔터 속도로 촬영했다는 것을 알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