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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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호 | 중화민국(中華民國) | ||
| 국기 | |||
| 영토 | 1945년 최대 강역 | ||
| 존속 기간 | 1912년 1월 1일 ~ 1949년 12월 7일 | ||
| 성립 이전 | 청나라 | ||
| 천대 이후 |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대만정부) | ||
정식 명칭 중화민국(中華民國) 약칭 중국(中國).
중화민국이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대륙에 그 통치권이 미치는 임시정부를 건국한 시기부터 1949년 장개석이 국공내전 중 마지막 국공내전인 충칭에서 모택동에게 패하고 대만으로 물러가 대륙의 통치권이 끊긴 시기까지를 말한다. 통칭 중화민국 대륙시기(中華民國大陸時期). 말 그대로 중화민국이 대륙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다.
청 말기, 계속되는 부정부패, 외세의 침입과 그런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력하게 쓰러지는 청조는 청내 모든 백성들에게 황조의 인식을 추락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여러 봉기가 일어났고 성공하여 중화민국을 세운 봉기인 신해혁명도 그 중 하나였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의 주체인 호북신군(湖北新軍)은 무한(武漢, 우한)에서 최초로 봉기해 당일 바로 그곳을 점령하고 대륙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남경(南京)을 수도로 정했다. 한편 혁명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받은 원세개도 혁명군과 싸워 청을 지켜봤자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여 바로 혁명군의 주체 손문과 합의해 총통직을 위양받고 중화민국이 청나라를 계승하였음을 천명했다.
이로써 1913년 10월, 중화민국 정부는 북경(北京)[2]에서 정식 성립했고 북양군벌의 수장 원세개가 총통을 맡았기에 역사상 이 중화민국을 중화민국 북양정부라 부른다.
하지만 청나라 시기 부패한 나라사정은 별로 변한게 없었고, 모든 권력을 차지한 원세개는 더욱더 자신의 독재를 강화해 중화민국의 약법을 폐지한 뒤 중화제국을 선포하여 황제 등극에 이른다. 기껏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운 혁명군과 국민들은 당연히 반발할수밖에 없었고 혁명군은 원세개의 과욕에 맞써 다시 혁명을 일으켜 제정을 폐지했으나, 복고된 중화민국의 임시집정이 된 단기서의 강압적인 군벌폐지로 중국 대륙은 고대 춘추전국시대를 재현하듯 군벌들끼리 갈라져 오랜 내전을 진행하는 전국시대가 되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패권싸움에 밀려난 손문은 진형명의 도움으로 광동을 수복하여 그곳에서 국민당을 바탕으로 1949년 국부천대하여 대륙을 잃을때까지 대륙을 통치한 국민당의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선포했다. 이후 국공합작을 체결해 공산당과 힘을 합쳐 대륙 수복을 꾀했고, 손문은 군벌들을 굴복시키고 대륙을 통일하기 위한 북벌을 주장하다 곧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된 장개석은 손문의 의지를 이어 북벌을 감행해 차례로 고토를 수복해나갔으나 중간에 4.12 사건으로 공산당과의 갈등은 골로 깊어져 공산당과는 협력에서 적대관계로 나아갔고 이러한 갈등도 훗날 대륙을 두고 내전하는 국공내전의 시초가 되었다. 그 이후 장개석은 북쪽으로 나아가 마지막 군벌인 장작림의 봉천군벌에게 대승을 거둬 완전한 대륙 통일에 한발짝 나아갔고 장작림의 아들이자 2대 수장인 장학량이 항복하여 국민정부는 대륙을 다시 통일한다.
허나 이번에는 일본 제국이 대륙을 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만주국을 세워 자신들의 야욕을 현실에 옮기고 있었고 국내 목소리도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그만두고 항일할 것을 주장, 시안 사건을 계기로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다시금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하여 협력해 일본에 저항할 것을 선언했다. 1930년대 중화민국은 교통, 위생, 교육,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한 시기이기에 일명 황금의 10년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1937년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을 함락하자 중국은 존립의 위기에 처했고,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의 개입이 확인되자 장개석이 선전포고해 중일전쟁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이 중화민국을 비롯한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하여 만주, 내몽골, 대만을 반환받아 현대 중국 영토를 고정시켰고 1946년 공산당과의 화의 결렬로 다시 2차 국공내전에 빠졌다.
1947년 중화민국은 헌법을 공포하고 헌법에 맞는 정부로 개편했으며,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정치, 경제적 혁신을 통해 그 지위를 공고히 하려 했으나 인플레이션의 발생으로 실패했고 그 결과 중화민국의 존립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인민해방군은 1948년 9월부터 1949년 6월까지 3번의 전투와 도강전투(渡江戰役)에서 승리해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을 점령했고, 최종적으론 국민당의 마지막 할거세력인 충징지역까지 점령하여 국민당 세력을 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대륙을 상실한 중화민국은 대북으로 정부를 이전하여 그곳에서 지금까지 통치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난세이기도 하다. 신해혁명, 호국전쟁, 북벌, 중원대전, 중일전쟁, 국공내전에 이르기까지 38년동안 진정한 평화는 없었다.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한 대규모 인명, 경제적 피해와 소련의 간섭으로 몽골을 빼앗기고 영국은 티베트를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데 개입했다. 또한 중일전쟁은 최종적으론 승리했으나 전쟁 도중엔 일본에게 영토의 반을 뺏기기까지 하는 참극을 당했다. 중화민국은 2차대전 연합국 중 하나였으며 2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돌아가자 승전국,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어 현대 중국의 국제적 지위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근대 국가였기에 중국 역사상 사상과 문화가 번성했던 시기로 그동안 발전한 문예, 정치 사상은 중국의 향후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서방으로부터 유입된 근대 물품들 역시 중국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에 영향을 끼쳤고 이 영향은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국호
| 파일:孫中山肖像.jpg | |
| 손문(孫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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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은 중화민국(中華民國)으로 한족의 중화(中華, 중국의 옛 이름중 하나)를 회복하고, 인민들의 나라라는 뜻에서 민국(民國)을 조합해 결정했다. 중화민국이란 국호는 미래의 민권주의, 공화제도를 실현할 중국을 생각하여 만들었다. 또한 1916년에 왜 중화공화국이 아닌 굳이 중화민국인지에 대해 말했다.
“ 제군들은 중화민국의 뜻을 아는가? 왜 중화공화국이라 하지 않고 중화민국이라 하는지 아는가? 이 민(民) 자의 의미는 10여년 동안 연구하여 얻어낸 결과이다.
미국(美國) 공화국은 우리 중화민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20세기의 나라는, 창제(創製)의 정신을, 18,9 세기에 만들어 진 성법(成法)을 본받으며 발(足, 신체의 일부분)처럼 여길 것이다.
공화정체(共和政體)는 각 국가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 깃발 아래 예속된 자, 그리스와 같이 귀족, 노예의 계급이 있었으나 지금은 구별이 없다. 이것을 전제공화(專制共和)라 한다.
미국은 이미 14개의 성(省)을 갖고 있고, 직접 민권을 얻었으며, 스위스는 직접 민권 제도를 갖췄다. 비록 현대에 독단적으로 처리하기 쉬우니 대의 정치가 되었지만, 어찌 구태여 스스로 억압하여 남들보다 뒤에 쳐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앞으로 온 국민이 정신을 가다듬고 세계에 빛을 발해, 나아가 직접 민권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의정치의 그늘 아래 우리 국민이 누리는 것은 대의권의 일종이다. 직접 민권이라면 창체권, 폐지권, 퇴관권(退官權)이 있다. 그러나 이런 민권은 광막(廣漠)한 성(省)에 행하는 것은 해롭기에 현(縣) 단위로 지방 재정은 전적으로 지방에서 처리하며, 중앙의 정비(政費)를 분담한다.
나아가 각종 실업(實業)의 경우, 미국 트러스트의 폐해를 중점으로 하여 처벌한다.
몇 년만 지나면, 반드시 장엄하고 찬란했던 중화민국이 동대륙에서 발견되어 세계공화국 위에 설 것이다.“ — 손문(孫文, 1866 ~ 1925)
손문은 1923년 10월 20일 광주(廣州) 전국청년연합회(全靑年聯合會) 연설에서 중화민국은 인민 위주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영문 공식 명칭은 'Republic of China' 인데, 이는 민(民)을 번역하지 않은 형태이다. 손문의 뜻에 따른 중화민국은 'People's Republic of China' (인민들의 중국 공화국)' 로 번역해야 한다.
이 문서의 '제목'인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중국어 위키백과의 中華民國大陸時期(중화민국대륙시기)에서 따온 제목이다. 당시 중화민국이 대륙을 유지하고 있을때 국호는 "중화민국" 그대로였으며 중국어 위키백과와 이 문서의 제목인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중화민국은 그 역사가 굴곡있고 많은 사건을 겪었기에 시기상 후대에 편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역사
역사적 배경
중화민국은 신해혁명이라는 무력투쟁을 통해 성립되었다. 신해혁명은 중국의 2천년동안 이어져 오던 제정을(帝政), 더 나아가 5천년동안 이어져 오던 군주제를 폐지시키고 현대 국민에게 권리가 있는 공화정을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기에 중화민국의 건국을 알려면 신해혁명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당시 청나라는 서방 세력이 일으킨 아편전쟁, 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 운동으로 큰 피해를 겪고 서양으로부터 생산된 기술에 주목하여 이는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으로 청나라의 11대 황제 광서제 근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청 내부의 고질적인 문제, 당시 섭정인 서태후와 군권의 최고책임자인 원세개의 정변(무술정변)으로 이러한 근대화 운동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청조는 멸망할때까지 서방에게 시달리게 된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의화단(義和團)이란 종교 비스무리한 단체가 등장했고, 그 종교가 백련교[3]와 합쳐지면서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청조 내에서도 서방세력의 유입으로 기독교가 퍼지자 유교적인 중국의 뿌리가 흔들릴것에 위기감을 느낀 중국인들이 많아졌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틈타 의화단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의화단은 서방 공사관, 서방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고 서방세력은 이러한 의화단의 만행과 청조가 의화단과 연합하여 이 운동을 조장하자 연합국을 구성해 청조와 전쟁을 벌였고 승리하여 신축조약을 맺고 청을 사실상 식민지화 시킨다.
중화민국의 건국
청나라가 무력하게 쓰러져가고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자 이 증오는 모두 청 황실에게 향했다. 이 시기 손문은 홍중회를 조직해 혁명세력의 기반을 만들었고, 이 혁명세력이 동맹회로 커지자 구체적인 공화정과 임시정부를 구상했으며 손문이 초대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한다는 계획을 완성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은 후, 혁명군은 무한에서 처음으로 봉기해 당일내로 그곳을 점령한 뒤 청조의 최고 군권 책임자 원세개와 협상하여 청이라는 봉건적인 체제를 형식적으로라도 무너뜨린 뒤 원세개한테 총통직을 양위해 중화민국을 견고히 한다.
혁명당이 굳이 원세개와 협상해 중화민국을 형성한 이유는 아무리 무너져가는 청이라도 오합지졸인 혁명군이 정규군을 이길 정도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무한은 청 황실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쉽게 점거가 가능했지만 청 조정과 가까운 곳일수록 혁명군이 패배했기에 혁명군은 최소한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청이라는 그 근본적인 존재부터 형식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군권 최고책임자인 원세개와 협상한 것이다.
원세개의 반동
원세개는 손문을 비롯한 혁명당과 협상하여 청을 멸망시키는 대신 총통직을 위임받아 대륙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한다. 이렇게 원세개가 집권하여 형성된 중화민국 정권을 원세개의 군벌 소속이 북양군벌이기에 북양정부라 부른다.
일단 청이라는 근본적인 존재부터 무너뜨리고 출범한 공화국이였으나 원세개는 총통직을 양위받자마자 바로 자신의 독재를 강화하여 여러 정적들을 암살하고 매국 행위를 일삼아 열강들의 환심을 샀다. 이 결과 많은 국민들과 혁명당이 반발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공화국의 상징인 국회까지 해산하여 황제와 다름 없는 만행을 보이더니 기어이 1914년 12월 20일 국호를 중화제국(帝國), 연호를 홍헌(洪憲)이라 선언하면서 진짜 황제로 등극한다.
전국시대의 도래와 군벌의 병립
당연히 이런 반동행위에 민심과 혁명당은 반발했고 원세개의 매국 행위(21개조 요구)와 제국 선포가 중첩해 민심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당계요, 채악, 이열균을 비롯한 혁명군이 원세개에게 제제취소 공문을 보냈으나 답변이 없자 무력으로 공화정을 쟁취하겠다고 결심한 군벌 세력에 의해 호국전쟁이 일어났고 원세개의 직속 부하들마저 혁명당에 투항하자 원세개는 제제를 취소하고 총통으로 내려가겠다고 했으나 군벌들은 원세개의 완전한 해임을 요구했다. 결국 원세개는 권력을 상실했으며 그의 부총통이였던 여원홍이 중화민국 의 3대 총통이, 단기서가 임시집정이 되었다.
다시 공화정으로 복고된 중화민국이였으나 단기서와 여원홍 간 국회 해산에 관한 문제, 정권 문제[4]로 정쟁이 극화되다가 단기서가 여원홍에게 국회 해산을 건의한 계기로 여원홍은 그를 해임하기까지 한다. 분노한 단기서가 멸망한 청나라의 유신 장훈과 협력해 여원홍을 몰아내려 했으나 북경으로 입성하는 장훈은 여원홍을 공격하긴커녕 오히려 멸망한 청나라의 황제 선통제를 복위시키는 이른바 장훈복벽을 일으킨다. 반란으로 간주되었단 장훈복벽은 단 12일만에 진압되었고 모든 반대파들이 없어지자 단기서는 독재를 일삼았으며 남쪽에 세력권을 형성하던 군벌들에게 강압적인 통합명령을 내렸다. 결국 이에 반발한 군벌들과 단기서의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무력충돌하여 호법전쟁이 일어났고 정부에서 소외된 손문을 비롯한 구 혁명파들도 남군벌에게 협력하여 진정한 공화국 수립을 꾀한다.
호법전쟁은 대륙 통일을 목적으로 일어난 내분이였고, 손문에겐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중의 평화 요구로 정부를 개편하고 군 부대를 재편성하자는 남북간의 화의는 결렬되었고 손문은 일전 임시로 화의가 맺어질 때 군벌들에게 추방되어 일본을 전전하다 진형명의 도움으로 광동만을 수복해 그곳에 정착하는데 이것이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시초이다. 곧 손문은 광동에서 국민당을 선포하고 다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북벌론을 주장했으나 곧 죽었다. 화의의 결렬은 중국을 근 10년간 전국시대를 재현하듯이 대륙을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당의 북벌과 전국통일
국민당을 선언한 손문의 뒤를 이은 그의 부하 장개석이였다. 장개석은 스승 손문이 주장하던 북벌론을 받아들여 일전에 그 북벌론을 비웃고 반대하던 진형명을 영풍함 사건을 계기로 축출한 후 국민당 내에서 모든 반대파(공산당, 왕정위)와 정적들을 몰아내고 국민당의 1인자가 되었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광동에서 출발해 바로 6성을 점령하고 1927년 3월 공산당이 남경을 점령하자 열강의 도움을 받아 공산당원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한 후 남경을 수복해 그곳에서 독자적인 남경정부를 세웠다.
남경정부를 세운 장개석의 국민당과 기존 우한의 국민당 정부가 공존했기에 자칫하면 또다른 내전에 처할수도 있었지만 곧 영한합작이란 회의를 통해 두 국민당은 하나가 되었고 장개석은 하야했지만 곧 복귀했다. 이후 장개석은 마지막 군벌인 봉천군벌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1928년 12월 29일 봉천군벌의 2대 수장인 장학량의 항복을 받아 대륙을 다시 통일했다.
일본의 침략
하지만 또다른 외세가 대륙을 노리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일본 제국이였다. 일본은 국민정부가 대륙을 통일하기 전 장학량의 아버지이자 봉천 1대수장 장작림을 거슬려했고 그가 패퇴하자 그가 타고있던 열차를 폭파시켜 그를 죽인 전례가 있었다. 장학량도 일본의 압박을 못 견디고 국민당에 항복한 것이기도 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대륙침략 야욕을 이전부터 꿈꾸고 있었고, 중화민국 대륙시기엔 만주사변을 일으켜 장학량의 만주를 빼앗고 그곳에 만주국을 세웠다. 서안 사건을 계기로 2차 국공합작을 맺은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초기엔 만주를 빼앗고 소극적인 침략만 했으나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그것을 구실삼아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한다.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통일의 불완전성과 잦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국력을 이끌고 대항하려 했으나 내전의 후유증, 미발달된 농업국가의 한계로는 역부족이였고 결국 화북 전역과 수도 남경까지 빼앗기는 참패를 당한다. 곧 국토의 절반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고 임시 수도인 중경까지 폭격을 맞아 중화민국 존립 여부가 갈리는 위기에 처했지만 미국이 개입하여 중일전쟁은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 연합국의 압박에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일본의 중국 침략은 종결되었고 국민당은 연합국으로부터 상임이사국, 승전국 지위를 얻었다.
국공내전 패배, 국부천대
| 대륙을 유지하던 중화민국의 정부 이전 과정 남경 -> 광주 -> 중경 -> 성도 -> 서창 -> 최종적으론 대북에 정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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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이 끝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을 중지하는 화의를 진행했지만 국민당은 미국의 압박으로 인해 화의를 파기하여 두 진영은 다시 내전을 재개하게 된다.
초기에는 국민당이 미국의 지원, 승전국 지위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곧 내전은 종식될 것으로 보였으나 무리한 점령지 확산과 모택동의 게릴라전에 취약했던 국민당은 곧 속수무책으로 영토를 뺏기기 시작한다. 또한 중화민국 대륙시기는 이전 전쟁의 후유증, 경제 개혁의 실패로 민심이 추락했지만 공산당은 이 점을 극복하여 민심을 포섭한것이 중화민국의 승리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 되었으며 미국의 지원을 받는것이 무색하게 수도 남경, 요충지 상하이를 공산당에게 빼앗긴다.
모택동은 1949년 10월 1일 북경까지 세력권을 넓힌 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차례로 광주, 중경을 함락해 국민당을 대륙에서 축출해가기 시작했다. 대륙에서 저항하기 힘들어짐을 느낀 장개석은 작은 섬 타이베이로 탈출해 그곳에서 대륙 수복을 노렸으나 국민당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성도까지 1949년 함락당하자 대륙을 완전히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빼앗기고 만다.
중화민국의 대륙 통치기는 1949년 성도를 빼앗김을 기점으로 종료되었다. 중화민국 명맥 자체는 대만 땅으로 이전하여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49년 이후의 중화민국은 대만 참조바람.
정치
중앙정부
중화민국 정부는 1911년 무창(武昌, 우한의 일부)에 건국된 중화민국 임시정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남경(南京)임시정부, 북경임시정부, 북양정부, 국민정부로 여러 정권 교체를 거쳤다.
무창봉기[5] 바로 다음날, 중화민국군정부 악군도독부(鄂軍都督府)[6]를 설립했고 여원홍이 도둑을 맡아 손문이 편성한 '혁명방략(方略)'에 따라 청나라의 선통 연호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 나라 이름을 중화민국으로 정하기로 했다. 이는 중화민국 역사상 첫 군정기로, 중화민국이 정식 출범하기 전까지 사실상 중화민국을 구성했다.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공식 수립되었고 중화민국 임시 약법이 공식 시행된 후에 남경 임시정부는 북경 임시정부로 이어지며 1913년 10월 10일 중화민국 북경정부(북양정부)[7]가 수립되었다.
군벌이 주축이였던 북양정부는 1912년부터 1928년까지 존속했다. 이 존속기간에도 집권자는 자주 바뀌었는데 목록은 다음과 같다.
- 1912 ~ 1916년은 원세개가 통치
- 1916 ~ 1920년까진 환계군벌(단기서)이
- 1920 ~ 1924년은 직계군벌(조곤)이
- 1924 ~ 1928년까진 봉천군벌의 장작림이 통치했다. 이후 중화민국 북양정부는 국민혁명으로 인해 장개석의 국민당에 통합되었다. (동북역치)
구 혁명군의 주체 손문은 추방된 후 1921년 4월 2일 광주 군정부의 대총통이 된 뒤,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새 국기로 제정하여 북양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혁명당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호법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와해당하고(영풍함 사건) 1923년 3월 2일 다시 돌아와 육해군대원수대본영(陸海軍大元帥大本營)을 비롯한 군정을 새로 구성했다. 손문이 사망한 후엔 장개석이 광동정부를 계승하여 북벌을 진행해 본격적인 통일사업에 착수한다.
장개석 시기엔 짧은 기간동안 국민정부는 1927년 남경정부, 무한정부로 분열되기도 했으나 영한합작으로 하나가 되었다. 북벌 성공 후 남경정부는 북양정부를 통합하여 중화민국의 중앙정부이자 최고행정기관이 되었다. 1948년 5월 20일 국민정부는 중화민국 정부로 개편되었으며 주석이란 국가원수의 호칭도 총통으로 격상되어 대만으로 축소된 지금까지 이어진다.
중화민국 초기 국가 원수의 호칭 변화는 초기엔 대총통, 장개석의 북벌 이후엔 주석, 1947년 헌법 제정 후엔 총통 순으로 바꼈다. 손문은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대총통, 원세개는 초대 공식 총통, 초대 주석은 왕정위[8], 헌정 이후 초대 중화민국 총통은 장개석이다.
정부 수반 총잭임자 직함은 북양정부 시절엔 국무총리, 국민정부 시기엔 행정원장, 중일전쟁 당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최고 권력기관이였으며 위원장은 장개석[9]이였다.
지방
중앙정부가 통치하는 대륙 외에 중화민국 국경내엔 많은 지방할거세력이 존재했다. 그 중에는 독립을 선언한 외몽고, 티베트 그리고 공산당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10], 일본 제국의 꼭두각시 정권(왕정위 정권)이 있었다.
- 복드 칸국(외몽고)
1911년 12월 29일 잡중담바 호특트는 대륙의 중앙통치권이 약해진 틈을타 복드 칸국을 선포하고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천명했다. 1915년 6월 9일 중-러-몽 협략의 체결로 독립을 취소, 중화민국에 병합되어 자치가 실시되었으나 1921년 러시아 백군이 몽골에 주둔하던 중국군을 몰아내면서 정권을 자연스레 회복했고 1924년 복드 칸(잡중담바 호특트) 사망 후 동년 11월 26일 헌법을 개정해 입헌군주제 대몽고국을 몽골 공화국으로 개편하였다. 중화민국은 1946년 1월 5일 몽골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투바 지역은 1757년 캬흐타 조약[11]으로 청나라에 복속된 지역이였는데, 신해혁명으로 청이 붕괴하자 투바는 독립을 선언했으나 3년 후 러시아 제국한테 병합당했다. 그러나 그 러시아도 러시아 혁명으로 붕괴해 다시 국민당군이 점령하여 중화민국에 합병되었다. 이후 투바 지역엔 1920년 러시아 내전 중 적군과 백군이 투바를 놓고 싸우다 적군이 최종적으로 점령, 적군과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 하의 독립 선언으로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1911년 무창 봉기 당시 성(省) 단위로 청에 편입된 민족들은 청이 붕괴하자 각각 독립을 선언했고 티베트도 그러한 성 중 하나여다. 1912년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 13세가 티베트의 라싸로 돌아와 구 청군을 몰아내 독립에 성공했나 곧 1913년 10월 티베트, 영국, 중화민국 북양정부와 조약 중 영국은 티베트를 분할해 중국의 영향력 하에 속하게 했고 영국은 티베트에 공사관을 설치해 티벳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명목상으론 티베트는 중화민국의 영토였으나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고 1932년 사천성의 군벌 유문휘(劉文輝)의 세력과 티베트 간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화민국은 이후에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기 전까지 티베트를 속국으로 취급했으며 영국 역시 티베트를 괴뢰국으로 대우했다.
- 동투르키스탄(위구르)
위구르족 역시 1933년 11월 12일 신장성 카슈가르에서 동투르키스탄(위구르) 제1공화국을 선포해 독립을 시도했으나 1934년 2월 6일 회족군벌 마중영(馬仲英)에 의해 1년만에 붕괴되었다. 1944년 8월 신장성 북부의 이리(伊犁), 탑성(塔城), 아산(阿山) 세 개의 지역에서 혁명(삼구혁명)이 일어났고 중화민국군을 몰아낸 알리한 투라는 소련의 지지를 받아 제2공화국을 수립했으나 중화민국 내부에서 혼란이 진정되자 장개석은 장치중을 파견해 동화정책을 시도했고 설상가상으로 독립의 주축이자 당시 지도자였던 에흐메탄 콰짐이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자 급속도로 독립운동은 와해되었다. 독립운동이 와해당했을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 중이였고 승리하여 새로 대륙을 접수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위구르와 합병조약을 체결해 정식으로 위구르를 합병하였다.
- 중국공산당혁명근거지
1927년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국민당이 대대적인 공산당 탄압에 들어가자 공산당은 정강산혁명근거지, 중앙혁명근거지,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화소비에트공화국서북연방을 수립해 국민당을 상대로 투쟁을 계속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망명은 최종적으론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대장정으로 이어진다.
- 중화공화국
복건사변 당시 장개석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군벌들이 선포한 공화국이나 1년만에 반란이 진압당해 소멸되었다.
- 일제의 괴뢰 정권
- 만주국 - 만주사변으로 장학량을 몰아내고 만주를 점령한 일본이 멸망한 청나라의 황제 선통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운 괴뢰 정권이다.
- 중화민국 임시정부 (괴뢰 정권) -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중국 본토와 만주국 사이 완충 지대를 두기 위해 중국의 친일 관료들을 중심으로 수립한 괴뢰 정권이다. 왕정위 정권에 통합됨.
- 중화민국 유신정부 - 일제가 난징대학살을 일으키고 그곳을 통치하기 위해 수립한 괴뢰 정권. 왕정위정권에 통합됨.
- 왕정위 정권 - 위의 두 정권을 흡수해 만들어진 일제의 괴뢰 정권으로 왕정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부라 왕정위정권이라 부른다. 장개석과 달리 왕정위는 일본에 긍정적이였고 그에 따라 협조를 받아 별도의 국민정부를 수립했으나 곧 일본이 패배하자 붕괴,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통합되었다.
법률
중화민국 헌법은 손문의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 중시), 오권헌법(권력분립)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삼민주의의 삼민은 민족, 민권, 민생을 나타내며 각 민족과 타국간 사이좋게 지내는 민족주의, 국민으로부터 권력이 나와 국민이 정부를 다스리는 민권주의, 또한 정부는 인민을 위해 헌신하고 경제, 사회를 번영시켜 민족의 삶을 향상시키는 민생주의를 구축해야 하므로 중화민국 헌법은 중화민국을 민족이 가지고, 민족이 통치하며, 민족 중심의 공화국이라고 명시하였다.
5권헌법 중 오권(다섯 개의 권한)은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고시권[12], 감찰권을 말하며 이는 삼권분립에서 더 나아간 일명 오권 분립에 해당한다. 중앙정부는 이 5가지의 권한에 따라 오원정부(五院政府)를 구성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권한을 명확히 구분하였다.
헌법에 관해 이전부터 헌법 초안이 발제되었고, 1928년 동북역치로 중국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한 후 중앙상무위원회에서 훈정이 통과되었으며 이후 1936년 헌법 초안을 마련해 대만으로 이동한 지금까지 쓰이는 헌법을 마련하였다. 헌법은 1946년 정식으로 선포했다.
사법부는 각 성 단위에 고등재판청을 설립했으며 지역 행정구를 개편했다. 상부(商埠)에는 지방재판소를, 현 단위엔 초급재판소를 설치했다. 이후 추가로 공포하여 3심제를 제정했고 각 성의 고등재판청은 고등법원으로 바뀌었으며 지방재판소 역시 지방법원으로 개칭되었다. 각급 검찰청은 검찰로 바뀌어 청장직을 폐지하고 수석 검사를 따로 두었다. 검찰은 각 성의 일부로, 사법부와 지방정부 하에 속했다.
1932년 법원 설립을 중앙에 중앙법원을, 성(省)에는 고등법원, 현에는 지방법원을 설치하는 식으로 개편했다.
당파
- 중국국민당 - 국민당 1당 독재 체제로 국공내전 이후 대만으로 물러가 대륙 통치권을 상실했다.
- 중국공산당 - 1949년 국공내전으로 국민당 축출.
- 중국청년당
- 중국민주사회당
- 중국치공당
강역
외교
북양정부
국민정부/대륙시기
군사
- 국민혁명군 문서 참조.
경제
사회
인구수 변화표
민족 구성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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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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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기타
연표
참고
- ↑ 대륙에선 1949년까지 쓰였고, 대만으로 축소된 이후에도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공식 국기로 사용하고 있다.
- ↑ 남경에서 출발했는데 북경에서 성립한 이유는 원세개가 처음 청나라의 명을 받을 당시, 혁명군을 진압한다는 명분 하에 북경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 ↑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까지 존재했던 민간 불교 종교.
- ↑ 이 시기 단기서의 권한은 여원홍을 능가했고 여원홍에게 간섭하며 그를 괴뢰로 만드려 했다.
- ↑ 신해혁명의 첫 봉기. 당일 바로 무창 점령
- ↑ 악군=후베이군
- ↑ 군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화민국 정부.
- ↑ 광주국민정부
- ↑ 중화민국(당시 연합국 중 하나) 지휘관
- ↑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선. 중공 정식 성립 이전 공산당의 국가. 대장정으로 1934년 사실상 궤멸.
- ↑ 청나라와 러시아 간 투바 지역을 두고 누가 접수할지 조약을 정함.
- ↑ 考試權. 시험에 관한 권리